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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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애니메이션 '란마 1/2'을 비디오 가게에서 빌려 봤었다. 다음 편이 궁금해 한 번에 2~3편씩, 다음 편을 누군가 빌려 갔으면 예약까지 걸어가면서...

란마가 절반은 여자 절반은 남자라는 판타지 요소, 란마와 대결을 펼치는 샴푸가 란마가 여자일 때는 복수를 위해 싸움을 벌이지만 남자 모습일 때는 그 모습에 반해 사랑을 고백하는 개그와 에로 요소, 그리고 변태적 요소가 '란마 1/2'에 등장했다. 지금 다시 본다면 재미없을듯하다.

하여튼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를 읽으면 '란마 1/2'이 제일 먼저 생각났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특징적 요소들이 겹쳤다.


짝사랑하는 서클 여자 후배는 천진난만하기 그지없다. 엄지손가락을 안으로 숨겨 굳게 주먹을 쥐고 날리는 사랑이 가득 찬 친구펀치를 구사하며, 두 발 보행 로봇 스텝으로 기쁨과 의욕을 표현하며, 태평양 물이 모두 럼주라면 좋겠다고 할 만큼 술을 좋아하며, "나무 나무!"라고 읊조리는 만능 기도도 독자적으로 개발하여 애용하며 대학생활의 낭만을 신나게 즐긴다. 선배의 짝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고 만날 때마다 "아, 선배, 또 만났네요!"라고 인사할 뿐이다.

선배는 서클 후배를 사모하지만 마음을 전하지 못하고 그녀의 주위를 서성인다. 후배의 흔적을 쫓아 찾아다니지만, 그녀 앞에 자신을 존재를 드러내기는커녕 마주칠 때마다 "뭐, 어쩌다 지나가던 길이었어"라는 대사를 목에서 피가 날 정도로 반복한다. 실패와 수난만 계속되는 걸 보니 그저 찬 바람을 맞으며 길가의 돌멩이처럼 구르고만 있을 것만 같다.


이 소설은 4개의 에피소드로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어느 봄날 밤, '술'과 눈부신 어른의 세계를 만난다.
'"이백 옹에게는 두 가지 취미가 있었어. 하나는 술친구들을 거느리고 다니다가 밤길을 걷는 남자를 습격해서 속옷을 빼앗는 거고, 다른 하나는 가짜 전기부랑으로 술 마시기 대회를 하는 거야." (P.41)'

여름의 헌책시장에서는 짝사랑하는 서클 후배가 그토록 찾는 <라타타탐>을 위해 선배는 세상에서 가장 매운 음식을 먹는 지옥을 체험한다.
'멀리 돌아가는 계획을 백지로 돌리고 더 완벽한 계획을 다듬어 완성시켰건만, 거꾸로 내가 앞에서 백지로 돌렸던 처음의 계획이 멋대로 진행되다니, (p. 177)'

광란이 난무하는 가을 대학축제, 옥상 건물에서 발을 헛디뎌 추락하는 죽을 고비를 넘긴 후, 사랑의 대서사시 <괴팍왕>의 주연이 되어 드디어 후배를 품는다.
'"설마 선배가 괴팍왕 역할일 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요."내가 그렇게 말하자 선배는 별생각 없다는 듯
"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했습니다. (...)
"그건 그렇다 쳐도 정말 신기한 인연이네요. 선배와는 자주 만나잖아요. 이거야말로 신의 편리주의라고 해야겠지요."
"그렇군." (p. 287)'

교토 전체를 휩쓴 감기로 모두 앓아누운 겨울, 서클 후배만이 멀쩡하다. 감기로부터 모두를 구할 자는 다름 아닌 달걀술과 전설의 약 '윤폐로'를 손에 얻은 서클 후배다. 드디어 커피숍 전진당에서 선배 곁으로 걸어가는 후배가 작게 중얼거린다.
'이렇게 만난 것도 어떤 인연. (p. 392)'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는 천진난만한 여대생과 그녀를 짝사랑하는 선배의 이야기를 그린 로맨스판타지다. 2006년 작품으로 모리미 도미히코가 서른도 되지 않은 나이에 썼다.

