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으로 읽는 세계사 - 하트♥의 기원부터 우주로 띄운 러브 레터까지 1만 년 역사에 새겨진 기묘한 사랑의 흔적들 테마로 읽는 역사 10
에드워드 브룩 히칭 지음, 신솔잎 옮김 / 현대지성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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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가장 오래된 입맞춤인 기원전 9000년경 아인 샤크리 연인상부터 남편과 아내의 결투 풍습, 하트의 기원, 데이팅 앱이라는 공개 구혼에 이르기까지, 사랑에 관한 풍성한 이야기의 구상은 곁땀에 젖은 사과 조각에 얽힌 풍습에서 비롯됐다.

19세기 오스트리아 지방에 살던 여성들은 겨드랑이 사이에 사과 조각을 끼운 채 춤을 춘 다음, 땀에 흠뻑 젖은 사과 조각을 자신에게 결혼을 청한 남자에게 내민다. 호감이 있다면 남자는 기뻐하며 그 사과 조각을 먹는다. 사랑 이야기, 시작부터 예사롭지 않은 험난함을 예고한다.


사랑이란? 사랑은 어떻게 해야 이룰 수 있을까? 이제까지 인류는 어떤 사랑을 해왔을까? 기상천외한 역사책을 주로 쓰는 에드워드 브륵 히칭의 <사랑으로 읽는 세계사>는 50가지 유물을 살펴보며 그 속에 담긴 사랑의 사연을 흥미롭게 풀어낸다.

2, 3세기경 <카마수트라>에서 이 책을 쓴 인도 철학자 바트야야나는 돈이나 제물을 위해 남성을 이용하는 데 불편해하지 말라고 여성에게 조언한다. 쓸모없는 남성을 떼어놓는 방법으로 "입술을 비틀며 비웃음을 보이고" "쿵쿵대며 걷고" "무시하는" 등의 행위도 소개해 놓았다.

17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까지 영국에서 불행한 부부들은 아내를 내다 파는 괴이한 관습을 택할 수 있었다. 아내를 사람들 앞에 세워두고 장점을 소개하며 공개 경매했다. 뭐 이런 일이 있나 싶지만, 웃음을 짓게 하는 해피엔딩 반전이 있다.

'괴이하게 느껴지지만 당시 여러 자료를 보면 이 관행은 실로 부부 모두에게 이롭게 작용했다. '낙찰자'는 보통 아내의 연인일 때가 많았기에 다들 자유를 얻고 자신의 행복을 찾아 떠나는 셈이었다. ( p. 138)'

에도 막부 시설엔 춘화가 인기 절정이었다. 정부는 춘화를 금지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춘화의 인기를 사그라들게 만든 건 에로틱한 사진술의 등장이었다. 결혼을 반대하면 둘은 더 불타오르지 않던가. 다른 연인을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게 더 현명할지도.

사랑하는 이의 심장, 치아 그리고 머리카락을 장신구에 넣어 가지고 다니기도 했고, 부채로 은밀한 감정을 전달하기도 했다. 사랑은 밀어로 속살일 때 에로틱하다.

'여성이 손가락으로 부채 끝을 만지면 '당신과 대화하고 싶다'는 뜻이고, 부채를 빙그르르 돌리면 '우리를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는 경고, 한쪽 뺨에 가져다 대면 '사랑한다', 오른손에 부채를 쥐고 얼굴 앞에 두면 '나를 따라오라'는 의미라고 설명한다. (p. 281)'

기괴하고 충격적인 곁땀 사과 조각 이야기로 러브스토리를 시작했지만, 이 책의 마지막 스토리를 감동이다. 지구를 떠나 태양계를 지나가는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은 <코스모스>의 저자 칼 세이건과 아내 앤 드루얀이다. 둘은 우주 탐사선 보이저 1호가 싣고 갈 골든 레코드에 담을 음악에 대해서 한 시간 동안 통화했다. 통화가 끝날 즈음에 드루얀은 칼 세이건에게 청혼했다.

