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실 - 2005년 제1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김별아 지음 / 문이당 / 2005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던 여성의 원형을 찾아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신라시대 왕정과 화랑도를 쥐고 흔들었던 미실에 이른다. 뛰어난 미색으로 남성들을 휘어잡았던 팜므파탈의 원형을 찾아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또한 3대에 걸쳐 신라의 왕을 모셨던 미실에 이른다. '화랑세기'에 드러난 이러한 사실 때문에 미실은 모습은 우리나라 페미니즘의 원류로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이것이 미실이라는 한 여자의, 한 인간의 참모습일까? 우리는 문헌상에 기록된 한 인물의 극히 축소된 일생을 놓고 그 인물의 참모습을 파악했다고 쉽게 생각해 버린다. 아쉽게도 천오백 년 전의 인물의 실체를 복원하기 위해 문헌을 읽어나가는 것 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소설이라는 장르는 편리하고도 매력적이다. 역사의 행간을 상상력으로 채워넣으면서, 역사 속 인물에 가공을 가하고 새롭게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리얼리티를 확보하기 위해서 역사적인 고증을 거치는 것은 기본이지만 말이다.

김별아의 '미실'은 미실이라는 인물에 대한 재해석의 빌미를 제공해 주는 소설이다. 소설은 미실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그의 일대기를 따라가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여기에 화랑세기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의 일화들이 곁들여지며 이야기를 한층 풍성하게 해준다.

미실은 왕과 그 일족의 부인을 공급하는 인통 중에서도 대원신통 계통의 여인으로, 당대에도 보기드문 미와 매력의 소유자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진흥-진지-진평왕 3대를 섬겼으며, 사다함, 세종, 설원랑 등 당대의 화랑들과 몇몇 왕자를 비롯한 숱한 호걸들과도 염문을 뿌렸다.

오늘날의 잣대로 미실의 연애행각을 평가하여, 그녀를 욕망의 화신이자 시대의 요부로 단정짓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이는 인간의 행위에 있어서 환경의 영향을 간과한 해석이다. 김별아가 말하는 미실은 페미니스트의 선구자도 아니고 팜므파탈의 원형도 아닌, 천오백 년 전 신라 시대를 살았던 한 여인이자 한 인간일 뿐이다.

신라는 아름다움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고,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을 최대한 존중해야할 것으로 여기던 시대였다. 인간이 만든 '제도'라는 것이 인간을 억압하기 이전, 오늘날과 같은 성관념이 자리잡기 이전의 사회였다. 제도라는 틀에 속박되지 않은 인간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원초적인 상태로 존재했으며 이들간의 교합의 본능은 죄악이라기보다 하나의 미덕이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제도라는 틀안에서 여타의 것들과 구별되는 존재가 아니라 산, 강, 바람, 흙과 같이 자연의 일부를 이루며 자연이 정해 놓은 본성에 알맞게 살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미실은 색(色)으로 왕을 섬겨야 하는 색공지신으로서 인간의 본성이 존중받던 사회의 중심에서 당연하게 살아갔을 뿐이다. 따라서 유교 사상이 인간 본성을 억압하기 이전의 자유분방한 신라 사회를 이해하지 않고, 오늘의 관점으로 미실을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 '미실'은 현대의 도덕관념에 비추어보면 난잡하기 그지없는 외설에 다름 아니다. 작가가 재현해 놓은 신라 사회의 가치관과 풍속을 이해한 뒤에야 인물들의 행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미실'은 흥미진진한 서사 이외에도 여러 면에서 독서의 즐거움을 느끼게 한다. 눈이 휘둥그래질 정도로 적나라한 내용을 묘사함에 있어서도 속된 표현을 지양하고 담백한 문체로 잘 버무려 놓은 작가의 문장력은 매 구절마다 감탄을 자아낸다. 곳곳에 우아한 단어가 쏟아져 나오고, 비유와 묘사에 있어서도 잘 다듬어진 신선한 표현들이 읽는 재미를 더한다. 화랑도의 생활상이나 왕실의 풍속에 대한 생생한 재현도 흥미롭다. 또한 미실의 일대기를 중심으로 역사나 문학을 통해 알려진 신라시대의 일화들이 불현듯 그려지며 작품 속 세계에 신빙성을 더해준다. 사다함과 무원랑의 우정, 원광대사의 탄생 비화, 비형랑사라는 주술가의 기원 등이 주요 서사의 줄기에서 일탈해 불현듯 서술되며 지적 호기심을 채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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