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셔츠
존 스칼지 지음, 이원경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4년 8월
평점 :
절판


'레드셔츠'는 SF활극의 클리셰로 사용되는 용어다. <스타트렉> 시리즈에서 주연급 인물을 대신하여 죽음을 당하는 하급 대원들이 대부분 빨간 제복을 입고 나오는 데서 유래한 말이다. 존 스칼지의 <레드셔츠>는 제목에서 보듯이 이 클리셰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하나의 메시지를 향해 앞으로 곧장 달려나가는 소설이 아니다. 읽을수록 이야기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선회한다. 처음에는 SF액션 활극인가 싶다가 다음 순간 무능한 상급자들에 대한 풍자로 이어진다. SF의 장르적 문법에 대한 거침없는 조롱이 펼쳐지고 숱한 클리셰처럼 인물들이 희생된다.

소설의 인물들은 <스타트렉>의 세계관을 공유한 듯한 소설 속 세계에 살고 있다. 프롤로그같은 첫 장에서 주인공이라고 생각했던 인물이 눈깜짝할 사이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소설이 시작된다. 다음 장에서 '인트레피드호'에 탑승하게 된 다양한 인물들이 그려지고, 함선 안에서의 그들의 생활을 보여주며 <스타트렉>의 분위기를 상기시킨다. 그런데 <스타트렉>이 보여주는 거대란 우주적 세계관을 부각시키는 대신 사건 사고에 휩쓸려가는 인물들의 내면이 두드러진다. 이 인물들은 마치 프로그래밍된 '프리시티'에 살고 있는 NPC처럼 자유의지와 상관없는 생각과 행동을 한다. 미지의 힘에 의해 조종되고 있음을 이들이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이야기는 큰 전환점을 맞는다.

<레드셔츠>는 '인트레피드호의 연대기'라는 실제 세계에서 만들어지는 드라마 속 인물들이 자아의지가 박탈된 무력한 세계에 반기를 들어 현실세계의 각본을 바꾸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다. '이야기' 속의 인물이 그 '이야기'의 메커니즘을 알게되는 설정은 허구와 사실의 경계를 허문다. '멀티버스'가 동일한 좌표에 놓인 여러 우주를 뜻한다면, <레드셔츠>의 세계관은 서로 다른 우주이면서 그 세계의 차원이 다르다. 멀티버스라기보다는 오히려 중층의 텍스트가 상화작용하는 메타픽션이 된다. 현실과 허구의 세계를 넘나들며 서로의 세계에 상호영향을 미친다는 구성은 SF계의 포스트모더니즘적 실험적 글쓰기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스타트렉>이라는 텍스트가 우리 사회에서는 대중적 레퍼런스로 자리잡지 못했기 때문에 이 책이 한국 독자에게 대중적으로 호소하기는 힘든 점은 아쉬우나, 실험적인 구성이나 세계를 바라보는 독특한 시선은 감탄할 만하다. '우주의 신'이 '일개 방송작가'라는 깨달음은 작품 안의 인물들이 느끼는 무력감을 나타내는 설정이지만, 이 세계의 신은 과연 방송 작가보다 나은 존재인가 하는 현실세계의 물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 소설은 각본 안의 세계, 각본과 현실이 상호작용하는 세계, 현실의 세계를 차례대로 보여주며 존재론적 질문을 던진다. 존 스칼지식의 쉽지만 날카로운 글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실망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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