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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것들의 인문학
조이엘 지음 / 섬타임즈 / 2024년 5월
평점 :
'왕이 될 가능성이 아예 없이 제왕학 수업을 하나도 이수하지 않았던 고1 청소년이, 1567년 덜컥 왕위에 오른다. 조선 14대 임금 선조다. (p. 14, 실패한 과외)
'이게 나라냐' 싶은 말이 나올 것도 같고, 큰일이다 싶기도 하고 해서 퇴계 이황이 속성으로 족집게 과외를 했다. 그런데 이 인물의 됨됨이가 심각하다. 자기성찰이 부족하고, 그릇 사이즈는 초밥집 간장 종지고, 귀가 엄청 얇고, 스승을 엄청 존경하지만 충고는 가려서 듣는다.
450년 전의 선조와 비스므레? 아니 딱 들어맞는 한 사람이 2022년에 '덜컥' 등장했다. 싸한 느낌의 이런 역사는 왜? 꼭, 반드시, 반복될까?
<사소한 것들의 인문학>은 제주도에 과수원을 몇 개는 살 수 있을 정도의 돈으로 책을 사 모은 조이엘 작가의 네 번째 책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이야기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p. 75, 이괄)' 우리는 이야기로 산다.
퇴계 이황, 선조, 이괄, 허엽을 비롯한 그 집안사람들, 광해군, 윤선도 등 이들을 들여다보는 164편의 (그리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에서 오늘날 우리들이 겪고 있는 현실을 이해할 만한 실마리를 끄집어낸다. 풍자를 곁들인 작가 (천재라고 말하고 싶은) 조이엘의 깊고 넓은 지식의 향연은 인문학이 소설보다 재미있음을 증명한다.
서른 살의 젊은 선비 윤선도는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에 참다못해 이이첨의 실체를 폭로하는 탄핵 상소를 광해군에게 올린다. 광해군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절대 권력자는 절대로 토론하지 않는다. 토론이, 제가 누리는 절대 권력을 갉아먹는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주주의 반대말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불통과 독재, 그리고 입틀막이다. (p. 275, 276, 입틀막)'
토론만 안 하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임금이건, 대통령은 질문에 대답도 하지 않는다. 광해군은 정적 제거를 마무리한 다음 경운궁 리모델링과 창경궁 중건을 명령한다. 그런데 이상한 건 궁이 완성됐는데도 들어가질 않고 오히려 경덕궁과 인경궁 신축을 지시해 백성들을 힘들게 한다.
'"들어가 살지도 않을 궁궐을 왜 그렇게 지으셨어요?" (p. 330, 이해할 수 없는 행동)'
묵묵부답......
그래서 17세기, 21세기를 힘겹게 살아가는 백성은 (토론도 대답도 안 하는 자의) 이상한 행동을 하는 이유로 네 가지 중 하나일 거라 생각 (했다) 한다.
'머리가 나쁘다, 머리가 아프다, 배후에 법사가 있다, 부인 배후에 법사가 있다. (p. 330 이해할 수 없는 행동)
광해 10년 4월 13일(내 결혼기념일이네?) 기록을 보면 성지라는 요승妖僧있었다. 인왕산 아래에 왕기王氣가 있다고 왕을 헷갈리게 해서 인경궁을 짓게 하고 출세해 그 위세가 하늘을 찔렀다. 400년 세월이 흘러 이번엔 요목妖牧이 나타났다.
'"여자 신도가 나를 위해 속옷을 내리면 내 신자, 그렇지 않으면 내 교인이 아니다."(2005) (p. 352, 요승과 요목)'
2012년 대선 때 '셀프 감금'이라는 신조어를 만들며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댓글 공작 사건, 1612년에도 있었다. 이이첨을 보스로 하는 대북파가 정적을 제거하려고 댓글 공작을 폈다. 역모죄로 고발당한 허균도 위기를 극복할 수단으로 팩트가 약간 섞인 댓글 공작을 활용했다.
'인문학은 청년들에게 이런 도움을 줄 수 있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볼 수 있도록 한다. 그래서 당연한 것을 의심할 수 있도록 한다. 심지어 기존 진리 주장까지도 의심할 수 있도록 한다. 결국엔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p. 226, 인문학 무당)'
얼마 남지 않은 수명 안에는 선조를 바꾸기 힘들다고 생각한 퇴계는 궁을 떠난다. 동호대교 북단 두뭇게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저자도를 들렀다가 잠실 운동장, (내 직장이었던) 롯데월드, 서울아산병원을 지나 광나루에 잠시 쉬었다가 (여기서부터) 남양주시 미음나루에서 하룻밤을 지낸 후 팔당대교를 지나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여기까지 내가 사는 동네)를 지나간다.
퇴계가 지난 간 곳이라 생각하니 내게 너무 익숙했던 잠실, 미음나루, 두물머리가 낯설게 느껴진다. 배를 타고 퇴계가 가졌을 상념과 잠실을 출퇴근하며, 우리 동네 한강을 산책하며 내가 품었던 여러 생각이 관통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어쭙잖은 상상도 해본다. 통쾌하고 속 시원한 글이다. 그래서 단숨에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