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의 힘 - 지리는 어떻게 개인의 운명을, 세계사를, 세계 경제를 좌우하는가 지리의 힘 1
팀 마샬 지음, 김미선 옮김 / 사이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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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의 힘'은 지정학에 대한 책이다. 그동안 우리가 여기 저기서 주워 들었던 국제적인 역학 관계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근데 이 책은 거기서 한 발짝 더 들어간다. 우리가 미처 몰랐던, 역학 관계를 조성하는 지리 자체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예를 들면, 한반도가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의 경유지라는 얘기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얘기다. 근데, 한반도에 '지리적 천연 장벽'이 없기에 강대국들의 '경유지' 역할을 해왔다는 것은 나는 생각하지 못했던 이야기다. 우리 나라를 험준한 산맥이 가로 막거나 아니면 거대한 사막이 가로 지르고 있었다면 우리의 역사는 또 달라졌을 거라는 걸 나는 생각조차 못했다.


이런 식으로 이 책은 국가 간의 역학 관계를 지리의 축복과 구속과 한계라는, 지리 자체의 관점으로 한 발 더 들어간다. 로키 산맥과 애팔래치아 산맥 사이의 광대한 평원이라는 미국의 축복, 평야와 가항하천이라는 유럽의 힘, 배를 띄울 수 없는 강이라는 아프리카의 제약, 우크라이나라는 방어 구역에 목을 건 러시아, 인도와 중국의 분쟁을 막아주는 히말라야 산맥 등.  우리가 잘 아는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잘 몰랐던 이야기들을 지리라는 관점에서 설명해준다.


요새 보면 기존의 역사를 넘어서 새로운 사물이나 새로운 관점에서 역사를 이야기하는 시도들이 많아 보인다. 새로운 내용도 없이 억지스러운 과장이나 아전인수격 갖다 붙이기의 상업적 속셈도 많아 보이지만, 어떤 책들은 새로운 지식과 관점을 깊이있게 다루기도 한다.


예전에 도서관에서 빌려서 앞부분만 조금 읽었다가 대출 기한이 다 되어서 반납했던 '기후로 다시 읽는 세계사'라는 책도 내게는 그런 책이었다. '기후'라는 나에게는 무지한 관점에서 역사를 풀어가는데 신선하고 흥미로왔다. 근데, 책이 읽기가 편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나중에 시간이 나면 제대로 읽고 싶은 책이다.


역사를 얘기할 때, '지리'라는 관점은 '기후'라는 관점에 비하면 훨씬 편하고 익숙하다. 그런 면에서 이 책 '지리의 힘'은 덜 신기하고 덜 신선할 수도 있다. 하지만 대신 이 책은 편하고 재미있다.


내가 볼 때 이 책의 장점은 '명확성'이다. 저자는 서문에서부터 각 지역의 핵심 특징을 짚어 놓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미 많이 알려진 사실에 특징까지 짚어 준 다음에 얘기를 들어가니 이해하기가 매우 싶다. 게다가 오랜 경력의 기자 출신 답게 쉽고 명쾌하게 이야기를 풀어간다.


오랜 기사 작성 경력으로 단련된 기자 출신 작가들의 가장 큰 장점은 이해하기 쉽고 잘 정리된, 가독성 뛰어난 글을 쓴다는 점이다. 그 가독성이 때로는 미세함과 오묘함을 포기하고 거칠고 무리한 내용을 만들기도 하지만.


책은 국내에서 2016년 초판이 발간되었는데, 책의 내용을 보면 2015년 경에 쓰여진 것 같다. 책 내용 중에 '니카라과 대운하' 얘기가 나오는데, 나는 처음 들어보는 얘기였다. 미국의 영향력 아래 있는 파나마 운하를 대체하기 위해 니카라과를 가로지르는 대운하를 건설하기 위해 홍콩의 자본이 투입된다는 얘기였는데, 행간의 느낌으로는 배후에 중국 국가의 자본이 있는 것 같았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봤더니 니라카과 대운하는 건설 시작도 못한 사업이었다. 경제성이나 환경 파괴와 니카라과 현지 주민들에 대한 우려도 컸고, 해당 홍콩 자본은 그 사업과 무관하게 도산을 한 것으로 나왔다. 애초에 거품 가득한 사업이었던 것 같고, 중국의 국가적인 자본이 들어갈 사업이었다면, 자본가 한 명의 도산으로 쉽게 포기했을 것 같지는 않다.


