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최소한의 화학 - 100개의 물질로 읽는 생명과 우주, 인류의 미래 최소한의 지식 2
김성수 지음 / 지상의책(갈매나무)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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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헬리베~ 붕탄질산~ 플네나마~ 알규인황~ 염아칼칼~ 이게 뭔 소리지? 암호처럼 들리겠지만 학창 시절 화학을 배웠다면 한 번쯤 해본 리듬을 넣어 주기율표 외우는 방법이다. 알다시피 화학이란 과목은 외워서 공부하기엔 한계가 있다. 이해해야 한다.

원자핵은 양성자와 중성자로 구성되어 있다. 양성자 수에 따라 원소 주기율표를 만들었다. 양성자가 하나면 수소, 두 개면 헬륨, 세 개면 리튬... 이런 식으로 말이다.

모든 물질은 주기율표에 한자리씩 차지한 원소들의 화학반응 결과물이다. 화학은 어디에서나 발견된다. 우주의 별에도, 지구의 암석, 바다, 대기에도 있고, 지구에서 살아가는 생물들도 화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인류의 역사도 화학이란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끝없는 우주를 향한 탐사 여정도 화학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 책의 저자는 '어떠한 학문 분야와도 연계하고 소통할 수 있는 화학이야말로 진정한 '중심 과학 central science' (p. 6 들어가며)'이라고 천명하며, 수많은 물질 가운데 100개를 뽑아 생명과 우주, 인류의 미래를 설명한다.


100개 물질 가운데 유난히 눈이 가는 화학물질을 소개하면...

'"화학은 별에서 시작된다." (p. 15)'

헬륨 기체 He, 최초의 비활성기체.
태양에서는 태양의 주성분인 수소 원자가 헬륨을 만드는 핵융합이 벌어지고 있다. 지구에도 물의 형태로 수소가 풍부하다. 언젠가 핵융합 기술로 인공 태양을 만들 가능성이 있는 셈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인류는 더 이상 에너지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자연은 모든 참된 지식의 원천이다." (p. 185)'

아세틸렌 C2H2, 고온 용접 불꽃의 원료.
아세틸렌과 산소가 반응하면 섭씨 3,000도가 넘는 불꽃을 만든다. 그 덕분에 용접과 절단으로 금속을 다양하게 성형한다. 이 기술은 우리가 세계 최고다. 그래서 배를 만들고 바다에 터빈 구조물을 세워 풍력으로 전기에너지도 얻는 데 우리를 따라올 나라가 없다.

'"이것은 한 명의 인간에게는 작은 발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위대한 도약이다." (p. 315)'

리튬 Li, 전기 문명의 도약을 이끌 2차전지의 핵심 소재.
끝없는 우주 개척에 필요한 모든 활동은 전기에너지에 바탕을 둔다. 그래서 충전과 방전을 반복하여 거듭 사용 가능한 2차전지의 개발은 필수다. 2차전지 가운데 가장 중요한 발명이 제일 가벼운 금속인 리튬을 전하 운반체로 활용한 리튬 이온 전지다.


빅뱅으로 우주에 수소 원자가 만들어졌다. 열역학과 화학반응이 이어져 수많은 화학물질이 우주를 뒤덮었고, 이 화학물질을 매개로 우주를 구성하는 모든 존재는 소통해 오고 있다.

화학물질 간 반응 결과로 호모 사피엔스가 출현했다. 이 종에게는 상상력과 탐구 정신이 있었고, 이 능력을 발휘해 자연환경에서 발견할 수 없는 화학물질을 만들어냄으로써 조물주를 모방하는데 열심이다.

인류는 자신들이 새로 만든 물질의 혜택을 맛보며 자신감이 붙었다. 그리고 물질세계 이해가 풍요로운 미래를 만드는 지름길이라고까지 여긴다. 하지만...

'하지만 우주적 평형에 대한 고려 없이 세상을 이해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며, 심지어 위험하기까지 하다. (...) 이처럼 세상의 모든 존재가 서로에게 빚진 채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화학이란 그 공존을 지속 가능하게 하는 수많은 물질의 변화라는 것을 모두가 기억해야 할 것이다. (pp. 349, 350 나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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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류지에 머무는 밤 - 당신이 찾던 다정한 상실
박소담 지음 / 서로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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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 깁스 한 사람을 보면 그 불편함에 측은한 마음이 든다. 나도 그런 경험이 있기에 그렇다. 슬퍼하는 사람을 보며 아파하는 것도 내 슬픔이 겹치기 때문이고, 외로움, 상실, 고된 삶... 모두 마찬가지다.

