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1년만 쉬겠습니다 - 격무에 시달린 저승사자의 안식년 일기
브라이언 리아 지음, 전지운 옮김 / 책밥상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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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느 날 병가나 휴가 한 번 쓰지 않고 일한 저승사자 '죽음'에게 인사부에서 1년의 휴가를 명령한다. 한 번도 쉬어본 적이 없는 '죽음'은 난감하다. 어디 가지? 뭘 하지?... 잠이 오질 않는다. 많은 시간이 생기자 감당이 되질 않아, 일기를 써 보기로 하고 할 일의 목록을 만들어본다.

<딱 1년만 쉬겠습니다>는 저승사자 '죽음'의 1년 동안의 안식년을 기록한 그림책이다. 쉼이 낯선 자의 쉼의 기록이다. '삶'을 살아본 적이 없는, 죽어가는 것에만 집중하며 살아온 '죽음'의 삶에 관한 책이다.


저승사자 '죽음'이 앞으로 1년 동안 무얼 할까? 책 읽기를 잠시 멈추고 상상해 보았다. 많은 할 일이 떠올랐다. 퇴직 후 1년 동안 쉬어봤기 때문이다. 백수 생활 일주일이 지나면 스케줄이 꽉 차 과로사한다는 말이 있다. 지난 1년 동안 실감했던 말이다.

하지만 직장이 내 인생의 전부인 양 한창 일하던 삼사 십 대의 나에게 1년의 안식년이 주어졌다면? 저승사자 '죽음'처럼 안절부절못하며 불안해하지 않았을까?

'죽음'도 쉰 지 한 달 반 만에 습관적으로 사무실 일을 확인해 본다. '죽음' 없이도 회사는 잘 돌아갔다. '나' 없이도 회사는 잘 돌아간다. 그러지 않길 바라는 건 내 욕심이요 쓸데없는 희망 사항이다. 실제로 퇴직한 후 내가 다니던 회사는 잘 돌아갔다. 그들은 나를 잊어도 벌써 잊었음이 분명하다. (이번에 부친상을 당하면서 확인했다.)


뭘 하며 휴가를 보낼지 난감해하던 저승사자 '죽음'은 1년 동안 과연 무얼 했을까?
우선 생각들을 모으기 위해 일기를 썼다. 사람들을 사귀어보고, 동물 다큐멘터리를 밤새워 보고, 놀이동산에 놀러 가 게임을 잘해 금붕어를 상으로 받았다. 네 컷 사진도 찍고, 데이트도 하고, 가만히 누워 나뭇잎이 바삭거리는 소리도 듣고, 스노볼을 모으기도 하고, 해변에서 시간도 보내고, 여행도 하고... 1년의 휴가를 마칠 때쯤에는 삶의 의미를 깨닫기까지 한다.

부지런히 일하는 '근로勤勞'가 세상의 최고 선善이라고 말하는 자들을 멀리하고 시간을 자신에게 써야 한다.

형제들에 의해 애굽으로 팔려간 요셉은 애굽의 총리로 정착해 안정된 삶을 살아가던 어느 날, 식량을 구하기 위해 자신 앞에 무릎 꿇은 형제들을 보고 하나님이 준비한 요셉 자신의 미션을 깨닫는다.

내 삶의 미션이 회사 일에 파묻혀 일하는 것은 분명 아닐 터이다. 퇴직 후에야 알았다. 알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는 것보다 나으니 다행이다. '지금 삶이 제대로 된 삶인가'하는 의심이 든다면 죽어가는 삶이다. 제대로 된 삶이 아니니 말이다. 삶의 의미, 내 삶의 미션을 일보다 우선순위로 두어야 한다.


당신의 (혹시 모를) 안식년 계획은?
생각나지 않는다면 일상에서 과감히 탈출해, 저승사자 '죽음'처럼 적어보자.
그리고 잊지 말자. 지금 내가 겪는 나의 시간을 먼저 살아간 사람들이 하는 충고를...
"적게 일해라."

