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우리 부부의 결혼기념일이다.
10월 9일 한글날이 다시 공휴일로 지정되었던 2014년 우리는 결혼식을 올렸다.
12년동안 우리는 한 번도 결혼기념일을 챙기지 않았었다. 축하한다는 말도, 또는 고맙다는 말도 한 적이 없다. 아마도 그건 신혼 시절, 우리가 서로 친밀하게 지냈던 기간보다 싸우며 지낸 냉전 기간이 훨씬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신혼 초 이혼을 들먹이며 싸우던 시기가 많다보니 평화로운 동안에도 챙기지 않고 지나가는 게 자연스러워졌다.
블로그에도 여러 번 밝혔지만 남편과의 불화 시기를 견디게 해 준 건 책이었다.
그 당시 OTT도 흔하지 않았던 시기였다. 남편은 쌍둥이들은 자기가 데려가겠다며 얼씬도 하지 못하게 했다. 그 속에서 나는 소외되었고 할 일이 없었다. 마침 서평단 활동을 하며 책을 읽고 블로그에 리뷰를 남기는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학창 시절, 책을 읽긴 했지만 성인이 된 후 책을 잘 읽지 않던 내가 다시 책을 찾게 된 건 남편의 공이 컸다.
오늘도 무덤덤한 결혼기념일. 책을 읽고 있을 때 남편과 둘째가 들어왔다.
남편은 둘째에게 "네 엄마는 왜 이렇게 책을 자주 읽는 걸까?" 하며 묻자 나는 답했다.
"그건 너 때문이잖아. 아이들 어렸을 때 너랑 하도 싸워서 내가 너무 힘들어서 책을 읽었어. 나를 왕따시키니까 내가 할 게 없었으니까."
그 말에 남편은 그럼 그 전에는 책을 안 읽었느냐고 하자 이렇게까지는 아니었다고 답했다.
남편은 자신이야말로 일등 공신이라며 나에게 차갑게 했던 것도 다 큰 뜻이 있었노라고 큰 소리 친다.
신혼 초, 내가 왜 이 사람과 결혼했을까 하며 힘들게 했는데 과연 그 시간이 없었노라면 내가 이렇게 책을 읽고 쓰는 사람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김연수 작가의 소설집 『눈 내리는 삼일포』를 읽고 있다.
항상 그렇듯, 김연수 작가의 소설집은 너무 좋아 천천히 읽게 된다.
김연수 작가의 소설집 『눈 내리는 삼일포』를 읽고 있다.
항상 그렇듯, 김연수 작가의 소설집은 너무 좋아 천천히 읽게 된다.
첫번째 단편 <우리 인생의 목격자>에서는 힘들어서 죽고 싶다고 하소연하는 지인의 전화를 받는 것에서 시작한다.
지쳤다는 지인에게 어떤 위로를 건넬 지 고민하는 소설 속 이선희는 자신의 이야기를 생각한다.
어린 시절 야구를 좋아했던 야구소녀에서 자신에게 동경의 선수였던 동명이인의 여자 야구선수 이선희 선수가 '비운의 에이스'로 쓸쓸한 흑역사를 쓰며 선수생활을 마쳐야했던 이야기.
진행자는 이선희 선수에게 자신의 공으로 '끝내기 만루 홈런'을 날리게 했던 그 비운의 역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흑역사를 묻는 질문에 이선희 선수는 개인으로서는 아픔이었지만 프로야구 발전을 위해서 밑거름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걸로 위로했다고 말했다.
분명 개인적으로는 수치다. 비운이다. 자신의 야구 선수로서의 인생도 끝났으니까.
하지만 그 시간을 견디고 나니 비록 자신은 쓸쓸하게 마감하지만 덕분에 야구가 한 층 더 발전했다는 것까지를 볼 수 있었다.

그 시간을 견디고 나서야 볼 수 있는 것을 아는 것.
나의 지금을 돌아보아도 그 외로움의 시간이 나를 읽고 쓰는 사람으로 만들어준 것 아닐까?
그 시간을 버텼더니 읽고 쓰고 있는 내가 보였다.
김연수 소설의 또다른 소설 <우리들의 실패>에서도 비슷한 문장이 나온다.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불확정의 시간을 견뎌야 한다.
우리의 미래가 그렇고 바로 내일의 일도 그렇다.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견디고 버티는 것이다.
버텨야만 멀리 있는 걸 확인할 수 있고 큰 의미 안에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나는 지금 글을 쓴다.
여전히 읽고 쓰지만 죽도 밥도 아닌 내 상태가 서글프지만
이 불확정의 시간을 다시 견뎌나간다.
비록 아무것도 안 되더라도
소설 속 이선희 선수처럼 나를 더 큰 의미에서 발견할 수 있는
위로의 시간을 견디기를 바라면서 오늘을 견디며 글을 쓴다.
이 글을 읽는 모두가
오늘, 내일, 그리고 2026년, 27년 불확정의 시간을 견디며
위로의 눈을 가지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