'저자는 한 인터뷰에서, 소설에 나오는 여러 가지 기발한 아이디어들은 힘들게 고안해낸 것이 아니라 늘 머릿속에서 넘쳐나 그걸 모두 소설에 이용하려 들면 소설이 끝도 없이 길어질 것 같다고 말한 바 있다. 또한 자신이 살고 있는 교토라는 도시와 대학생활, 어려서부터의 독서력이 그에게 소설의 소재를 제공한다고 밝혔다. (p. 396)'

심리, 행동, 주변 상황에 대한 세밀한 묘사가 눈에 띈다. 그런 이유로 시종일관 귀염귀염하고 무심한듯한 매력의 후배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눈에 못이 박힐 정도로 후배 뒤통수만 바라보고 쫓아다니는 순진무구의 선배 모습도 마찬가지다.

읽는 내내 웃음이 떠나질 않는다. 신선하고 기발하고 판타지적인 아이디어가 놀랍다. 같은 상황을 후배의 입장에서 선배 입장에서 대비하며 펼치는 구성도 재미요소를 한층 높인다.

역자도 역자 후기에서 밝혔듯이
'"... 그냥 '읽어봐'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무책임한 의무의 방기가 아니다. 손끝에 닿는 기묘한 감촉, 혹은 이 혀끝의 촉감을 직접 맛보게 하고 싶은 것이다. 설명하기보다 오히려 내 쪽에서 "어때? 어때?" 하고 빙긋이 웃으며 물어보고 싶어진다." (p.398)'

"재밌지? 그 대목은 정말 재미있지 않아? 또 여기 요 대목도...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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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 - 시행착오, 표절, 도용으로 가득한 생명 40억 년의 진화사
닐 슈빈 지음, 김명주 옮김 / 부키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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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털이 동물의 비행을 돕기 위해 생겼다거나 폐와 다리가 동물들이 육지에서 걷는 것을 돕기 위해 생겼다고 생각한다면 - 여러분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지만 - 완전히 틀렸다. (p. 18)'

진화는 맞지만, 자연과 생명은 탁월하고 혁신적인 발명가라기보다는 수십억 년을 시행착오, 표절, 도용 등을 일삼은 모방꾼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진화사는 길고도 기묘한 경이의 여행이며 그 여정은 시행착오, 우연과 필연, 우회, 혁명과 발명으로 수놓아져 있다. (p. 18)'


닐 슈빈은 세계적인 고생물학자로 2004년 동료들과 캐나다 북극권에서 목, 팔꿈치, 손목을 가진 물고기 화석 '틱타알릭 로제아이 Tiktaalik roseae'를 발견했다.

'틱타알릭은 수생 생물과 육생 생물을 잇는 존재로, 먼 옛날 우리 조상들이 물고기였던 중요한 순간을 밝혀준다. (p. 14)'

닐 슈빈은 40억 년의 진화사와 진화 연구사, 그리고 게놈 생물학의 연구 성과가 얼마나 눈부시게 발전했는지를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에 담았다. 화석 증거에서부터 유전자에 이르기까지 40억 년 생명의 역사를 설명한다.


최초로 지구에 출현한 생명은 미생물이고 그 상태가 수십억 년을 지속하다가 약 10억 년 전 단세포 미생물에서 몸을 지닌 생명체가 탄생했다. 수억 년 뒤 해파리부터 사람에 이르는 모든 것들의 조상이 탄생했다. 이들은 진화했고, 시의적절한 발명을 토대로 또 발명을 생산해 새는 날개와 깃털을 이용해 하늘을 날고 육지동물들은 폐와 사지를 지닌다. 발명은 계속 이어진다. 진화한다.

