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Chaeg 2022.6 - No 77
(주)책(월간지) 편집부 지음 / (주)책(잡지) / 2022년 5월
평점 :
품절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고 놀다 보면 어느새 해가 어둑어둑 집니다. 물에 젖은 신발을 신은 채 철퍽철퍽 집으로 가는 길도 즐겁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무슨 할 이야기가 그렇게 많았는지, 집으로 가는 길은 짧기만 합니다. (...) 집에 들어가면 뭐든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처럼 시장합니다. 고추장과 김치를 비벼 만든 비빔밥을 한 숟가락 입에 떠 넣고, 열무물김치를 쭈욱 찢어 먹으면 세상은 다 내 것이고, 그 순간만큼은 전학 간 첫사랑도 잊었습니다. 밥을 다 먹으면 밥숟가락을 놓자마자 또다시 일어납니다. 아이들이 모두 골목에서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지요. - 나의 여름, 김제동 (p. 39)'

나의 여름은 중고등학생 시절 교회 또래들과 함께 여름마다 즐기던 낚시였다. 주로 소래 포구에서 망둥이를 잡곤 했는데 대나무 낚싯대를 사용했다. 지렁이를 무서워하는 여자아이들의 미끼를 끼워주고, 점심은 만들기 손쉬운 카레였다. 코펠에 밥을 짓고, 당근, 감자를 썰어 익힌 후 카레를 넣고 휘휘 저어주면 어느새 걸쭉해진다. 여름이면 소래 인근엔 복숭아가 지천이었다. 한 입 먹을 때마다 물이 줄줄 흐르는 복숭아는 오후에 허기진 배를 채우는 최고의 여름 과일이었다.


이 달의 테마는 바로 문 앞에 와있는 계절 '여름으로'

'우리를 찾아온 여름을 있는 힘껏 끌어안고 즐길 수 있도록 <Chaeg>이 각종 여름 이야기를 모아보았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바래지 않는 아름다운 여름으로 기억되기를 바라며. - 지금 우리 계절은, 편집장 지은경 (p. 17)'


'스웨덴의 한림원은 그의 문학을 "식민주의 효과와 각 문화 간, 그리고 대륙 간 심연에 빠져 헤매고 있는 난민의 운명을 비타협적이고 동정적으로 간파" 하고 있다는 소감을 들며 노벨문학상을 수여한다고 밝혔다. (p. 56)'

'한여름 밤의 책'에서 아프리카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압둘라자크 구르나를 소개한다. 영문학인가 아프리카 문학인가? 압둘라자크 구르나를 포함한 아프리카 작가들의 고민은 이중적 감정이다. 300여 년에 걸친 식민 기간에서 비롯됐다. 전통에 대한 혐오와 근대성의 갈망 그리고 반대로 아프리카 전통을 향한 애정과 식민을 빼놓고 논할 수 없는 근대성을 배격하는 마음이다.


'책 속 이야기'에서 소개한 다섯 권의 책은

화가이자 작가인 우지현이 물을 사랑하고 즐겼던 화가들의 그림 100여 점을 소개하는 에세이 <풍덩>, 휴가를 떠나는 이들의 기분을 알록달록한 색들로 표현한 이명애 작가의 그림책 <휴가>, 휴가지에서의 하루를 시간대별로 그려낸 솔 운두라가의 <여름 안에서>, 울릉도 역사 보고서 김도훈, 박시윤의 <우리가 몰랐던 울릉도, 1882 여름>, 호아킨 소로야의 <바다, 바닷가에서>이다.

관심을 끌었던 건 클로드 모네가 '빛의 대가'라고 호평한 호아킨 소로야의 그림이었다.
'그의 팔레트와 붓질은 자연 풍경과 그라나다의 무슬림 정원, 그리고 무엇보다도 바다 앞에서 솜씨를 발휘했다. (p. 119)'

가만히 보고 있자니, 지은경 에디터의 글처럼 '바다의 물결, 곳곳에 반사되던 빛의 밝기와 공기의 농도, 습도, 냄새 (p. 116)'가 그림에서 느껴진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 눈을 사로잡은 건 그의 굵고 과감한 붓 자국으로 단순하게 처리한 사람들의 얼굴과 몸짓에서 여러 가지 표정과 섬세한 동작들이 보였다. 살짝 웃고, 찡그리고, 모래를 밟으며 달리고 걷고, 무언가 말하는 듯한 세밀하고 다양한 표정이 신비롭게 다가왔다.


