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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우면 종말 - 안보윤 산문
안보윤 지음 / 작가정신 / 2025년 9월
평점 :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선한 사마리아인 실험을 했다. 설교 발표까지 남은 시간에 따라 위험에 처한 사람을 돕는 행동에 큰 차이가 났다. 시간이 촉박한 참가자는 10% 정도만 도왔지만, 시간 여유가 있는 참가자는 63%나 도왔다.
'나라면 우산을 받쳐 들고 그와 함께 차도를 걸을 수 있었을까. 아니, 그전에 나는 그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을까. 급행열차가 오는 시간에 맞춰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뛰어오르기 일쑤인 나는, 핸드폰 속 좁은 화면을 응시하느라 주변을 거의 둘러보지 않는 나는 아마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약한 사람만이 약한 사람을 알아볼 수 있는 세계에 나는 살고 있으니 말이다. (pp. 87, 88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
퇴직한 다음에야 비로소 나의 시간은 느리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내가 사는 아파트 동 청소하시는 분과 처음 인사를 나눈 것도 그즈음이다. 이젠 제법 친해져 말도 주고받는다. 차 타고 획획 지나쳤던 한강 산책로, 이제서야 걸으면서 숨어있던 계절을 발견했다. 우리 동네에 '이런 게 있었나?' 싶은 것들도 눈에 띈다.
안보윤 작가 말마따나 퇴직 전까지 나는 시간을 뭉텅뭉텅 잘라가며 보냈다. 벌써 4/4분기네. 서른 살이 되었고 마흔 살, 쉰 살이 됐다. 다 큰 아이들이 학창 시절을 아내만 간직할 뿐 내 기억에 남은 건 달랑 몇 장면뿐이다.
<외로우면 종말>은 가만히 하루를 들여다보는 안보윤의 첫 산문이다. 가만히 보니 시간 속에서 작가 자신을 발견한다. 가족, 친구 그리고 주변 사람들도 보인다.
비겁했던 나, 친구를 봄의 반대편으로 밀어냈던 나, 사람을 미워하는데 에너지를 썼던 나. 나를 다독여 주고 싶은 하루도 있었다.
틀에 맞춰진 친절함은 없지만 타인을 성실히 보살피는 이웃, 큰 사고를 당해 억울한 텐데 사고를 일으킨 노인을 걱정하는 단단한 마음을 가진 친구, 내일의 나를 위해 오늘 할 일이 없어 빙글빙글 도는 사람들.
'진리가 뭐야, 엄마? 아이가 발가락을 꼼지 대며 다시 물었다. 변하지 않는 거야. 약속하는 거? 약속은 깨질 수도 있잖아. 진리는 안 변하는 거야. 절대 안 변한다고, 매일매일 똑같다고 믿을 수 있는 거. 아이가 살그머니 웃으며 말했다. "엄마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 같은 거?" (p. 187 당연하다는 착각)'
엄마와 아이에 사이에 달그락달그락 소란이 있었겠지만 사랑하는 마음을 갖기까지 부단히 노력했을 나날들. 춥거나 덥게 지내질 않길 바라는 마음에 매일 날씨를 알려주는 가족. 그 모습에서 아주 작은 쉼표를 발견하기도 한다.
'그러니 회복이란 무언가를 부러 뜨리고 이어 붙이듯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손을 뻗어 기울어진 바를 다잡아 나가는 과정 전체를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p. 170 한밤의 산책자들)'
산책할 때 만나는 칠십 대 초반의 엄마와 삼십 대 아들이 있다. 지적 장애가 있는 아들과 매일 걷는다. 눈이 오든 비가 오든 빼먹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잰걸음으로 아들을 뒤따라가는 엄마를 볼 때마다 아내와 나는 기도를 한다. 아들이 꾸준히 나아지기를.
가만히 안보윤의 시간을 보며 나의 시간도 가만히 들여다본다. 예전 같으면 바쁘게 지나쳤을 것들, 사람들.
아이스크림을 사가지고 오다가 땀에 젖은 채 청소하시는 분을 만났다. 아내가 아이스크림 하나를 드시라면 건넸다. 이 세상에 있는 줄 꿈에도 몰랐을 활짝 웃는 모습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