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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평점 :
책을 다 읽었다.
뒤의 '옮긴이의 글'도 읽는데, 저자 클레어 키건이 번역자에게 한 말이 눈에 띄었다.
"저는 두 번 읽어서 결말 부분이 앞으로 밀려와 다시 서사가 한 바퀴 돌아가기 전에는 이야기를 다 읽었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나도 다시 한 번 읽어볼까?
첫 페이지를 다시 펼쳤다. 싫다. 다시 읽기 싫다. 책을 덮었다.
주인공 '펄롱'을 보면서 많은 공감을 했다. 나와 다른 듯 하면서도 비슷했고, 비슷한 듯 하면서도 달랐다.
펄롱은 부인과 함께 다섯 명의 딸을 키우는 아버지다. 하루 하루를 열심히 일하며 살아가는 성실하면서도 가정적인 사람이다. 가족에게 다정할 뿐만 아니라 이웃들에게도 베풀 줄 알고 과욕을 부리지 않는 사람이다.
'주고 받는 것을 적절하게 맞추어 균형 잡을 줄 알아야 집 안에서나 밖에서나 잘 지낼 수 있단 생각을 했다'
그렇게 성실하게 살아가면서도 가끔은 또 다른 삶을 상상하기도 한다.
'여기 이 집에서 저 사람을 아내로 삼아 사는 삶은 어떨까 하는 상상으로 흘러가도록 두었다. 최근에 펄롱은 가끔 다른 삶, 다른 곳을 상상했고 혹시 그런 기질이 자기 핏속에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자기 아버지도, 갑자기 불쑥 영국행 배를 타고 떠나버린 건 아니었을까?'
석탄 판매를 하면서 부유하지는 않지만 불경기 속에서도 빚 안지고 살아가는 자영업자면서도 종종 막연한 불안에 빠지곤 한다.
'펄롱은 마음 한 편이 공연히 긴장될 때가 많았다. 왜인지는 몰랐다. 모든 걸 다 잃는 일이 너무나 쉽게 일어난다는 걸 펄롱은 알았다'
'갑자기 무언가가 목구멍에서 울컥 치밀었다. 마치 이런 밤이 다시는 오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일요일 밤에 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심란한 걸까?'
때로는 압박감에 시달리기도 한다.
'달아나고 싶은 충동이 펄롱을 사로잡았고 펄롱은 홀로 낡은 옷을 입고 어두운 들판 위로 걸어가는 상상을 했다'
'펄롱은 외투를 걸치고 마당으로 나오면서 어떤 안도감을 느꼈다. 밖으로 나와서, 강을 보고, 바깥 공기를 마시니 얼마나 좋은지'
펄롱의 불안과 압박감을 보면서 '불안'을 쓴 철학자 '알랭 드 보통'이 생각났다. 그에게 이 책을 읽으라고 권해 주고 싶었다. 당신이 모르는 불안이 여기 있다고. 보고 느끼고 사색하라고.
펄롱은 때로는 삶에 대한 상념에 빠지기도 한다.
'늘 이렇지, 펄롱은 생각했다. 언제나 쉼 없이 자동으로 다음 단계로, 다음 해야 할 일로 넘어갔다. 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이 있다면 삶은 어떨까,'
'펄롱은 자기가 아일린에게 좋은 대화 상대가 못 된다는 생각, 긴 밤을 짧게 만들어주는 재주가 없다는 생각을 했다. 아일린도 다른 사람하고 결혼했더라면 어땠을까하는 상상을 할까?'
펄롱은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다. 어려운 사람들을 보면 도와주고 싶어하고, 또 실제로 도와준다.
'막 시노트네 애가 오늘 또 땔감을 주우러 길에 나와 있더라고. 장대비가 내렸잖아. 차를 세우고 태워주겠다 하고 주머니에 있던 잔돈을 좀 줬어. 한 백 파운드는 얻은 것처럼 좋아하더라. 애 잘못은 아니잖아'
'펄롱은 수차례, 돈이 있을 때는 자신에게 땔감을 구입하곤 했던 집 앞에 차를 세우고 문 앞에 장작 자루를 두고 왔다'
그런 펄롱이 수녀원에 석탄을 납품하러 갔다가 학대받는 소녀들을 목격한다.
'저한테는 아무 것도 없어요. 그냥 물에 빠져 죽고 싶어요. 우리한테 씨발 그것도 못 해줘요?'
'내 아기 어떤지 물어봐 주시겠어요? 배고플 텐데, 누가 젖을 주죠? 14주 됐어요. 아기를 데려가 버렸는데 만약 여기 있다면 다시 젖을 먹이게 해줄지도 몰라요.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요"
펄롱은 충격을 받으면서, 한편으로는 모든 걸 잊고 안온한 자신의 일상을 지키고 싶어진다.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거야?'
'또 다시 펄롱의 마음 한편에서는 그냥 모른 척하고 집으로 가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수녀원장은 펄롱을 은근히 압박하고, 이에 펄롱은 반감을 느낀다.
'조금 전 까지는 여기를 뜨고만 싶었는데 이제는 반대로 여기에서 버티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버티고 뻗대는 모든 이여, 힘 내소서!
이웃과 아내는 잊어버릴 것을 요구한다.
