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서
한호택 지음 / 달과소 / 2008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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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약하고, 하늘하늘한 비단옷에 뜻모를 미소를 짓고 있는 반가사유상의 모습이 이 책을 읽으면 내내 떠오른다.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절절한 마음이 서로 어긋나고, 외떨어지고, 맘 깊숙이 숨긴 채 똑똑 떨어져 고인 아스라한 사랑.


 정치를 버리고 사랑을 선택한 무왕. 나라를 버리고 남자를 선택한 선화 공주.
아버지의 여자가 되어버린 그 ‘한 여인’을 그리며 타국에서 돌에 그 얼굴을 새기며 인생을 마감한 아좌태자. 모든 것을 가졌지만, 사랑하는 이의 마음을 얻지 못해 전전긍긍, 불에 타죽어도 그이의 사랑이 좋았던 해진왕비. 여자를 돌처럼 여겼던 위덕왕, 단 하룻밤에 그에게 아들을 낳았던 수진. 연서란 책의 제목은 여기서 나온 듯하다.

 백제의 이미지는 나에게 상당히 세련되고 아름다운 여인네의 느낌이었다. 고구려가 남성적이고 신라가 풋풋한 청년의 이미지라면. 어쩌면 사랑이야기가 여기 백제에서 나와준 것이 적합하달까. 예술을 사랑한 그들은 많은 유적을 남겼고, 일본이 국보라고 부르던 그 유물이, 백제 장인의 솜씨라는 사실이 밝혀져 당혹해하던 뉴스도 기억이 난다. 책을 읽노라니 백제가 일본에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는지 상상이 된다.

난 소설가를 뻥쟁이라고 생각한다. 없는 존재마저 있게 만드는 기막힌 이야기꾼, 책에 나온 활자의 설득력으로 말미암아 밤을 새며 그 사실이 진짜인지 뒤지게 만드는 유혹자. 나는 항상 결과를 아는 ‘역사소설’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뚜껑을 연다. 나는 결론을 안다, 당신은 어떻게 결론을 다 알고 있는 우리에게 반전을 주고, 기대감을 계속 이끌어갈 것인가 하고 작가와 경쟁하기도 한다. 
 
다행히도, 실망시키지 않았다. ‘전형적으로’ 매력이 넘치는 주인공이, 출생의 비밀을 안고 어려운 형편에 태어나 기승전결로 문제를 풀이해나가며 신분을 알게 되고, 사랑을 얻는 과정은 옛이야기체 그대로이다. 그런데, 스피드가 장난이 아니다. 시나리오의 형식처럼 그림을 그려보여주면서도, 빠르게 전개된다.  

빨려들어가듯 책을 읽고, 정말일까 궁금해져서 자료를 찾아보느라 또 밤을 새워야했고, 아스카 문화를 뒤적였으며, 백제의 역사도 추적해보게 만들었다. 나는 잘 쓰여진 팩션의 점수는 여기서 판가름난다고 생각한다. 다 알고 있는 얘기를 얼마나 재밌게 엮을 것인가, 그리고 역사 속으로 얼마나 끌어당겨줄 것인가.


무왕과 선화공주는 워낙 유명한 캐릭터이고, 내게 여기서 가장 와닿는 인물을 꼽으라면 지명을 뽑겠다. 지광스님 밑에서 주인공이 수련을 쌓을 때 함께 하던 캐릭터인데, 마치 그런 인물이 옆에서 살아 숨쉬듯 선명하게 눈에 밟힌다. 정말 왜나라로 떠나가는 주인공을 보며, 나무 밑에서 눈물을 글썽이며 무탈을 빌었을 것 같은, 땀냄새 풍겨가며 함께 수련하고, 소박하고 선한 눈망울로 일생을 자분자분 살아갔을 것 같은 모양새다. 

정염에 휩싸여 몸을 부르르 떠는 해진왕비며, 소탈하게 한 여인만 바라고 살았던 사람좋은 아좌태좌도 캐릭터가 생생하게 살아 있다. 누가 모델이었을지 한번쯤은 물어보고 싶은 인물이다.

무왕은 백제 의자왕의 아버지였다는 학설이 있다. 의자왕이라면 주지육림에 빠져 나라를 상큼하게 말아먹었던 화제의 그 인물. 당시만 해도 삼국으로 나라는 나뉘어 있었지만 동북아를 문화로 제패할 만한 힘이 있었음에도 어느 날 눈 떠보니 일본보다 한참 뒤떨어져 버린 현실이 더 처절하게 서글프다. 우리에게 이런 문화의 힘과 인물들이 있었으니 숨겨진 저력으로 한번쯤 다시 뒤집을 날도 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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