대부분 여름에 휴가를 보내다 보니 추억이 제일 많은 계절은 누가 뭐래도 여름이 아닐까? 강가나 계곡, 바다는 다양한 추억의 장소다. 그곳에 누구와 있었는지, 내 인생에 어느 시기에 갔는지에 따라 다양한 감정과 장면들이 차곡차곡 쌓이는 계절, 여름이다. 청춘과 닮은 계절, '여름이었다'.

'여름에 대한 양가적 감정은 우리가 청춘을 생각하는 방식과도 닮아있지 않은가 싶다. 청춘을 지나 보낸 이들은 그때의 반짝임을 아름답게만 추억하지만, 정작 청춘을 지나는 동안에는 아픔과 혼란, 절망과 부끄러움을 수시로 겪기 때문이다. - 눈부시던 계절에, 김수미 (p. 5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쓰고 싶다 쓰고 싶지 않다
전고운 외 지음 / 유선사 / 202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직장 생활을 하면서 많은 프로젝트를 경험했다. 어트랙션을 도입 설치했고 뮤지컬 극장도 지었다. 항상 막바지가 돼서야 일분일초가 소중했고 밤새워 일하곤 했다. 마무리하여 오픈하고 든 생각은 하루의 여유가 더 있었더라면 완벽했을 텐데...

'기자들 사이에서는 '마감이 원고를 쓴다'는 유의 농담도 있는데 ( p. 84)'

시험 일자가 코앞에 닥쳐야 마음을 잡고 책상에 앉는다. 책상에 먼지가 있네? 청소하고. 샤프가 잘 작동되지 않네? 분해해 조립하고. 살짝 배고픈 것 같네? 일단 뭐 좀 먹고. 갑자기 평상시 눈도 안 가던 소설이 당기네? 물도 갖다 놓아야 하고. 어떤 과목부터 해야 할지 순서도 정해야 하고. 시간도 과목별로 쪼개야 하고. 시험공부를 완벽한 환경에서 시작해야겠기에... 할 일이 마구마구...

'그때 나는 느꼈다. (...) 정말 지금 완벽하게 글을 쓰기 위한 상태가 된 것이 맞는 건지 집요하게 묻고 있다는걸. (...) 그동안 나는 쓰기 위한 준비를 해왔던 게 아니라 오로지 그 일을 하지 않기 위해 피해 다니기만 했었다는걸. (p. 70)'


작가, 감독, 배우 9인의 각자 자리에서 '글 쓰는 마음'의 이야기가 담긴 에세이집이다. 쓰는 일을 하는 그들은 어떤 마음으로 글을 쓸까? 사적인 이야기다. 솔직하게 풀어내는 이야기 속에 고독, 치열함, 행복, 고통, 모순, 낭만, 단호한 결심, 불안, 마음가짐, 대화 등등 온갖 게 교차한다. 글 쓰기에 이토록 많은 감정이 담겼다.

영화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 전고은은 글과 나 사이에 차가운 강을 맨몸으로 건너 글쓰기에 이른다. 인생이 그렇듯 이석원 작가의 글쓰기는 오락가락이다. 어느 날은 한 글자도 못 쓰고 어느 날은 책 한 권 분량을 너끈히 써내고. 기자 이다혜는 뭐든 써야겠기에 글을 쓴다. 만만하지 않지만 그래도 글을 쓴다.

아티스트 이랑은 글쓰기 과정에서 희로애락 모두를 느낀다. 배우 박정민은 쓰고 싶지 않은 이유를 서른두 가지나 나열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글을 쓴다. 영화도 만들고 글도 쓰는 김종관은 쓰고 싶은 순간을 만들기 위해 허구 속으로 달려간다.

백세희 작가는 무리하게 에너지를 소진하는 과정에서 그 불안함을 에너지로 글을 마무리 해낸다. 소설가 한은형의 글쓰기는 마음가짐이다. 무엇에도 흔들림 없고, 지지 않는 부드러운 마음. 영화감독 임태형의 글쓰기는 타인과의 대화다. 나를 내비치고 표현하는 대화.


쓰는 행위는 일기처럼 자신에게 솔직함을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다. 아픈 상처를 치유하는 수단이기도 하고, 힘겹지만 글쓰기에서 행복도 느끼고. 하지만 글쓰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건 부담감이다. 답답해 도망치고 싶은 마음. 매번 도망치고 싶어 하며 다시 글과 마주하게 되는 모순. 이게 글쓰기만의 매력이다.

쓰고 싶은 마음과 쓰고 싶지 않은 마음을 오가며 글을 완성하는 진솔한 고민은 꼴랑 네댓 자 쓰는 나의 갈등만은 아니었다. 글 쓰는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들과 나의 차이가 있다면 성실함과 꾸준함 그리고 근육이 있고 없고...

