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에게 말을 걸다
김교빈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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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그의 인생에 선물 같기만 했던 배우자를 서른넷 젊은 나이에 떠나보냈다.

'죽음도 죽음에 대해서 공부를 해야 조금은 두렵지 않다는 것을 지금은 안다. 하지만 그때는 정말 아무런 준비도 없이, 죽음이라는 것이 마치 초인종 누르듯 그냥 불쑥 찾아왔다. (p. 143)'

두 아이가 남겨졌다. 미술교사이자 작가, 서양화가인 저자가 두 아이와 살아가기 위한 선택은 좋은 강연, 책, 글쓰기였다. 그가 쓴 <명화에게 말을 걸다>는 그림에 말을 걸어 세상에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스스로 치유해 나가는 과정을 풀어낸 성장 에세이다.

'나의 상처를 노출한다는 것은 발가벗는 것을 의미한다. 남에게 나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은 용기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다. 그 용기 자체가 이미 능력이기 때문이다. 자기 아픔을 드러내는 일은 그 누군가에게 내 품을 미리 내어주는 일이다. 내 아픔의 고백이 비슷한 슬픔을 겪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백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p. 182)'


폴 고갱의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저자는 이 그림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고갱이 작품 속에 인간의 모든 삶을 담으려 했음을 발견한다. 그는 자신에게 질문한다. '우리는 누구인가' 이어지는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나를 얼마나 알까? 삶의 모든 문제는 '나'를 모르기 때문이다.

폴 고갱에게 말을 걸어 얻어낸 대답은 '나를 먼저 사랑하고 존중하는 일'이다. 마테를링크의 <파랑새>에서 행복이 우리 가까이에 있다고 알려주듯 살아갈 힘의 원천도 모든 질문을 해결할 답도 내 안에 존재한다.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
'이 그림은 자욱한 안개를 바라보는 한 남자의 뒷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안개는 맹렬하게 요동치는 파도처럼 산을 덮고 있고 남자의 뒷모습은 엄숙해 보이면서도 결연한 의지로 가득 차 있다. 포효하는 대자연에 맞서려는 듯 지팡이를 짚고 서 있는 남자의 뒷모습이 고독해 보인다. 마치 인생의 거센 물결같이 거칠고 사납게 위협하는 자연에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강한 집념과 투쟁의 정신으로 작품에 긴장감을 더 해준다. (p. 234)'

저자는 결혼을 '프리마돈나'에 비유한다. 프리마돈나가 혼자 춤을 추는 '솔리스트'보다 더 뛰어난 이유는 남녀가 함께 한 호흡으로 합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완전히 다른 여자와 남자가 만나 서로 힘과 감정을 배려하는 까다로운 삶, 결혼이 바로 그렇다.

하지만 이제 저자는 '프리마돈나'로 꿈꾸었던 삶을 뜻하지 않게 멈추고 '솔리스트'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프리드리히의 그림과 말을 섞으며 '안개 바다를 홀로 바라보는 남자'의 뒷모습에서 솔리스트가 된 자신을 발견한다. 혼자 춤추면서 고독이 준 선물을 달게 받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저자의 뒷모습에서 보인다.


딸아이가 서양화를 전공한 터라 집 곳곳에 딸아이 그림이 있다. 나도 딸아이 그림에 말을 걸어보곤 한다. 그런데 아빠로서 궁금한 건 아이가 무슨 감정을 지니고 그린 그림일지, 뭘 나타내고자 했을지, 어떤 영감이 떠올랐을지, 이 아이가 자기 그림에서 무엇을 추구하는지... 딸아이를 가늠해 보는 말을 걸어본다. 저자와는 다르다.

이제부터 나도 나를 위해 그림에게 말을 걸어볼까? 아이의 미래도 궁금하지만 잠시 접고, 지나온 삶 그리고 지나온 시간보다 훨씬 짧게 남은 나머지 시간을 살아갈 답을 찾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 마음이 든다.


책을 덮고서도 잔상이 남는 그림은 윌리엄 맥그리거 팩스턴의 <스튜디오를 떠나며>이다. 뒤돌아보는 여인의 눈빛.

