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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열쇠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265
대실 해밋 지음, 홍성영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2월
평점 :

텔레비젼에서 연일 정치인들의 비리가 쏟아진다. 사람들은 더 이상 성추행, 위장전입, 취업청탁,비자금 등의 이슈등 놀라지 않는다. "정치인들 중 깨끗한 놈 없다며" 이런 것쯤이야 사소한 일이라며 가볍게 넘긴다. 선거를 위한 물밑작업과 치열한 돈놀음은 당연하다. 왜? 정치판이니까. 돈과 힘 없이는 절대 살아날 수 없다. 그래서 정치인에게는 돈 가진 자가 항상 붙고 뒷일을 해결하는 자가 따라다닌다. 선거에 이기기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정의? 그건 선거에 당선된 후 정의를 부르짖으면 된다. 선거 전까지는 정의도 원칙도 없다.
대실 해밋의 소설 『유리 열쇠』는 정치인 폴 매드빅과 그를 도와주는 네드 보몬트가 재선을 앞두고 벌어진 살인 사건의 이야기다. 선거가 있으면 재임 중인 정치인은 자신의 업적을 대중들에게 어필한다. 거리의 전봇대에 매달린 국회의원들의 "~ 철도선 확정" 과 같은 전단지들이 펄럭거리며 마치 자신의 힘으로 해낸 듯 홍보한다. 폴 매드빅 또한 재선을 앞두고 상수도 계약을 따내기 위해 골머리를 앓는다. 자신의 뒷일을 봐주는 네드 보몬트가 친구의 형을 빼달라는 청을 하지만 선거를 앞두고 구설수에 휘말릴 수는 없다. 선거 앞에서는 어떤 실수도 용납할 수 없다.
폴 매드빅은 현직 의원인 헨리 의원의 딸 재닛 헨리와의 결혼을 꿈꾼다. 정치적 협력자인 헨리 의원과 절친하게 지내며 딸 재닛 헨리에게 마음을 두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다. 헨리 의원의 아들 테일러 헨리가 폴 매드빅의 딸 오팔과 사랑하는 사이이기 때문이다. 테일러와 딸 오팔의 교제를 반대하는 이 미묘한 관계가 지속되던 중, 테일러 헨리가 시체로 발견되며 네드 보몬트가 이 사건의 진실을 추적하며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살인 사건 발생 후 네드 보몬트를 비롯해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정체 불명의 편지를 받는다. 단 폴 매드빅 한 사람을 제외하고. 그렇게 사건은 폴 매드빅 한 사람을 지목하며 범인을 확정해 나간다. 이 소설이 정치판이여서일까. 1931년에 쓰여진 소설이지만 소설 속 상황은 현실과 결코 다르지않다. 아니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그대로 옮겨놓은 듯 하다. 정치인은 경찰서장을 압박해 당장 영업 정지라는 초강수를 두고 장사꾼은 뒷돈과 폭력배를 동원해 선거 방해 공작을 펼친다. 이기기 위해서라면 감금, 폭력 등은 대수롭지 않다. 쉽게 배신하고 쉽게 재결합한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뒷돈을 당당하게 요구하고 딸을 감금시키는 것 쯤이야 대수롭지 않다.
흥미로운 점은 이 사건에 전혀 관련이 없어보이는 인물들이 새롭게 등장하며 이야기를 새로운 국면으로 끌어간다는 점이다. 살인 사건 초반 단순히 돈이라고 생각했던 이 일이 폴 매드빅의 딸 오팔의 전면 등장으로 살인 사건의 단서를 제공하고 존재감 없어 보이던 폴 매드빅이 결혼하고 싶어하는 재닛 헨리의 등장은 사건 수사에 전환점을 가져온다. 아니 어쩌면 읽는 독자들에게 '범인은 이 사람입니다'라고 친절하게 알려주는 게 나을 듯하다. 새로운 증인들이 나타나며 이제 범인은 밝혀졌다고 생각한 순간 대실 해밋은 가장 의외의 반전을 선사해준다. 결코 생각할 수 없던 방식으로, 섬뜩하고 정치인들의 가장 비열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방법으로. 또 하나의 반전이 있다면 가장 더러운 인물인 줄 알았던 인물이 의외로 순애보적인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영미 소설 『유리 열쇠』는 정치판의 뒷모습을 그대로 재현한다. 그와 동시에 완전히 선한 인간도, 악한 인간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해 준다. 이익을 위해 또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끊임없이 남을 이용하고 상처받기도 한다. 그들은 이 삶이 당연한 것처럼 여기는 듯하다. 그래서 모든 인물들의 삶에는 결국 공허함만이 남는 듯하다. 어느 누구도 행복해 보이지 않으면서도 개의치 않아하는 이들의 모습은 씁쓸하게 느껴지기까지하다.

유리 열쇠는 자물쇠를 열 수 없다. 자물쇠를 열기 위해 돌리는 순간 압력에 못 이겨 산산조각이 난다. 그 산산조각난 유리 열쇠는 결국 당사자를 불행하게 한다. 이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 모두는 유리 열쇠를 들고 있는 자들이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자신 또는 누구를 상처입히든 상관 없는 유리 열쇠. 이 열쇠를 놓지 않는 한 끊임없이 상처를 주게 될 것이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읽고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