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 시크릿, 그림자 인간 - 세계 1%만이 알고 있는 어둠의 실력자들
손관승 지음 / 해냄 / 2008년 7월
평점 :
절판


스파이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인물이다. 이 책을 읽은 뒤로 더욱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영화에서 본 스파이는 낭만적이었지만, 지금 책장을 덮고 난 뒤, 우중충한 동서독의 회색 빛깔, 냉전의 냄새가 배어나 습기차고 음흉한 느낌이 더 강하다.

마르쿠스 울프는 얼굴없는 사나이로 통하면서, 동서독의 냉전체제에서 HVA라는 작지만 강한 정보기구를 이끌었다. 내 사람을 저쪽에 심고, 꾸준히 관리하면서, 남의 사람도 끌어오는 게 첩보일 인데, 그게 참 이상하다. 워낙은 나라를 위한다는 목표아래 행해지지만, 하다보면 나라를 위한다는 범주안에 들어간 것이 남의 사생활 수집이고, 내 나라 위하자고 남의 나라 정치가의 비서를 미남계, 미인계로 호리기도 한다. 기업과 정치가의 유착을 알아뒀다가 적당한 시기에 유포해서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기도 하고… 일반적으로는 ‘비겁하다’고 할 만한 모든 방법이 그 안에 다 있다.

한 가지 눈에 띄인 건, 기자와 스파이의 공통점이었다. 또 두 직업을 오간 사람들도 있었다. 007제임스 본드를 쓴 이언 플레밍은 모스크바에서 특종을 보도하면 로이터 통신 기자였으며, 해군 정보부대를 거쳐 영국 M16에 연결되어 있다가 다시 선데이 타임즈로 복귀한 특이한 사람이었다. 가끔 영화에서 취재원의 속을 떠보다가, 혹은 경찰처를 기웃거리다가 쓰레기통을 뒤져서 특종을 터뜨리는 기자의 모습을 보았는데, 천상 정보가 생명인 기자는 스파이와 친척간인 모양이다.

처음 이 책에 흥미를 가진 건, 역시나 정보 없이는 ‘밥먹고 살기’ 힘들다는 판단에서였다. 첩보방법이 있다면, 나도 정보가 생명인 이 시대를 잘 살아나갈 수 있겠다는 생각. 결론적으로, 이 책은 스파이 교과서가 아니다. 사람을 포섭하는데 능했던 마르쿠스 볼프는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스파이 조직을 키우고, 점조직으로 운영하면서 서로 모르게 하여 조직과 사람들을 보호했다. 한 명 한 명 공들여 관리했으며 내 사람이라는 확신을 심어주고, 그들의 불안감을 해결해주는 데 힘썼던, 기본기가 강했던 인물이다. 배신에 능하거나 줄타기를 잘하는, 뭐 그런 캐릭터가 아니다.

정보탐색이란 것도 그렇다. 고급정보는 고급 인사의 근처에 있는 인물에게서 나온다. 오랜 시간을 들여 그 사람을 포섭한다. 이중삼중으로 스파이의 신분이 노출되지 않게 단도리를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그는 정보원들의 자료를 전적으로 신뢰하기 보다, 신문, 논문에서 고급정보를 얻었다.

개개인에 의해 필터링되기도 하는 까닭도 있고, 거짓정보를 상대가 유포시키는 수도 있기에. 그러면서도 그는 컴퓨터를 믿지 않았다. 휴민트, 사람에 의한 정보, 사람에 의한 분석을 신뢰했다. 이중 삼중 스파이가 있기에 주의해야 하긴 했지만 말이다.

유태인이면서 독일출생이고, 러시아에서 살았으며, 항공우주 교육을 받고 우주인의 꿈을 키우던 그는, 공산당의 명령으로 기자생활을 하다가, 첩보교육을 받으면서 동독에 파견되어 첩보기구를 결성 운영하는 일을 했다. 소박하고, 러시아 요리며 ‘미샤’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는 걸 좋아한, 훤칠한 키의 매력적인 남자. 항상 정체를 숨겨야했고, 동료의 배신에 가슴아파했으며, 조심조심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살았던 생애.

서로서로 얼마나 정보전을 벌이는지, 정보의 힘이란 것이 얼마나 대단한지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다. 한편, 정보는 해석하기 전까지는 정보가 아니라는 것. 때에 맞는 정보가 가치가 있고 귀중하다는 것. 뻔하지만 스파이들이 인생과 바꾼 그 이야기가 귓전을 울린다. “경험상 어떤 전자 기술 수단도 인간의 훌륭한 정보능력과 판단 능력을 대체할 수는 없다. 전자정보의 문제점은 근본적으로 판단이 빠졌다는 점이다.” 판단은 곧 생각, 생각하는 힘이 있어야 스파이도 해먹을 수 있다. 머리를 쓰는 데에 너무나 게으른 내게는 또 다른 자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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