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번 교향곡
조셉 젤리네크 지음, 김현철 옮김 / 세계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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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모짜르트 미공개 악보가 발견되었다는 뉴스가 떴다. 나처럼 10번교향곡을 집어든 사람이라면 귀가 번쩍 뜨일법한 이야기다. 사실인지, 어떻게 보관되어 왔는지, 무슨 음모는 없었는지 하고 말이다.
 
이 책은 베토벤의 미공개 교향곡 10번을 테마로 썼다. 처음에 한 여자와 남자가 차를 타고 가다가 사고가 나는데 감쪽같이 그 이야기는 삼킨 채 진행된다. 별로 매력이라곤 없는 대학교 강사가 등장하면서 베토벤의 성격이며, 숨겨져 있던 스토리들이 공개된다.
 
여러 나라를 종횡무진 무대로 삼아가며 진행되는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우선 베토벤 자체가 기이한 인물이고,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은 데다가 클래식을 테마로 삼은 추리소설이어서 더욱.
 
책에 따르면-나는 무슨 소설책을, 클래식에 대한 무식도 털어낼 겸, 정보를 얻는 심정으로 접근했는데-베토벤은 낭비를 극도로 싫어한 인물이어서 철저하게 고치고 또 고치고, 곡 하나하나에 공을 들였다고 한다. 음도 불필요한 게 들어 있을까봐 전전긍긍했다고 하니, 천재라는 그도 강박관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것이 새롭다.
 
10번교향곡이란 건, 많은 작곡가가 10번까지는 쓰지 못하고 10번을 쓰고 나면 죽는 그런 신드롬을 테마로 썼다. 그리고, 베토벤의 10번이 미완성일 적에 베토벤도 죽고 말았다는 상상속에서 풀어져나간다. 탄탄하게 뒷받침된 사료와 풍부한 상상속에서 경계가 불투명해지고, 머릿속에 음악이 들리는 것처럼 음악을 글로 그려준다.
 
숫자를 이용한 풀이, 악보속에 숨기는 비밀, 프리메이슨…두꺼운 소설이 손에 잡히자 마자 끝까지 결말을 향해 고삐풀린 망아지처럼 달려나가고, 별로 의심가는 주인공이 없는(대부분 추리소설은 이놈 저놈이 다 의심이 가는데 반해) 상태로 갑작스레 소설의 앞머리와 뒷머리가 이어지면서 짠하고 결말이 난다.
 
가운데 배수구에 물이 쫙 빨려들어가는데 음표들이 물을 따라 둥둥 빨려들어가는 것처럼, 그런 스피드와 흥미로 읽었다. 음악하는 사람들은 천재인가보다. 그많은 교향악단의 악보를 따로 그리고, 음악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쓰다니, 그것도 노랫말도 없이(나중에는 합창이 생기지만) 기악만으로 심상을 표현하다니 말이다. 나는 그냥 기분따라 음악을 듣는다. 조용할 때 듣는 음악, 우울할 때 듣는 음악 이렇게..
 
소설이기 전에, 방대한 음악 기초 입문서처럼 그렇게 도움이 되는 책읽기였다. 새삼 음악을 틀어놓고 듣자니, 사람이 이렇게나 완벽한 작업을 하다니 싶어 소름이 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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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의 거짓말
제수알도 부팔리노 지음, 이승수 옮김 / 이레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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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나는 작가라는 직업에 약간의 편견이 있다. 이 책의 저자는 교사출신이었는데, 교사가 이처럼 기발한 소설을 쓰다니 내 고정관념에는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처음 작품을 발간하고 나서부터 무르익은 그의 글솜씨는 무궁무진한 상상력과 생산성을 보였다. 사진집의 글도 담당해서 쓴 이력을 보고, 내심 무척이나 부러웠다. 재주도 지독히 많군. 이런 상상력이 대단하면서, 폭넓은 교양의 소설을 쓰고, 사진을 소개하는 촌철살인의 글도 쓰다니...