한반도에 관한 부분을 읽을 때는 묘한 위화감이 들기도 했지만, 명확하게 잘못된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았다. 아마도 책의 저자가 서구인의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기에 그런 것 같다.  한반도에 대한 내용이 묘하게 어긋난 부분이 있다면, 다른 지역에 관한 이야기들도 세부적으로는 묘하게 어긋난 부분들이 있지 않을까?


이 책은 거칠게 단순화시킨 느낌들이 들긴 하지만 쉽고 편하고 재미있다. 중국, 미국, 유럽, 러시아, 한국,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중동, 인도, 북극 등의 다양한 지역의 지정학적 특징과 지리적 조건을 이야기한다. (근데 책을 읽으면서 지리가 문제가 아니라 종교가 문제 아닌가 하는 생각이 종종 들기도 한다. 중동의 경우에 특히 그렇다. 누구처럼 말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바보야, 문제는 종교야'  그렇지만 그냥 닥치겠다.)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이 미처 요리되지 못한 익지 않은 식재료라면, 이 책은 그 재료를 뛰어난 조리법과 맛난 양념을 사용해서 차린 맛난 밥상인 셈이다. 게다가 이 밥상은 '지리'라는 명확한 주제를 갖고 차린 밥상이다, 마치 잘 꾸며진 계절 밥상이랄까? 다른 거 신경쓰지 말고 '지리'만 음미하면서 맛있게 먹으면 된다. (참, 지리의 힘 2권도 나온 것 같다. 그 책을 당장 급하게 읽고 싶지는 않다. 언젠가는 읽게 되겠지)


그런데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미용과 성형 의술이 떠올랐다. 인간은 '지리라는 감옥'을 탈출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고, 많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 배와 비행기를 이용해서 세계의 거리를 줄이고 있고, 파나마 운하를 개설해서 태평양과 대서양을 잇기도 하고, 수로가 될 수 없는 아프리카의 강들을 수력 발전에 활용하고 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사이에 험준한 산맥을 만들거나, 인도와 중국의 정규군이 대규모로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서 진격을 하게 만드는 기술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의술도 마찬가지다. 주름을 없애고 젊은 피부를 만들고, 코를 높이고, 눈을 크게 뜨게 해주고, 날씬한 허리를 만들어 주는 현대 의술은 놀랍다. 신인 연예인이 유명해지면서 다른 사람처럼 변하는 모습은 현대 미용 의술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게 해준다.


근데, 그런 현대 의술도 여전히 못하는 것이 있다. 팔다리를 늘려주거나, 모여라 꿈동산같은 커다란 '대갈통'을 한국인들이 선망하는 조막만한 '머리'로 만들어 주는 것은 여전히 못한다. 옛날에 다리 뼈를 부러뜨려서 다리를 늘리는 기술이 뉴스에도 나오고 했는데, 부작용도 크고 비용이나 기간이나 고통도 커서 활성화 된 것 같지는 않다. 그 수술을 받은 사람이 다리 길이가 짝짝이가 되었다고 소송을 걸었던 뉴스도 기억난다. 내 짧은 생각에는 외과적 수술로는 불가하고, 유전자의 재조합으로 육체를 재생성해야 가능한 것 아닌가 싶다.


여하튼 나는 궁금하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 험준한 산맥을 건설하는 기술과 팔다리를 늘려주는 기술 중 어느 것이 먼저 생겨날까? 인도나 중국의 정규군 대군이 히말라야를 넘어서 상대방으로 진격하게 만들어 주는 기술과, 커다란 대갈통을 조막만한 머리로 바꿔주는 기술 중 어느 것이 먼저 탄생할까?


