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학교 학부모 공개수업이 있었다. 반차를 내고 학교에 갔다.
아이가 그린 성장동화가 생각보다 예뻐서 대견스러웠다.
공개수업이 끝난 후 남편과 함께 식사를 하고 남편이 데려다 주어서 회사에 편히 도착할 수 있었다.
마침 이사님과 사장님 모두 출장 중이셔서 한가로운 날들이었다.
평안했던 하루였다.

SNS 피드를 보던 중 세월호 유족 유민아빠 김영오님의 페이스북 피드를 본다.
나에게는 평안한 하루지만 누군가에게는 제일 슬픈 날로 기억되는 하루..
벌써 12년이 지났다. 그럼에도 자식을 바닷가에 떠나보낸 억울한 죽음에 대한 슬픔이 사라지겠는가.
누군가는 말한다.
이제 그만 할 떄도 되지 않았느냐고.
이제 떠나 보내고 새 출발해야 한다고 말이다.
마침 이제야 시인의 <슬픔의 펼침면>의 '오늘의 여력'이라는 시 한 구절이 들어온다.
골목을 지나다 낡은 의자에 앉은 소년을 봅니다.
소년도 자장가를 들으며 자랐겠지 생각하면 애처롭지 않습니다.
서로가 모르는 슬픔은 자주 쉽게 해석됩니다.
불면증을 겪는 사람과 춘곤증이 시작되었다는 사람을 견주어봅니다.
겪는 것과 시작되는 것 중에 무엇을 먼저 위로해야 할지에 대해
시차 없이 비슷한 고통에 대해
이제 그만 할 떄도 되었다고 하는 사람은 슬픔을 쉽게 해석하는 사람이다.
각각의 슬픔은 개인만이 해석할 수 있는 것을 사람들은 모르면서 자꾸 해석하려고 한다.
슬픔을 해석하고 자기 식으로 해석할 수 있도록 지켜주어야 한다.
슬픔을 해석할 수 없다면 옆에서 어느 조언도 해 줄 수 없다.
누군가는 그 해석이 빠를 수도, 느릴 수도 있다.
그 해석은 설사 100주년이 된다 하더라도 지켜주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