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 - 가성비의 시대가 불러온 콘텐츠 트렌드의 거대한 변화
이나다 도요시 지음, 황미숙 옮김 / 현대지성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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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를 소비하는 방식은 그 컨텐츠 자체보다 매체의 변화에 더 영향 받는 것 같다. 비디오 가게에서 힘들게 고른 비디오 하나를 몇 번이고 돌려보다가 늦게 반납해서 연체료를 물던 시절에는, 기억의 유통기한도 길어서 그 한 편의 영화가 감수성에 미치는 영향도 컸다. 오늘날 스트리밍 서비스가 장악하고 있는 영상 콘텐츠 소비 환경에서는 컨텐츠를 소비하는 방식 뿐 아니라 컨텐츠를 대하는 자세도 전과 다르다.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은 우리가 체감하는 이러한 변화의 이면에 어떤 사회적 맥락이 있는지를 조명하는 대중문화 비평서다.

이 책은 오늘날 영화를 빨리감기로 보거나 건너뛰기 하는 현상을 '작품감상'이 아닌 '콘텐츠 소비'라는 측면으로 접근한다. 그리고 왜 Z세대에게 '콘텐츠'를 '소비'하는 것이 중요해졌는가를 다양한 자료와 인터뷰를 통해 분석한다. 표면적으로는 OTT구독 서비스 확대가 영화 감상의 패러다임을 바꾸어 놓은 것이 가장 큰 이유다. 이는 빨리 감기가 가능해진 환경을 제공했다는 점 뿐 아니라 언제고 다시 틀어서 볼 수 있다는 이점을 제공하며, 오히려 영화 자체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풍조를 만들었다. 돈과 시간을 들여 영화관을 찾거나 비디오 대여점에서 대여할 영화를 하나하나 고르던 때와 같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스트리밍 서비스가 엄밀히 따지면 공짜는 아니지만, 일단 구독을 하고 나면 그 안의 컨텐츠 하나하나는 공짜로 여겨진다. 사람들은 공짜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면 돈과 시간을 들여 영화 한 편을 공들여 보려 하지 않으면서 스트리밍 서비스에 올라온 컨텐츠를 '빨리 감'아서까지 보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24시간 SNS를 통해 타인과 연결되어 있는 요즘, 대화에서 소외되지 않으려면 유행하는 콘텐츠를 보아 두어야 한다는 것이 이유라고 이 책은 설명한다. 같은 이유에서 이들이 소비하는 컨텐츠도 주로 유행하는 최신작 위주로 한정된다. 작품이 유행할 때 발빠르게 봐 두어야 대화에서 소외되지 않을 거라는 초조감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영상매체 뿐 아니라 활자매체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신간이나 베스트셀러나 이슈화되는 책이 등장하면 온갖 책 컨텐츠가 그 책들로 도배된다. ) 작품성과 관심영역으로 컨텐츠를 감상하는 대신, 유행에 대한 편승을 이유로 그것을 소비하는 것이다. 이른바 '덕후'의 시대는 지나갔다. 컨텐츠를 제공하는 플랫폼도 헤비 유저에게 혜택을 주던 '프리미엄'에 힘을 쏟기보다 리퀴드 소비자를 공략한 서비스를 확장하는 데 더 힘을 쏟는다. 그러므로 프리미엄 '혜택'을 누리던 이른바 '덕후'들은 오래된 컨텐츠를 더 바싸게 봐야하는 경우가 생긴다. '영화' 서비스가 진정한 영화팬보다는 부동층의 표심을 얻기 위해 가벼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콘텐츠의 질 또한 이러한 흐름에 맞춰 바뀌어가고 있다. 이 책은 컨텐츠를 소비하는 주요층인 Z세대들은 감정적 스트레스를 견디기 힘들어하기 때문에 이야기의 기승전결을 온전히 즐기지 못한다고 분석한다. 이들은 해피엔딩이 확정된 작품만 보기를 원하기 때문에 오히려 스포일러를 즐긴다. 주인공의 고난의 과정은 당연히 건너뛰고 행복한 장면만을 보기 원한다. 이렇게 작품을 건너뛰거나 빨리 감기로 감상하다보니 작품이 표현하고자 하는 여백의 미학을 이해하지 못한다. 건너뛰기로 콘텐츠를 감상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침묵과 여백에 대해 질문하기를 원하지 않다. 콘텐츠는 이들의 성향에 맞추어 짧은 시간에 많은 정보를 담는 식으로 변하고 있다. 아래위, 좌우 자막으로 가득찬 예능프로의 화면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 관객들은 이해하지 못하면 바로 채널을 돌리기 때문에 제작자는 한 화면에 최대한 정보를 욱여넣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은 컨텐츠 소비를 둘러싼 다양한 사회 현상을 설명하면서 그것을 부정적인 시각에서 비평하지도 감상적으로 과거를 회고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변화를 부정적으로 보기보다 오히려 '작품 감상의 한 가지 방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견해를 내비친다. 영화는 영화관 밖으로 나올 때 이미 '원형'의 상태로 감상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비디오나 블루레이를 통해 작은 모니터로 소비될 때부터 이미 감독이 의도하는 온전한 작품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그러므로 빨리감기나 건너뛰기 또한 비디오가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감상 메커니즘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다. 그러나 인스턴트식 소비 문화를 체념하듯 받아들이게 된다면, 모든 영역에서 대중적 취향을 이유로 한없이 가벼운 컨텐츠만 대량 생산될 것이고 시간이 지나면 그것들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 채 빠른 속도로 사라질 것이다. 인간이 즐거움을 느끼는 이유는 오직 쾌락에만 있지 않다. 어떤 즐거움은 깊은 사고와 분석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문화를 소비하는 태도에는 정신적인 에너지를 기꺼이 감수하고자 하는 적극적 의지가 포함되어 있다고 믿는다. 현상의 분석에는 수긍할 부분이 많지만 두루뭉술한 결론은 아쉬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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