웃는 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내 얼굴에 웃음을 띠게 되고, 누군가 소리치면 나도 덩달아 고함을 내지르고 싶은 것 역시 내가 겪은 경험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주저했던 날들을 고백한다.
나약한 자가 살아남아 오랫동안 슬펐다. 그림을 그리면 좀 나아졌다.
죽음이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p. 6)'

박소담의 고백록 <소류지에 머무는 밤>을 읽으며 그를 따라 내 마음이 가라앉는 건, 서른 남짓 박소담의 삶에 내 삶의 몇몇 장면이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어린아이가 감당하기엔 너무 깊은 상처, 아이를 보낼 채비를 미처 갖추기도 전에 닥친 상실, 폭력... 이 모든 것으로 인해 죽고 싶은 마음이 어른거렸지만 박소담은 '이겨야 하는 사람들이 자꾸 지면서 사는 (p. 94)' 세상에서 견디며 살아남기로 했다.

소류지沼溜地에 머무는 삶.

'소류지에 머무는 밤에도 우리는 산다. 시간을 나누며 어김없이, 아픔을 딛고 슬픔을 쪼개며 산다. 삶이란 본래 너무 초라한 것인지 영영 가릴 수 없는 슬픔도 있다. 동료를 보냈고, 아이와 제자들을 보냈고, 친구들을 보냈다. 하늘이 정말 나를 시험하고 있는 걸까. 그렇게라도 믿지 않으면 숨을 정신을 일으킬 수 없었다. (p. 107)'

임파스토 Impasto, 상처가 남긴 자국엔 물감을 두텁게 발랐다. 그러자 세상이 넓어졌다. 박소담 작가의 삶과 닮은 사람들도 보였다. 아픔이 닮았고 보고 느끼는 것도 닮았다.

소류지에서 버티는 날들을 박소담은 기적이라 믿었다. 그 기적이, 박소담이 써놓은 삶의 고백이, 나의 상실이 넘치지 않도록 잘 보듬어준다. 박소담이 그림으로 상실을 견뎠듯이 그의 글에서 위로를 얻고자 한다

'...
붓에 다뤄지는 이 운명을 충실하게 소모할 계획이다.
그림이 내 모든 감정을 소유하는 날까지 남아보려 한다.
아주 먼 시간까지 가닿기 바라며 나약한 고백을 마친다. (p. 143)'

내게 남은 시간을 더 이상 허비하지 않을 계획이다.
책에 내게 남은 상실을 다 담아 넣으려 한다.
언제일지 모르겠지만
그때 나의 마지막 고백에 후회란 말이 들어가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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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은 생각한다 - 인간은 동물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 지음, 박종대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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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전 일이다. 35년 전쯤? 형님 집 앞 마당에서 들어서면 항상 날 반기던 개가 눈에 띄질 않았다. 여덟 살 조카에게 개가 어디 갔는지 물었다. "할아버지와 아빠가 드셨어요~." 천진난만하게 대답했다.

다니던 직장 생태체험관에서 아이들이 만질 수 있는 애벌레를 전시한 적이 있다. 게시글 반응이 둘로 나눴다. '우리 아이가 직접 애벌레를 만지며 촉감을 느낄 수 있어 좋았어요.' 그리고 다른 글은 '동물 학대예요. 당장 전시 중단해 주세요. 고발할 겁니다.'


'이 책은 생각하는 동물들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생각하는 유일한 동물인 인간에 관한 이야기다. (p. 7 들어가기 전에)'

동물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먹거리인가? 아님 볼거리인가. 생각도 고통도 느끼지 못하니 막 다뤄도 되나? 아님 동물 권리를 지켜줘야 하나. 사육해도 되나? 아님 가족처럼 가까이 두고 보살펴야 하는 존재들인가.

현대 독일 철학의 아이콘 리하르트 다비드 프레히트는 <동물은 생각한다>에서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 대해서 진지한 고민을 해보자고 제안한다.