내기라도 걸면 재미있을 것 같다. 근데 내기를 걸 거라면 하나를 더 추가하고 싶다. 내 생각에 우리 인류의 현대 기술은 자연을 거스르고 있다. 레고 쌓기처럼 결국에는 무너질 기술을 무리하게 쌓아가고 있다. 기후 위기가 보여주듯이 인간 문명은 몰락을 향해 달리고 있다. 인간은 어떻게든 살아남겠지만, 문명은 결국 붕괴할 것이다.


대규모 군대가 히말라야를 넘어서게 만들어 주는 기술과 팔다리를 늘려주는 기술과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문명의 침몰, 그 중 어느 것이 먼저일지 내기를 걸고 싶다.


근데 그 내기의 끝을 내가 볼 수는 없는 걸까? 내기가 결판 나는 것이 백 년이 될 지, 천 년이 될지 몰라도 내가 살아남아 그 결과를 직접 볼 수는 없는 걸까? 내가 동박삭이나 므두셀라가 아니란 것은 확인된 사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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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하지 않는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장편소설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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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라의 노래 '바람이 분다'를 좋아했었다.

그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떨고 있는 와인잔이 생각났다.
물을 반쯤 머금은 채
고주파의 소리에 폭발할 듯 떨리는 와인잔의 진동이 느껴졌다.
진동하는 유리잔처럼
불안하고 위태로운 감수성을 갖고 살아가는 삶이 어떨지
상상이 잘 가지 않았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전혀 다르게 말하고 있지만
마찬가지로
종이장처럼 얇고, 면도날처럼 예리한 감수성이 내내 불편했다.

우리는 뽀송뽀송한 아기를 겨울 벌판으로 데려가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나가야만 한다면
꽁꽁 싸매고, 싸매고, 싸맨 다음에 품에 푹 안고서야
간신히 나갈 것이다.
아기 없이 나 홀로 나가는 경우라도
내복과 두터운 바지와 털옷과 방한 파카로 중무장하고
거기에 손난로까지 하나 챙긴 다음에야
간신히 나설 것이다.

이들은 왠지 온통 벌거벗은 나신의 모습으로
벌판으로 나설 것 같다.
어쩌면 자신을 위해
벙어리 장갑 할 켤레나 털 모자 하나 쯤은 챙겼을 지도.

햇살이 노곤한 봄의 벌판이나
하늘이 높은 가을의 벌판은 못 견디고
춥고 황량한 겨울의 벌판을 찾아 나설 것 같다.
그리하여
얼어붙은 대지에 눈보라 날리고 태양은 숨어 들어간
어둡고 춥고 쓸쓸한 겨울의 벌판을 만나면,
그제서야 비로소 이들의 작품은 태어날 것만 같다.

오래전 읽다가 던져버린 책 중에
길리언 플린의 '몸을 긋는 소녀'라는 책과
마커스 세이커의 '칼날은 스스로를 상처 입힌다'라는 책이 있다.

몸을 긋는 소녀는 너무 우울해서 덮었고,
칼날은 스스로를 상처 입힌다는 너무 유치해서 덮었다.

그 내용들은 기억나지 않건만
오늘 종일 책 제목이 나에게 달라붙는다.
한강은
마음을 긋는 소녀 같고
스스로를 상처 입히는 작가 같다.

이들은 나름 일가를 이룬 치열한 예술가들이지만
나는 이들이 하나도 부럽지 않다.

작별하지 않는다를 힘들게 읽으면서
'이렇게 힘들게 써야 하나' 생각하다가
'이렇게 쓰는 작가도 있어야지'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이런 책을 읽는 독자들도 있어야지.

그러나 나는 그 독자에서 제외되고 싶다.


그렇지만
이런 작품이 있어서
이런 작가가 있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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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 인간 - 제155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무라타 사야카 지음, 김석희 옮김 / 살림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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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망스러웠다.

책을 읽는 건 크게 어렵지 않았다.
인간의 일반적인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아서
타인과 공감하지 못하고 사회의 이질적인 존재이면서,
편의점에서만 자신의 존재 의미와 역할을 찾는 주인공에 관한
짧고 단순한 이야기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느낀 점은 크게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일본 사회가 많이 병적이구나 하는 것과
또 하나는 일본 문학의 깊이가 많이 부족하구나 하는 거였다.