'생물의 몸에 생기는 발명은 그것이 관여하는 대변화를 일으키는 계기가 아니었다. 깃털은 비행이 진화하면서 탄생한 게 아니었고, 폐와 사지도 동물이 육상으로 진출하면서 진화한 게 아니었다. (...) 큰 변화는 오래된 기관이 새로운 용도로 전용되면서 일어났다. 혁신의 씨앗은 그것이 싹트기 훨씬 전에 뿌려져 있었다. 무슨 일이든 우리가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는 시점에 실제로 시작된 것은 아니다. (p. 52)'

뇌를 비롯해 우리 몸의 기능을 담당하는 것들의 유전자는 모두 복제됐다. 점핑 유전자는 자기 사본을 만드는 일은 전담하고 게놈은 변이를 계속 퍼뜨린다. 동시에 발생하는 변이 덕분에 진화는 계속된다. 점핑 유전자와 다른 DNA, 게놈과 바이러스 사이에는 항상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는 건 착각에 불과하다. 박테리아가 개발한 기술은 인수, 합병, 전용으로 생물을 변화시켰고 우리 뇌는 이런 발명을 고쳐 쓰고 있는 셈이다.


자연의 발명과 진화의 비밀은 호기심을 충만하게 한다. 욕심에 책을 집어 들어 읽었지만, 솔직히 잘 모르겠다. 양자역학만큼이나 어렵다. 그리고 기독교인으로서 진화 이야기만 나오면 혼란스럽다. 물론 신앙이 과학적인 증명이 아닌 믿음의 문제이긴 하지만, 진화사는 항상 믿음을 흔들어 놓는다.

하지만 결국 과학에서도 화석에서도 우리의 궁금증에 확실한 답을 구하지 못한다면, '신이 만든 거야'라고 복잡함과 무지의 답을 대신하지 하지 않을까? 그러고는 다시 과학과 새로 발견된 화석으로 신을 의심했다가 다시 신을 답으로 하고... 다시 답을 구하고 못 구하면 신을 찾고... 계속...

'인간은 지식의 공백을 희망, 기대, 두려움이 조금씩 버무려진 우리 자신의 선입관으로 메우는 경향이 있다. 우리 뇌는 점처럼 흩어져 있는 과거 사건들을 연결해 한 변화가 다음 변화로 연쇄적으로 이어지는 선형적인 내러티브를 구성하는 경향이 있다. (p. 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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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 1 - 개정판 코리안 디아스포라 3부작
이민진 지음, 신승미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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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베스트셀러, 4대에 걸친 재일조선인 가족 이야기, 이민진 장편소설 <파친코>가 판권 계약 종료로 절판되었다가 새로운 번역가의 작품으로 인플루엔셜에서 다시 출간했다. 몇 년 전 널리 읽힐 때 내용만 대충 알뿐 읽지 못해 아쉬웠었는데 인플루엔셜을 통해 <파친코 1>을 읽는 기회가 내게도 생겼다.


'한국인 이야기를 쓰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 그 질문에 대체로 나는 이렇게 답한다. 우리가 매력적이기 때문에 한국인 이야기를 쓴다고. (...) 내게 한국인은 지적으로나 감성적으로나 깊이 있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가치가 있는 이들이다. (p. 7)'

이민진은 한국인이 매력 있고 주인공이 될 가치가 있다고 한국 독자들에게 말하며, 놀라운 상황을 견디며 분투한 한국인을 강조했다.


'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p. 15, 첫 문장)'
나라도 잃었고, 높은 자리에 있는 지도자들도 이념에 심취한 국민들을 이용만 할 뿐 우리를 저버렸지만 상관없다. 주어진 삶을 받아들이며, 참고 견디며 살아가야 할 뿐이다.