'두 사람이 통화하고 이틀 후, 여전히 흥분에 들떠 있던 드루얀은 뉴욕의 벨뷰 병원에서 뇌전도를 녹음했다. "사랑에 푹 빠진 스물일곱 살 여성으로서 제 감정이 그 레코드에 담겨 있어요. 영원한 기록이죠. 적어도 향후 1억 년 동안은요. 제게 보이저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지울 만큼 대단히 강렬한 기쁨을 주는 존재예요." (p. 318)'


내 사랑 이야기가 하고 싶어서, 그 사랑을 그리워하고 싶어서, 당신들이 한 사랑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한다. 물론 그 사랑이 궁금하기도 하다. 사랑, 참 어렵다. 세월이 지나도 사랑, 잘 모르겠다. 그래서 사랑 이야기에 대한 호기심은 멈출 수가 없다. 사랑을 상상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로 멈출 수 없다.

'볼테르가 말했듯, "사랑은 자연이 제공하고, 상상력이 수를 놓는 캔버스"다. 이 책은 그 예술의 캔버스 위에 수놓인 인류사의 가장 빛나는 장면들을 차분하게 따라간다. (p. 6, 추천사, 정우철 도슨트)'

1만 년 역사에 수놓은 사랑 이야기, 1만 년을 이어갈 것이다. 인간이 지구에서 사라져 우리의 사랑 이야기가 끝나더라도, 계속해서 우주탐사선에 실릴 사랑 이야기는 태양계를 넘어 끝없는 우주로, 항해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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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원전으로 읽는 움라우트 세계문학
알베르 카뮈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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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잘못이 없고 나에게도 없지만 세상과 소통할 때 비로소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자체가 부조리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내가 경험한 가장 부조리한 집단은 군대였다. 회사보다 더했다. 80년 초반에 군 생활은 지금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부조리가 심했다. 군 생활 일상이 부조리였다. 간부들은 쌀과 부식, 기름 등을 빼네 팔아먹었다. 명령 대부분은 이걸 내가 왜 해야 하지?라는 생각이 드는 것들이었다.

졸병 때 작업 나가기 위해 타고 갈 트럭을 기다리며 서 있었더니 지나가던 선임이 니들 뭐 하냐며 차가 올 때까지 쪼그려뛰기를 시켰다. 사단장이 오는 길에 바큇자국이 있으면 안 된다고 해서 차가 지나갈 때마다 빗자루질을 했다. 사단장은 헬기 타고 왔다. 군대 부조리는 밤새 이야기해도 모자랄 지경이다.

회사도 만만찮다. 승진하려면 실력보다는 줄을 잘 서는 것이 더 중요하다. 무사히 제대하려면, 회사에서 잘리지 않으려면 침묵하거나 부조리를 당연한 일상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부조리를 인정해야 한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양로원으로부터 전보 한 통을 받았다. '모친 사망. 내일 장례식. 삼가 애도함.' 그건 아무 의미가 없었다. 아마 어제였을 것이다. (p. 16, 첫 문장)'

<이방인>은 이 첫 문장 하나면 충분했다. 첫 문장에 소설 모두를 담았다. 주인공 뫼르소는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른 후 평상시와 같은 일상을 보낸다. 이웃 레몽과 별장에 놀러 갔고 거기서 또 만난 아랍인을 총으로 죽인다. 이 사건으로 뫼르소는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는다.


카뮈는 <이방인>을 이렇게 요약했다.
'우리 사회에서, 자기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사형선고를 받을 위험이 있다. 나는 단지 이 책의 주인공이 그 손쉬운 일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음을 선고받았다고 말하고 싶었다. (p. 5 작가 서문)'

타는듯한 태양, 이마가 지근거렸다. 뜨거움에 서 있을 수 없었다. 바다는 무겁고 뜨거운 숨결을 실어 왔다. 불의 비가 쏟아지는듯해 긴장했고 손으로 권총을 꽉 움켜잡았다. 방아쇠가 당겨졌다. 우발적 살인이었다.

뫼르소는 묻는 말에 솔직하게 자기감정을 드러냈다. 어머니의 죽음에 슬픔을 느끼지 않은 것도 아니다.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맞추지 않았을 뿐이다.

재판에 참여한 배심원들이 볼 때 뫼르소는 그들과 동떨어진 사회 부적응자다. 어머니가 죽었는데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살인을 했는데도 반성하지 않기 때문이다. 재판이란 사회적 시선은 뫼르소의 살인 행위보다 사람을 평가했다. 그 결과 우발적 살인은 계획적 살인으로 바뀐다.

