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말하지 못한 모든 것
에밀리 파인 지음, 안진희 옮김 / 해리북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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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로 태어나며 엄마는 나와 여동생에게 강조한 건 침묵이었다. 오빠에게는 없었던 침묵으로의 강요.. 내가 강간당할 위험에서 나왔을 때도, 설사 내 의견을 말할 때조차 부모님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말하지 말 것을 종용하셨다.

어느 날 문득, 이런 침묵은 나와 여동생만 겪는 일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생각은 나만의 생각으로 그쳤다. 침묵을 강요받아서일까. 나는 침묵을 깨기가 어려웠다.

『내가 말하지 못한 모든 것』의 저자 에밀리 파인 또한 자신의 오랜 사적인 경험들을 침묵 속에 봉인해야했다. 어린 시절 헤어진 부모님, 알콜중독자 아버지, 강간, 우울증, 불안 등 모든 것들을 한 편의 원고로 서랍 속에 묵혀두었었다. 저자의 원고를 발견한 파트너의 격려로 저자는 자신이 겪은자신의 몸의 모든 것을 봉인해제한다.

앞서 말했듯, 저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이야기한다. 알코올중독자 아버지, 헤어진 부모님 사이에서 중재자로 겪어내야만 했던 아픔. 그 중 가장 나의 관심을 끈 건 저자의 불임에 대한 고백이다. 아이를 갖고 싶어 파트너를 설득하고 배란일에 맞춰 섹스를 하지만 아이가 생기지 않는 자신의 몸을 보며 저자는 모든 기쁨을 잃는다. 임신했다는 동생의 소식에 쉽게 기뻐하기 어렵고 주변의 아이들만 보아도 마음이 아파온다.

나는 고장 났어.

나를 봐.

임신하지 못하는 것은 고장 난 것과 똑같아.

불임은 자신의 몸을 저주하게 되고 섹스 또한 기쁨이 아닌 임신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치열한 배란일 기록과 임신만을 위해 달려오면서 파트너와의 관계는 어려움에 처한다.

계류유산, 불임 등 치열했던 과정이 끝난 후 임신을 포기하기로 결심한 후 비로소 잃어버린 삶을 되찾는다.

저자의 글을 읽으며 며칠 전에 읽은 <굴욕 없는 출산>이 떠올랐다. 임신을 하면서부터 한 개인이 사라져버리는 듯한 굴욕과 소외감을 고백했던 이 책의 경험은 『내가 말하지 못한 모든 것』에서 불임 치료를 받으며 버텨간 저자의 경험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여성의 몸은 쉽게 출산을 위한 도구로 수십 번씩 전락한다. 매번 많은 고통을 감내해야 하지만 의료진들은 그저 당연히 참아야 할 과정으로만 인식한다. 그 차가운 인식 안에 여성은 갈 곳을 잃는다.

책을 읽으면서 이토록 솔직하게 말해도 될까라는 의문이 들만큼 저자는 자신에 대해 담담하게 고백한다. 외로웠던 어린 시절, 자신이 외로웠다고도 잘 인식하지 못했던 그 시절의 경험, 합의하에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던 옛 남자 친구와의 섹스가 사실은 강간이였다는 것도 저자는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저자는 성인이 되서까지 침묵 속에 경험들을 봉인해왔고 봉인된 기억은 저자를 시시때때로 아프게 했다.

침묵을 깨고 말해야겠다며 이야기하는 저자는 비로소 자신의 이야기를 말하고 자신을 위로해준다. 침묵했을 때는 침묵을 지키느라 자신을 위로해주지 못했다. 하지만 침묵을 깨고 말하는 순간 저자는 알게 된다. 자신이 많이 아파왔음을. 많이 힘들었고 상처받았음을 깨닫고 비로소 자신을 다독인다.

엄마는 나에게 오랜 시간 침묵을 강요하셨다. 내가 속도위반을 한 것도 부끄럽다며 조용히 하라고 강요한다. 심지어 여자는 정상적인 몸의 반응인 생리조차도 부끄럽게 여기도록 강요받는다. 무엇이 여자의 몸을 이토록 부끄럽고 침묵하도록 만들었을까. 그리고 왜 우리는 우리의 경험들을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게 만들었을까.

『내가 말하지 못한 모든 것』의 저자 또한 침묵했을 때는 자신의 아픔을 자각하지 못했다. 그렇게 침묵은 상처만을 키운다. 침묵을 깨는 건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큰 용기 뒤에는 온전한 자신의 모습이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말해야 한다. 숨기지 않고 말하기 시작될 때 비로소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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