'작가에게 필요한 것은 천재적인 영감보다는 성실함과 꾸준함이다. 당연한 얘기 같지만 의외로 당연하지 않다. 작가에게 가장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가 그것이기 때문이다. 글쓰기는 없는 근육을 만들어 유지하는 일과 같다. (p. 23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불꽃으로 살다 - 짧지만 강렬하게 살다 간 위대한 예술가 30인의 삶과 작품 이야기
케이트 브라이언 지음, 김성환 옮김 / 디자인하우스 / 202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키스 해링이 에이즈 합병증으로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을 때 한 말이다. 고작 31세에 사망했다.

"후회는 없다. 내가 죽음을 직면하는 데 어려움을 겪지 않는 이유는 죽음이 한계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죽음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고, 언젠가는 반드시 일어나게 되어 있다. 만일 이런 관점에 따라 살아간다면 죽음은 그 무게를 상실하게 된다. 내가 지금 하는 모든 일은 정확히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일들이다." (p. 27)'

케이트 브라이언의 <불꽃으로 살다>는 찬란하게 그리고 처절하게, 짧지만 불꽃같은 예술혼을 보여주고 젊은 나이에 죽음에 이른 예술가 30인의 인생을 들여다본다. 저자는 젊은 나이의 기준을 40세 전후로 잡았다. 20대 초반부터 작품 활동을 시작하더라도 예술가로서의 삶은 20년 남짓이다. 수십 년간 재능을 연마해야 하는 예술가의 속성을 감안할 때 턱없이 부족한 기간에 놀라운 업적을 이룬 이들은 천재들임에 틀림없다.


30인의 예술가들을 다섯 개의 주제로 분류하여 불꽃의 삶을 소개한다.

첫 번째는 찬란하고 빠르게 타오른 요절한 예술가들이다. 예술을 자신의 생명보다 소중히 여긴 키스 해링, 회화의 규칙을 다시 쓴 장미셸 바스키아, 예술 역사상 최대의 악동인 카라바조, 뉴욕의 진정한 보헤미안 대시 스노. 이들은 요절했지만 삶이 짧아 보이지 않는다. 우리들의 호기심을 계속 자극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때 이른 죽음으로 죽음이 '신화화'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킨 예술가들이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해 받지 못한 천재 빈센트 반 고흐, 처참한 사건들이 신화가 된 아마데오 모딜리아니, 흐릿한 형체와 유령 같은 형상을 활용한 프란체스카 우드먼, 자신의 몸을 도구 삼아 작품을 찍어낸 아나 멘티에 타, 대중과 소통하는 능력을 타고난 미술 민주주의자 필릭스 곤잘레즈토레스, 신화가 확고한 명성이 된 라파엘로. 죽음을 맞이하고 나서야 비로소 엄청난 존경과 찬사를 받은 이들이다.

세 번째 그룹은 시대를 너무 앞선 선구자들이다. 미니멀리즘과 개념 미술, 행위 예술, 그리고 마음챙김 명상의 대유행 등을 미리 예견한 이브 클랭, 미국식 가정집을 둘로 쪼개는 식으로 공간과 형태를 전복시킨 고든 마타클라크, 기존의 사진을 순수 예술로 만든 로버트 메이플소프, 인간의 형상을 끊임없이 탐색한 에곤 실레, 현대 예술 최초의 임신 자화상을 작품으로 남긴 파울라 모더존베커, 유럽과 인도 두 문화 간의 연결 고리를 제공한 암리타 셔길, 빛의 마술사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의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자연과 직접 교감한 로버트 스미스슨. 이들의 작품은 가치를 인정받고 수용되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네 번째는 질병과 여러 갈등에 시달리며 창작 활동을 한 이들이다. 시달린 병고를 예술에 엄청난 평안과 영감의 원천으로 삼은 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와 오브리 비어즐리, 아프리카계 미국인 예술가이자 큐레이터였던 노아 데이비스, 불안정하고 비전통적인 재료를 활용한 에바 헤세, 비극적인 그래픽 노블과도 같은 삶을 산 샤를로테 살로몬, 전쟁을 진보의 기반이 되는 정화의 과정으로 이상화한 움베르토 보초니, 전쟁터에서 사망한 최초의 여성 전쟁 사진작가 게르다 타로. 이들에게 예술은 구원에 이르기 위한 수단이자 하나의 은신처였다.