우선은 이 책을 읽으며 어리둥절했다. 제목은 그날 밤의 거짓말인데, 그렇다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건데, 누가 어디까지 거짓말하는 것이며, 서로 어떻게 물려가고 있는지 가늠할 수 없었기에. 마지막으로 치닫도록, 술술 넘어가는 책장, 그러나 쉽지 않은 문화의 기반과 그 용어들, 약간 주눅들어가며 진실을 기다렸다. 뭔가 불안하긴 했지만, 정말 놀라운 결말에 이르도록, 기막힌 거짓말을 펼쳐간다.

진실을 위한 거짓말도 거짓말일까. 거짓말만 아니면 다 진실일까. 생각해보게 한다. 감방에서 죽음을 기다리며, 피가 마르는 하룻밤 동안,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장단을 맞춰 '신념'을 이룬 그들의 꿍짝도 참 기이할 만큼 부러웠거니와, 그 작품을 가능하게 한 문화적 배경 또한 심히 부러웠다. 이야기꾼이 이정도로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사회란 도대체 어떤 문화의 힘을 가진 것일까 하고.

유럽은 하나의 나라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뉘어져 있고, 성격도 다소 다르지만, 그들의 생산품역시 시장이 유럽연합이란 폭넓은 시장이 있다. 미국또한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소설도, 황석영 선생님을 비롯해 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시장의 한계로, 좁은 바닥에서 뜨다 말지 않나 하는 아쉬움마저 겹쳐졌다.

각설하고, 이 작품이 다른 작품들이 자진해서 사퇴하게 만들었다는데, 정확히 그랬어야 하는 이유는 난 잘모르겠다. 다만, 한시적으로 유행하고 말 냄새가 아니라, 고전적 구성, 고전의 냄새를 풍기는 것만은 확실하다고 여겨졌다. 희미한 분위기에서 정확한 역사의 배경, 역사적 장소를 토대로 쓴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많은 부분 문화를 향유한 사람만 쓸 수 있는 글에 존경심을 갖었다. 한편으로는 오래진 않은 그의 죽음에 애도도 하게 되었고. 복잡한 서양의 역사를 잘 모르겠으나, 혁명과 왕정, 자신의 권리주장으로 인해 문명이 꽃피고, 문학과 철학이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진다는 것에 부러움을 느꼈다. 글쟁이의 처음부터 막장까지 휩쓸려가게 하는 글에 놀라기도 하고.

이 소설에 대해 평가를 내릴 수 없다. 다만, 저자를 이해하고 싶고, 막연하게나마 존경하게 되었다. 분명치도 않은 이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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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 시크릿, 그림자 인간 - 세계 1%만이 알고 있는 어둠의 실력자들
손관승 지음 / 해냄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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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스파이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인물이다. 이 책을 읽은 뒤로 더욱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영화에서 본 스파이는 낭만적이었지만, 지금 책장을 덮고 난 뒤, 우중충한 동서독의 회색 빛깔, 냉전의 냄새가 배어나 습기차고 음흉한 느낌이 더 강하다.

마르쿠스 울프는 얼굴없는 사나이로 통하면서, 동서독의 냉전체제에서 HVA라는 작지만 강한 정보기구를 이끌었다. 내 사람을 저쪽에 심고, 꾸준히 관리하면서, 남의 사람도 끌어오는 게 첩보일 인데, 그게 참 이상하다. 워낙은 나라를 위한다는 목표아래 행해지지만, 하다보면 나라를 위한다는 범주안에 들어간 것이 남의 사생활 수집이고, 내 나라 위하자고 남의 나라 정치가의 비서를 미남계, 미인계로 호리기도 한다. 기업과 정치가의 유착을 알아뒀다가 적당한 시기에 유포해서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기도 하고… 일반적으로는 ‘비겁하다’고 할 만한 모든 방법이 그 안에 다 있다.