인간도 동물일까. 신이 우리에게만 준 영혼과 감정이 우리랑 똑같이 동물에게도 있는 건가. 인간은 동물을 어떻게 다루어왔을까. 이제부터는 어떻게 다루는 것이 좋을까. 동물 권리와 동물 보호를 철학 관점에서 접근도 해본다. 마지막 4장에서는 이제까지 살펴본 문제를 정리하면서, 모든 문제를 인정하기까지 쇼펜하우어 세 단계를 통해 동물과 관계에서 실용적으로 이끌어 내야 할 결론이 무엇일지 또 어떻게 실행될 수 있는지를 묻는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모든 문제는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기까지 세 단계를 거친다. 처음에는 주목받지 못하거나 우습게 여겨지다가 그다음에는 받아들여지고, 마지막에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p. 530)'

유일하게 직립보행을 하는 인간, 형태부터 다른 동물과 다르다. 창조주가 만든 질서 가운데 인간종은 자연의 사다리 맨 꼭대기에 있어 다른 동물과는 완전히 분리됐다. 지혜도 있었다. 이로써 인간은 자연을 정복할 권리를 얻었다. 동물을 인식할 때도 인간 관점으로만 생각했다.

만물의 영장 인간은 거의 착취자에 가까웠다. 수많은 생명체를 파괴하고 지구를 막 사용해 오염시켰다. 동물을 사육하고 죽이는 범죄를 은폐하고 그 현장을 스스로 외면했다. 쇼펜하우어 첫 번째 단계, 이러니 동물의 권리 따위는 주목받지도 못했고 당연히 우습게 여겼다.

'도덕은 공식적으로 어떻게 규정되든 심리 공학이기도 하다. 그래서 자잘한 문제에서 스스로 '나쁘다'고 느끼면서도 장시간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가능하고, 또한 단기간이라면 큰 문제에서 스스로 '나쁘게' 느끼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큰 문제에서 계속 스스로 '나쁘다'고 느끼는 상황은 견디지 못한다. (p. 365)'

인간에게만 한정되던 권리가 동물에게도 적용, 동물권 철학이 제시되면서 쇼펜하우어 두 번째 단계, 도덕철학이 동물들에게 확대되는 걸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동물에게 감정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동물들은 사람에게 생각이 없다고 느낄 것이다. - 금언 (p. 525)'

이제 남은 것은 쇼펜하우어 마지막 단계, 동물을 도덕적 의식을 갖고 대하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일만 남았다. 비건 문화처럼 말이다. 채식문화는 요즘 더 이상 웃음거리가 아니다.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추세다.


내가 똑똑하고 힘이 세다고 다른 생명을 마음대로 죽일 순 없다. 동물에게도 마찬가지다. 동물을 잘 안다는 생각,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라는 말씀을 놓지 않는 인간 중심주의 오만을 내려놓아야 한다.

모든 생명은 생명에 기대어 살아간다. 생명을 기준으로 한 윤리를 다시 세워 인간을 향한 생명 존중을 모든 생명을 향한 윤리로 확장해야 한다.

'그러나 지적 능력의 증가, 자기 행동이 부른 결과의 예측, 부패한 관습과 미신의 충분한 인식 같은 다윈의 이 경건한 유토피아는 의식의 진화 과정에서 진정으로 의미 있는 도약이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결코 완결된 과거는 아니다.
이는 여전히 미래의 과제로 남아 있다. (pp. 538, 539)'

다윈이 그린 유토피아에서는 집에서 기르던 개를 먹는 인간을 더 이상 없을 것이다. 그럼 고기 대신 뭘 먹나. 배양육? 이것도 동물복지, 환경문제 등 논란이 많던데. 그리고 애벌레 체험, 글쎄 생명윤리에서 생각하면? 음... 반응은 둘로 나뉠 것 같다.

"동물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여전히 내게도 완결되는 않은 과제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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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 오사무, 문장의 기억 (양장) - 살아 있음의 슬픔, 고독을 건너는 문장들 Memory of Sentences Series 4
다자이 오사무 원작, 박예진 편역 / 리텍콘텐츠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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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에게 묻는다. 저항하지 않는 것은 죄인가?...... 인간, 실격.
이제 나는 완전히 인간이 아니게 되었다. (p. 49, 인간실격人間失格)'

인간, 실격. 다자이 오사무(太宰治). <다자이 오사무, 문장의 기억>을 엮은 박예진 번역가는 그의 글을 '무너지며 써 내려간, 인간이라는 병의 기록'이라고 표현했다. '인간이라는 병'을 앓다가 결국 스스로 죽음을 택한 다자이는 <인간실격>에서 '인간의 삶이라는 걸 도무지 모르겠습니다.'라고 고백하며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한다.

