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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캐나다 토론토에서 종교학과 동물학을 공부하는 한 남자가 있다. 종교와 동물, 어울리지 않는 두 학문을 전공으로 선택한 인도인. 자존심이 강하고 복잡한 내면을 가진 이 아리송한 인물이 '파이 이야기'의 주인공 피신 몰리토 파텔이다. 리차드 파커를 그리워하고 그를 떠올릴 때마다 슬픔에 잠기는 이 남자에게는 대체 어떤 사연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영어 소설을 대상으로 하는 상 중에서 가장 권위적인 것으로 알려진 '부커상' 수상작이라는 요란한 타이틀이 붙은 '파이 이야기'의 시작은 상당히 불친절하다. 시점과 시공간이 마구 뒤섞여 있고 , 특정한 대상에 대한 설명이 장황해지는가 하면 반대로 장면이 너무나 짧게 묘사되기도 한다. 이런 기법상의 문제를 차치하고라도 도무지 피신 몰리토 파텔이라는 인물에 대해 쉽게 정리되지 않는다는 점도 큰 장애로 다가온다. 이런저런 이유에서 우리는 많은 물음표를 안은 채 소설을 시작하게 된다.
'피신(Picine)'은 '수영장'이라는 뜻을 가진 프랑스어이다. 발음도 의미도 황당한 이 단어를 이름으로 갖게 된 인도 소년은 여차저차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파이(Pi)'라고 불리기를 원한다. 그리고 자기만의 방법으로 그 뜻을 마침내 관철시킨다. 이름에 얽힌 이러한 에피소드에서도 드러나는대로 그는 자신의 운명을 기꺼이 바꿀만한 능력의 소유자임은 분명하다. '파이 이야기'는 뜻밖의 운명에 휩쓸리는 이 독특한 소년의 모험에 관한 놀라운 이야기이다.
소설은 공간의 이동에 따라 크게 3부로 나뉘어 진다. 1부는 토론토에서의 현재와 폰디체리에서의 과거를 번갈아 보여준다. 오늘날 그를 있게 한 과거의 여러 삽화들을 나열하면서 현재의 파이의 모습을 곁들이는 식이다. 수수께끼같은 파이의 인물됨은 인도의 폰디체리에서 보냈던 유년의 경험에 크게 영향받는다. 그의 유년을 지배하는 두 가지는 바로 동물과 신이다. 동물원을 경영하는 집안의 아들로서 파이는 동물들의 생태에 대해 남다른 식견을 가지게 된다. 그런데 동물들에 관한 묘사는 사실적이라기보다 철학적이면서 유머러스하게 진행된다. 그의 별난 성격은 이 부분에서 잘 드러난다. 또한 파이는 신에 대한 절실한 믿음을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의 계기로 삼는다. 문제는 그것이 하나의 종교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각 종교계의 수장들을 대번에 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리는 신에 대한 파이의 독특한 관점은 실소를 자아내기도 하지만 고개를 주억거리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이렇게 1부는 파이라는 특별한 인물을 그려내는데 온통 지면을 할애한다.
작품의 진정한 묘미는 태평양 한 가운데에서 벌어지는 2부의 모험담이라 할 수 있다. 2부에서는 호랑이와 함께 227일 동안 태평양을 표류하게 되는 파이의 기막힌 운명이 숨가쁘게 그려진다. 태평양 한 가운데에서 표류된 파이에게는 한 배에 올라탄 호랑이와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 있는 신이 운명처럼 함께하고 있다. 1부의 다양한 포석들은 2부에 와서야 그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결국 동물과 신은 파이의 운명 속에서 꾸준히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언어에 생명력을 불어넣으며 단조로운 수평선과 끝없이 푸르기만한 바다를 생동감 넘치는 역동적인 생태계로 탈바꿈시킨다. 작가의 손 끝에서 태평양과 구명보트는 파이의 치열한 생존공간으로 거듭난다. 작가는 파이가 겪는 바다 한 가운데서의 일상을(그런 일상이란 것이 있겠느냐만은) 너무나 그럴싸하게 묘사하면서 망망대해에 떠 있는 좁은 구명보트 위에서 기껏 얼마나 많은 일들이 벌어질까하는 우려를 간단하게 잠재운다. 터무니 없는 거짓말을 사실인 듯 꾸며내는 일, 소설이 아니면 해낼 수 없는 이런 작업을 얀 마텔은 정말 완벽하게 해내고 있다.
'파이 이야기'는 액자 구조를 아주 잘 활용하고 있다. 이 소설을 액자구조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프롤로그 격인 '작가노트'까지 소설의 내부로 끌어들일 필요가 있다. 소설가인 '나'가 파이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게된 경위를 설명하는 것이 '바깥 이야기'라면 우리는 이를 통해 파이의 모험담을 그린 '안 이야기'를 더욱 사실처럼 믿게 된다. 그러나 '파이 이야기'에서 바깥이야기는 신뢰성을 이끌어내는 장치라기보다 오히려 무엇이 진실인지 헛갈리게 만드는 특이한 기능을 한다. 3부에서 파이는 또 하나의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며 2부의 흥미진진했던 모험담이 거짓일 가능성을 제시한다. 파이가 털어 놓는 두 가지 이야기 중 무엇이 진실인지는 파이 자신만이 안다. 그럼에도 우리는 진실은 해피엔딩이라고 믿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을 사랑하고, 동물을 좋아하며, 끝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파이의 모습을 앞에서 이미 봐 왔기 때문이다.
'파이 이야기'는 우선 매우 흥미진진하다. 내용은 독창적이며 그것을 풀어가는 방식은 철학적이고 심오하다. 독특한 유머와 성찰이 어우러지는가하면 진한 감동과 잔잔한 슬픔이 밀려오기도 한다. 숨가쁜 전개, 뛰어난 언어의 연금술, 독자를 혼란에 빠뜨리는 가벼운 반전의 묘미까지 골고루 갖췄다.
소설을 읽고 나면 분명해지는 것이 두 가지 있다. 인간은 놀라울 정도로 환경에 적응을 잘 한다는 것과 희망만큼 위대한 삶의 조건은 없다는 것. 목숨을 위협하는 진퇴양난의 곤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파이의 노력에서는 감동을 넘어 위대함마저 느껴진다. 인간이란 비록 극한의 상황에 처해 있지 않더라도 얼마나 좌절하기 쉬운 존재인가. 그러나 인간에게는 절망에 맞서 싸울 힘이 있기 때문에 삶이 더욱 숭고한 것이다. '파이 이야기'는 희망이 있다면 어떤 삶이라도 살아갈 가치가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