거짓말을 거부하고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면 낯선 사람 '이방인'이 되는 사회다. 그 사회는 자신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한다.

'그는 실재하는 것을 말하고, 그의 느낌을 숨기기를 거부함으로써 즉각적으로 사회는 위협을 느끼는 것이다. (p. 6 작가 서문)'


어차피 죽는 데 왜 살까? 죽음은 삶의 의미를 없애버린다. 어떤 가치가 나은 것이고 못한 것인지 죽음 앞에서는 그 기준마저 의미 없다. 이런 맥락에서 죽음만큼 부조리한 건 없다. 부조리한 죽음마저 애써 모른 체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종교에 기대어 다음 생의 구원을 소망하며 살 텐가.

'잠시 후에, 그녀는 내게 자기를 사랑하는지를 물었다. 나는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슬퍼 보였다. (pp. 56, 57)'

뫼르소의 삶은 모호하고 불확실했다. 사형 선고를 받고 죽음을 바로 앞에서 마주했을 때 뫼르소는 죽음을 피하지도 종교에 의지하지 않는다. 죽음을 받아들인다.

뫼르소가 이끌어 온 삶 내내 부조리했다. '그것이 내게 뭐가 문제인가? 다른 이의 죽음, 어머니의 사랑, 그의 하느님이 내게 문제라고 여긴 것, 우리가 선택한 삶, 우리가 고른 운명, 단지 하나의 운명은 내 스스로 고르는 것이기에, (p. 157)'

모두 죽는다. 사형 선고를 받고 죽을 수도 있다. 억울하게 어머니 장례식장에서 울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발돼서 말이다. 뭐가 문제란 말인가.


삶뿐만 아니라 죽음마저 부조리한 세상,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바위를 언덕 꼭대기까지 올려놓은들 죽음처럼 어차피 바위는 굴러떨어질 텐데. 살아가는 것이, 바위를 밀어 올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자살해야 하나? 바위 올리기를 그만둬야 하나? 신이 주신 삶인데? 신이 내린 형벌인데?

뫼르소처럼 부조리한 삶과 죽음을 똑바로 쳐다보며 나를 가둬둔 것들에서 벗어나 보란 듯이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야 한다. 바위를 언덕 꼭대기까지 밀어 올리기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죽지만, 굴러떨어지지만. 그래도 그래도 그런 삶에서 의미를 찾아내 반항해야 한다.

'"그는 거짓말을 거부한다… 그래서 어떤 영웅적 태도도 취하지 않고, 진실을 위해 죽음을 받아들이는 한 남자의 이야기로서 <이방인>을 읽으면 크게 실수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내가 하는 말이 아니라 카뮈가 한 말이다. (p. 11, 역자의 말)'


그 뭣 같은 군 생활에서도 의미를 찾으려 했다. 그렇지 않았으면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거나 탈영했을지도 모른다. 회사도 마찬가지다. 의미가 시시때때로 바뀌긴 했지만, 그렇더라도 어떤 의미를 찾지 못했다면 정년퇴직은 꿈도 못 꿨을 것이다. 내가 찾은 의미가 뭔지 모르겠지만 시시할 것 같다고?

<이방인>을 읽은 나의 대답은 '시시한들... 뭐가 문제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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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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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 후 내가 꾼 악몽은 다니던 직장이 나오는 꿈이었다. 그 꿈은 몇 년 동안 이어졌다. 그렇게 분했다. 성실했고 남이 보지 않더라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늦게까지 일했으며 나름 실적을 개선하기도 했다. 평생을 회사를 위해 일했는데 그런 내가 이런 대우를 받으며 퇴직해야 했나. 억울한 세상을 살았다는 생각이 머리를 채웠다.


<비둘기>는 하루 동안 벌어지는 사건이다.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은행 경비원 조나단 노엘의 복잡하게 얽혀있는 마음의 갈래를 한 올 한 올 정교하게 풀어냈다.