이 책에 기록된 다자이의 12개 작품 속 180개 문장은 그의 고백과 질문으로부터 출발해 얻은 글이란 생각이 든다. 글을 음미하다 보면 나도 나에게 질문을 하게 된다. '나는... 왜 살아가는가' 그리고 왜...

'왜 거짓말을 하고, 왜 상처받으며,
왜 끝내 사랑을 갈구하는가. (p. 14, 프롤로그)'


슬픔과 고독이 가득한 다자이의 글, 과연 그의 글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박예진 번역가는 다자이를 '죽음을 향해 가면서도, 누구보다 살고자 했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죄인처럼 살면서도, 죽을 용기를 내지 못한 자"로서, 그는 인간 내면의 상처와 이중성, 도망과 회복, 절망과 연민을 누구보다 진실하게 그려냈습니다. (p. 14, 프롤로그)'

일본 문단은 다자이를 전쟁에서 패배한 일본의 상실을 대변한 작가로,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기 파괴를 통해 끝내 인간을 긍정한 작가라고, 문학 평론가 나카노 시게하루는 그의 글이 상처받은 영혼에게 가장 진실한 위로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의 문장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다는 뜻이다.


'나는 확신하고 싶다. 인간은 사랑과 혁명을 위해 태어난 것이다. (p. 27, 사양斜陽)'

몰락한 귀족임에도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어머니와 동생 나오지, 그 사이에서 <사양> 속 주인공 가즈코는 주저앉지 않고 새로운 시작을 한다.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조용히 나를 믿고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다. 나는 믿음을 받고 있다. 내 목숨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죽음으로 속죄하겠다는 따위의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p. 118, 달려라 메로스)'

<달려라 메로스>에서는 인간을 믿을 수 있는 존재로, <앵두>에서는 상처와 고통이 따르는 인간의 약함을 보여주면서도 그 또한 성장하는 삶의 일부라고 웅변한다.

'사는 일은 참으로 힘든 일이다. 이곳저곳에서 사슬이 얽혀 있어서,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피가 터져 나온다. (p. 136, 앵두)'

더 이상 남편을 원망하지 않기로 한 <비용의 아내> 속 주인공 아내를 통해 다자이는, 선택이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만의 방식을 찾아가는 방법임을 보여준다. 남편을 위한 희생을 선택할 수도 있고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는 독립을 선택할 수도 있다. 인간 답지 못하면 어떤가, 그래도 선택이란 도구를 앞세워 인간은 살아간다.

'일이라는 건, 별것 아니에요. 걸작도 졸작도 따로 있는 게 아니죠. 사람이 좋다고 하면 좋은 거고, 나쁘다고 하면 나쁜 거예요. 마치 내쉬는 숨과 들이쉬는 숨 같은 거예요. (p. 201, 비용의 아내)'


"나는 왜 살아가고 있는가?"

인생은 차디찬 고독이다. 슬프고, 마음에 금이 가기도 하고, 불편하고, 불안하고,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다반사고, 허탈하고, 소외당하며 부끄럽고, 상처받아 병이 들기도 한다. 그런 거다. 숨겨야 할 것도 고쳐야 할 것도 아닌, 삶이란 그런 거다.

도무지 모르겠다고? 있는 그대로 나를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저항이다. 저항하지 않는다면... 인간, 실격. 인간으로서 실격될 것인지, 그래도 인간으로 살아갈 것이지는 내 선택에 달렸다.

'<다자이 오사무, 문장의 기억>은 작가가 남긴 문장들을 다시 짚는 동시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여정입니다. 그 여정 끝에서 각자 이렇게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는 괜찮지 않을 수 있지만, 그래도 괜찮다." (p. 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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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기다리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
사무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 / 민음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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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아내가 하는 말이 뭘 뜻하는지 모르겠지만 '알았어'라고 대답한다. 일단 대답해 놓고 속뜻을 알려고 노력해 보지만 잘 모르겠다. 그렇다고 물어보기도 좀 그렇다. 그런데 그냥 뭐 모르는 채 아니면 내가 생각한 대로 해석하고 지내도 우리 사이에 별일은 없다.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내 이런 상황과 비슷하다. 뭘 이야기하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알겠다고 일단 대답해놓고 뭘 의미하는지 찬찬히 살펴봐도 되는 작품이다. 뭐 꼭 뭔지 몰라도 아니면 내 나름대로 해석해도 괜찮다.