'"아버지, 만약 과거로 간다면 서른 살의 아 버지에게 어떤 충고를 하시겠어요?" 아버지는 주저 없이 단 두 마디를 하셨다. "적게 일해라." - 저자의 서문 '쉬는 걸 불안해하는 이들에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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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샵
피넬로피 피츠제럴드 지음, 정회성 옮김 / 북포레스트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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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플로렌스 그린은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밤을 지새우는 날이 많았다. 굴 창고가 딸린 바닷가의 낡은 건물 올드하우스를 사들여 하드버러 최초로 서점을 열어야 할지 말지 고민한 탓이었다. (p. 7, 첫 문장)'

전장에서 남편을 잃은 중년의 플로렌스는 자식도 없고 재산도 없다. 정착하려 하는 작은 바닷가 마을 하드버러는 남편과 플로렌스의 추억이 깃든 곳이다. 플로렌스는 이곳에서 서점을 열려고 한다. 대출을 받아 오랫동안 방치된 올드하우스 꾸미고 책들을 들여놓는다.

이 계획이 알려지자 마을의 최고 권력자 가맛 부인은 올드하우스에 문화센터를 세운다는 핑계로 다른 마을에 서점을 열라고 압박하며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 방해하기 시작한다. 마을 사람들도 가맛 부인의 편에 선다.

큰 저택에 틀어박혀 사는 명문가의 브런디시는 플로렌스와 서점을 지지한다. 죽음 앞두고 가맛 부인을 찾아가 플로렌스를 내버려 두라고 부탁하기도 한다. 가맛 부인의 그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지만...


피넬로피 피츠제럴드는 예순한 살인 1977년에 늦깎이 소설가로 데뷔했다. 첫 작품 <황금 아이 Gold Child>는 주목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그럼에도 실망하지 않고 이듬해인 1978년 <북샵>을 내놓았고, 다음 해 1979년 <오프쇼어 Offshore>로 멘부커상을 수상하면서 마침내 소설가로 인정받았다.

'옮긴이의 말'에 의하면 피츠제럴드는 소외된 존재들을 자신의 소설에 등장시켰다.
'피츠제럴드의 소설에 나오는 인물 대부분은 기존의 사회 질서에 녹아들지 못한 채 방황하는 사람이거나 꿈만 좇다가 현실의 벽에 부딪혀 신음하는 예술가이거나 부모가 없는 가난한 아이 등 소외된 존재들이다. (p. 252)'


<북샵>의 플로렌스 역시 사회적 약자다. 남편도, 자식도, 재산도, 인맥도 없다. 하지만 용기가 있다. 플로렌스의 유일한 지지자 브런디시도 이 점을 칭찬한다.

'"제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 중에 무얼 존경하는지 말씀드리지요. 신이나 동물도 가지고 있겠지만, 저는 무엇보다 인간이 지닌 미덕, 굳이 미덕이라고 부를 필요도 없겠으나 아무튼 지고의 가치를 높게 평가합니다. 그것은 바로 용기이지요. 그린 부인, 댁은 용기가 아주 대단한 사람입니다." (p. 165)'

플로렌스는 책을 통해 삶의 희망을 찾고자 하지만, 먹고살기 힘든 어촌 마을 사람들은 '책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라고 여긴다. 마을 사람들의 모습에서 얼핏 우리들이 보인다. 플로렌스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자신을 훼방하는 이들과 가맛 부인에 맞서 꿋꿋하게 서점을 운영하자 점점 마을 사람들이 하나 둘 서점을 찾게 되고 책에서 위로와 공감을 얻는다.


'플로렌스는 인간 세상은 절멸시키는 자와 절멸당하는 자로 나뉘어 있고, 언제나 절멸시키는 자가 우세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사실을 부인함으로써 자신을 위로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아무리 의지가 강해도 안 되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었다. (p. 63)'

우리도 부침을 겪으며 삶을 살아간다. 훼방꾼을 만나기도 하고 내 편을 만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세상도 소설 속처럼 '절멸시키는 자'가 우세한듯하다. 플로렌스처럼 용기를 내보지만 플로렌스가 결국 서점을 닫듯이 우리도 힘이 부친다.

