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나라 스페셜 에디션 2
김진 지음 / 이코믹스미디어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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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순정만화의 전성기였던 90년대를 대표하는 굵직굵직한 순정만화 작가의 대열에 당당히 이름이 올라 있는 김진. 그의 대표작 '바람의 나라'는 그의 이름을 대신할 정도로 막강한 네이밍 파워를 가지고 있다. 다양한 문화 컨텐츠로 제작되었고, 최근에 드라마로 제작된 까닭이기도 하지만 원작 자체가 가진 강력한 흡인력이야말로 작품이 십수년 동안 꾸준히 사랑받는 진정한 이유일 것이다.

1990년대 초 '댕기'라는 만화 잡지에 처음 연재를 시작한 '바람의 나라'는 학원물이나 로맨스가 주류였던 순정만화계에서는 다분히 획기적인 작품이었다. 한국의 역사를 본격적으로 다룬 시대물이 당시에는 흔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대물에 판타지를 접목시켜 독창적인 신장르를 개척했다는 데 더욱 큰 의미가 있다. 독창적이라는 것은 신선함과 난해함이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지만 '바람의 나라'는 매니악하면서도 대중적인 매력까지 놓치지 않고 있어 순정만화치고 제법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다.   

고구려 3대 대무신왕은 유리왕의 아들, 혹은 호동왕자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다. 사실 대무신왕은 꾀꼬리에 의탁하여 사랑하는 여인과의 이별을 노래했다는 유리왕보다도, 낙랑공주와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로 설화 속에 오르내리는 호동왕자보다도 유명하지 않다. 그럼에도 왕으로서 그의 업적은 굳이 역사책을 뒤적이지 않고 그의 시호만 보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고구려사를 의도적으로 축소 왜곡시킨 고대사의 여러 문헌들 탓에, 대무신왕에 대해서는 알려진 사실이 지극히 적다. '바람의 나라'는 이러한 조건 속에서 대무신왕 무휼의 생애와 업적을 복원하는데 일차적 목적을 두고 탄생했다.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하지만 당연히 작가적 상상력에 더욱 의존한다.  

'바람의 나라'는 왕이기 이전에 무휼이라는 한 인간의 고뇌를 세밀하게 다루고 있다. 무휼은 부여의 업신여김을 받으면서도 부여왕에게 아첨하기 위해 무고한 아들을 잇달아 희생시킨 아버지 유리에 대한 적대감 속에서 태자 시절을 보낸다. 왕이 된 후에는 부여의 정벌을 위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기억마저 지우려 한다. 그러나 그가 부여를 치기 위해 이끌고 간 군사는 대부분 동명왕의 구신들이거나 죽은 해명태자에게 충성을 맹세한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의 굽힐 줄 모르는 의지와 강인함의 이면에는 이처럼 철저한 외로움이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그 고독 속에 자신을 철저히 유폐하며 급기야는 그토록 증오해왔던 아버지의 전철을 밟게되는 아이러니한 운명이 가슴 아프게 그려지고 있다. 

작가는 대무신왕의 정치적, 인간적 고뇌를 묘사하는 것에만 지면을 할애하지는 않는다. 만화라는 영역이 허용하는 한도내에서 역사에 대해 조심스런 재해석을 내리면서도 순정만화로서의 정체성을 잊지 않는다. '바람의 나라'는 역사를 곁들인 사랑 이야기에 가깝다. 작품 전체에서 무휼의 정치적 업적과 인간적 고뇌를 중심으로 인물들의 애틋한 사랑이 그려진다.


이들의 사랑은 한결같이 안타깝고 애절하다. 죽은 연에 대한 그리움과 정치적 야망 사이에서 갈등하는 무휼, 하늘로부터 목숨을 빌려 살고 있어 언제 죽을 지 모르는 괴유를 사랑하는 세류, 죽음을 앞둔 해명과 하룻밤의 인연을 맺고 그를 보내버려야 했던 혜압 등 아픈 사랑 이야기가 무궁무진하게 펼쳐진다. 이들의 사랑 속에는 고귀한 희생이 있으며, 애절한 한(恨)도 묻어난다. 깊이 있고 절절한 감정 묘사가 작가 특유의 감각적인 연출과 잘 어우러져서 사랑의 정서를 더욱 심화시켜 준다. 

작가는 고대의 신화적 세계관을 그대로 받아들여 환상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수호신, 천녀, 요물, 귀신 등이 공존하는 기이한 고대의 세계를 상상력으로 창조해냈다. 이들 초현실적 존재들은 인물의 힘의 상징하기도 하고 정치적 이해관계나 하늘로부터 주어진 운명을 상징하기도 한다.

무휼, 세류, 괴유, 운 등의 인물이 보여주는 천기를 읽는 비범한 능력은 그들이 부리는 신수의 힘으로 상징된다. 이들이 부리는 청룡, 백호, 주작과 달리 현무는 부여왕 대소의 신수로 악의 힘을 상징한다. 이는 아마도 방위로는 '북', 색으로는 '흑'을 나타내는 현무의 차가운 이미지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현무는 대소의 신하로 화신하여 고구려를 부여에 귀속시키기 위해 사사건건 무휼의 청룡과 대립한다. 신수의 대립은 운명적인 세계관을 반영한다. 인간사가 하늘로 부터 부여받은 운명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현무와 청룡의 대립은 결국 무휼과 대소의 대립으로 구체화 되고 있으며, 대소왕의 죽음은 청룡의 힘이 현무를 압도하는 천기(天氣)의 흐름을 통해 암시된다. 또 무휼과 호동의 비극적 운명은 그들의 신수가 상극인 것에서 비롯된다. 모든 것이 인간사의 갈등이기 이전에 하늘이 정해준 운명이라는 뜻이다.


현무 뿐 아니라 다양한 요물들이 고구려와 대적하는 부여의 세력으로 출현한다. 원 모습이 뱀인 부여의 신하 흑귀사조나, 여우가 둔갑한 원비 이지의 몸종 등이 그렇다. 귀신의 존재는 무속적 세계관과 통한다. 무당인 혜압이나 해오녀에 의해 해명의 혼이 이승에 머무를 수 있는 설정이 이를 말해준다. 
 

이처럼 '바람의 나라'는 사실 그대로의 역사가 아니면서 그 어떤 작품보다 장대한 고구려 역사의 한 면을 보여주고 있으며, 신화적인 세계관이 지배하는 시대를 묘사하면서 인간 보편인 감정인 사랑을 애절하게 그려냈다. 또한 전통적인 그림체와 의고적인 문체가 어우러져 작품의 분위기를 한층 깊이있게 만들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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