'샤랭통에서 살았을 때, 1942년 7월쯤이었다고 생각되는 어느 여름날 오후 낚시를 갔다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 천둥 번개가 치더니 소나기가 한바탕 내린 날이었다. 그는 후끈한 열기와 빗물에 젖어 있던 아스팔트 위를 신발을 벗고 신나게 물웅덩이 속을 첨벙거리며 맨발로 걸었다.... (p. 6)'

집에 돌아와보니 어머니가 없었다. 며칠 후 아버지도 사라져 버리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어린 누이동생과 함께 생면부지의 친척 아저씨 집에서 농사를 거들며 살았다. 파란만장한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오니 누이동생마저 없었다. 결혼했지만 4개월 만에 사내아이를 낳은 아내는 과일 장수와 눈이 맞아 떠났다. 좋지 않은 일은 겪은 조나단 노엘은 사람들은 믿을 수 없었다. 평화롭게 살려면 그들을 멀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첫눈에 반한 사랑 같은 파리의 작은방을 얻었다. 보금자리로 여기며 은행 경비원을 살아온 조나단, 연말에 8천 프랑만 내면 그 방을 영원히 소유하게 된다.

'여기까지가 비둘기 사건이 발생하기 전인 1984년 8월 어느 금요일 아침까지의 상황이었다. (p. 14)'

출근하려고 방문을 연 조나단은 복도에 나타난 비둘기 한 마리를 발견하고 눈이 마주치자 공포를 느낀다. 조나단은 그날 끔찍한 하루를 겪게 된다. 30년 동안 흐트러짐 없던 그만의 경비원을 자세를 잡을 수 없었다. 공원에서 만난 거지의 태평스러운 인생을 보니 화가 났고 질투가 일었다. 공원 벤치 나사에 걸려 바지마저 찢어졌다.

큰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작은 공간에서 그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아무에게도 침해당하지 않고 지내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살았다. 세상을 나에게 왜 이러는가. 50대 남자의 작은 바람조차 들어주지 않는가.

'그리고 그것은 범죄가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생각해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행동으로 실행하거나 혹은 말로도 생각을 '내뱉을 능력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참아내는 사람이었다. (p. 90)'

복도에 비둘기가 있는 집으로 돌아갈 용기가 나질 않아 허름한 호텔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된 조나단은 내일 자살할 결심을 하고 잠에 빠져든다. 그러다가 아침에 도시 전체가 폭발해 버릴 것만 같은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천둥소리를 듣는다.

''도대체 사람들이 왜 안 오는 걸까? 왜 나를 구출해 내지 않지? 왜 이렇게 쥐 죽은 듯이 조용한 거야? 다른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지? 다른 사람들이 없으면 나 혼자서는 절대로 살 수가 없단 말이야!' (p. 105)'


그래도 그 직장에서 한평생을 보내며 아이들 학비를 보탰다. 35년 동안 직장 생활한 덕에 쥐꼬리만하지만 연금도 받는다.

무엇보다 조나단이 공원에서 만난 거지처럼 남들이 자 지켜보는 가운데 엉덩이를 까고 용변을 보지도 않는다. 집에 화장실이 두 개나 있다. 줄 서거나 눈치 보면서 용변을 보지 않아도 되니 최소한의 자유는 누리고 산다. 어찌 보면 지금까지 살아온 게 천만다행이다 싶기도 하다. 경제적으로 풍족하지는 않아도 다른 사람을 부러워하거나 지나온 삶을 억울해하거나 후회할 이유도 없지 싶다.

고작 비둘기에 놀라자빠져 악몽을 꾸는 셈이다. 그 비둘기 때문에 직장 생활의 수고를 송두리째 날려버릴 수는 없다. 소리쳐 도움을 청하면 내게 다가올 가족, 친구도 있다. 하찮은 비둘기 따위에 왜 정성스럽게 한 장 한 장 벽돌 쌓듯이 쌓아 올린 견고한 삶이 무너질까. 소유하려는 집착이 원인이다.


옷을 입고 호텔을 나선 조나단 노엘은 빗물 웅덩이 한가운데서 어느 여름날 집으로 돌아올 때처럼 이 웅덩이 저 웅덩이를 찾아 철벅거렸다.