한 가지 눈에 띄인 건, 기자와 스파이의 공통점이었다. 또 두 직업을 오간 사람들도 있었다. 007제임스 본드를 쓴 이언 플레밍은 모스크바에서 특종을 보도하면 로이터 통신 기자였으며, 해군 정보부대를 거쳐 영국 M16에 연결되어 있다가 다시 선데이 타임즈로 복귀한 특이한 사람이었다. 가끔 영화에서 취재원의 속을 떠보다가, 혹은 경찰처를 기웃거리다가 쓰레기통을 뒤져서 특종을 터뜨리는 기자의 모습을 보았는데, 천상 정보가 생명인 기자는 스파이와 친척간인 모양이다.

처음 이 책에 흥미를 가진 건, 역시나 정보 없이는 ‘밥먹고 살기’ 힘들다는 판단에서였다. 첩보방법이 있다면, 나도 정보가 생명인 이 시대를 잘 살아나갈 수 있겠다는 생각. 결론적으로, 이 책은 스파이 교과서가 아니다. 사람을 포섭하는데 능했던 마르쿠스 볼프는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스파이 조직을 키우고, 점조직으로 운영하면서 서로 모르게 하여 조직과 사람들을 보호했다. 한 명 한 명 공들여 관리했으며 내 사람이라는 확신을 심어주고, 그들의 불안감을 해결해주는 데 힘썼던, 기본기가 강했던 인물이다. 배신에 능하거나 줄타기를 잘하는, 뭐 그런 캐릭터가 아니다.

정보탐색이란 것도 그렇다. 고급정보는 고급 인사의 근처에 있는 인물에게서 나온다. 오랜 시간을 들여 그 사람을 포섭한다. 이중삼중으로 스파이의 신분이 노출되지 않게 단도리를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그는 정보원들의 자료를 전적으로 신뢰하기 보다, 신문, 논문에서 고급정보를 얻었다.

개개인에 의해 필터링되기도 하는 까닭도 있고, 거짓정보를 상대가 유포시키는 수도 있기에. 그러면서도 그는 컴퓨터를 믿지 않았다. 휴민트, 사람에 의한 정보, 사람에 의한 분석을 신뢰했다. 이중 삼중 스파이가 있기에 주의해야 하긴 했지만 말이다.

유태인이면서 독일출생이고, 러시아에서 살았으며, 항공우주 교육을 받고 우주인의 꿈을 키우던 그는, 공산당의 명령으로 기자생활을 하다가, 첩보교육을 받으면서 동독에 파견되어 첩보기구를 결성 운영하는 일을 했다. 소박하고, 러시아 요리며 ‘미샤’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는 걸 좋아한, 훤칠한 키의 매력적인 남자. 항상 정체를 숨겨야했고, 동료의 배신에 가슴아파했으며, 조심조심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살았던 생애.

서로서로 얼마나 정보전을 벌이는지, 정보의 힘이란 것이 얼마나 대단한지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다. 한편, 정보는 해석하기 전까지는 정보가 아니라는 것. 때에 맞는 정보가 가치가 있고 귀중하다는 것. 뻔하지만 스파이들이 인생과 바꾼 그 이야기가 귓전을 울린다. “경험상 어떤 전자 기술 수단도 인간의 훌륭한 정보능력과 판단 능력을 대체할 수는 없다. 전자정보의 문제점은 근본적으로 판단이 빠졌다는 점이다.” 판단은 곧 생각, 생각하는 힘이 있어야 스파이도 해먹을 수 있다. 머리를 쓰는 데에 너무나 게으른 내게는 또 다른 자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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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서
한호택 지음 / 달과소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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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약하고, 하늘하늘한 비단옷에 뜻모를 미소를 짓고 있는 반가사유상의 모습이 이 책을 읽으면 내내 떠오른다.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절절한 마음이 서로 어긋나고, 외떨어지고, 맘 깊숙이 숨긴 채 똑똑 떨어져 고인 아스라한 사랑.