'시골길,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저녁.
에스트라공이 돌 위에 앉아서 구두를 벗으려고 한다. 기를 쓰며 두 손으로 한쪽 구두를 잡아당긴다. 끙끙거린다. 힘이 빠져 그만둔다. 숨을 헐떡이며 잠시 쉬었다가 다시 시작한다. 같은 동작이 되풀이된다. (p. 9)'

에스트라공과 블라드미르가 고도를 기다리는 모양새가 내 삶과 닮았다. 기다림이 연속되는 삶. 어른이 되기를, 아이가 자라기를 기다리고, 저녁을, 아침을 기다린다. 구름이 걷히기를, 비가 멈추기를 기다린다. 친구를 기다린다. 그리고 여자를 기다린다. 결혼 전 백번 넘게 선을 봤으니 그 횟수만큼 나와 결혼할 여자를 기다린 셈이다. 무수한 시간을 기다리면 난 뭘 했을까.

처음 만나는 사람이니 모습을 상상해 보기도 하고, 뭘 타고 올지, 장소는 제대로 알고 있는지, 저녁을 먹었을까? 난 어제 뭘 먹었지? 어제 몇 시간 잤지? 부장이 왜 날 찾았지? 뭐 사고 났나? 나 어릴 때 허벅지 찢어진 적 있었지... 의식의 흐름에 따라 밑도 끝도 없이 중구난방으로 속으로 중얼거리며 마치 에스트라공과 블라드미르처럼 기다렸을 뿐이다.

힘들게 노력해서 얻는 일이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것이라면, 그걸 기다리면서 할만한 일이 별로 없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드미르처럼 기다리는 수밖에. 뭘 한다고 해도 기다림의 대상을 기다리는 것엔 변함없다. 그래도 기다려야 하는 것, 그것을 위해 내가 마땅히 할 일은 없지만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 오지 않아서 보지 못해서 잘 모르지만 그렇다고 기다림을 멈추고 자리를 뜰 수도 없는 것...

'에스트라공 : 가자.
블라디미르 : 갈 순 없다. …
에스트라공 : 왜?
블라디미르 : 고도를 기다려야지.
에스트라공 : 참 그렇지. (p. 82)'

그런 고도는 무엇일까.
죽음...! 끝이 아닐까?

사뮈엘 베케트가 이 책을 집필할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홀로코스트를 겪고 난 뒤다. 신을 찾았지만 응답하지 않았다. 우리가 신으로부터 소명을 받은 존재인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그저 세상에 던져진 존재일 뿐이다. 이제 내 의지와 책임으로 삶의 의미를 스스로 찾아내는 일만 내 앞에 남았다.

신조차 막지 못하는 전쟁, 전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고도는 전쟁이 끝나는 것일 테다. 전쟁의 끝이라는 고도가 언젠가 온다는 사실을 안다면 기다림에도 의미가 생긴다.

세상에 내던져진 우리 삶에도 죽음이란 끝이 있다. 희망이 생긴다. 끝이 있다면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어차피 굴러떨어질 바위를 밀어 산꼭대기 올려놓기를 반복하지만, 언젠가 그 무의미한 일상에 끝이 있다면 바위를 밀어올리는 일에서 의미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언젠가 내가 어른이 되고, 아이가 자라고 또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고, 언젠가 구름이 걷히고, 비가 멈춘다는 걸 안다면, 친구가 온다는 걸 안다면, 그 기다림이 영원히 계속되지 않는다는 걸 안다면 기다림은 의미 있다. 나와 결혼할 여인이 온다는 걸 안다면, 에스트라공과 블라드미르처럼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을 중얼거리며 기다리더라도 그 기다림은 의미가 있다. 그래서 기다린다. 고도를... 죽음을... 끝을... 지금 내 삶을 지키며 의미를 찾으면서.

'블라디미르 : 그럼 갈까?
에스트라공 : 가자.
둘은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다. (p. 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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