타인과 공감하지 못하는 주인공의 감정과 입장에서는
어느 정도 공감이 되었다.
주인공처럼 심하지는 않지만
나도 살아오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위화감과 이질감을 많이 느껴 왔으니까.

그렇지만 주인공을 대하는 사람들의 과도한 배척과
그에 대처하는 주인공의 자세는
별로 공감이 가지 않았다.

책에 나오는 모든 이들은
획일적이지 않은 주인공의 삶을 불량이나 고장으로 취급하고
정상으로 돌아오기를 강요한다.
그게 너무 지나치다.

소설이라서 과장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이 책이 문학상까지 받은 것을 생각하면
이 책의 내용이 터무니없는 과장은 아닐 것 같다.
어느 정도 현실성이 담보되었을 것 같다.

정말 그렇다면 일본 사회는 매우 병든 사회일 것 같다.
개인의 자유와 개성에 대한 강한 배제와
획일화된 집단주의를
건강한 시민 사회의 모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배타적인 사람들을 대하는 주인공의 선택 또한
이해하기도 동의하기도 어렵다.
자신의 자유나 개성이나 존엄성에 대한 생각이나 주장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잔소리 듣기 싫고 간섭 받기 싫을 뿐이다.
책의 주제 자체는 생각해 볼만한 것이지만,
그 주제에 대한 어떤 사색이나 사유가 느껴지지 않는다.

주인공은 그냥 미성숙한 어린 아이처럼 행동하는데,
내가 책을 보며 느낀 것은 작가 또한 그 수준인 것 같다.
개성과 자유에 대한 사색과 사유와 고민 대신,
그저 잔소리와 간섭을 피하고 싶을 뿐이다.
어린 아이 수준의 고민과
어린 아이 수준의 대처만 보인다.

그나마 결론에서
주인공이 편의점을 선택함으로써
주체적인 선택을 하는 성숙한 사람으로서의 첫 걸음을 내딛는 건
작은 의미가 있어 보인다.

이런 책이 문학상을 받았다는 건
그 소재나 주제를 떠나서
이해하기 어렵다.

게다가
이 책의 이야기는 너무 단선적이다.
좋은 소설이라면 가져야 할
이야기가 없다.
풍성한 이야기도 진한 이야기도 없다.
어찌 보면
동화책이나 만화 스토리 수준의 이야기다.
소설에서 이야기를 제일 중요시하는 나에게는
실망스러운 책이다.

이야기도 빈약하고
사유도 앙상한
이런 책에 문학상을 준다는 점에서
나는 일본 문학을 의심하게 된다.

문학의 '수준'을 논하는 것이
너무 편협한 발상이라면
나와 일본 문학은 맞지 않는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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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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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다 읽었다.
뒤의 '옮긴이의 글'도 읽는데, 저자 클레어 키건이 번역자에게 한 말이 눈에 띄었다.
"저는 두 번 읽어서 결말 부분이 앞으로 밀려와 다시 서사가 한 바퀴 돌아가기 전에는 이야기를 다 읽었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나도 다시 한 번 읽어볼까?
첫 페이지를 다시 펼쳤다. 싫다. 다시 읽기 싫다. 책을 덮었다.

주인공 '펄롱'을 보면서 많은 공감을 했다. 나와 다른 듯 하면서도 비슷했고, 비슷한 듯 하면서도 달랐다.

펄롱은 부인과 함께 다섯 명의 딸을 키우는 아버지다. 하루 하루를 열심히 일하며 살아가는 성실하면서도 가정적인 사람이다. 가족에게 다정할 뿐만 아니라 이웃들에게도 베풀 줄 알고 과욕을 부리지 않는 사람이다.
'주고 받는 것을 적절하게 맞추어 균형 잡을 줄 알아야 집 안에서나 밖에서나 잘 지낼 수 있단 생각을 했다'

그렇게 성실하게 살아가면서도 가끔은 또 다른 삶을 상상하기도 한다.
'여기 이 집에서 저 사람을 아내로 삼아 사는 삶은 어떨까 하는 상상으로 흘러가도록 두었다. 최근에 펄롱은 가끔 다른 삶, 다른 곳을 상상했고 혹시 그런 기질이 자기 핏속에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자기 아버지도, 갑자기 불쑥 영국행 배를 타고 떠나버린 건 아니었을까?'