'훈이는 새 소식을 가져오는 남자들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단호히 숨을 내쉬고는 벌떡 일어나서 일을 했다. “상관없다.” 훈이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상관없어.” 중국이 항복하든 대갚음하든, 채소밭에서 잡초를 뽑아야 했고 식구들이 신발을 신고 다니려면 짚신을 삼아야 했고 몇 마리 안 되는 닭을 훔치려고 하는 도둑들을 쫓아야 했다. (p. 30)'


부산 영도에서 하숙을 치는 어부와 그의 아내는 아들 셋을 낳았지만 윗입술이 세로로 갈라지고 한쪽 발이 뒤틀린 큰아들 훈이만 살아남았다. 훈이가 스물일곱 살이 되던 해 조선은 일본에 통치권을 빼앗겼다. 스물여덟 살 훈이는 가난한 집의 딸 넷 중 막내인 열다섯 살 양진과 혼인한다. 양진은 네 번째 아이이자 유일한 딸인 선자를 낳았다. 딸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고 자식을 웃게 하는 것이 삶의 목표인 선자의 아버지 훈이는 선자가 열세 살이던 겨울, 결핵으로 죽는다.

어머니 양진과 하숙집을 운영하며 살아가던 선자가 열여섯 살 때 일본인 학생들에게 괴롭힘을 당했고 이를 도와준, 어머니 양진 또래의 서른여섯 살 고한수를 만나 사랑에 빠져 한수의 아이를 갖는다. 오사카에 한수의 아내와 세 딸이 있음을 알게 된 선자는 한수의 첩이 되기를 거절한다.

그해 11월 평양에서 백이삭이라는 목사가 오사카에 사는 형 요셉의 집에 가기 위해 요셉이 알려진 양진의 하숙집을 방문한다. 다시 찾아온 결핵에 양진과 선자의 극진한 보살핌으로 죽을 고비를 넘김 이삭은 선자 아이의 아버지가 되기로 하고 선자와 오사카로 떠난다.

'"내 삶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좋은 쓰임새가 없다면 삶이란 아무 의미가 없을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p. 128)'

이삭의 형, 요셉과 그의 아내 경희는 오사카에 온 선자를 진심으로 맞이하고 선자가 낳은 아이 노아도 친 자식처럼 사랑을 준다. 어려운 생활을 이어가는 중에 이삭은 신사참배 거부로 감옥에 갇히고 죽음 직전에 풀려나 집으로 돌아와 아내와 두 아이를 보지만 끝내 죽고 만다.

'선자는 아랫입술을 깨물었고 여전히 눈앞에 한수가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어서 빤히 쳐다보았다. 12년이 흘렀다. 그때와 똑같은 얼굴이 여기 있었다. 자신이 몹시 사랑했던 그 얼굴이었다. 선자는 밝은 달빛과 차갑고 푸른 바닷물을 사랑했듯이 한수의 얼굴을 사랑했다. 한수가 맞은편에 앉아 있었고, 선자의 눈길에 다정한 눈빛으로 응했다. 하지만 한수는 여전히 침착했고 신중하게 내뱉은 모든 말은 확신에 차 있었다. 한수는 언제나처럼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한수는 선자 아버지나 이삭, 요셉과 창호와도 달랐다. 한수는 선자가 아는 다른 어떤 남자와도 달랐다. (p. 314)'

어느 날 힘겹게 살아가는 선자 앞에 12년 만에 한수가 나타난다. 고비 때마다 한수는 선자와 아이들, 요셉과 경희를 도와준다. 일자리도 찾아주고, 폭격을 피해 오사카 외곽에 거처를 마련해 주고, 선자의 어머니 양진을 부산에 찾아 선자에게 데려오고, 나가사키에서 폭격에 심하게 상처 입은 요셉을 찾아오기도 한다.

전쟁이 끝난 후 오사카에 다시 돌아온다. 선자의 큰 아들 노아는 와세다 대학 입학을 위해 공부하고 둘째 아들 모자수는 조선인이라는 차별에 힘들어하며 1권은 마무리된다.

1권이 선자를 큰 축으로 이야기가 전개됐다면 2권은 선자의 두 아이 노아와 모자수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질듯하다. 아직은 왜 소설의 제목이 파친코인지는 짐작하기 어렵다. 2권에서 그 이유를 알게 되겠지.