'단정하고 자신감 있는 차림새의 여인이 무언가 말을 건네는 듯한 눈빛이다. 이 장면을 보면 우리는 현재의 상황에 맞게 각자 상상할 수 있다. 근심이나 불안의 기색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여인의 단호한 표정이다. 다가올 일들에 대해 전혀 두렵지 않아 보인다. 오히려 당당하고 담대한 태도마저 느껴진다. (p. 271)'

그림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문밖으로 나서다 말고 뒤돌아서 그림 속 여인의 눈빛이 우리에게 건넨 말은 마치...

'"너 존재했어? 너답게 세상에 존재했어? 너만의 이야기로 존재했어?" (p.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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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
정지아 지음 / 마이디어북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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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네 편의 글은 작가 정지아의 이야기, 작가가 술잔을 부딪치며 사람들과 만난 곳, 그리고 그 사람들의 이야기다. 작가만의 유머가 담긴 글이어서 웃음 짓고 읽지만 꼭 코끝이 찡해지고 만다.

술은 친구를 불러 모은다. 구례 정 작가의 집을 드나드는 친구들은 손님을 데려온다. 술은 그 손님과 사이를 좁혀놓는다. 세상이 아무리 아득하고 어두워도 술을 마신 사람의 감각은 훤히 열려 잎사귀가 땅에 내려앉는 소리마저 보인다.

사정이 있어서 그리 살 수 없어서 원하는 삶, 한이 된 삶을 살아보고픈 소망을 술에 담아내기도 한다.
'알코올중독이었으니 참으로 귀했을 소주를 부어 만들어준 계란밥, 그 밥을 장손도 아니고 동생의 딸에게 건네준 그 마음 때문에 어쩐지 나는 큰아버지를 미워할 수가 없다. 그에게도 그만의 사정이 있지 않았을까? 그도 어쩌면 손주에게 계란밥 만들어주고 고구마 구워주는 따스하고 평범한 남자로 살고 싶지 않았을까? (p. 105)'

삶에 무게가 가슴에 얹혀 있다면 그것을 내려보내는 소화제는 술이다. 아이리시 위스키는 붉은 가슴으로 가슴이 뜨거웠던 적이 있었다는 수줍은 고백도 하게 하고, 아버지가 담근 뱀술은 한 학기 등록금 대출을 가능하게 한 교수님 배려의 깊음을 더 깊게 만들어버린다.

달았던 술이 어떤 땐 쓰고, 쓴 술이 어떤 땐 달다. 마음에 담고 있던 말도 술의 힘을 빌리면 서슴없이 말할 수 있다. 그래서 해묵은 오해를 풀어낸다. 상처를 드러내며 울고 그 상처에 술을 부어 보듬으며 같이 울고 웃는다. 술은 관계의 유통기한을 연장시켜 놓는 힘을 발휘한다.


무엇이 정지아 작가를 술꾼이 되게 만들었을까? 사람이란다.
'나는 사람을 좋아한다. 그래야 하는 직업을 갖고 있기도 하다. 소설이란 사람의 이야기니까. 그런데 아직도 사람에게 다가가는 법을 잘 모른다. 모른다기보다 어렵다는 게 더 정확하겠다. 술 없이 말을 시작하고, 술 없이 누군가의 삶 속으로 스며드는 게 나는 이 나이 먹도록 어렵다. 그래서 술을 마신다. (pp. 310, 311)'

술은 마시지 않는 나야말로 정작 사람에게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데, 먼저 말을 걸지 못할뿐더러 누군가의 삶에 엮기는 걸 힘들어하는데... 그래서 정지아 작가는 술은 마신다는데... 그렇담 사람이 좋은 나도 이제 나도 술을 마셔야 하나?

정지아의 글에, 에세이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에 술 향기가 가득하다. 이야기에 취한다. 정지아 작가와 연을 맺은 사람들, 그들 이야기에 또 취한다. 혹시 취해서 쓴 글은 아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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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2023 - 애도의 방식
안보윤 외 지음 / 북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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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란 어떤 사람들일까? 대상 수상 작가와 인터뷰한 김유태 기자는 '명확하고 선명한 답이 없는 질문을 만들기 위해 자기 생의 일부를 기꺼이 세상에 내어주는 (p. 83)'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번에 수상한 작가들도 작품을 통해 자신들의 삶에 잇대어서 만든 질문을 우리에게 던져준다.

