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피용 (양장)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뫼비우스 그림 / 열린책들 / 200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프랑스어로 '나비' 혹은 '나방'이라는 의미를 가진 '파피용(Papillon)'은 태양 에너지로 항해하는 거대한 우주 범선의 이름을 가리킨다. 인류에게 더 이상 어떤 희망도 찾을 수 없어 미지의 행성을 개척하고자 기나 긴 여행을 떠나는 14만 4천 명을 태운 우주 범선이다. 그들이 가고자 하는 행성은 넉넉잡아 이천년을 가야 닿을 수 있는 곳에 위치해 있다. 그들은 과학의 힘을 빌어, 이 거대한 우주 범선 안에 중력을 작용시키고 생태계를 조성하여 이천년간 자급자족할 수 있는 완벽한 환경을 만든다. 그리고 그들이 환멸을 느껴 떠나왔던 지구의 수많은 관습과 폐단들을 답습하지 않기 위해 그들만의 룰을 만들어 새로운 공동체를 조성해 나간다. 지구를 떠난 순간부터 그들은 그들만의 '이상적인 세계'를 만들어 더 이상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해 버린 지구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을 꿈꾸게 된다.

이러한 기발한 생각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여러 다른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과학으로부터 출발한다. 소설에는 기막힌 프로젝트에 대한 발상이라든지, 그 전개 과정들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질 만큼 자연스럽게 기술되어 있다. 소설 속에서 실행하고자 하는 프로젝트는 너무나 어마어마한 것이기 때문에, 프로젝트에 동참하고 있는 인물들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 잠시도 책장 넘기는 것을 멈출 수 없게 된다.

소설의 과학적인 기술방법은 간혹 과학적 지식이 풍부한 독자에 의해 비판될 수도 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허구인 문학의 영역에서는 과학적 가설에 대한 설득적인 증거를 요구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과학기술에는 한계가 있지만, 상상력에는 한계가 없다.

'파피용'의 대단한 점은 단순히 과학적 상식에서 출발하여 누구도 생각해내지 못한 거대한 모험을 상상해냈다는 것 자체에 있지 않다. 베르베르는 (그의 다른 소설에서도 마찬가지지만) 공상과학소설의 전형적인 플롯을 답습하지는 않는다. 그 시작은 과학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철학, 심리, 사회적인 문제와 같은 인류의 깊이 있는 부분 까지 들추어 낸다. 인간 근원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파피용'호에 탑승한 14만 4천명은 새로운 제도를 만들며 타락한 지구와 다른 이상적인 사회를 꿈꾼다. 그러나 아무리 철저한 계획과 연구를 거친 과학의 힘으로도 통제할 수 없는 유일한 것은 바로 인간이었다. 이들은 과학의 힘을 빌어 완벽한 자연환경을 조성하였으나, 인간 간의 유대와 협력으로 이루어지는 사회환경까지는 통제하지 못한다. 바로 인간이라는 변수를 고려하지 못한 탓이다. 인간이 지구에서 이룩한 모든 것을 잊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고자 하는 시도는 결국 인류 역사의 오류들을 반복하는 결과를 낳고 만다.   

소설은 또 공상과학의 세계에서 인간에 대한 진지한 탐구로 나아가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전작에 비해 스케일이 훨씬 커진 '파피용'에는 인류의 세계관에 대한 패러다임마저 뒤바꾸어 버리는 어마어마한 결말까지 기다리고 있다. 이 결말은 일차적으로 신에대한 부정, 과학에 대한 긍정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파피용호 안에서 인류의 야만적인 역사를 반복해서 보여준 인간들이 진정으로 이상적인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인류의 시작지점에서 다시 출발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작가 나름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렇듯 과학의 무궁무진한 가능성과 무한한 상상력, 빠르고 흥미진진한 전개 속에서 놓치기 쉬운 메시지를 베르나르는 언제나 깊숙이 숨겨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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