마지막으로 죽음으로 잊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예술가들이다. 전문적인 여성 예술가를 전혀 인정해 주지 않았던 빅토리아 시대의 분위기 속에서 죄책감과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소망 사이에서 갈등을 겪었던 조애나 메리 보이스, 명성과 아름다움이 오히려 불리하게 작용한 팝 아트의 디바 폴린 보티, 정치적 대상으로서의 여성의 신체와 작품 창작 활동, 사회적 기대 등과 씨름을 벌인 헬렌 채드윅, 배타적인 예술계를 단숨에 사로잡은 흑인 여성 카디자 사예, 문학과 음악을 그림에 끌어들인 바살러뮤 빌. 이들의 유산은 찬사 받고 소중히 여겨져야 할 가치가 있기에 이야기는 아직도 끝나지 않고 계속된다.


'아프리카에는 삶과 시간에 관한 독특한 관념이 있다. 사람이 죽어도 그를 기억하는 이들이 있는 한 그는 '현재와 그 가까운 전후'를 뜻하는 '사샤sasha'에 살아 있다. 그를 기억하던 이들이 더 이상 없을 때 그는 '먼 과거'를 뜻하는 '자마니zamani'에 잠기게 된다. (p. 9)'

불꽃으로 살다가 때 이른 죽음을 맞이해 아직도 드러나지 않은 예술가들이 많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겠다. 먼 과거를 뜻하는 '자마니'에 잠긴 예술가들 말이다. 하지만 진정한 예술가는 죽지 않는다. 하지만 불멸에 전제가 되어야 할 것은 그들을 찾아내어 '기억하는 일'이다. 그래야 우리와 가까이 '사샤'에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남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덟 건의 완벽한 살인
피터 스완슨 지음, 노진선 옮김 / 푸른숲 / 202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리스트 한 여덟 편의 소설에 따라 살인을 저지르는 자가 대체 누구란 말인가?
이 일련의 사건 발단은 보스턴의 추리소설 전문 서점 주인 맬컴 커쇼의 교환 살인으로부터 시작됐다.


맬컴 커쇼는 올드데블스 블로그에 '여덟 건의 완벽한 살인'이란 글을 올렸다. 새로운 보수의 지시에 따라 완벽한 살인이 등장하는 범죄소설 여덟 편을 리스트 했다. 눈보라가 계속되는 어느 날 FBI 요원이 찾아와 서점을 운영하며 살아가는 맬컴 커쇼에게 질문한다.

'그녀는 가죽 가방의 지퍼를 열더니 종이 한 장을 꺼냈다. “2004년에 당신이 이 서점 블로그에 썼던 리스트, 기억하세요? '여덟 건의 완벽한 살인'이라는 리스트였죠.” (p. 19)'

그 범죄소설 리스트는 A.A. 밀른의 <붉은 저택의 비밀>, 앤서니 버클리 콕스의 <살의>, 애거서 크리스티의 <ABC 살인사건>, 제임스 M. 케인의 <이중 배상>,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열차 안의 낯선 자들>, 존 D. 맥도널드의 <익사자>, 아이라 레빈의 <죽음의 덫>, 도나 타트의 <비밀의 계절>이다.


소설 초반부는 약간 지루한듯했지만 추리소설답게 빠져드는 소설이다. 추리소설의 백미는 역시 범인을 찾는 일. 살해당한 이들이 커쇼 서점의 단골손님에서 점차 커쇼의 아내의 죽음에 관계된 인물들로... 살인자가 점점 커쇼를 향해 다가온다. 커쇼는 의심 가는 자들을 용의자 선상에 올려놓고 하나하나 파헤쳐 나간다.

커쇼도 나도 범인을 지목하는 데 실패했다. 국내에 소개된 피터 스완슨의 전작 <죽여 마땅한 사람들>에서 스완슨의 진가를 보여준 모양인데, 소설 막판에 이르러 전혀 예상치 못한 범인의 등장은 추리소설의 매력을 느끼기에 충분한 반전이었다.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졌을 때 범인을 가리키는 요소들이 이미 있어서 설득력이 있었다. 탄탄하고 짜임새가 돋보이는 스토리 전개였다.

추리소설의 매력 중 하나는 이야기가 어디서 많이 읽은듯한데 또 빠져드는 데 있다. 이 작품 역시 그런 맛이 있다. 고전적인듯하면서 작가 특유의 흡입력을 엿볼 수 있었다.


추리소설을 읽을 때 괜한 공상을 하곤 한다. 내가 범인을 잡는 사람이라면? 또는 내가 범인이라면? 후자의 경우 완전범죄를 꿈꾸며 이런저런 방법을 모색해 본다. 나도 이 소설의 주인공 커쇼처럼 완벽한 알리바이를 위해 교환 살인이 적당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으며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그동안 잊었던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그래, 믿긴 누굴 믿어... 확실한 알리바이가 아니라 이용당할 약점만 잡힐 뿐이지. 그래서 완전범죄는 존재하지 않으니 꿈꾸지 않는 걸로 결론 내리기로 했다.