하지만 플로렌스가 힘이 들 때 바닷가를 찾아가고 책에서 위로를 받듯, 우리도 위로받을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플로렌스는 포구에서 상공을 나는 왜가리 한 마리를 보았다. 왜가리는 힘차게 날갯짓하면서 부리에 문 장어를 삼키려고 애썼다. 하지만 장어는 장어대로 왜가리 부리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쳤다. (p. 7)'
그리고 '절멸시키려는 자'의 부리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쳐야 한다. 희망을 놓지 말고. 그렇게 사는 게 인생이다.
잔잔한 울림이 담긴 <북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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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첫 미술사 수업 - 평등한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관점을 배우다
강은주 지음 / 이봄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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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여성 누드 그림이 많을까?
'누드는 단지 옷을 입지 않은 상태를 의미하는 나체 naked와 달리 인간의 벗은 몸을 그린 이미지를 말합니다. 따라서 누군가에게 보이는 대상화된 신체 이미지입니다. (p. 96)'

누드화는 남성에게 소비되는 작품으로 남성들의 성적이고 탐미적인 대상으로 제작됐다. 누드 미술에도 성의 권력관계가 다양한 방식으로 작동했다. 여성 신체의 아름다움은 남성들의 시선에 맞춰졌고 우리 모두는 이에 동조해왔다.

미술가들은 오랫동안 미술에서 섹슈얼리티를 주제로 다뤄왔고, 그 주체는 남성이었다. 여성의 눈으로 바라보는 섹슈얼리티는 그림에 없었다. '그 이유가 뭘까?' <우리의 첫 미술사 수업>은 미술의 역사에서 여성 미술가의 위치가 어떠했는지, 미술에서 여성 이미지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이 두 가지 흐름을 살펴보며 답을 찾아나간다.


<우리의 첫 미술사 수업>은 이화여대에서 '인생수업'이라 불리는 강은주의 '여성과 예술' 강의를 풀어쓴 글로, 미술사를 젠더 이데올로기의 관점으로 설명한다.

'정리하면, 남녀를 분리하고(성차별), 남녀를 상하 관계로 설정하여(성 위계), 불평등한 구조(성 불평등)를 합리화하는 모든 사고 체계를 젠더 이데올로기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젠더 이데올로기는 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강화함으로써 여성들의 사회적 역할을 축소하고 위치를 낮추는 데 일조해왔습니다. (p. 49)'

앞서 누드화에서 이야기했듯 미술은 여성의 신체를 남성들의 탐미적 대상으로 삼았고, 부드러운 특성으로 여성성을 규정하여 저항하는 여성은 야만적인 존재로 그림에 담았다.

그림 속 성모 마리아는 어머니라는 역할을 강조하며 성스럽다 못해 신적으로 묘사하면서 여성의 성 역할을 가정으로, 수동적인 모성애를 가진 양육자로 여성 존재를 제한해 공적, 사회적 활동에 참여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여성의 사회 진출에 대한 남성의 불안과 거부감은 상당했다. 당시 여성의 성 역할과 여성에게 허용된 교사, 가정부와 같은 직업의 범위를 벗어나 사회에 진출한 여성을 타락한 여성으로 이미지화했다. 이브를 원죄의 기원으로 삼았고, 적장인 아시리아 장군의 목을 잘라 유대 민족을 구한 민족 영웅 유딧마저도 전형적인 팜므파탈로 그림에 묘사하는 등 여성의 부정적 이미지를 강화했다.


그림을 감상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이 책에서 말하는 페미니즘 방법론으로 미술 보기는 낯설기만 하다. 익숙하지 않아서이다. 강은주의 <우리의 첫 미술사 수업>은 새로운 미술사 보기 방법을 알려줌으로써 우리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틀 하나를 추가해 준다.