'자네 정말 열심히 잘 살아서, 여기까지 온 거잖아. 딸들도 잘 키우고 있고, 알겠지만 그곳하고 세인트마거릿 학교 사이에는 얇은 담장 하나 뿐이라고'
'교단은 다르지만 다 한통속이야. 어느 한쪽하고 척지면 다른 쪽하고도 원수 되는 거야'
'걔들은 우리 애들이 아니라고'
펄롱은 괴로워 한다.
'펄롱을 괴롭힌 것은 아이가 석탄 광에 갇혀 있다는 것도, 수녀원장의 태도도 아니었다. 펄롱이 거기에 있는 동안 그 아이가 받은 취급을 보고만 있었고, 그애의 아기에 관해 묻지도 않았고,-그 아이가 부탁한 단 한 가지 일인데-수녀원장이 준 돈을 받았고, 텅빈 식탁에 앉은 아이를 작은 카디건 아래에서 젖이 새서 블라우스에 얼룩이 지는 채로 내버려두고 나와 위선자처럼 미사를 보러 갔다는 사실이었다'
펄롱은 수녀원으로 가서 아이를 데리고 나온다.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 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대가를 치르게 될 터이지만, 그래도 변변찮은 삶에서 펄롱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와 견줄 만한 행복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갓난 딸들을 처음 품에 안고 우렁차고 고집스러운 울음을 들었을 때조차도'
필롱이 구하는 아이는 어쩌면 자신의 어머니고, 결국에는 자기 자신일지도 모른다.
'미시즈 윌슨이 아니었다면 어머니는 결국 그곳에 가고 말았을 것이다. 더 옛날이었다면 펄롱이 구하고 있는 이가 자기 어머니였을 수도 있었다.'
'저 문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고생길이 느껴졌다. 하지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지나갔다.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은 지나갔다. 지금부터 마주하게 될 고통은 어떤 것이든 지금 옆에 있는 이 아이가 이미 겪은 것, 어쩌면 앞으로도 겪어야 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펄롱의 가슴속에서는 두려움이 다른 모든 감정을 압도했으나, 그럼에도 펄롱은 순진한 마음으로 자기들은 어떻게든 해나가리라 기대했고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펄롱의 선택과 실천은 감동적이다. 낙관적이고 건강한 마음으로 사람에 대한 애정과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실천으로 이어지고.
어쩌면 여기가 펄롱과 내가 갈라지는 지점 아닐까? 어려운 사람들을 보고 마음 아파하고 도와주고 싶어하는 건 나와 펄롱이나 똑같다. 근데 나는 결국 외면한다. 펄롱은 실제로 도와준다. 나에게 결국 그들은 남이다. 펄롱은 그들과 같은 세상을 살아간다.
펄롱과 나는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부자집 하녀의 아비없는 아들로 태어났지만, 피 한 방울 안 섞인 부자집 마님의 애정과 지원 덕분에 잘 자라난 그의 성장 배경이 그를 베풀 줄 아는 사람으로 만든 것일까? 그럼 부모님의 부족함없는, 때로는 과한 관심과 애정을 받고 자란 나는 왜 베풀 줄 모르는 것인가?
그건 아닐 것이다. 성장 배경이 뭐든 간에 펄롱은 실천하고 행동하는 사람인 것이다. 나는 망설이고 투덜거리는 사람이고. 펄롱은 실천하고 행동하기에 자기와 접촉한 사람들과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거다. 나는 망설이고 투덜거리기에 나만의 동떨어진 세상을 살아가는 거다. 펄롱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사람이고, 나는 세상을 비웃는 사람이다.
펄롱과 나를 가르는 것은 결국 인간에 대한 믿음 아닐까?
책은 저자가 말했듯이 많은 부분 절제와 암시로 이루어져 있다. 문장은 압축적이고 많은 여운을 남기고 있다. 역자는 '이 짧은 소설은 차라리 시'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내 취향은 아니다. 아니, 그렇기에 내 취향이 아니다. 책 값은 아깝지 않은데, 이 새 책이 이렇게 한 번 읽혀지고 내 책장 귀퉁이에서 잊혀지고 말 것이 아깝다. 만화책을 포함해서, 책을 읽을 때면 종종 느끼는 것인데, 작가에게 미안하다. 나도 여운을 위해서 이 애기는 여기까지만.
이 소설의 문장은 함축적이고 내용은 감동적이다. 그렇지만 구성은 단순하고 줄거리는 단조롭고 캐릭터는 평면적이다. 이른바 '문학성'이나 '작품성'이란 측면에서 이렇게 큰 칭찬을 받는 것은 나에게는 좀 놀랍게 느껴진다. 단순한 구조와 함축적인 문장속에서 삶의 울림과 감동을 담은 이야기들은 이 소설 말고도 많다.
독토에서 다른 회원들의 얘기를 들어보고 싶어졌다. 그 사람들이 이 책을 읽으면서 어떤 걸 느꼈을지, 왜 이 책이 이렇게 많은 찬사와 인기를 얻고 있는지. 나는 못 보는 걸 보고, 나는 못 느끼는 걸 느끼는 여성들의 얘기를 들어보고 싶다. 아, 남성들의 얘기도 들어보고 싶다. 편견은 숨겨야지. 넘어설 수 없다면.
책 겉 표지에는 비평가들의 추천사가 적혀 있다. 그 글을 읽으며 내가 왜 문학 비평을 외면하는지 그 이유를 다시 깨달았다.
이 책은 막달레나 세탁소를 소재로 한 책이다. 작가는 막달레나 세탁소에서 고통받았던 여자들과 아이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