강보라의 <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에서 주인공 재아는 처음 만난 사람들의 취향에 거리를 둔다. 재아 자신의 취향이 우월하다는 생각에서 취향에 계급을 부여한다. 김병운의 <세월은 우리에게 어울려>에서 '나'는 퀴어 삼촌을 둔 친구 장희와 부산을 방문해 죽은 줄 알았던 삼촌을 만난다. 알고 보니 사회의 시선을 피해 숨어있는 삼촌의 삶은 전해 들은 것과 다르게 전혀 부끄럽지 않은 삶이었다.

김인숙의 <자작나무 숲>에서 작가인 주인공의 할머니는 '쓰레기 호더'다. 주인공은 할머니가 죽자 그동안 모아놓은 쓰레기와 함께 유산을 상속받게 된다. 애지중지 모은 할머니의 쓰레기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엔 가치가 없는 것들이다. 묻거나 태워버린다.

'이것은 내 이야기인가, 할머니의 이야기인가 아니면 소설 속이 야기인가. 참으로 오랜만에, 그러니까 거의 한 세기 만인 듯, 빨간 줄로 죽죽 그었던 문장이 떠오른다. 빨간 줄로 죽죽 그은 후 쓰레기가 되어버렸던 문장. 그건 살인마인 아빠에 대한 문장이 아니라 그토록 생생하다고 호평받았던 할머니의 쓰레기에 관한 문장들이었다. 그 문장을 지금은 외우지 못해 대화로만 기억한다. (p. 203)'

신주희의 <작은 방주들>은 직장 생활의 구조적 부조리 피해 대상인 여성을, 그리고 지혜의 <북명 너머에서>에서는 가난한 집에 태어나 가족을 먹여살리는 주인공 성자가 젊은 시절 희망이었던 언니 조옥을 잃어버리고 기억을 잃은 남편에게서조차 잊히는 여성의 삶을 그린다.


대상 수상 작가 안보윤의 <애도의 방식>은 학생 간에 폭력을, 자선작 <너머의 세계>는 학생과 부모 그리고 교사들이 동료 교사 한 사람에게 가하는 폭력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애도의 방식>에서 동주는 승규로부터 학교폭력을 당해왔다. 동전을 던져 '앞'인지 '뒤'인지를 묻고 틀리면 때린다. 동전의 앞뒤를 결정하는 건 승규 마음이다. 동주가 이런 승규의 결정을 순순히 따르는 건 굴종이다. 이어지는 폭력은 신체에 고통을 준다. 평소와 같이 승규가 동전을 내밀자 동주는 승규가 임의로 바꿀 수 있는 '앞' '뒤'가 아닌 '호랑이'라고 대답한다. 바로 이때, 동주는 주먹을 피해 앉았고 승규는 공사 중이던 건물 옥상에서 떨어져 죽는다.

이제 학교폭력을 당해왔다는 사실이 살해 동기가 된다. 동주가 혐의를 벗는 방법은 부정이다. 이제까지 시달렸던 굴욕과 고통은 없었던 일이 돼버린다.

뉴스로 학폭을 전해 듣지만 사건이 변질돼 우리 머릿속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또 이슈가 되면 시끌벅적하게 떠들어댄다. 그리고 또 잊고...

'애도(mourning)란 사랑하는 이의 죽음에서 오는 슬픔을 일컫는다. 정신분석학에서 '성공적인' 애도란 상실한 대상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는 것이다. 그래야 상실감의 비애 속에 함몰되지 않고 남은 삶을 지속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p. 76)'

피해자는 잊을 수 없어 굴욕과 고통은 해결되지 않는다. 모호한 상태로 남아 애도에 성공하지 못할뿐더러 승규의 죽음으로부터도 벗어나지 못한다. 삶의 일부분을 매듭짓지 못해 새로운 삶을 살기도 어렵다.


사회가 개인에게 가하는 구조적인 힘과 논리에 개개인은 어떻게 대항할 것인가. 작가들은 명확하고 선명한 답을 낼 수 없는 질문을 한다. 답이 없으니 이제까지 살아온대로 관성을 유지하며 살 것인가? 그렇다면 작가들은 또 우리에게 질문할 것이다. 멈추고 가던 방향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우리가 갈 때까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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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말라고는 안 했잖아요? - 한국문학 번역가 안톤 허의 내 갈 길 가는 에세이
안톤 허 지음 / 어크로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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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말라고는 안 했잖아요?>는 한국문학 번역가인 안톤 허의 일과 삶을 담은 에세이다.
'그래서 말한다. 번역은 쉬울지 몰라도, 번역가는 힘들다고. 나는 한국문학 번역가다. (p. 25)'

해외 작품을 우리글로 옮기는 작가도 그리 흔치 않을텐데, 우리 문학을 영어로 번역하다니, 정말 드물겠다고 짐작했는데 역시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한영 문학번역가는 세 명 남짓이다. 게다가 영어권에 한국문학 작품이 일 년에 열 권만 출판돼도 많은 편이라고 한다.