'정말 신나는 짓이었다. 그는 어린아이들이 하는 그런 지저분한 유희를 다시 되찾은 대단한 자유라도 된다는 듯이 즐겼다. 플랑슈 가에 도착하여 집의 대문을 들어서고, 잠겨 있는 로카르 부인의 숙소를 잽싸게 지나 뒷마당을 가로지르고, 좁다란 뒤 계단을 올라갈 때도 그는 여전히 활기찼고 행복해했다. (p. 108)'

조나단이 어릴 때처럼 웅덩이 물을 철벅거리며 자유를 누리듯, 내 마음속에 품고 있던 여러 가지 회사 생각이 다른 것들로 채워져 내가 다니던 회사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조나단이 자살할까 봐 마음 졸이며 읽었다. 얼마나 다행인지. 조나단이 복도에 다다랐을 때 비둘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시푸르뎅뎅하고 축축하고 번들거리는 똥도, 바들바들 떨리던 작은 깃털도 보이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나도 회사가 나오는 악몽을 더 이상 꾸지 않는다. 얼마나 다행인지. 퇴직 후 억울함에 극단적인 생각을 하지도 않았고 소중한 삶을 무너뜨리지도 않아서.

''너는 이제 끝장이야!'라고 소리를 꽥 지르는 것 같았다.
'너는 이제 늙었고 끝났어. 기껏 비둘기한테 놀라 자빠지다니! 비둘기 한 마리가 너를 방안으로 몰아넣고, 꼼짝 못 하게 만들고, 가두어 놓다니! 조나단, 너는 이제 죽은 목숨이야. 설령 지금 당장 죽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곧 그렇게 될 거야. 네 인생은 실패한 거야... ' (p. 19)'

비둘기는 또 내 앞에 나타날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는 한갓 새에 지나지 않은 비둘기일 뿐이다. 곧 날아가 버릴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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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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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 후 내가 꾼 악몽은 다니던 직장이 나오는 꿈이었다. 그 꿈은 몇 년 동안 이어졌다. 그렇게 분했다. 성실했고 남이 보지 않더라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늦게까지 일했으며 나름 실적을 개선하기도 했다. 평생을 회사를 위해 일했는데 그런 내가 이런 대우를 받으며 퇴직해야 했나. 억울한 세상을 살았다는 생각이 머리를 채웠다.


<비둘기>는 하루 동안 벌어지는 사건이다.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은행 경비원 조나단 노엘의 복잡하게 얽혀있는 마음의 갈래를 한 올 한 올 정교하게 풀어냈다.

'샤랭통에서 살았을 때, 1942년 7월쯤이었다고 생각되는 어느 여름날 오후 낚시를 갔다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 천둥 번개가 치더니 소나기가 한바탕 내린 날이었다. 그는 후끈한 열기와 빗물에 젖어 있던 아스팔트 위를 신발을 벗고 신나게 물웅덩이 속을 첨벙거리며 맨발로 걸었다.... (p. 6)'

집에 돌아와보니 어머니가 없었다. 며칠 후 아버지도 사라져 버리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어린 누이동생과 함께 생면부지의 친척 아저씨 집에서 농사를 거들며 살았다. 파란만장한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오니 누이동생마저 없었다. 결혼했지만 4개월 만에 사내아이를 낳은 아내는 과일 장수와 눈이 맞아 떠났다. 좋지 않은 일은 겪은 조나단 노엘은 사람들은 믿을 수 없었다. 평화롭게 살려면 그들을 멀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첫눈에 반한 사랑 같은 파리의 작은방을 얻었다. 보금자리로 여기며 은행 경비원을 살아온 조나단, 연말에 8천 프랑만 내면 그 방을 영원히 소유하게 된다.

'여기까지가 비둘기 사건이 발생하기 전인 1984년 8월 어느 금요일 아침까지의 상황이었다. (p. 14)'

출근하려고 방문을 연 조나단은 복도에 나타난 비둘기 한 마리를 발견하고 눈이 마주치자 공포를 느낀다. 조나단은 그날 끔찍한 하루를 겪게 된다. 30년 동안 흐트러짐 없던 그만의 경비원을 자세를 잡을 수 없었다. 공원에서 만난 거지의 태평스러운 인생을 보니 화가 났고 질투가 일었다. 공원 벤치 나사에 걸려 바지마저 찢어졌다.

