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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의 힘 - 지리는 어떻게 개인의 운명을, 세계사를, 세계 경제를 좌우하는가 ㅣ 지리의 힘 1
팀 마샬 지음, 김미선 옮김 / 사이 / 2016년 8월
평점 :
'지리의 힘'은 지정학에 대한 책이다. 그동안 우리가 여기 저기서 주워 들었던 국제적인 역학 관계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근데 이 책은 거기서 한 발짝 더 들어간다. 우리가 미처 몰랐던, 역학 관계를 조성하는 지리 자체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예를 들면, 한반도가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의 경유지라는 얘기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얘기다. 근데, 한반도에 '지리적 천연 장벽'이 없기에 강대국들의 '경유지' 역할을 해왔다는 것은 나는 생각하지 못했던 이야기다. 우리 나라를 험준한 산맥이 가로 막거나 아니면 거대한 사막이 가로 지르고 있었다면 우리의 역사는 또 달라졌을 거라는 걸 나는 생각조차 못했다.
이런 식으로 이 책은 국가 간의 역학 관계를 지리의 축복과 구속과 한계라는, 지리 자체의 관점으로 한 발 더 들어간다. 로키 산맥과 애팔래치아 산맥 사이의 광대한 평원이라는 미국의 축복, 평야와 가항하천이라는 유럽의 힘, 배를 띄울 수 없는 강이라는 아프리카의 제약, 우크라이나라는 방어 구역에 목을 건 러시아, 인도와 중국의 분쟁을 막아주는 히말라야 산맥 등. 우리가 잘 아는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잘 몰랐던 이야기들을 지리라는 관점에서 설명해준다.
요새 보면 기존의 역사를 넘어서 새로운 사물이나 새로운 관점에서 역사를 이야기하는 시도들이 많아 보인다. 새로운 내용도 없이 억지스러운 과장이나 아전인수격 갖다 붙이기의 상업적 속셈도 많아 보이지만, 어떤 책들은 새로운 지식과 관점을 깊이있게 다루기도 한다.
예전에 도서관에서 빌려서 앞부분만 조금 읽었다가 대출 기한이 다 되어서 반납했던 '기후로 다시 읽는 세계사'라는 책도 내게는 그런 책이었다. '기후'라는 나에게는 무지한 관점에서 역사를 풀어가는데 신선하고 흥미로왔다. 근데, 책이 읽기가 편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나중에 시간이 나면 제대로 읽고 싶은 책이다.
역사를 얘기할 때, '지리'라는 관점은 '기후'라는 관점에 비하면 훨씬 편하고 익숙하다. 그런 면에서 이 책 '지리의 힘'은 덜 신기하고 덜 신선할 수도 있다. 하지만 대신 이 책은 편하고 재미있다.
내가 볼 때 이 책의 장점은 '명확성'이다. 저자는 서문에서부터 각 지역의 핵심 특징을 짚어 놓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미 많이 알려진 사실에 특징까지 짚어 준 다음에 얘기를 들어가니 이해하기가 매우 싶다. 게다가 오랜 경력의 기자 출신 답게 쉽고 명쾌하게 이야기를 풀어간다.
오랜 기사 작성 경력으로 단련된 기자 출신 작가들의 가장 큰 장점은 이해하기 쉽고 잘 정리된, 가독성 뛰어난 글을 쓴다는 점이다. 그 가독성이 때로는 미세함과 오묘함을 포기하고 거칠고 무리한 내용을 만들기도 하지만.
책은 국내에서 2016년 초판이 발간되었는데, 책의 내용을 보면 2015년 경에 쓰여진 것 같다. 책 내용 중에 '니카라과 대운하' 얘기가 나오는데, 나는 처음 들어보는 얘기였다. 미국의 영향력 아래 있는 파나마 운하를 대체하기 위해 니카라과를 가로지르는 대운하를 건설하기 위해 홍콩의 자본이 투입된다는 얘기였는데, 행간의 느낌으로는 배후에 중국 국가의 자본이 있는 것 같았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봤더니 니라카과 대운하는 건설 시작도 못한 사업이었다. 경제성이나 환경 파괴와 니카라과 현지 주민들에 대한 우려도 컸고, 해당 홍콩 자본은 그 사업과 무관하게 도산을 한 것으로 나왔다. 애초에 거품 가득한 사업이었던 것 같고, 중국의 국가적인 자본이 들어갈 사업이었다면, 자본가 한 명의 도산으로 쉽게 포기했을 것 같지는 않다.