석탄 판매를 하면서 부유하지는 않지만 불경기 속에서도 빚 안지고 살아가는 자영업자면서도 종종 막연한 불안에 빠지곤 한다.
'펄롱은 마음 한 편이 공연히 긴장될 때가 많았다. 왜인지는 몰랐다. 모든 걸 다 잃는 일이 너무나 쉽게 일어난다는 걸 펄롱은 알았다'
'갑자기 무언가가 목구멍에서 울컥 치밀었다. 마치 이런 밤이 다시는 오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일요일 밤에 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심란한 걸까?'

때로는 압박감에 시달리기도 한다.
'달아나고 싶은 충동이 펄롱을 사로잡았고 펄롱은 홀로 낡은 옷을 입고 어두운 들판 위로 걸어가는 상상을 했다'
'펄롱은 외투를 걸치고 마당으로 나오면서 어떤 안도감을 느꼈다. 밖으로 나와서, 강을 보고, 바깥 공기를 마시니 얼마나 좋은지'

펄롱의 불안과 압박감을 보면서 '불안'을 쓴 철학자 '알랭 드 보통'이 생각났다. 그에게 이 책을 읽으라고 권해 주고 싶었다. 당신이 모르는 불안이 여기 있다고. 보고 느끼고 사색하라고.

펄롱은 때로는 삶에 대한 상념에 빠지기도 한다.
'늘 이렇지, 펄롱은 생각했다. 언제나 쉼 없이 자동으로 다음 단계로, 다음 해야 할 일로 넘어갔다. 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이 있다면 삶은 어떨까,'
'펄롱은 자기가 아일린에게 좋은 대화 상대가 못 된다는 생각, 긴 밤을 짧게 만들어주는 재주가 없다는 생각을 했다. 아일린도 다른 사람하고 결혼했더라면 어땠을까하는 상상을 할까?'

펄롱은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다. 어려운 사람들을 보면 도와주고 싶어하고, 또 실제로 도와준다.
'막 시노트네 애가 오늘 또 땔감을 주우러 길에 나와 있더라고. 장대비가 내렸잖아. 차를 세우고 태워주겠다 하고 주머니에 있던 잔돈을 좀 줬어. 한 백 파운드는 얻은 것처럼 좋아하더라. 애 잘못은 아니잖아'
'펄롱은 수차례, 돈이 있을 때는 자신에게 땔감을 구입하곤 했던 집 앞에 차를 세우고 문 앞에 장작 자루를 두고 왔다'

그런 펄롱이 수녀원에 석탄을 납품하러 갔다가 학대받는 소녀들을 목격한다.
'저한테는 아무 것도 없어요. 그냥 물에 빠져 죽고 싶어요. 우리한테 씨발 그것도 못 해줘요?'
'내 아기 어떤지 물어봐 주시겠어요? 배고플 텐데, 누가 젖을 주죠? 14주 됐어요. 아기를 데려가 버렸는데 만약 여기 있다면 다시 젖을 먹이게 해줄지도 몰라요.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요"

펄롱은 충격을 받으면서, 한편으로는 모든 걸 잊고 안온한 자신의 일상을 지키고 싶어진다.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거야?'
'또 다시 펄롱의 마음 한편에서는 그냥 모른 척하고 집으로 가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수녀원장은 펄롱을 은근히 압박하고, 이에 펄롱은 반감을 느낀다.
'조금 전 까지는 여기를 뜨고만 싶었는데 이제는 반대로 여기에서 버티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버티고 뻗대는 모든 이여, 힘 내소서!

