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현준의 인문 건축 기행
유현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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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 베란다에 손바닥만한 작은 화분을 하나 놓았다고 치자(참, 이 책에 의하면 베란다가 아니라 '발코니'다). 거기 씨앗을 하나 심었다. 씨앗이 잘 자라기 위해서는 햇볕과 물이 필요할 터인데, 햇볕 잘 드는 남향의 거실이라면 햇볕은 걱정 없을 것 같다. 문제는 물이다. 조리개에 물을 조금 담아 조심스럽게 주어야 할 터이다. 화분의 흙이 물을 머금을 수 있도록. 근데 이런, 양동이로 물을 들이 부었네?

이 책을 읽는 기분이 그러하다. 목이 말라서 물을 청하니, 우물가의 규수는 바가지에 버들잎을 띄워서 물을 주는 게 아니라, 머리 위에서 물을 들이 부었다. 내가 원한 건 등목이 아니라 한 모금의 식수일 뿐인데. 온 몸이 젖었지만 갈증은 해소가 되지 않는다. 물에 잠겼지만 목으로 들어와 갈증을 해소시키는 물은 없다. 남은 것은 쫄딱 젖은 몸 뿐이다. 할 수 없다. 그 물이라도 핥아야지.

건축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나에게 이 책이 말하는 내용은 너무 방대하다. 쉽고 평이한 문장이지만, 많은 이야기를 담았다. 무려 30개의 건축물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독토를 위해서 쫓기듯 페이지를 넘긴다. 건축에 관한 이야기들이 눈으로 들어왔다가 하품으로 나간다. 책은 읽지만 머리 속에 남는 건 없다. 그저 나를 통과할 뿐이다. 책의 이야기는 지식이 아니라 바람이고, 나는 통풍구가 되어 버린다.

나 같은 건축의 문외한에게 책의 활자만으로는 그 입체적인 공간이 느껴지지 않는다.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현장에 가서 직접 보고 느끼거나, 아니면 촬영 영상이라도 봐야 감이 오지 않을까 싶다. 그것이 어렵다면, 오랜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씹어가면서 읽어야 할 것 같다. 근데 아쉽게도 그렇게 씹어가며 읽기에는 맛이 부족하다. 건축에 관한 이야기는 편하고 부담 없다. 불편한 건 작가의 세계관이다.

작가는 현학적이다. 건축 이외에도 많은 이야기를 한다. 비교하고, 비유를 들고, 맥락을 설명한다. 작가는 많은 지식을 자랑하고 싶어하는 것 같지만, 행간에서 느껴지는 작가의 역사 의식이나 사회 의식은 거칠고 빈약하다. 책을 씹고 음미하기 보다는 건축에 관한 이야기만 후다닥 읽고 빨리 지나가고 싶어진다.

책을 읽으면서 제목에 나오는 '인문학'이란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인문학이란 무엇일까? 왜 우리 사회는 그렇게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할까? 내 생각에는 인문학은 도구이다. 인문학적 지식은 세상을 알아보고, 삶을 통찰하고, 스스로를 성찰하기 위한 도구이다.

80년대 대기업 공채 필기 시험에서는 '영어'와 '상식'이 거의 필수 과목이나 마찬가지였다. 대졸 취업 준비생들은 영어 공부 말고도 두꺼운 '일반 상식'책을 놓고서 공채 시험을 준비했다. 4지 선다형의 객관식 시험. 잡다한 토막 지식을 물어보는 시험이었고, 그를 위해 신문을 많이 읽는 것이 권유되던 시절이었다.

이른바 문사철, 문학과 역사와 철학을 중심으로 많은 지식을 쌓으면 그것이 저절로 인문학인 걸까? 고민과 사색과 사유와 반성과 성찰이 없는 인문학이라면, 시험을 위해 달달 외우던 일반 상식과 뭐가 다를까? 객관식 시험용 일반 상식이 아니라 주관식 시험용 일반 상식일까? 인문학은 허식과 겉치레와 유행에 불과한 것일까?

책의 중간쯤에서 작가는 말한다. "원래 하수들이 어려운 철학을 가져오고 구구절절 설명이 길다" 포스팅을 할 때 마다 주절주절 많은 말을 늘어놓는 나는 뜨금하다. 남의 얘기가 아니다. 그러나 다행히 나는 작가가 아니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늘어놓는 아마추어일 뿐이다. 나는 하수라도 괜찮다. 그래, 나는 하수다.

내가 하수임을 인정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작가에게 물어보고 싶어진다. 당신은 그렇게 자신 있는가?

책은 읽어볼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건축의 문외한이 건축이라는 낯설고 신기한 이야기를 뒤집어 쓰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의미있는 경험이다. 이물질도 좀 묻을 것 같지만 털어버리면 그만이지. 세계의 유명 건축가와 건축물과 그 철학과 맥락에 대한 얘기를 한 번 들어봤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다.

내가 어디 가서 이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가? 머리 속에 남아 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지만, 그건 나의 무지와 무식의 탓이다. 건축에 대해서 생각하는 방법을 알게 된 것이 어디인가? 건축 이야기에 쫄딱 젖어볼 수 있는 게 어디인가? 이건 그저 시작일 뿐이다. 이야기를 내 속에 담아내는 건 앞으로 나의 할 일이다.

어쩌면 이 책에서 새로운 세상의 입구를 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건축이라는 그 세상은 충분히 흥미롭고 경이로울 것이다. 이 책을 시작으로 건축에 관해 많은 지식을 쌓고 많은 것을 이해하게 되길 바란다. 앎의 즐거움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같다. 그렇지만 그것은 또 다른 시작이고, 결국은 순환의 한 고리일 뿐이다.

건축 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무량무변의 거대한 우주에 대해서도, 심지어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는 양자라는 미시 세계에 대해서조차 많은 것들을 알아가고 있다. 그런데 미안하게도 건축의 소재인 물질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

'도시의 환경은 건축 기술 뿐만 아니라 그 환경을 둘러싼 물질들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공교롭게도 이 책을 읽고 나서 손에 잡은 <물질의 세계>라는 책의 '모래' 편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제는 물질에 대해서도 알아가야 할 때일까?

아는 것은 너무나 적고, 모르는 것은 너무나 많다. 세상의 지식은 너무나 많고, 세월의 변화는 너무나 빠르다. 한 개인으로서는 평생을 쫓아간다 한들 그 꽁무니조차 쫓을 수 없을 것이다. 다행히 나는 학자가 아니다. 모르는 것에 괴로워하는 대신, 알아가는 것에 즐거워 할 일이다. 평생에 걸쳐서 앎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그저 책 몇 권 읽는 것 만으로도.

책을 계속해서 읽다 보면 맨 처음 느꼈던 서먹함과 어색함이 점점 줄어들게 된다. 책의 후반부 즈음에 가면 어느새 건축의 이야기에 적응하고 재미를 느끼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한 권의 책에서 변하는 자신을 느끼는 것은 재미있는 경험이다.

이 책의 건축 이야기에 한 번쯤은 젖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다만, 물들지는 말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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