저자 안톤 허의 대단함은 지금부터다. 다 알다시피 그는 지난해 자신이 번역한 <저주토끼>, <대도시의 사랑법> 두 작품이 부커상 롱리스트(1차 후보)에 올랐다. "TWICE! (두 권이나!)" 일 년에 열권 남짓 번역돼 출간되는 작품 중, 세 명 정도의 한영 문학번역가가 있다 치고... "TWICE! (두 권이나!)"말이다. 안톤 허는 부커상 역사상 더블 롱리스팅이 된 세 번째 작가다.

이런 대단한 작가의 삶을 읽는다는 것, 그가 하는 일은 안다는 것, 그가 자신의 삶을 대하는 태도를 엿볼 수 있다는 것만큼 즐거운 일이 있을까?

'부모님 말은 절대 들어서도, 믿어서도 안 된다. 그들은 자기 인생밖에 모르는 사람들이다. 실수를 해도 자신의 실수를 하는 것이 낫다. 인생을 망쳐도 내 손으로 망쳐야 한다. 이 진리를 십 대 때 알았더라면, 가장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배울 수 있었던 한 번뿐인 소중한 이십 대 시절을 그처럼 무의미하게 낭비하진 않았을 텐데... (p. 63)'

이런 당당함은 또 뭔가. 내 아이들이 이런 자신감으로 세상을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프린스턴대학교 강연 가운데 언어가 권력 도구로 쓰인다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이제까지 전혀 생각해 보지 못한 접근이어서 흥미로웠다.

우선 왜 대기업 지원자가 TOEIC으로 영어 실력을 입증해야 할까 하는 의문이다. 대기업의 모든 사원들이 반드시 영어 실력이 출중할 필요가 있을까? TOEIC 점수를 높이기 위해서는 비싼 과외나 유학을 보낼만한 여유가 있어야 한다. 지원자의 경제 계층을 파악하려는 의도가 아닐까라는 것이 저자가 품은 생각이다. 영국에 존재하는 귀족처럼 한국에는 영어 귀족층이 존재한다.

'전미번역상 수상자 테자스위니 니란자나 교수는 <번역의 위치화 Siting Translation>라는 저서에서 번역의 식민주의적 뿌리 및 식민지 현지 통번역가들이 '언어 하인'으로 간택되는 방식에 대해 논합니다. (p. 214)'

지주로부터 소작인들의 관리를 위임받은 마름이나,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보다 더 한국인을 괴롭힌 앞잡이들처럼 지배자의 언어를 중간에서 선점해, 전달하는 과정에서 한 편에겐 군림하지만 결국 힘 있는 자의 하인이 됨을 경계해야 한다는 논리다. 즉 번역이 도착어의 시중드는 행위가 돼서는 안된다는 편에 저자는 서 있다. 번역가가 언어에 열등감을 가진다면? 옳지 않다.


한국문학 번역가로서 번역 일을 하며 겪은 저자의 경험담은 국수주의, 차별 등 여러 사회 문제들을 담론으로 이끌어 낸다. 관습과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거침없이 행동하는 저자의 낯선 모습이 신선하다. (나만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데) 작가란 연락을 먼저 하기보다 받는 입장의 다소 수동적 태도를 가진 사람이 아닐까라는 고정관념이 깨지는듯해 안톤 허의 삶이 그의 글이 좋았다. 흔치않은 삶을 만나는 경험도 특별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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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인간 - 인생을 단단하게 살아내는 25가지 지혜
발타자르 그라시안 지음, 강민지 옮김 / 교보문고(단행본)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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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불평불만이 많은 당나귀는 제우스 신 앞에 서서 왜 나만 불행한지 따져 물었다.
'오만한 사자가 승리합니다. 잔혹한 호랑이가 살아남습니다. 모두를 속이고 모두가 비웃는 여우가 이깁니다. 게걸스러운 늑대가 남습니다. 저는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았는데 모두가 저에게 피해를 줍니다. 저는 능력이 부족해서 일을 많이 합니다. 칭찬은커녕 꾸중만 듣습니다. (p. 222)'

