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찬란한 태양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 현대문학 / 200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경험의 공간을 문학의 영역까지 확장해도 제3세계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 볼 기회란 그리 많지 않다. 기껏해야 가난, 내전, 외세의 침입, 유아사망 등 불명예스러운 타이틀이 붙는 신문의 국제면을 통해서 우리는 그들의 삶을 짐작이나 할 뿐이다.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은 아프가니스탄 출신의 작가가 고국의 아픈 역사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그린 소설이다. 좀처럼 접하기 힘든 중동 지역이란 생소한 배경 덕분에 이 소설에서 이국취미를 느끼기는 쉽지만, 소설은 두 인물의 기구한 삶에서 드러나는 인간 보편의 사랑과 휴머니즘에 더욱 초점을 두고 있다.
 

소설은 두 주인공 마리암과 라일라의 삶을 아프가니스탄의 굴곡진 근현대사 속에서 바라보고 있다.
마리암은 태생부터 호의적이지 않은 환경속에서 혼자 싸워야 했다. 그녀는 사생아라는 이유로 어머니에게 조차 인정받지 못하고 헤라트 외곽의 외진 마을에서 외롭게 자라왔다. 모든 사랑을 퍼부었던 아버지로부터 배신을 당한 채 헤라트에서 카불로 시집을 온 뒤로 마리암의 삶에는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다.
한편, 라일라는 지식인 부모의 밑에서 부족함 없이 살아왔으나, 지하드에 참여했던 두 오빠가 전사한 뒤 변해버린 어머니로 인해 많은 내적 갈등을 겪는다. 그러는 중에  그녀는 다정한 아버지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꿉친구 타리크로 인해 위안을 받는다. 그러나 타리크가 내전으로인해 피폐해진 카불을 뒤로 하고 떠나고, 폭격을 맞아 부모가 죽자 라일라의 삶은 급격하게 달라지기 시작한다.
마리암과 라일라가 같은 집에서 살며, 서로에 대한 깊은 신뢰와 애정을 가지고 고된 삶을 견뎌내는 과정은 굳이 아프가니스탄의 역사적 배경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애절하게 다가온다. 작가가 격변하는 역사를 말하기 위해 인물에 생명을 불어 넣은 것이 아니라, 두 여성의 삶을 이야기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의 처절한 근대사를 곁들여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마리암의 희생은 받는 사랑보다 주는 사랑이 얼마나 크고 숭고한 지를 보여준다. 우정과 모성을 비롯해, 무엇에 대한 애착을 준 적도 받은 적도 없었던 마리암에게 그 모든 것을 채워주었던 라일라를 위해 마리암은 숭고한 희생을 결심한다. 죽음을 앞둔 그녀의 말에서처럼 마리암에게 있어서는 누군가를 위해서 그렇게 죽는 것이 썩 나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마리암의 삶은 죽음 뒤에 오히려 완성되어진다. 소설은 라일라의 뱃속에 자라나는 새로운 생명을 통해 마리암의 삶은 계속될 것이라는 암시를 주고 끝을 맺는다. 불합리한 운명에 맞서 싸우는 것은 누군가의 희생이 없이는 불가능할 만큼 어려운 일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숭고한 것임을 작가는 두 여성을 통해 말하고 있다.

소설은 두 여자가 한 집에 살게 되기까지 그들 각각의 삶을 긴 호흡으로 그려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초점을 달리하여 두 여성의 삶을 교차시켜 보여줌으로써 초반의 두 여자의 과거는 전혀 어우러지지 않을 듯 별개로 그려지고 있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이 각각의 삽화는 마리암이 죽은 후 그녀가 과거에 지워내지 못한 회한들을 라일라를 통해 해소케 함으로써 하나의 서사구조 안에 정착한다. 아버지의 진실한 사랑의 증거로서 마리암이 갈구했던 만화영화 피노키오가 라일라의 눈에 재생되는 순간 이 서사적 장치는 완성되는 것이다.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은 풍부한 서사가 있어 쉽게 읽히는 이야기지만 가볍지만은 않다. 아프가니스탄의 비참한 근현대사와 그 속에서 살아야했던 아프간 국민들의 삶이 너무도 가혹하게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소련침공, 내전, 탈레반 집권에 이르기까지 평화로울 틈이 전혀 없는 곳에서, 지하드란 명목으로 전쟁에 참여한 젊은이들은 속속 죽어 나가고, 아무런 잘못 없는 약한 어린이와 여성들은 도심 한가운데로 떨어지는 탄환에 무자비하게 희생되어간다. 살아남기 위해 고국을 등진 사람들 또한 파키스탄의 빈민촌에서 가난과 전염병에 대항해 싸워야한다. 무엇이 이들의 삶을 이토록이나 고달프고 비참하게 만들고 있을까. 작품의 배경이 되는 시간은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으로부터 그리 오래 떨어진 시간이 아니다. 거의 동시대에 지구 한쪽에서는 생존을 위한 절박한 외침이 끊이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지금 우리 삶과의 괴리감에 어쩔 수 없이 마음이 무거워질 것이다.

소설에 묘사된 여성들의 삶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유교적 전통을 가진 우리나라에서조차 받아들이기 어려울 정도로 충격적인 아프간의 여권. 실상 라시드와 같이 마초적인 악역을 맡은 남자주인공은 우리나라를 비롯해 다른 국가의 소설 속에서도 여러 차례 등장했다. 그러나 라시드의 만행이 정당화되는 사회, 부당한 폭력에 항의조차 할 수 없는 사회 속에서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폭력을 피해 달아나려 해도 남성을 동반하지 않은 여성은 외출조차 금지되어 있고, 폭력에 맞서 대항해 보았자 정당방위조차 인정되지 않는 철저히 고립된 곳에서 아프가니스탄의 여성들은 무엇을 통해 행복을 느낄까. 이는 차라리 여권에 대한 문제라기 보다 인권에 대한 문제라고 하는 것이 더 알맞다. 문화 상대주의를 고려하더라도 용납되지 않을 인권에 대한 폭력이 어쩌면 아프간 여성들에게는 전쟁보다 더 두려운 것이 아닐까. 수많은 마리암과 라일라들이 부르카 밑에 슬픈 얼굴을 감추고 있을 아프간의 거리가 21세기에 어떤 모습으로 바뀔지 궁금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