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둘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퇴직 후 내가 꾼 악몽은 다니던 직장이 나오는 꿈이었다. 그 꿈은 몇 년 동안 이어졌다. 그렇게 분했다. 성실했고 남이 보지 않더라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늦게까지 일했으며 나름 실적을 개선하기도 했다. 평생을 회사를 위해 일했는데 그런 내가 이런 대우를 받으며 퇴직해야 했나. 억울한 세상을 살았다는 생각이 머리를 채웠다.


<비둘기>는 하루 동안 벌어지는 사건이다.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은행 경비원 조나단 노엘의 복잡하게 얽혀있는 마음의 갈래를 한 올 한 올 정교하게 풀어냈다.

'샤랭통에서 살았을 때, 1942년 7월쯤이었다고 생각되는 어느 여름날 오후 낚시를 갔다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 천둥 번개가 치더니 소나기가 한바탕 내린 날이었다. 그는 후끈한 열기와 빗물에 젖어 있던 아스팔트 위를 신발을 벗고 신나게 물웅덩이 속을 첨벙거리며 맨발로 걸었다.... (p. 6)'

집에 돌아와보니 어머니가 없었다. 며칠 후 아버지도 사라져 버리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어린 누이동생과 함께 생면부지의 친척 아저씨 집에서 농사를 거들며 살았다. 파란만장한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오니 누이동생마저 없었다. 결혼했지만 4개월 만에 사내아이를 낳은 아내는 과일 장수와 눈이 맞아 떠났다. 좋지 않은 일은 겪은 조나단 노엘은 사람들은 믿을 수 없었다. 평화롭게 살려면 그들을 멀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첫눈에 반한 사랑 같은 파리의 작은방을 얻었다. 보금자리로 여기며 은행 경비원을 살아온 조나단, 연말에 8천 프랑만 내면 그 방을 영원히 소유하게 된다.

'여기까지가 비둘기 사건이 발생하기 전인 1984년 8월 어느 금요일 아침까지의 상황이었다. (p. 14)'

출근하려고 방문을 연 조나단은 복도에 나타난 비둘기 한 마리를 발견하고 눈이 마주치자 공포를 느낀다. 조나단은 그날 끔찍한 하루를 겪게 된다. 30년 동안 흐트러짐 없던 그만의 경비원을 자세를 잡을 수 없었다. 공원에서 만난 거지의 태평스러운 인생을 보니 화가 났고 질투가 일었다. 공원 벤치 나사에 걸려 바지마저 찢어졌다.

큰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작은 공간에서 그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아무에게도 침해당하지 않고 지내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살았다. 세상을 나에게 왜 이러는가. 50대 남자의 작은 바람조차 들어주지 않는가.

'그리고 그것은 범죄가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생각해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행동으로 실행하거나 혹은 말로도 생각을 '내뱉을 능력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참아내는 사람이었다. (p. 90)'

복도에 비둘기가 있는 집으로 돌아갈 용기가 나질 않아 허름한 호텔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된 조나단은 내일 자살할 결심을 하고 잠에 빠져든다. 그러다가 아침에 도시 전체가 폭발해 버릴 것만 같은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천둥소리를 듣는다.

''도대체 사람들이 왜 안 오는 걸까? 왜 나를 구출해 내지 않지? 왜 이렇게 쥐 죽은 듯이 조용한 거야? 다른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지? 다른 사람들이 없으면 나 혼자서는 절대로 살 수가 없단 말이야!' (p. 105)'


그래도 그 직장에서 한평생을 보내며 아이들 학비를 보탰다. 35년 동안 직장 생활한 덕에 쥐꼬리만하지만 연금도 받는다.

무엇보다 조나단이 공원에서 만난 거지처럼 남들이 자 지켜보는 가운데 엉덩이를 까고 용변을 보지도 않는다. 집에 화장실이 두 개나 있다. 줄 서거나 눈치 보면서 용변을 보지 않아도 되니 최소한의 자유는 누리고 산다. 어찌 보면 지금까지 살아온 게 천만다행이다 싶기도 하다. 경제적으로 풍족하지는 않아도 다른 사람을 부러워하거나 지나온 삶을 억울해하거나 후회할 이유도 없지 싶다.

고작 비둘기에 놀라자빠져 악몽을 꾸는 셈이다. 그 비둘기 때문에 직장 생활의 수고를 송두리째 날려버릴 수는 없다. 소리쳐 도움을 청하면 내게 다가올 가족, 친구도 있다. 하찮은 비둘기 따위에 왜 정성스럽게 한 장 한 장 벽돌 쌓듯이 쌓아 올린 견고한 삶이 무너질까. 소유하려는 집착이 원인이다.


옷을 입고 호텔을 나선 조나단 노엘은 빗물 웅덩이 한가운데서 어느 여름날 집으로 돌아올 때처럼 이 웅덩이 저 웅덩이를 찾아 철벅거렸다.

'정말 신나는 짓이었다. 그는 어린아이들이 하는 그런 지저분한 유희를 다시 되찾은 대단한 자유라도 된다는 듯이 즐겼다. 플랑슈 가에 도착하여 집의 대문을 들어서고, 잠겨 있는 로카르 부인의 숙소를 잽싸게 지나 뒷마당을 가로지르고, 좁다란 뒤 계단을 올라갈 때도 그는 여전히 활기찼고 행복해했다. (p. 108)'

조나단이 어릴 때처럼 웅덩이 물을 철벅거리며 자유를 누리듯, 내 마음속에 품고 있던 여러 가지 회사 생각이 다른 것들로 채워져 내가 다니던 회사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조나단이 자살할까 봐 마음 졸이며 읽었다. 얼마나 다행인지. 조나단이 복도에 다다랐을 때 비둘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시푸르뎅뎅하고 축축하고 번들거리는 똥도, 바들바들 떨리던 작은 깃털도 보이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나도 회사가 나오는 악몽을 더 이상 꾸지 않는다. 얼마나 다행인지. 퇴직 후 억울함에 극단적인 생각을 하지도 않았고 소중한 삶을 무너뜨리지도 않아서.

''너는 이제 끝장이야!'라고 소리를 꽥 지르는 것 같았다.
'너는 이제 늙었고 끝났어. 기껏 비둘기한테 놀라 자빠지다니! 비둘기 한 마리가 너를 방안으로 몰아넣고, 꼼짝 못 하게 만들고, 가두어 놓다니! 조나단, 너는 이제 죽은 목숨이야. 설령 지금 당장 죽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곧 그렇게 될 거야. 네 인생은 실패한 거야... ' (p. 19)'

비둘기는 또 내 앞에 나타날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는 한갓 새에 지나지 않은 비둘기일 뿐이다. 곧 날아가 버릴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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