이에 대한 설명을 듣고자 제우스는 '행운'을 찾아 데려오라고 했다. '행운'을 찾아 나섰다. '명령'의 집은 혼란스러울 뿐 행운은 없었다. '부'의 집에 들어가 봤더니 잠시 머물렀다가 가시덤불과 송곳 몇 자루를 남기고 바로 떠났다고 했다. '미'의 집, '현명'의 집에도 없었다. '가난'의 집에 갔더니 말하기를 아직 '행운'이 오지 않았지만 항상 '행운'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책 <세상을 바라보는 지혜 (쇼펜하우어 編, 두행숙 譯, 도서출판 둥지)>로 발타자르 그라시안을 만났다. 간결한 글에 실린 힘과 지혜에 매료되어 책 한 권을 더 사 사무실 책상에도 놓았다. 비록 몇 년 동안이었지만, 집에서도 직장에서도 촌철살인寸鐵殺人의 글로 하루를 시작하며 쇼펜하우어가 그의 글을 인생의 동반자로 삼았듯이 나도 그렇게 했다. 지금도 빛바랜 표지의 그 책을 가끔 펼쳐 읽곤 한다.

17세기 위대한 철학자 발타자르 그라시안은 예수회 신부다. 그러나 그의 글에서 종교적인 냄새를 맡기란 쉽지 않다. 그가 생각한 삶의 목표는 명예나 부를 이룩한 성공이 아니다. 개인의 성숙이다. '인생을 단단하게 살아내는 25가지 지혜'라는 부제의 <완전한 인간>에서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도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고 자신을 온전히 지키라는 것이다.

'삶의 절반은 대화를 하며 흘러갑니다. 풍부한 지식은 현명한 사람들을 위한 맛있는 식사입니다. (p. 58)'
'선택이 없는 곳엔 완벽이 없습니다. 선택할 줄 아는 능력과 선택을 잘하는 능력, 이 두 가지가 탁월한 능력입니다. 선택하지 않으면 우연이나 욕망에 따라 맹목적인 길을 가게 됩니다. (p. 104)'
'비판은 비난과는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비판은 감정을 배제한 것이고 비난은 성급한 의심입니다. (p. 191)'


우리 인간에게 완전함이란 게 존재할까? 발타자르 그라시안은 도덕 철학이 우리를 신중한 인간으로 만들고, 자연은 현명한 인간으로, 역사는 준비된 인간으로, 시는 독창적인 인간으로, 수사학은 유창한 인간으로, 인문학은 신중한 인간으로, 우주학은 박식한 인간으로, 성서는 경건한 인간으로 만들어 성숙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들 수단으로 나를 성숙한 인간을 만든다는 건 결국, 우리는 완전한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우리 삶은 내 삶을 완전한 삶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 이 책에서 말하는 25가지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이 책을 덮으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완전한 인간이 되고자 하는 삶의 마지막은 죽음이란 생각을. 혹시 죽음에 이르러야 비로소 완전함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단 한 번 찾아오는 죽음을 잘 맞이하는 삶이 결국 완전한 인간의 삶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행운'을 찾았다.
마침내 '선'의 집에서 웃음 짓는 '행운'을 찾았다. 물론 모두를 기쁘게 하긴 어렵지만 그렇더라도 왜 매일 불만을 늘어놓는 자들이 나를 찾아오는지 제우스는 '행운'에게 물었고 '행운'은 대답했다.
'"위대하신 제우스여,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그 당나귀는 대체 누구에게 불만을 토로하는 것입니까?" (p. 225)'

'행운'의 답을 듣고 제우스는 위로 대신 당나귀에게 이렇게 말했다.
'"불행한 짐승이여, 네가 더 많은 것을 깨달았다면 그토록 비참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부터 사자의 명석함, 코끼리의 신중함, 여우의 영리함, 늑대의 주의력을 배우도록 하라. 준비물을 잘 갖췄다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필멸의 운명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p. 226)'

완전한 인간은 아니더라도 완전한 인간이 될 준비가 되어있다면 그 운명 자체가 '행운'인 셈이다. 죽음을 잘 맞이할 운명인 삶...

'다른 이에게서는 불행이 아닌 행복만 보고 자신에게서는 행복이 아닌 불행만 보는 건 자신을 학대하는 행동이다. (p. 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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