한반도에 관한 부분을 읽을 때는 묘한 위화감이 들기도 했지만, 명확하게 잘못된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았다. 아마도 책의 저자가 서구인의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기에 그런 것 같다. 한반도에 대한 내용이 묘하게 어긋난 부분이 있다면, 다른 지역에 관한 이야기들도 세부적으로는 묘하게 어긋난 부분들이 있지 않을까?
이 책은 거칠게 단순화시킨 느낌들이 들긴 하지만 쉽고 편하고 재미있다. 중국, 미국, 유럽, 러시아, 한국,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중동, 인도, 북극 등의 다양한 지역의 지정학적 특징과 지리적 조건을 이야기한다. (근데 책을 읽으면서 지리가 문제가 아니라 종교가 문제 아닌가 하는 생각이 종종 들기도 한다. 중동의 경우에 특히 그렇다. 누구처럼 말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바보야, 문제는 종교야' 그렇지만 그냥 닥치겠다.)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이 미처 요리되지 못한 익지 않은 식재료라면, 이 책은 그 재료를 뛰어난 조리법과 맛난 양념을 사용해서 차린 맛난 밥상인 셈이다. 게다가 이 밥상은 '지리'라는 명확한 주제를 갖고 차린 밥상이다, 마치 잘 꾸며진 계절 밥상이랄까? 다른 거 신경쓰지 말고 '지리'만 음미하면서 맛있게 먹으면 된다. (참, 지리의 힘 2권도 나온 것 같다. 그 책을 당장 급하게 읽고 싶지는 않다. 언젠가는 읽게 되겠지)
그런데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미용과 성형 의술이 떠올랐다. 인간은 '지리라는 감옥'을 탈출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고, 많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 배와 비행기를 이용해서 세계의 거리를 줄이고 있고, 파나마 운하를 개설해서 태평양과 대서양을 잇기도 하고, 수로가 될 수 없는 아프리카의 강들을 수력 발전에 활용하고 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사이에 험준한 산맥을 만들거나, 인도와 중국의 정규군이 대규모로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서 진격을 하게 만드는 기술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의술도 마찬가지다. 주름을 없애고 젊은 피부를 만들고, 코를 높이고, 눈을 크게 뜨게 해주고, 날씬한 허리를 만들어 주는 현대 의술은 놀랍다. 신인 연예인이 유명해지면서 다른 사람처럼 변하는 모습은 현대 미용 의술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게 해준다.
근데, 그런 현대 의술도 여전히 못하는 것이 있다. 팔다리를 늘려주거나, 모여라 꿈동산같은 커다란 '대갈통'을 한국인들이 선망하는 조막만한 '머리'로 만들어 주는 것은 여전히 못한다. 옛날에 다리 뼈를 부러뜨려서 다리를 늘리는 기술이 뉴스에도 나오고 했는데, 부작용도 크고 비용이나 기간이나 고통도 커서 활성화 된 것 같지는 않다. 그 수술을 받은 사람이 다리 길이가 짝짝이가 되었다고 소송을 걸었던 뉴스도 기억난다. 내 짧은 생각에는 외과적 수술로는 불가하고, 유전자의 재조합으로 육체를 재생성해야 가능한 것 아닌가 싶다.
여하튼 나는 궁금하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 험준한 산맥을 건설하는 기술과 팔다리를 늘려주는 기술 중 어느 것이 먼저 생겨날까? 인도나 중국의 정규군 대군이 히말라야를 넘어서 상대방으로 진격하게 만들어 주는 기술과, 커다란 대갈통을 조막만한 머리로 바꿔주는 기술 중 어느 것이 먼저 탄생할까?
내기라도 걸면 재미있을 것 같다. 근데 내기를 걸 거라면 하나를 더 추가하고 싶다. 내 생각에 우리 인류의 현대 기술은 자연을 거스르고 있다. 레고 쌓기처럼 결국에는 무너질 기술을 무리하게 쌓아가고 있다. 기후 위기가 보여주듯이 인간 문명은 몰락을 향해 달리고 있다. 인간은 어떻게든 살아남겠지만, 문명은 결국 붕괴할 것이다.
대규모 군대가 히말라야를 넘어서게 만들어 주는 기술과 팔다리를 늘려주는 기술과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문명의 침몰, 그 중 어느 것이 먼저일지 내기를 걸고 싶다.
근데 그 내기의 끝을 내가 볼 수는 없는 걸까? 내기가 결판 나는 것이 백 년이 될 지, 천 년이 될지 몰라도 내가 살아남아 그 결과를 직접 볼 수는 없는 걸까? 내가 동박삭이나 므두셀라가 아니란 것은 확인된 사실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