'"... 모르는 사람이 날 위해 누군가를 대신 죽여준다는 거? 그래서 나한테 확실한 알리바이가 생긴다고? 어림없는 소리야. 낯선 사람이 날 위해 누군가를 죽이는 순간, 경찰에 자수하는 게 낫지.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게 된다고.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면 직접 죽이게. 이 세상에 살인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은 없어." (p. 25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선량한 이웃들 - 우리 주변 동식물의 비밀스러운 관계
안드레아스 바를라게 지음, 류동수 옮김 / 애플북스 / 202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단 모든 동식물을 해로운 것과 이로운 것으로 나누는 기존의 사고방식은 내려놓아야 한다. (p. 6)'

동식물을 해로운가 또는 이로운가 나누는 건 인간 중심의 관념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인간이 먹는 작물이나 인간이 아름답다 여기는 원예식물이 많다고 세상을 풍요롭다 할 수 일을까? 그런 일은 자연계에서 일어나지 않을뿐더러 종의 빈약화를 낳는다는 주장도 덧붙인다. 풍요로움을 동식물종 분포 스펙트럼의 최대화로 정의한다.


우리 주변에는 무관심하면 보이지 않지만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다양한 동식물들이 존재함을 눈치챈다. 안드레아스 바를라게의 <선량한 이웃들>은 주변 동식물들의 신비로운 이야기를 전해준다.


사실 이들 동식물들의 대부분은 우리보다 먼저 지구에, 내가 살고 있는 곳에 먼저 터전을 잡았다.

'최초로 등장한 곤충 집단은 딱정벌레류로, 시간적으로는 고생대 마지막 시기인 페름기, 그러니까 약 2억 6500만 년 전이었다. 꿀을 제공하는 꽃식물이 처음 등장한 것은 그로부터 1억 2천만 년쯤 지난 백악기였다. 가장 오래된 꽃식물로 목련을 들 수 있는데 1억 년 전부터 존재해 왔다. (p. 113, 114)'


궁금해서 주변의 동식물에게 물어보고 싶은 질문에 답도 들려준다.

새들은 어떻게 그리 오래 노래할 수 있을까? 울림막 두 개를 번갈아 가며 떨기 때문이다. 가장 많은 종을 가진 곤충은 나비류로 총 16만 종이나 된다. 지렁이를 반으로 자르면?

'이런 재생력은 지렁이가 무척 많은 줄기세포를 지녔다는 데에 기인한다. 줄기세포란 미분화 세포로, 필요에 따라 근육, 신경 또는 감각 기관 세포 등으로 발달할 수 있는 세포를 가리킨다. (p. 162)'


서로의 영역을 인정해 주며 스트레스를 주지 않는 '잘 돌아가는 이웃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도 알려준다.

많은 동물들이 작은 웅덩이에서 수분을 섭취한다. 여기저기 놓아둔 물통은 새를 비롯한 동물들에게 많은 도움을 준다. 밝고 어두운색이 교차된 띠 모양을 유리에 붙이면 이를 보고 새들은 유리를 피해 간다. 파리는 도무지 쓸모없는 벌레인가? 파리의 성충이 되기 전의 구더기는 죽은 모든 유기체를 분해해 작은 동식물들이 섭취 가능하도록 만들어 놓는다.


널리 알려지지 않은 동식물의 여러 습성도 흥미롭다.

무당벌레의 애벌레는 인간에게 귀찮은 존재인 진딧물을 거의 3천 마리나 먹어치우는 식욕을 자랑한다. 겨울을 보낸 일벌들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겨우내 쌓인 배설물을 처리다. 봄철 양봉하는 마을의 일벌 배설물은 골칫거리다. 박새가 둥지를 지을 때 지저분해질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 남들이 알아챌만한 흔적을 전혀 남기지 않는다.

'벌이 다가오면 대개는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충분히 안전하다. (...) 벌은 두 다리로 걸어 다니는 거대한 존재에게서, 별로 얻어먹을 게 없음을 파악하면 제 갈 길로 날아가 버린다. (p. 123)'


수십 년간 정원의 동식물과 함께 해온 저자의 풍부한 경험과 지식이 친절한 설명으로 잘 녹아 있는 이 책은 최재천 교수의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에 이어지는 이야기란 생각이 들었다. 이런 유의 책은 알아가는 재미에 흥미롭기도 하지만, 글을 쓰는 사람, 글을 쓰려고 하는 사람에게 많은 글감을 주는 필독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