일제강점기, 전쟁, 가난이 세트로 마련된 무대에 내던져진 삶이다. 역사마저 저버린 무대에서 대를 이어 살아가야 하는 엄혹한 환경이다. 견디며 사는 방법은 채소밭에 잡초를 뽑듯 닥치는 대로 일하고, 가족이 신을 짚신을 삼듯 내 가족을 지켜야 하고, 내 가족을 넘보는 도둑을 쫓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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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마텔 101통의 문학 편지
얀 마텔 지음, 강주헌 옮김 / 작가정신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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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마텔 101통의 문학 편지>는 <파이 이야기>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얀 마텔이 전 캐나다 수상 스티븐 하퍼에게 2007년 4월부터 2011년 2월까지 격주로 보낸, 문학작품을 언급한 편지를 모아 묶은 책이다. 총 101통의 편지였고, 101권이 조금 넘는 책을 선물로 같이 보냈다.


얀 마텔이 수상에게 편지를 보내게 된 이유를 책 서문에서 밝히는데 그 내용이 곱씹어 볼 만하다. 캐나다 예술위원회 창립 50주년 행사에 참석해 한 마디도 하지 않았을뿐더러 고개조차 들지 않은 수상을 얀 마텔은 보았다. 예술 행사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수상에게 의문과 관심이 생겼다.

하퍼 수상이 문학작품이나 그에 버금가는 문학작품을 읽는지, 만약 문학작품을 읽지 않는다면, 그의 마속에 무엇이 있고, 인간 조건에 대한 통찰력을 어디에서 얻는지, 인간다운 감성을 어떻게 구축했는지, 무엇을 근거로 상상하고, 그 상상의 색깔과 무늬는 무엇인지...

'스티븐 하퍼 수상에게도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며 혼자서 빈둥대는 시간이 있어야 했다.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까? 이 문제는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라는 기능적인 문제보다, '이것은 왜 이렇고, 저것은 왜 저럴까?'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하는 시간이 있어야 했다. 나는 책과 관련된 직업에 종사하고 책을 읽고 쓰는 사람이기 때문에, 또 책과 고요함은 잘 어울리는 한 쌍이기 때문에, 좋은 책을 통해서 스티븐 하퍼 수상에게 조용한 시간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주기로 결심했다. (p. 24)'


하퍼 수상의 말과 행동에서 문학이나 문학 전반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습이 전혀 없음을 얀 마텔은 눈치챘다. 자신이 보낸 편지의 일곱 통의 의례적인 감사 편지를 받고 얀 마텔은 그 생각을 굳힌듯하다. 그가 원한 답장은 자신이 보낸 편지와 책을 몇 권만이라도 읽었음을 증명하는 도도한 답장, 원칙론적인 답장, 교활한 답장, 정직한 답장, 야멸차게 정직한 답장, 숨김없이 정직한 답장이었다.


지도자라면 세상이 어떤 모습으로 바뀌면 좋겠다고 꿈꾸는 능력까지 갖추어야 하는데 세상을 이해하고 꿈꾸는 데 문학 작품만큼 좋은 것이 없다고 얀 마텔은 개인적인 견해를 밝힌다.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스티븐 하퍼 수상처럼 나를 지배하는 사람이 어떤 방향으로 무엇을 상상하는지 알아야 한다. 그의 꿈이 자칫하면 나에게는 악몽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설과 희곡과 시는 인간과 세계와 삶을 탐구하는 가공할 만한 도구이다. 지도자라면 인간과 세계와 삶에 대해 당연히 알아야 한다. 따라서 나는 열렬하게 성공을 바라는 지도자에게 "국민을 효과적으로 이끌고 싶다면 책을 광범위하게 읽으십시오!"라고 말해주고 싶다. (p. 33)'

나부터 인간과 세계와 삶을 탐구할 도구 문학을 가까이해야겠다고 결심한다. 우선 <얀 마텔 101통의 문학 편지>를 곁에 두고 틈틈이 다시 읽고자 한다. 한 번 단숨에 읽고 옆으로 치워둘 책이 아니어서다. 그리고 얀 마텔에게 정직한 답장, 야멸차게 정직한 답장, 숨김없이 정직한 답장을 써보려 한다.