미술에서조차 여성은 소외되어 왔고 주체가 되지 못했다. 미술사 수업으로 평등한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관점을 하나 더 얻었다. 남녀라는 구분이 아닌 인간이란 인식을 갖고 공존하는 관점을 배웠던 수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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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토 셰익스피어 - 인간관계가 어려울 때 꺼내 읽는 삶의 지혜 한 학기 한 권 읽기 1
한기정 지음 / 그린비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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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서른일곱 개 희곡에 1,222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제임스 조이스는 하느님 다음으로 많은 인물을 창조한 사람은 셰익스피어라는 말을 남겼다.

지성을 갖췄지만 우유부단의 대명사가 돼버린 햄릿, 불안과 공포에 스스로 무너져버린 맥베스, 열네 살의 어린 나이에 맹목적이고 불꽃같은 사랑을 한 스윗 소로우의 상징 줄리엣, 피도 눈물도 없는 악당이라 하기엔 좀 억울한 샤일록과 천하에 불효 자식인 샤일록의 딸 제시카,

권위에 가려 단순한 진실조차 보지 못한 리어 왕 그리고 버림받았음에도 끝까지 아버지를 사랑한 리어 왕의 셋째 딸 코델리아, 젊은 왕자 핼의 허물없는 친구인 자유로움과 뻔뻔함을 갖춘 놈팡이 노인 폴스타프, 성공적인 리더의 자질을 발휘한 핼 왕자 헨리 5세, 의심 많고 마음이 약해 사랑하는 데스데모나를 죽인 오셀로, 악의 화신 이아고...


또한 셰익스피어는 자신의 창조한 수많은 캐릭터에 인간의 모든 문제를 투영했다.

'인생의 중요한 문제들을 셰익스피어처럼 광범위하면서도 깊이 있게 다룬 작가는 많지 않습니다. 선과 악, 사랑, 복수, 야망, 질투, 우정, 명예, 권력, 위선, 배신, 기만, 양심, 고통, 정의, 성공 그리고 실패 등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인간의 문제를 다루며, 개성이 넘치면서도 동시에 보편적인 캐릭터를 통해 절묘한 언어의 배합으로 얘기합니다. (p. 6)'

이런 이유로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통해 인간과 세상을 바라보기와 인간관계에서 문제에 직면했을 때 셰익스피어를 멘토로 삼아 문제 해결의 지혜를 구하는 일이 가능하다.


셰익스피어 경력의 시작은 배우였다는 설이 있다. 배우로써 평가는 좋지 않아 대사가 적은 역할을 했다는 증거도 있는 모양이다.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 책과 저작권의 날'은 셰익스피어가 죽은 날에서 유래했다. 셰익스피어는 아내에게 두 번째로 좋은 침대를 물려주었고 대부분의 유산은 딸에게 주었다. 가장 좋은 침대도 아니고... 왜 그랬을까?

옥스퍼드 영어사전의 단어 중 1,700개 정도는 셰익스피어가 만들어 낸 단어라고 한다. 당시 지식인들이 20,000개 정도의 단어를 사용했다고 하니 영어와 영문학에 미친 영향은 엄청나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흥미로운 셰익스피어의 에피소드는 그이 작품이 영화에 사용된 외계어로도 번역된 사실이다. ㅎㅎㅎ
' BBC에 의하면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800편 이상의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중에도 <햄릿>은 50편 이상의 영화로 발표되었습니다. 그의 작품은 10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고 특이하게도 영화 <스타트렉>에서 사용되는 외계어 클링온으로도 <햄릿>과 <헛소동>이 번역되었다고 합니다. (p. 127)'


셰익스피어를 모조리 탐독한 한기정의 <멘토 셰익스피어>에 담긴 모든 흥미로운 이야기는 셰익스피어와 셰익스피어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고 재미있게 여행하는데 안내서 역할을 톡톡히 한다. 셰익스피어를 들어 알기만 할 뿐 제대로 읽어보지 못한 나 같은 사람에게는 그의 작품에 도전하는 용기를 주는 책이다.


