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을 하고 1주일 만에 장이 꼬여 응급실에 실려갔었다. 원래 장이 좋지 않은데 제왕절개로 수술하다보니 장이 꼬여버렸다고 했다. 병원에서는 제왕절개 수술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최대한 수술은 피하자며 장이 풀리도록 최대한 운동을 열심히 하라고 말했다. 


장이 꼬여 배에 가스는 계속  차오르고 통증에 시달려 앉아 있는 것도 힘든 상황이어서 사실 운동은 무의미했다. 남편은 자꾸 제게 걸어다녀야 한다고 했지만 몇 발자국도 못 걷고 주저앉았다. 더 이상 못 걷겠다고 우는 나에게 남편은 힘든 건 아는데 노력을 하지 않는다며 나를 나무랐다.  결국 꼬인 장은 풀리지 않았고 제왕절개 2주만에 응급수술로 장 수술을 받아야 했다.

쌍둥이를 낳고 남편에게 힘들다고 할 때마다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았다.

" 나는 노냐? 나도 힘들어."

자신이 육아를 도와주는데도 힘들다고 말하면 어쩌자는 거냐며  쏘아붙일 때마다 정말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

힘들 때  돌봐주었던 남편이 고맙지만 나를 가장 힘들게 한 존재이기도 했다. 바로 '공감 제로'의 말들 때문이었습니다. 

앉아있기도 힘든 제게 힘든 건 알지만 나으려고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말.
육아로 힘들다고 하면 너만 힘드냐는 말. 그런 말들을 들으면 같이 있어도 혼자 있는 느낌이었다. 같이 있어도 외로웠다. 













《영원에 빚을 져서》 에서 주인공 세 친구 중 한 명인 동이 또한 어머니의 병간호를 했다. 통증 때문에 한 시간에 한 번씩 잠에서 깨는 엄마를 보며 동이는 묻는다. 

"아파서 그래? 불안해서 그래?" 

시간이 흐르며 질문은 더 짧아진다. 

"마음이야? 통증이야?" 

나중에서야 동이는 이 질문이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는다.  '마음'과 '통증'은 같기 때문이었습니다.  동이의 질문들은 엄마를 이해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특히 병 간호를 하는 사람 입장에서 환자의 상태를 제대로 아는 건 중요하다. 그래서 동이의 질문은 꼭 필요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동이의 질문은 왜 잘못되었을까? 

소설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그걸 한 번도 살핀 적이 없었다. 

결국 나와 혜란의 문제는 어떤 식으로든 석이의 마음과 고통을 
함부로 가늠하려고 했다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이해하는 것과 가늠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동이는 아픈 엄마를 "이해"하려 하기보다 "가늠"하려 했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이해'와 '가늠'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사전을 찾아봅니다. 

이해 - 남의 사정을 잘 헤아려 너그러이 받아들임
가늠 - 목표나 기준에 맞고  맞음을 헤아려 봄, 사물을 어림잡아 헤아림.

사전의 뜻을 보면  기준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이해'는 남의 사정이 기준이다.  그러므로 남의 사정이 아프다고 하면 그대로 너그러이 받아들일 수 있다.

반면 '가늠'은 '목표'와 '기준'에 초점을 둔다. 목표에 안 맞으면 이해하기 어렵다. 마치 나라의 정해진 복지 기준과 같이 이 조건에 해당하지 않으면 복지 혜택을 받을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 

소설 속 동이의 질문은 엄마의 고통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아프지 않은 건강한 자신의 '기준'으로 엄마의 고통을 헤아려 보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출산 후 나를 힘들게 했던 남편의 말들 또한 '출산의 경험이 없고 수술 받을 일이 없는' 건강한 남자의 몸의 기준으로만 제 고통을 가늠잡아 본 남편의 말들이 나를 힘들게 했었습니다.  

남의 사정을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노력이 있고 없고가 '이해'와 '가늠'을 받아들이는 큰 기준이 된다. 

 내 글들을  보면서 검색창에 '공감'을 찾아 보았다. 
와~~ 제가 공감을 한다는 글이 이렇게 많을수가. 그런데  나는 제대로 공감을 하고 있나 생각해보았다. 












 《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의 저자 이길보라 작가는 부모님이 청각장애인이다.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수화가 익숙하다.  아마 작가에게도 공감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우리의 공감이 제대로 되어 있는가 에 질문을 던진다.

장애인 스스로가 자신의 고통과 원치 않는 순간들에 대한 소유권을 쥐고 
스스로의 서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비장애인이 장애인의 서사와 고통에만 집중할 때  나는 불편함을 느낀다. 

왜 작가는 불편함을 느낀다고 말했을까? 

비장애인은 장애인의 '고통'과 '상실'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고통과 상실을 '가늠'해 볼 수 밖에 없다. 

이해하는 존재가 스스로의 서사를 갖고 말하는 것과 
가늠하는 존재가 가늠하여 말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는 그 고통과 상실을 이해하는 존재들인 장애인들이 이동권 권리를 위해 투쟁할 때도 비장애인인 우리가 잘 가늠해서 정할 텐데  괜히 불편을 끼친다는 논조로 말하는 언론을 접한다.

손과 발이 절단된 장애인의 의족기를 수입하는 회사에서 일하는 나의 경우도 '공감'은 굉장히 어렵다. 해외업체와 이메일하는 나는 의족기 사용 중 고장을 통지하는 일이 고됩니다. 나도 모르게 업무적으로 대할 때가 많고 소비자 과실로 단순히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럴때마다 환자를 직접 만나는 동료들은 그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해준다. 그러면 저는 최대한 상상력을 동원한다. 머리속으로 그 상황을 그려본다. 그리고 최대한 환자의 입장에서 이해하려 하지만 그럼에도 한계가 있다. 나 또한 비장애인인 입장에서 최대한 '가늠'하려고 할 뿐 '이해'에 다다르지 못함을 고백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해한다는 건 어떤 걸 말하는 걸까? 
제대로 공감한다는 건 어떤 걸 말하는 걸까? 

TV  <이혼 숙려 캠프>라는 프로그램에서 이호선 상담가의 말에서 그 힌트를 찾았다. 

그 방송분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무능력한 남편이 나왔다. 

빚이 1억이나 있고 무직 상태 6개월째인 경제력 제로인 남편. 
그럼에도 쇼핑은 많고 남에겐 호구이면서 아내와 아기에게는 무관심한 남편. 
탁구는 좋아해서 가족은 뒷전이고 전국곳곳을 돌아다닌다.

이혼가정에서 자란 아내는 최대한 버티어내는 상황에서 남편도 아내가 힘들거라 인정한다.  그런데 이호선 상담가는 남편의 태도를 지목한다.

"혀로만 얘기할 뿐 감각으로 느끼질 않아요."

이게 바로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가슴으로 이해하는 게 아닐까. 

남의 고통을 그대로 같이 아파하는 것. 똑같이 느끼기 위해 감각으로 느끼는 것. 

어쩌면 가장 어려울 수 있을 것이다.

나 또한 아파보니 내가 아무리 아프다 설명한들 남이 똑같이 느끼게 하는 건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존재라는 한계를 받아들이는 게 최선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해하는 존재가 그들의 서사를 갖고 말할 수 있도록 하는 것.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기준이 아닌 그들의 사정을 그대로 너그러이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를 생각한다. 


가늠하기보다 이해하기. 
어쩌면 우리가  평생 매일 해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숙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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