에고~ 읽을 책 리스트만 늘어나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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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짱 좋은 여성들 - 용기와 극복에 관한 가슴 떨리는 이야기들
힐러리 로댐 클린턴.첼시 클린턴 지음, 최인하 옮김 / 교유서가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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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 투쟁의 목표는 여성 아인슈타인을 조교수로 임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멍청한 여자들이 멍청한 남자들과 똑같은 속도로 승진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책의 '선출된 지도자들' 편에서 첫 번째로 다룬 인물, 남들은 그녀를 '거칠고 시끄러운 여자, 프로 권투선수, 남성 혐오자, 싸움꾼 벨라'라고 불렀지만, 자신을 '매우 진지한 여자'라고 소개하는 벨라 앱저그가 한 말이다.

여성들도 여느 남성들처럼 그림을 그렸고, 글도 쓰고, 무엇을 발견하고 발명하는 등 많은 업적을 이뤄왔다. 하지만 남성들이 기준을 만들고 판단해온 탓에 그녀들의 성과가 그리 잘 알려지지 않았으며 제대로 평가받지도 못했다.


<배짱 좋은 여성들>은 힐러리 클린턴과 딸 첼시 클린턴이 역사의 난처한 환경에서 굴하지 않고 현실에 맞서고, 의문을 던지고, 목표를 이루어 변화를 일으킨 여성들의 삶을 번갈아가며 들려주는 책이다.

교육계, 환경분야, 탐험, 발명, 치료 분야, 스포츠, 사회운동, 작가로, 정치 지도자로, 개척자로, 여성인권 운동가로...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한 배짱 좋은 여성들의 가슴 떨리는 이야기가 담겨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참가한 흑인 여성 육상 선수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플로렌스 그리피스 조이너. TV 화면에 비친 100미터 달리기 출발 자세를 취한 그녀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컬러풀한 긴 손톱, 짙은 화장, 선수의 모습이라고 하기엔 낯설었다. 100미터, 200미터 달리기에서 세계 신기록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흑인이라는 이유로, 여성이라는 이유로 사람들은 질투하며 그녀의 능력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그녀의 능력을 폄하해야 했다. 급기야 스테로이드를 복용했을 것이라며 흑인 여성의 능력을 부정하며 증명하려 했다. 약물 검사 결과는 깨끗했고 증명이 된 건 남성들의 알량한 기득권을 지키려는 나약하고 치졸한 자존심뿐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여성들은 '여성의 위치'를 새롭게 정의하고 지키고자 폭력이나 협박을 당해왔다. 위협에 맞설 때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했다. 때론 사적인 이야기를 털어놓아야 했고 사생활이 까발려지기고 했다.

그래도 지금은 모든 여성의 권익이 신장됐고 균등한 기회를 누리고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이 책에 소개된 많은 인물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착시에 불과하다.

여성의 참정권을 주장하는 운동이 19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시작됐고, 1971년이 되어서야 스위스에서 여성의 투표권을 허용했다. 불과 50년 전에.

출산 관련 위험과 출산에 따른 경력단절, 여성의 옷차림이나 외모를 통제하려는 시도, 여성 노동자의 임금 불평등, 성폭력 등은 여전하다. 여성들의 권리와 기회 그리고 완전한 참여를 보장하려는 노력보다는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시도들뿐이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대화가 시작되기를, 혹은 이미 시작된 대화를 이어 가기를 바란다. 절대로 이 책이 마침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만약이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여러분의 호기심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면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가서 그들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우길 응원해 주고 싶다. 가까운 도서관에 가서 책을 찾아보는 것도 좋겠다. (p. 11)'

아직 멀었다. 그런 이유로 힐러리, 첼시 모녀의 주장처럼, 계속 여성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잊히는 여성들이 없도록 이야기를 찾아 나서야 한다. 나의 아내, 나의 딸들의 인권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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