아 참, 책의 앞부분에 실제 셰익스피어의 모습과 가장 가깝다는 찬도스 공작이 소유했던 찬도스 초상화가 있다. 자세히 보면 한 쪽 귀에 귀걸이를 하고 있다. 그의 작품처럼 독창적이고 자유로운 스타일을 추구했던 것일까?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가혹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참고 견디는 것이 고귀한 일인가..." (...)
"사느냐 죽느냐"의 원문은 "To be or not to be"인데 우리 말로 딱 들어맞게 번역하기가 어렵습니다. 사는 것과 죽는 것을 얘기하고자 했다면 왜 "To live or to die"라고 표현하지 않았을까요? 햄릿은 개인의 차원에서 자살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지만, 작가는 인간 존재에 대한 고뇌를 철학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p. 41,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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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천천히 오래오래 소설, 잇다 1
백신애.최진영 지음 / 작가정신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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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정신이 멋진 취지로 기획한 근대와 현대 여성 작가를 잇는 '소설, 잇다' 시리즈 첫 번째 책은 백신애와 최진영의 <우리는 천천히 오래오래>다. 1908년생 백신애 작가의 소설 세 편과 73년의 세월이 지난 1981년생 최진영 작가의 소설 한 편, 에세이 한 편 그리고 문학평론가 이지은의 해설을 이 책에 실었다. 이어질 이 시리즈에 등장하게 될 근대 여성 작가는 또 누구일지 무척 기대된다.


우선 백신애의 세 편의 소설부터...

<광인수기 狂人手記> - <조선일보>, 1938년 6월 25일~7월 7일

'아니다, 네 이놈 하느님아. 에이 빌어먹을 개새끼 같은 하느님아, 네가 분명 하느님이라면 왜 그 악하고 악한 도둑놈의 연놈을 그대로 둔단 말인고. 당장에 벼락 천둥을 내려 연놈을 한꺼번에 박살을 시킬 일이지... (...)
저 빌어먹을 낮잠 잘 하느님은 저를 위해주고 겁내 하면 할수록 점점 더 건방이 늘고 심술이 늘어가더라. 나를 영 사람으로 여기지 않더라. (p. 16, 17)'

비가 쏟아지는 다리 아래에서 하늘을 향해 저주를 퍼붓는 주인공 '나'는 아내로써 남편을 보살폈고, 며느리로써 시부모의 모진 학대를 견뎌냈다. 하지만 주인공이 마주한 현실은 그렇게 자신을 아끼고 예뻐하던 남편의 외도와 배신이었다. 정신병원에서 탈출한 주인공이 한이 서린 억울함을 하소연할 곳이란 하늘밖에 없고, 돌아갈 곳은 자식들이 있는 집뿐이다. 미쳐가면서도 어머니로 돌아간다.

<혼명混冥에서> - <조광>, 1939년 5월

'어머니의 눈물입니다! 조용한 어머니의 눈물은 나에게서 모든 용기를 앗아가는 무기였습니다. 그 눈물은 오직 나에게 안일을 주려는 지극한 사랑이 근원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털끝만치도 나를 이해해 주려고는 생각지 않아요. 다만 끝없이 사랑할 줄만 압니다. 그 사랑을 감수하지 않을 듯한 불안에 항상 슬퍼합니다. 그리고 내 마음을 달래보며 온갖 정성을 다해줍니다. (p. 73)'

이혼한 주인공 '나'에 대한 가족과 어머니의 기대는 조용히 근신하는 여성의 삶이다. '나'는 이를 배반하려 한다. 내가 해야만 할 일,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일을 하려고 한다. 세상의 성미를 맞추기보다는 세상을 내 성미에 맞추려고 한다. 그러면 그럴수록 어머니의 눈물은 쌓인다.

<아름다운 노을> - <여성>, 1939년 11월 ~ 1940년 2월

'인간에게 만일 가치 있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많이 연소燃燒했던가 하는 것이다. 라고 앙드레 지드가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타려고 해도 탈 수도 없는 가장 애끓는 이야기였다. (p. 111)'

열 여섯 살 아들이 있는 젊은 미망인 순희는 친정의 대를 잇기 위해 재혼해 아들을 낳아야 할 처지다. 정규는 순희에게 구혼 중인 의사 성규가 아들처럼 보살펴온 열아홉 살의 동생이다. 순희는 처음 만난 정규의 모습에서 '그림을 시작한 후 그리고, 그리고 해오던 이상의 얼굴 (p. 123)'을 본다. 순희는 아들 또래인 정규와의 사랑을 애써 부정하며 예술적 욕망이라 우기며 몸부림친다.