 정치를 버리고 사랑을 선택한 무왕. 나라를 버리고 남자를 선택한 선화 공주.
아버지의 여자가 되어버린 그 ‘한 여인’을 그리며 타국에서 돌에 그 얼굴을 새기며 인생을 마감한 아좌태자. 모든 것을 가졌지만, 사랑하는 이의 마음을 얻지 못해 전전긍긍, 불에 타죽어도 그이의 사랑이 좋았던 해진왕비. 여자를 돌처럼 여겼던 위덕왕, 단 하룻밤에 그에게 아들을 낳았던 수진. 연서란 책의 제목은 여기서 나온 듯하다.

 백제의 이미지는 나에게 상당히 세련되고 아름다운 여인네의 느낌이었다. 고구려가 남성적이고 신라가 풋풋한 청년의 이미지라면. 어쩌면 사랑이야기가 여기 백제에서 나와준 것이 적합하달까. 예술을 사랑한 그들은 많은 유적을 남겼고, 일본이 국보라고 부르던 그 유물이, 백제 장인의 솜씨라는 사실이 밝혀져 당혹해하던 뉴스도 기억이 난다. 책을 읽노라니 백제가 일본에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는지 상상이 된다.

난 소설가를 뻥쟁이라고 생각한다. 없는 존재마저 있게 만드는 기막힌 이야기꾼, 책에 나온 활자의 설득력으로 말미암아 밤을 새며 그 사실이 진짜인지 뒤지게 만드는 유혹자. 나는 항상 결과를 아는 ‘역사소설’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뚜껑을 연다. 나는 결론을 안다, 당신은 어떻게 결론을 다 알고 있는 우리에게 반전을 주고, 기대감을 계속 이끌어갈 것인가 하고 작가와 경쟁하기도 한다. 
 
다행히도, 실망시키지 않았다. ‘전형적으로’ 매력이 넘치는 주인공이, 출생의 비밀을 안고 어려운 형편에 태어나 기승전결로 문제를 풀이해나가며 신분을 알게 되고, 사랑을 얻는 과정은 옛이야기체 그대로이다. 그런데, 스피드가 장난이 아니다. 시나리오의 형식처럼 그림을 그려보여주면서도, 빠르게 전개된다.  

빨려들어가듯 책을 읽고, 정말일까 궁금해져서 자료를 찾아보느라 또 밤을 새워야했고, 아스카 문화를 뒤적였으며, 백제의 역사도 추적해보게 만들었다. 나는 잘 쓰여진 팩션의 점수는 여기서 판가름난다고 생각한다. 다 알고 있는 얘기를 얼마나 재밌게 엮을 것인가, 그리고 역사 속으로 얼마나 끌어당겨줄 것인가.


무왕과 선화공주는 워낙 유명한 캐릭터이고, 내게 여기서 가장 와닿는 인물을 꼽으라면 지명을 뽑겠다. 지광스님 밑에서 주인공이 수련을 쌓을 때 함께 하던 캐릭터인데, 마치 그런 인물이 옆에서 살아 숨쉬듯 선명하게 눈에 밟힌다. 정말 왜나라로 떠나가는 주인공을 보며, 나무 밑에서 눈물을 글썽이며 무탈을 빌었을 것 같은, 땀냄새 풍겨가며 함께 수련하고, 소박하고 선한 눈망울로 일생을 자분자분 살아갔을 것 같은 모양새다. 

정염에 휩싸여 몸을 부르르 떠는 해진왕비며, 소탈하게 한 여인만 바라고 살았던 사람좋은 아좌태좌도 캐릭터가 생생하게 살아 있다. 누가 모델이었을지 한번쯤은 물어보고 싶은 인물이다.