이웃과 아내는 잊어버릴 것을 요구한다.
'자네 정말 열심히 잘 살아서, 여기까지 온 거잖아. 딸들도 잘 키우고 있고, 알겠지만 그곳하고 세인트마거릿 학교 사이에는 얇은 담장 하나 뿐이라고'
'교단은 다르지만 다 한통속이야. 어느 한쪽하고 척지면 다른 쪽하고도 원수 되는 거야'
'걔들은 우리 애들이 아니라고'

펄롱은 괴로워 한다.
'펄롱을 괴롭힌 것은 아이가 석탄 광에 갇혀 있다는 것도, 수녀원장의 태도도 아니었다. 펄롱이 거기에 있는 동안 그 아이가 받은 취급을 보고만 있었고, 그애의 아기에 관해 묻지도 않았고,-그 아이가 부탁한 단 한 가지 일인데-수녀원장이 준 돈을 받았고, 텅빈 식탁에 앉은 아이를 작은 카디건 아래에서 젖이 새서 블라우스에 얼룩이 지는 채로 내버려두고 나와 위선자처럼 미사를 보러 갔다는 사실이었다'

펄롱은 수녀원으로 가서 아이를 데리고 나온다.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 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대가를 치르게 될 터이지만, 그래도 변변찮은 삶에서 펄롱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와 견줄 만한 행복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갓난 딸들을 처음 품에 안고 우렁차고 고집스러운 울음을 들었을 때조차도'

필롱이 구하는 아이는 어쩌면 자신의 어머니고, 결국에는 자기 자신일지도 모른다.
'미시즈 윌슨이 아니었다면 어머니는 결국 그곳에 가고 말았을 것이다. 더 옛날이었다면 펄롱이 구하고 있는 이가 자기 어머니였을 수도 있었다.'

'저 문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고생길이 느껴졌다. 하지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지나갔다.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은 지나갔다. 지금부터 마주하게 될 고통은 어떤 것이든 지금 옆에 있는 이 아이가 이미 겪은 것, 어쩌면 앞으로도 겪어야 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펄롱의 가슴속에서는 두려움이 다른 모든 감정을 압도했으나, 그럼에도 펄롱은 순진한 마음으로 자기들은 어떻게든 해나가리라 기대했고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펄롱의 선택과 실천은 감동적이다. 낙관적이고 건강한 마음으로 사람에 대한 애정과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실천으로 이어지고.

어쩌면 여기가 펄롱과 내가 갈라지는 지점 아닐까? 어려운 사람들을 보고 마음 아파하고 도와주고 싶어하는 건 나와 펄롱이나 똑같다. 근데 나는 결국 외면한다. 펄롱은 실제로 도와준다. 나에게 결국 그들은 남이다. 펄롱은 그들과 같은 세상을 살아간다.

펄롱과 나는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부자집 하녀의 아비없는 아들로 태어났지만, 피 한 방울 안 섞인 부자집 마님의 애정과 지원 덕분에 잘 자라난 그의 성장 배경이 그를 베풀 줄 아는 사람으로 만든 것일까? 그럼 부모님의 부족함없는, 때로는 과한 관심과 애정을 받고 자란 나는 왜 베풀 줄 모르는 것인가?

그건 아닐 것이다. 성장 배경이 뭐든 간에 펄롱은 실천하고 행동하는 사람인 것이다. 나는 망설이고 투덜거리는 사람이고. 펄롱은 실천하고 행동하기에 자기와 접촉한 사람들과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거다. 나는 망설이고 투덜거리기에 나만의 동떨어진 세상을 살아가는 거다. 펄롱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사람이고, 나는 세상을 비웃는 사람이다.

펄롱과 나를 가르는 것은 결국 인간에 대한 믿음 아닐까?

책은 저자가 말했듯이 많은 부분 절제와 암시로 이루어져 있다. 문장은 압축적이고 많은 여운을 남기고 있다. 역자는 '이 짧은 소설은 차라리 시'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내 취향은 아니다. 아니, 그렇기에 내 취향이 아니다. 책 값은 아깝지 않은데, 이 새 책이 이렇게 한 번 읽혀지고 내 책장 귀퉁이에서 잊혀지고 말 것이 아깝다. 만화책을 포함해서, 책을 읽을 때면 종종 느끼는 것인데, 작가에게 미안하다. 나도 여운을 위해서 이 애기는 여기까지만.

