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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한국어 ㅣ 오늘의 젊은 작가 42
문지혁 지음 / 민음사 / 2023년 3월
평점 :
한국식 오토픽션 세계를 재치있고 유머러스하게 보여주는 문지혁 작가의 <초급 한국어> 후속작이다. 오토픽션은 허구와 사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여 서사에 사실성을 강화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오토픽션이 아닌 명백한 픽션의 형태를 취하면서 작가는 인물의 입을 통해 하고싶은 말을 노골적으로 전달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소설들은 문학적 형상화 측면에서 미흡하다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오토픽션은 말하자면 자신의 목소리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도 좋다는 면죄부를 부여받은 장르다. 이러한 장르적 면죄부를 등에 업고 에세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작가의 삶과 목소리가 많이 투영되어 있다.
보통 소설 속에 작가의 말이 직접적으로 드러난다다고 느껴질 때 불편하고 민망한 경우가 많은데, 이 시리즈는 작가가 노골적으로 드러남에도 불편하게 읽히지 않는다. 아마 소설에서 그려지는 작가의 개인적 측면이 사적이고 내밀한 부분이 아닌 지적인 면에 치우쳐있기 때문일 것이다. 주인공이 가르치는 세계 '한국어'와 '글쓰기'는 작가 자신의 본업인 동시에 이 소설의 주제를 관통하는 글감이다. 사적인 형식으로 보편적인 지성을 건드리고 있으므로 일기장을 훔쳐보는 것과 같은 불편함보다는 메타픽션이 탄생하는 과정을 통해 작가와 함께 인지적 쾌감을 유도한다.
문지혁의 한국어 시리즈는 오토픽션 형식을 취하며 에세이처럼 읽히기도 하지만 소설적 재미와 의미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있다. 전작 <초급 한국어>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한국어 수업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나타나는 에피소드들을 압축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하게 보여준다. 동시에 그 에피소드를 화자 자신의 일상이나 과거의 기억과 자연스럽게 병치시키는 기법이 능수능란하다. 항상 사용하는 한국어에서 미처 인식하지 못한 언어적 특징을 새삼 깨우치고 그 맥락 속에서 우리 삶을 들춰보는 방식이 흥미롭다. 시간 순서대로 진행되는 '강의' 에피소드는 미숙한 학습자들이 점점 성장해가고 심화되는 과정을 기록한다. 그와 함께 병치되는 에피소드들도 심화되는 강의처럼 의미를 획득하게 되므로, 완벽한 성장소설의 구조가 완성된다.
<초급 한국어>가 언어가 가진 속성에서 삶의 함의를 찾아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중급 한국어>는 언어가 실어나르는 메시지 자체를 다룬다. 외국어가 아닌 모국어로서의 한국어를 다루고 있다보니 자연히 언어 사용의 정수인 문학이 전면에 드러난다. '글쓰기 강의'라는 명목으로 펼쳐지는 수많은 문학적 레퍼런스를 친절한 해제와 함께 읽을 수 있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재미인 것 같다. 그래서 외국어로서의 한국어를 다룬 <초급 한국어>와 달리 실용 교양서에서와 같은 은근한 지적 충족도 기대해볼 수 있다.
<중급 한국어>의 중요한 축을 이루는 또 하나의 이야기는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는 사건인 아이의 탄생이다. 소설은 아이의 언어를 해독하며 자식의 존재가 가져다주는 삶의 미스테리한 변화들을 '낫텔 벗쇼' 의 방식으로 보여준다. 아이라는 불가해한 존재는 또 하나의 '외국어'로 은유되며, 이 소설 <중급 한국어>의 또 다른 의미를 차지한다. 물결표시(~)를 지양하다 못해 자판에서 없애야 한다는 글쓰기 지론을 가진 화자에게 어린 딸의 한페이지 가득 채운 ~~ 부호의 향연은 해독해야 할 외국어에 다름아니다.
펜데믹 시대의 풍경을 그대로 담고 있는 것으로도 시대적 가치를 가진다. 그 시대 상황들과 공포와 불안감에 휩쓸린 사람들의 풍경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 십수 년 후에는 또 다른 의미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은 '현실 가공'이라는 품을 들이는 대신 오토픽션이라는 장르를 활용하여 자신이 가장 잘 쓸 수 있는 것을 가장 재미있는 방식으로 만들어내며 새로운 소설 쓰기의 가능성을 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