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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물리학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3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읽고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

장편소설 『슬픔의 물리학』 은 첫 장부터 독자를 미궁으로 몰아간다.
나는 1913년 8월 끝자락에 남성 인간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한 단락이 끝난 후 '나'의 존재는 달라진다.
"나는 해가 뜨기 두 시간 전에 초파리로 태어났다." 로 갑자기 초파리가 되고 또 다른 단락이 시작되면 1968년 1월 1일 남성 인간, 또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존재가 되는가 하면 언제나 태어나 있는 존재가 된다.
끊임없이 달라지는 '나'라는 존재에 대해 그렇다면 '나'는 무엇이란 말인가? 카멜레온처럼 상황에 맞게 변하는 존재인 것일까? 라는 혼란에 빠진다. 그 답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다르다. 내가 다른 여러 존재가 될 수 있는 이유는 나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들어가 이입될 수 있는 '병적 공감' 혹은 '강박적 공감- 신체화 증후군' 이기 때문이다.
병적 공감. 타인의 이야기를 듣고 그 사람이 되어 느낄 수 있는 존재이다.
나는 어려운 시절 버려졌던 할아버지의 세 살의 모습으로 돌아가서 울 수도 있으며 그리스 로마 신화의 미노타우로스의 슬픈 현실에 통곡할 수 있다. 타인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재능도 어른이 되어가며 공감능력이 점점 쇠퇴한다. 글을 쓰는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수집해나간다.
『슬픔의 물리학』 은 그래서 슬픈 이야기들의 집합체이다. 부모의 잘못으로 태어나 영원한 미궁 속에 갇힌 미노타우로스를 비롯하여 옛날 유행하던 전자 다마고치등 지금은 잊혀져 가는 것들을 모은다. 이제는 쓸모 없는 것들. 이야기되지 않거나 또는 잊혀져 가는 것들을 모은다. 없어도 상관없는 이야기들, 잊어버려도 아무 영향 없는 것들을 찾기 위해 옛 신문이나 잡지를 찾는다. 왜 그게 중요할까?

정말 소중한 것은 잊혀지기 쉬운 것이기 때문이다.
죽는 것. 썩는 것. 부서지기 쉬운 것. 그것은 무엇인가. 바로 인간이다. 나와 너의 존재다. 즉 우리의 이야기다. 여기서는 타인의 슬픔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람은 죽고 썩어 사라지기 쉬운 존재이기에 타인의 이야기를 찾아 기억해야 한다.
어둠 속에서 훌쩍거리며 성냥을 켜는 것. 그건 희망이 아닐까. 나가 모으는 슬픔의 이야기들 속에서 빛을 발견해내는 것. 그것이 슬픔이 존재하는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슬픔의 물리학』 의 저자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는 '슬픔'에 집착한다. 희망은 기쁨 속에서 돋아나는 것이 아니라 슬픔 속에서 찾아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빠르게 변한다. 하루만 지나도 휙휙 변하는 세상이 이제 한 시간, 아니 1분 간격으로 SNS에 새로운 소식이 들려온다.
이야기들이 쉽게 묻히는 세상. 그 세상 속에서 우리가 타인의 이야기를 대하는 방식은 어떠한가.
땅에 묻히든, 페이스북과 같은 SNS에 글을 쓰든 90퍼센트 이상이 영원히 상실되는 수많은 이야기.
그것들이 잊혀지지 않기 위해서 저자는 캡슐의 좌표를 담은 '엄마 캡슐'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누구나 말하려고만 하는 시대에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고 남기는 사람, '엄마 캡슐' 과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걸 이 소설은 말해준다.
그래서 소설 속 나는 '사라진 존재'를 모은다.
잊혀진 다마고치, 옛날의 삐삐, 비디오카세트, 테이프 녹음기..
사라진 존재는 그냥 그런 시절이 있었지라는 추억팔이용만으로 끝내야 할 것인가? 그럴 수 없다. 그렇다면 그건 소설 속 '나'가 이야기를 모으는 이유가 될 수 없다.
그 많던 다마고치는 다 어디로 갔을까?
그 많던 옛날의 삐삐 곁으로.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많은 죽음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173p
슬픔을 모으는 것. 그건 우리 인간의 존재를 알기 위해서다. 인간이 살아가는 한 세상은 가장 슬픈 세상이 될 수 밖에 없다.
그 슬픈 세상에서 살아가는 법. 그것이 바로 슬픔의 물리학이다.
현대는 슬픔을 이야기하기 거부하는 시대이다. 먹고 살기도 힘든데 굳이 힘든 이야기를 꺼내나며 이야기를 기피한다.
그렇다고 피해야만 하느냐. 그럴 수 없다. 이 세상에서 희망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슬픈 이야기들이 필요하기 떄문이다.
슬픔이 이야기되지 않는 시대는 희망이 생겨날 수 없다.
『슬픔의 물리학』은 읽기에 쉬운 책은 아니다. 이 책은 독자들을 여러번 미궁 속에 빠뜨릴 것이다.
낯선 불가리아의 역사, 그리스 로마신화의 지식, 또는 여러 지적호기심까지도 자극하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더 독자들을 쉽게 헤어나올 수 없게 할 것이다.
슬픔이 이야기되지 않는 시대이다. 하지만 이런 시대에 슬픔을 이야기하는 이 책이야말로 꼭 읽어봐야 할 책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