이 소설의 문장은 함축적이고 내용은 감동적이다. 그렇지만 구성은 단순하고 줄거리는 단조롭고 캐릭터는 평면적이다. 이른바 '문학성'이나 '작품성'이란 측면에서 이렇게 큰 칭찬을 받는 것은 나에게는 좀 놀랍게 느껴진다. 단순한 구조와 함축적인 문장속에서 삶의 울림과 감동을 담은 이야기들은 이 소설 말고도 많다.

독토에서 다른 회원들의 얘기를 들어보고 싶어졌다. 그 사람들이 이 책을 읽으면서 어떤 걸 느꼈을지, 왜 이 책이 이렇게 많은 찬사와 인기를 얻고 있는지. 나는 못 보는 걸 보고, 나는 못 느끼는 걸 느끼는 여성들의 얘기를 들어보고 싶다. 아, 남성들의 얘기도 들어보고 싶다. 편견은 숨겨야지. 넘어설 수 없다면.

책 겉 표지에는 비평가들의 추천사가 적혀 있다. 그 글을 읽으며 내가 왜 문학 비평을 외면하는지 그 이유를 다시 깨달았다.

이 책은 막달레나 세탁소를 소재로 한 책이다. 작가는 막달레나 세탁소에서 고통받았던 여자들과 아이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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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준의 인문 건축 기행
유현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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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 베란다에 손바닥만한 작은 화분을 하나 놓았다고 치자(참, 이 책에 의하면 베란다가 아니라 '발코니'다). 거기 씨앗을 하나 심었다. 씨앗이 잘 자라기 위해서는 햇볕과 물이 필요할 터인데, 햇볕 잘 드는 남향의 거실이라면 햇볕은 걱정 없을 것 같다. 문제는 물이다. 조리개에 물을 조금 담아 조심스럽게 주어야 할 터이다. 화분의 흙이 물을 머금을 수 있도록. 근데 이런, 양동이로 물을 들이 부었네?

이 책을 읽는 기분이 그러하다. 목이 말라서 물을 청하니, 우물가의 규수는 바가지에 버들잎을 띄워서 물을 주는 게 아니라, 머리 위에서 물을 들이 부었다. 내가 원한 건 등목이 아니라 한 모금의 식수일 뿐인데. 온 몸이 젖었지만 갈증은 해소가 되지 않는다. 물에 잠겼지만 목으로 들어와 갈증을 해소시키는 물은 없다. 남은 것은 쫄딱 젖은 몸 뿐이다. 할 수 없다. 그 물이라도 핥아야지.

건축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나에게 이 책이 말하는 내용은 너무 방대하다. 쉽고 평이한 문장이지만, 많은 이야기를 담았다. 무려 30개의 건축물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독토를 위해서 쫓기듯 페이지를 넘긴다. 건축에 관한 이야기들이 눈으로 들어왔다가 하품으로 나간다. 책은 읽지만 머리 속에 남는 건 없다. 그저 나를 통과할 뿐이다. 책의 이야기는 지식이 아니라 바람이고, 나는 통풍구가 되어 버린다.

나 같은 건축의 문외한에게 책의 활자만으로는 그 입체적인 공간이 느껴지지 않는다.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현장에 가서 직접 보고 느끼거나, 아니면 촬영 영상이라도 봐야 감이 오지 않을까 싶다. 그것이 어렵다면, 오랜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씹어가면서 읽어야 할 것 같다. 근데 아쉽게도 그렇게 씹어가며 읽기에는 맛이 부족하다. 건축에 관한 이야기는 편하고 부담 없다. 불편한 건 작가의 세계관이다.

작가는 현학적이다. 건축 이외에도 많은 이야기를 한다. 비교하고, 비유를 들고, 맥락을 설명한다. 작가는 많은 지식을 자랑하고 싶어하는 것 같지만, 행간에서 느껴지는 작가의 역사 의식이나 사회 의식은 거칠고 빈약하다. 책을 씹고 음미하기 보다는 건축에 관한 이야기만 후다닥 읽고 빨리 지나가고 싶어진다.

책을 읽으면서 제목에 나오는 '인문학'이란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인문학이란 무엇일까? 왜 우리 사회는 그렇게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할까? 내 생각에는 인문학은 도구이다. 인문학적 지식은 세상을 알아보고, 삶을 통찰하고, 스스로를 성찰하기 위한 도구이다.

