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구공은 없다 - 다이몬에 관한 단상
정영운 지음 / 좋은땅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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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4학년 1학기를 마칠 때쯤 당구를 치기 시작했다. 남들은 취업 준비하려고 잘 치던 당구를 끊을 판에 나는 늦바람이 들었다. 다행히 일찌감치 취업한 친구 한 명이 있어 그 친구 당구를 치기 했지만 흥미를 느끼지 못대 결국 몇 개월 후 그만두었다. 하지만 당구장에서만 쓰는 용어라든지 당구 치는 요령은 제법 알았다. 다만 구력이 짧아 요령대로 치지 못하는 게 문제였다.

나같이 당구 하수에게 가끔 찾아오는 게 있는데 '뽀로꾸'다. 그 느낌은 어리둥절 기쁨이다. 심리적 갈등도 있는데 내가 의도한 것이라고 해야 할지 아님 우연이라고 커밍아웃해야 할지 잠시 머뭇거린다.

'보르헤스가 말한다. "한차례 일어났던 사건은 영원히 반복되면서 존재하게 된다." 우연이 반복되면 필연이 된다는 말이고, '한 번의 우연은 우연이지만 두 번의 우연은 필연이다'와 비슷한 말이다. 한차례 일어났던 뽀로꾸는 계속되는 반복을 통해서 존재로 탈바꿈할 수 있다. 물론 뽀로꾸를 연습하라는 말은 아니다. 뽀로꾸도 반복해서 연습하면 길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한 번의 '뽀로꾸'는 뽀로꾸지만 반복되는 뽀로꾸는 실력이다. 자연은 반복을 통해서 우연을 필연으로 만든다. (p. 130)'

연습할 때 무슨 생각을 하냐는 리포터의 질문에 김연아 선수는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생각은 무슨 생각을 해요? 그냥 하는 거지." 대회에서 우승한 후 경기 중에 무슨 생각을 했냐고 물었다. 김연아 선수의 대답은 "초반에 약간 긴장했지만 곧바로 연습한 것처럼 했습니다."였다.


저자 정영운은 현재 서울에서 당구클럽을 운영 중이다. 그래서 당구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당구를 잘 치는 기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별 부담을 느끼지 않고 일상적으로 행하는 '당구 치는 행위'에 대한 '철학적 의미'를 전혀 '철학적이지 않은 어조'로 이야기하려 한다. 따라서 일상적으로 당구를 치듯이 부담 없이 보면 된다. (p. 6, 7)'

<당구공은 없다>는 저자가 가장 잘 하는, 아니 저자는 '잘한다'라는 의미가 능숙하고 뛰어나다는 말이 아닌 '자주 한다'라는 의미라고 하니 가장 자주 하는 두 가지 행위, 당구 치는 일과 책 읽는 일을 버무려 만든 책이다. 이 책에 인용 및 참고한 책 리스트를 보면 저자가 책 읽는 일을 얼마나 자주 했는지 그리고 그의 철학적 사유가 얼마나 깊은지를 짐작할 수 있다.


도끼로 나무를 자르는 인디언을 측은하게 여긴 '자본주의적 백인'이 전기톱을 보여주었다. 좋아하는 인디언을 보고 백인은 도끼 대신 전기톱을 사용해 열 배나 많은 나무를 베는 인디언의 모습을 흡족해하며 상상했다.

'하지만 웬걸, 그 인디언 부족은 전기톱을 가지고 열 배 많은 나무를 베는 게 아니라 작업 시간을 십분의 일로 줄이고 나머지 시간은 빈둥빈둥 놀았다. 그래서 전기톱을 보고 기뻐했던 것이었다. (p. 69)'

'자본주의적 백인'은 나무 베는 일을 일로 여겼다. 하지만 인디언은 나무 베는 일을 놀이처럼 했다. 나무 베는 목적이 서로 달랐다.


그래서 내 당구 실력은? 내가 게임을 끝내본 적이 없다. 당구장에서 기분 좋게 외치는 '났어요~'란 말을 해본 적이 없다. 한때 제일 듣기 싫은 말이 "여태 당구도 안 치고 뭘 했어?'였다.

'뽀로꾸'도 반복해서 치다 보면 실력이 된다는 생각을 못 했다. 당구를 여럿이 어울려서 쳤어야 재미를 느꼈을 텐데 (하필이면 공 한번 치는데 요리 재고 조리 재고 안경을 몇 번씩이나 끌어올리는 '시간 겐세이'가 심한) 한 친구와 치다 보니 실력 향상을 위해 공부하듯 당구를 쳤다.

지금 난 저자처럼 당구와 책 읽기 두 가지 행위를 자주 하지는 못하고 책 읽기 하나만큼은 자주 한다. 책을 읽다 보니 당구의 '뽀로꾸'처럼 생각거리가 우연히 얻어걸리기도 한다. 한 권 두 권 계속해서 읽다 보면 우연이 필연이 되듯이 '뽀로꾸'가 실력이 되겠지? 그리고...

'세상은 여전히 달라지진 않지만, 그 여전한 세상에서 '즐거움'을 훔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진다. 곧 독서가 눈에 보이는 사회적 지위를 높여 주진 못하겠지만 보이지 않는 내적 쾌감을 제공할 수는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앞에서 누누이 말한 바대로 즐거움은 그냥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건 나를 강하게 만드는 물리적 힘이다. 곧, 독서는 즐거움을 통해 자존감의 토대를 강화한다. 해서 최대한 상황이 허락하는 상황을 만들어 내면서 독서를 해야 한다. '그게 가장 이문이 많이 남는 장사다.' 쇼펜하우어가 말한다. (p. 349, 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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