큰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작은 공간에서 그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아무에게도 침해당하지 않고 지내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살았다. 세상을 나에게 왜 이러는가. 50대 남자의 작은 바람조차 들어주지 않는가.

'그리고 그것은 범죄가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생각해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행동으로 실행하거나 혹은 말로도 생각을 '내뱉을 능력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참아내는 사람이었다. (p. 90)'

복도에 비둘기가 있는 집으로 돌아갈 용기가 나질 않아 허름한 호텔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된 조나단은 내일 자살할 결심을 하고 잠에 빠져든다. 그러다가 아침에 도시 전체가 폭발해 버릴 것만 같은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천둥소리를 듣는다.

''도대체 사람들이 왜 안 오는 걸까? 왜 나를 구출해 내지 않지? 왜 이렇게 쥐 죽은 듯이 조용한 거야? 다른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지? 다른 사람들이 없으면 나 혼자서는 절대로 살 수가 없단 말이야!' (p. 105)'


그래도 그 직장에서 한평생을 보내며 아이들 학비를 보탰다. 35년 동안 직장 생활한 덕에 쥐꼬리만하지만 연금도 받는다.

무엇보다 조나단이 공원에서 만난 거지처럼 남들이 자 지켜보는 가운데 엉덩이를 까고 용변을 보지도 않는다. 집에 화장실이 두 개나 있다. 줄 서거나 눈치 보면서 용변을 보지 않아도 되니 최소한의 자유는 누리고 산다. 어찌 보면 지금까지 살아온 게 천만다행이다 싶기도 하다. 경제적으로 풍족하지는 않아도 다른 사람을 부러워하거나 지나온 삶을 억울해하거나 후회할 이유도 없지 싶다.

고작 비둘기에 놀라자빠져 악몽을 꾸는 셈이다. 그 비둘기 때문에 직장 생활의 수고를 송두리째 날려버릴 수는 없다. 소리쳐 도움을 청하면 내게 다가올 가족, 친구도 있다. 하찮은 비둘기 따위에 왜 정성스럽게 한 장 한 장 벽돌 쌓듯이 쌓아 올린 견고한 삶이 무너질까. 소유하려는 집착이 원인이다.


옷을 입고 호텔을 나선 조나단 노엘은 빗물 웅덩이 한가운데서 어느 여름날 집으로 돌아올 때처럼 이 웅덩이 저 웅덩이를 찾아 철벅거렸다.

'정말 신나는 짓이었다. 그는 어린아이들이 하는 그런 지저분한 유희를 다시 되찾은 대단한 자유라도 된다는 듯이 즐겼다. 플랑슈 가에 도착하여 집의 대문을 들어서고, 잠겨 있는 로카르 부인의 숙소를 잽싸게 지나 뒷마당을 가로지르고, 좁다란 뒤 계단을 올라갈 때도 그는 여전히 활기찼고 행복해했다. (p. 108)'

조나단이 어릴 때처럼 웅덩이 물을 철벅거리며 자유를 누리듯, 내 마음속에 품고 있던 여러 가지 회사 생각이 다른 것들로 채워져 내가 다니던 회사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조나단이 자살할까 봐 마음 졸이며 읽었다. 얼마나 다행인지. 조나단이 복도에 다다랐을 때 비둘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시푸르뎅뎅하고 축축하고 번들거리는 똥도, 바들바들 떨리던 작은 깃털도 보이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나도 회사가 나오는 악몽을 더 이상 꾸지 않는다. 얼마나 다행인지. 퇴직 후 억울함에 극단적인 생각을 하지도 않았고 소중한 삶을 무너뜨리지도 않아서.

''너는 이제 끝장이야!'라고 소리를 꽥 지르는 것 같았다.
'너는 이제 늙었고 끝났어. 기껏 비둘기한테 놀라 자빠지다니! 비둘기 한 마리가 너를 방안으로 몰아넣고, 꼼짝 못 하게 만들고, 가두어 놓다니! 조나단, 너는 이제 죽은 목숨이야. 설령 지금 당장 죽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곧 그렇게 될 거야. 네 인생은 실패한 거야... ' (p. 19)'

비둘기는 또 내 앞에 나타날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는 한갓 새에 지나지 않은 비둘기일 뿐이다. 곧 날아가 버릴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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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우면 종말 - 안보윤 산문
안보윤 지음 / 작가정신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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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선한 사마리아인 실험을 했다. 설교 발표까지 남은 시간에 따라 위험에 처한 사람을 돕는 행동에 큰 차이가 났다. 시간이 촉박한 참가자는 10% 정도만 도왔지만, 시간 여유가 있는 참가자는 63%나 도왔다.

