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피는 고래
김형경 지음 / 창비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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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를 떠나보내는 일은,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일 것이다. 특히 예민하고 부서지기 쉬운 17세의 소녀에게는 세상을 통째로 잃는 깊은 상실일 것이다.

'꽃피는 고래'는 열일곱 니은이가 자기 앞에 놓인 가장 큰 상실을 극복하고 어른이 되어 가는 성장담이다. 소설은 부모를 잃은 상실감과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초조함, 두 가지 숙제를 한꺼번에 떠안고 있는 소녀의 복잡한 내면을 천천히 보여준다. 돌연한 부모의 죽음으로 홀로 남게된 니은은 아버지의 고향인 처용포로 내려와서 지내게 된다. 한 때 고래잡이가 번성했었고 고래 한 마리를 통해 삶의 희노애락을 모두 겪어왔던 사람들이 살고 있는 처용포. 처용과 황옥의 신화만큼이나 기이한 분위기를 간직한 처용포에서 겨우 숨을 쉴 수 있게 되지만 실체를 알 수 없는 슬픔은 꽤 오랫동안 니은을 붙잡고 놓아 주지 않는다.

소중한 것을 잃거나 깊은 좌절을 겪어 보았던 사람이라면 이해할 수 있다. 세상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는데 모든 것이 변해버린 것 같은 기분을. 니은에게 집은 더이상 안락한 공간이 될 수 없고, 남자친구도 아무런 위안이 되지 못한다. 가장 친한 친구와 주고받는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적인 대화도 폐부를 찌르는 독설처럼 느껴진다. 타인과의 소통은 부모가 있던 때와 없어져 버린 지금의 삶이 명백하게 달라졌다는 것을 깨닫게 할 뿐이다.

니은에게 유일하게 위안이 되는 처용포는 이미 신화가 사라져 버린 곳이지만 신화의 흔적은 여전히 남아 있다. 아빠의 유년의 공간이자 꿈이었던 처용포에는 오래된 신화를 간직한 채 살아가는 장포수 할아버지가 있다. 그는 포경이 금지된 이후에도 고래잡이 배를 보존하며 다시 한 번 바다 한 가운데서 고래가 꽃을 피우는 것을 보기를 소원한다. 처용포에는 또 가족을 잃은 슬픔을 타인의 상처를 보듬어 안는 것으로 치유해 가는 왕고래집 할머니가 있다. 장포수 할아버지와 왕고래집 할머니의 삶은 보이지 않게 니은의 아픔을 조금씩 달래준다. 장포수 할아버지의 고래배를 타고 넓은 세계를 접하게 된 니은은 마침내 처용포를 떠나 원래 살던 집으로 돌아간다. 그곳에서 친한 친구 나무의 사촌언니와, 영호 언니를 만나 그들의 자유로운 삶의 모습을 보게 된 니은은 부모 없이 살아가야 하는 삶에 조금씩 용기를 얻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남겨진 자신보다 자기를 남겨두고 떠나간 부모의 마음이 더욱 아팠을 것이라는 것을 이해할 정도로 아픔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외로움과 슬픔에서 벗어나 점차 혼자가 아님을 깨닫게 되고, 혼자서 살아갈 용기를 얻게되는 모든 과정이 처용포의 변화 과정과 교차되며 드러난다. 처용포는 고래잡이가 생의 전부였던 사람들의 기억을 화석처럼 저장해 관광상품화하고, 처용포의 신화를 옛 것으로 묻어버린다. 신화의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 슬픔의 세계에서 성장의 세계로 내려온 니은의 내면을 보여주듯이 이 모든 변화에 대해 니은은 담담하다. 그러나 니은의 부모가 어느날 갑자기 사라져 버린 것 처럼, 처용을 닮은 장포수 할아버지가 '신화처럼' 사라져 버리는 것을 본다. 사라진 부모와 장포수 할아버지, 신화 속의 처용을 일치시키면서 니은은 비로소 '이별'이라는 것의 속성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예고 없는 이별을 받아들이는 것이 한 걸음 성장해나가는 것임을 어렴풋이 알게 된다.

깨달음의 과정은 매순간 어떤 계기에 의해 점차적으로 일어난다. 그러나 결말에 가까워 올 수록 깨달음이 급속도로 빨리 전개되는 듯 보인다. 니은이 갑자기 주위의 모든 것에 대해 지나치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며 너무 쉽게 갈등에 종지부를 찍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그럼에도 단조로운 성장담에 신화와 같은 몽환적인 분위기를 끌어들인 섬세한 필력은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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