<광인수기>에서는 여성단체 활동을 한 백신애의 모습이 오버랩되고, <혼명>에서는 작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아름다운 노을>에서 작가 백신애는 순희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캐릭터로 모습을 드러낸다.


<구의 증명>으로 이미 알고 있는 최진영의
<우리는 천천히 오래오래>

이십 대 여성 정규는 정규직을 꿈꾸는 취준생이다. 아르바이트로 일하는 편의점에서 위협적인 남자 손님을 응대하던 중 딸의 가출한 친구를 찾기 위해 편의점을 들른 순희의 도움으로 정규는 그 위기에서 벗어난다. 순희는 남편의 폭력으로 이혼했고 딸과 생활을 위해 공무원으로 일하는 삼십 대 여성이다. 우연히 정규가 주말 아르바이트하던 펍에서 순희를 만났고 그 만남은 계속 이어진다. 둘은 서로 기다리는 사이가 되고 의자처럼 편히 쉴 수 있는 사랑을 한다.

'내가 간절하게 원하는 건 바로 이런 것.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보고 웃는 것. 비슷한 마음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것. 나에게 기쁜 마음을, 심심한 마음을, 힘든 마음을 이야기하는 것. 그 마음을 나눌 수 있다면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인생을, 외롭고 불안한 하루하루를, 망하고 계속 망할 뿐이라는 평범한 삶을 기꺼이 살아갈 수 있다. (p. 229)'


표제작 <우리는 천천히 오래오래>는 백신애의 <아름다운 노을>을 팔십 년을 이어받아 최진영이 변주한 소설이다. 정규와 순희를 그대로 가져와 정규를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꾸어, 성인 여성과 어린 남성의 사랑을 성인 여성과 젊은 여성의 사랑 이야기로 탈바꿈했다. 예나 지금이나 파격적으로 여겨지는 두 스토리 모두 '세상이 아직도 '이상한 queer' 것이라고 구별 지으려 하는 사랑 (p. 258)'이다.

최진영은 <광인수기>를 이어 써보려 했으나 소설이 아니라 분노만을 쓸 것 같았고, <우리는 천천히 오래오래>에서 정규를 남성 그대로 설정했다면 그 이야기는 범죄 스릴러가 될 것 같아 여성으로 바꾸었다고 에세이 <절반의 가능성, 절반의 희망>에서 밝힌다. '나는 쓰고 싶은 글이 아니라 쓸 수 있는 글을 생각했다. (p. 234)'


'소설의 도입부에 나오는 문장인 "나를 영 사람으로 여기지 않더라"에 밑줄을 여러 번 그으며 생각했다. 선생님, 저는 2022년의 사람입니다. 현재에도 어떤 자들에게 여성은 사람이 아닙니다. 여성을 무시하고 억압하려는 자들은 여전히 있습니다. (...)
'성인 남성과 명예 남성'이 아닌 소수자들은 '성인 남성과 명예 남성'의 안락한 삶을 위해 희생하고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여전히, 이곳에 있습니다. 선생님. (p. 231, 232)'

1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변한 것이 없기에 작가 최진영은 가부장제의 사회와 직장에서 여성이 느끼는 피로감을 더 이상 주고 싶어 하지 않는다. 여성이 지닌 사랑의 가치를 지켜주고, 그 사랑이 주는 다정함과 위안, 설렘과 따뜻함을 쓰고자 한다. <우리는 천천히 오래오래>에서 주인공은 남성이 아니다. 남성이 설자리조차 없다. 여성이 주인공이고, 고단하고 차별받은 삶이 아닌 여성만이 누릴 수 있는 다양하고 풍요로운 여성들의 삶이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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