'나라면 우산을 받쳐 들고 그와 함께 차도를 걸을 수 있었을까. 아니, 그전에 나는 그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을까. 급행열차가 오는 시간에 맞춰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뛰어오르기 일쑤인 나는, 핸드폰 속 좁은 화면을 응시하느라 주변을 거의 둘러보지 않는 나는 아마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약한 사람만이 약한 사람을 알아볼 수 있는 세계에 나는 살고 있으니 말이다. (pp. 87, 88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


퇴직한 다음에야 비로소 나의 시간은 느리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내가 사는 아파트 동 청소하시는 분과 처음 인사를 나눈 것도 그즈음이다. 이젠 제법 친해져 말도 주고받는다. 차 타고 획획 지나쳤던 한강 산책로, 이제서야 걸으면서 숨어있던 계절을 발견했다. 우리 동네에 '이런 게 있었나?' 싶은 것들도 눈에 띈다.

안보윤 작가 말마따나 퇴직 전까지 나는 시간을 뭉텅뭉텅 잘라가며 보냈다. 벌써 4/4분기네. 서른 살이 되었고 마흔 살, 쉰 살이 됐다. 다 큰 아이들이 학창 시절을 아내만 간직할 뿐 내 기억에 남은 건 달랑 몇 장면뿐이다.


<외로우면 종말>은 가만히 하루를 들여다보는 안보윤의 첫 산문이다. 가만히 보니 시간 속에서 작가 자신을 발견한다. 가족, 친구 그리고 주변 사람들도 보인다.

비겁했던 나, 친구를 봄의 반대편으로 밀어냈던 나, 사람을 미워하는데 에너지를 썼던 나. 나를 다독여 주고 싶은 하루도 있었다.

틀에 맞춰진 친절함은 없지만 타인을 성실히 보살피는 이웃, 큰 사고를 당해 억울한 텐데 사고를 일으킨 노인을 걱정하는 단단한 마음을 가진 친구, 내일의 나를 위해 오늘 할 일이 없어 빙글빙글 도는 사람들.

'진리가 뭐야, 엄마? 아이가 발가락을 꼼지 대며 다시 물었다. 변하지 않는 거야. 약속하는 거? 약속은 깨질 수도 있잖아. 진리는 안 변하는 거야. 절대 안 변한다고, 매일매일 똑같다고 믿을 수 있는 거. 아이가 살그머니 웃으며 말했다. "엄마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 같은 거?" (p. 187 당연하다는 착각)'

엄마와 아이에 사이에 달그락달그락 소란이 있었겠지만 사랑하는 마음을 갖기까지 부단히 노력했을 나날들. 춥거나 덥게 지내질 않길 바라는 마음에 매일 날씨를 알려주는 가족. 그 모습에서 아주 작은 쉼표를 발견하기도 한다.


'그러니 회복이란 무언가를 부러 뜨리고 이어 붙이듯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손을 뻗어 기울어진 바를 다잡아 나가는 과정 전체를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p. 170 한밤의 산책자들)'

산책할 때 만나는 칠십 대 초반의 엄마와 삼십 대 아들이 있다. 지적 장애가 있는 아들과 매일 걷는다. 눈이 오든 비가 오든 빼먹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잰걸음으로 아들을 뒤따라가는 엄마를 볼 때마다 아내와 나는 기도를 한다. 아들이 꾸준히 나아지기를.

가만히 안보윤의 시간을 보며 나의 시간도 가만히 들여다본다. 예전 같으면 바쁘게 지나쳤을 것들, 사람들.

아이스크림을 사가지고 오다가 땀에 젖은 채 청소하시는 분을 만났다. 아내가 아이스크림 하나를 드시라면 건넸다. 이 세상에 있는 줄 꿈에도 몰랐을 활짝 웃는 모습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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