80년대 대기업 공채 필기 시험에서는 '영어'와 '상식'이 거의 필수 과목이나 마찬가지였다. 대졸 취업 준비생들은 영어 공부 말고도 두꺼운 '일반 상식'책을 놓고서 공채 시험을 준비했다. 4지 선다형의 객관식 시험. 잡다한 토막 지식을 물어보는 시험이었고, 그를 위해 신문을 많이 읽는 것이 권유되던 시절이었다.

이른바 문사철, 문학과 역사와 철학을 중심으로 많은 지식을 쌓으면 그것이 저절로 인문학인 걸까? 고민과 사색과 사유와 반성과 성찰이 없는 인문학이라면, 시험을 위해 달달 외우던 일반 상식과 뭐가 다를까? 객관식 시험용 일반 상식이 아니라 주관식 시험용 일반 상식일까? 인문학은 허식과 겉치레와 유행에 불과한 것일까?

책의 중간쯤에서 작가는 말한다. "원래 하수들이 어려운 철학을 가져오고 구구절절 설명이 길다" 포스팅을 할 때 마다 주절주절 많은 말을 늘어놓는 나는 뜨금하다. 남의 얘기가 아니다. 그러나 다행히 나는 작가가 아니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늘어놓는 아마추어일 뿐이다. 나는 하수라도 괜찮다. 그래, 나는 하수다.

내가 하수임을 인정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작가에게 물어보고 싶어진다. 당신은 그렇게 자신 있는가?

책은 읽어볼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건축의 문외한이 건축이라는 낯설고 신기한 이야기를 뒤집어 쓰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의미있는 경험이다. 이물질도 좀 묻을 것 같지만 털어버리면 그만이지. 세계의 유명 건축가와 건축물과 그 철학과 맥락에 대한 얘기를 한 번 들어봤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다.

내가 어디 가서 이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가? 머리 속에 남아 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지만, 그건 나의 무지와 무식의 탓이다. 건축에 대해서 생각하는 방법을 알게 된 것이 어디인가? 건축 이야기에 쫄딱 젖어볼 수 있는 게 어디인가? 이건 그저 시작일 뿐이다. 이야기를 내 속에 담아내는 건 앞으로 나의 할 일이다.

어쩌면 이 책에서 새로운 세상의 입구를 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건축이라는 그 세상은 충분히 흥미롭고 경이로울 것이다. 이 책을 시작으로 건축에 관해 많은 지식을 쌓고 많은 것을 이해하게 되길 바란다. 앎의 즐거움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같다. 그렇지만 그것은 또 다른 시작이고, 결국은 순환의 한 고리일 뿐이다.

건축 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무량무변의 거대한 우주에 대해서도, 심지어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는 양자라는 미시 세계에 대해서조차 많은 것들을 알아가고 있다. 그런데 미안하게도 건축의 소재인 물질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

'도시의 환경은 건축 기술 뿐만 아니라 그 환경을 둘러싼 물질들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공교롭게도 이 책을 읽고 나서 손에 잡은 <물질의 세계>라는 책의 '모래' 편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제는 물질에 대해서도 알아가야 할 때일까?

아는 것은 너무나 적고, 모르는 것은 너무나 많다. 세상의 지식은 너무나 많고, 세월의 변화는 너무나 빠르다. 한 개인으로서는 평생을 쫓아간다 한들 그 꽁무니조차 쫓을 수 없을 것이다. 다행히 나는 학자가 아니다. 모르는 것에 괴로워하는 대신, 알아가는 것에 즐거워 할 일이다. 평생에 걸쳐서 앎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그저 책 몇 권 읽는 것 만으로도.

책을 계속해서 읽다 보면 맨 처음 느꼈던 서먹함과 어색함이 점점 줄어들게 된다. 책의 후반부 즈음에 가면 어느새 건축의 이야기에 적응하고 재미를 느끼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한 권의 책에서 변하는 자신을 느끼는 것은 재미있는 경험이다.

이 책의 건축 이야기에 한 번쯤은 젖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다만, 물들지는 말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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