무왕은 백제 의자왕의 아버지였다는 학설이 있다. 의자왕이라면 주지육림에 빠져 나라를 상큼하게 말아먹었던 화제의 그 인물. 당시만 해도 삼국으로 나라는 나뉘어 있었지만 동북아를 문화로 제패할 만한 힘이 있었음에도 어느 날 눈 떠보니 일본보다 한참 뒤떨어져 버린 현실이 더 처절하게 서글프다. 우리에게 이런 문화의 힘과 인물들이 있었으니 숨겨진 저력으로 한번쯤 다시 뒤집을 날도 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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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추악한 배신자들 - 조선을 혼란으로 몰아넣은 13인
임채영 지음 / KD Books(케이디북스)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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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에 의해 나라가 좌지우지되는 왕조국가 조선. 왕실의 적통성이 떨어질 때 신하들의 혁명으로 새로운 왕이 들어앉고, 약한 왕을 허수아비로 내세워 마음껏 주무르고, 왕비도 수렴첨정이란 이름으로 쥐락펴락하던 시대.
 
늘 역사극에서 조명받는 태조, 세종, 정조. 안 좋은 쪽으로 주목받는 연산군, 광해군. 보통 이 정도가 기억에 남는다. 역성혁명으로 고려를 뒤엎고 세워진 조선이라는 나라는 붕당정치의 끊임없는 정치의 소용돌이에서 죽고 죽이는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동시대 일본과 중국도 형편은 다르지 않았다. 나라가 이합집산하고, 막부별로 세력 다툼을 했다. 그러나, 이씨조선이라는 기치와 폐쇄적인 자세로 인해, 동북아에서 국력이 비슷하게 출발하여 뒤떨어지게 막을 내리는 역사로 줄달음쳤다.
 
이 책을 통해 소개된,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개인의 이익을 중요시했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누구나 본능적으로 이렇게 한다. 충신이라 하여 왕 한 명에게 충심을 다한다고 하나, 왕이 무지하여 소인배에게 속는 수준이면 충심은 덧없다. 중앙집권적으로 보이지만, 굉장히 허약했던 왕권과 개개인의 공정한 경쟁이 허락되지 않던, 인맥위주의 정치. 문호를 개방하는 데에 치명적으로 늦어버린 시대착오. 여기에 영리하면서도 개인의 이익을 국익으로 포장할 줄 알던 개인들의 치밀한 싸움이 야합했다.
 
서로를 견제할 수 있는 환경만 되었던들, 이들의 이름이 여기에 추악한 배신자로 기록되지는 않았을 터. 시스템의 부재라는 데 통감한다. 물론 한 편의 이야기만 듣고서 이들 모두를 배신자로 낙인 찍기는 어려운 면이 있다. 정조의 입장에서 보면 베겟머리 송사로 사도세자를 제거한 정순왕후가 그리도 미운 사람이지만, 그녀도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납작 엎드려 때를 기다렸던, 여인네였다.
 
전국시대의 일본을 보면 사람 알기를 마소보다 못하게 알고, 인질삼아 결혼하고, 협정이 깨질 때 이혼하며 백성은 성에 속한 하나의 소유물로 안다. 도덕이 상실된 모습도 보인다. 정치의 어두운면, 서로 나뉘어 파당을 짓고 다투는 것은 세계 공통이다. 다만, 누군가 수습할 만한 강한 통치와 함께, 다른 인재를 등용할 너른 가슴을 가진다면 나라가 발전할 수 있다는 점이 차이다.
 
책을 읽으며 왜 이렇게 밖에 할 수 없었을까 의문이 많이 들었다. 그러면서, 비겁하게 ‘어차피 망할 나라, 일본 손에 넘어갈 나라이니 피해를 최소화하자’고 말했던 이완용의 말이, 정면승부를 피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뼈저리게 깨닫게 해줬다. 최후 한 사람이 남더라도 원칙은 원칙이며, 외교상에도 요지가 있다. 외교권과 군사권은 넘겨주어서는 국력의 회복이 어려워진다. 차라리 돈을 주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학자로서, 정치가로서 앞서간 안목없이, 망망대해의 낙엽처럼 외국의 침범앞에 조무라기가 되어버린 조상들의 이야기에 허망해진다. 직지심경, 한글, 해시계의 나라가 정치의 실수로 이렇게 역사 속에 뒤쳐진다면 앞서간 조상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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