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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 김열규 교수의 열정적 책 읽기
김열규 지음 / 비아북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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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봄날이었던가, 가을이었던가. 햇살이 화사하게 비치는 창가에 기댄 한 금발의 여인이 책을 읽고 있다. 누가 다가오는지도 모른 채 책 읽기에 몰입한 그 여인의 미소를 머금은 얼굴은 환하게 빛이 나고 있습니다. 그녀의 맞은편에 있던 화가가 그 모습에 취해 있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 붓을 열심히 놀리기 시작했다. 너무도 아름다운 광경을 화폭에 담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프랑스 화가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명작 <讀書>를 보고 있노라면 마음까지 따뜻해지는 느낌이다. 그림 속 모델 마고는 연출된 자세를 취한 것이라고 보기 어려울 만큼 온 몸으로 책 읽기의 즐거움을 발산하고 있다. 짐작건대 그녀는 르누아르 집에 놀러왔거나 다른 그림 모델을 하던 중 휴식시간을 이용하여 창가에서 책을 읽다가 그만 몰입하여 한껏 즐거움을 느꼈으리라. 그리고 준비를 마치고 작업을 재개하려던 르누아르가 그녀를 부르려다가 책 읽기에 빠진 마고의 모습에 취해 저도 모르게 그린 그림이 아닐까.
 

▲오귀스트 르누아르(1841~1919), 독서, 1876, 파리, 오르세 미술관

  가끔 이 그림이 떠오를 때면 그녀는 과연 무슨 책을 읽고 있기에 저리도 즐거울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분명 빛이 나는 책을 읽고 있었던 것은 분명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저런 그림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니까. 그리고 내가 그 정도로 몰입하여 책을 읽은 적이 있었나라고 반문하게 된다. 김열규의 <讀書>를 읽으며 나는 그 물음을 다시 한 번 스스로에게 던졌다.

  한 인간을 알기 위한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생활습관, 말과 행동, 사귀고 있는 친구의 면면 등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여기에 하나를 추가한다. 바로 독서습관이다. 어떤 책을 좋아하고 읽는지를 알 수 있다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책이 사람됨을 보증서는 격이라고 할까. 
  김열규 교수는 자타가 인정하는 한국학 석학이다. 그가 어떤 인물인지는 지기가 아니고서는 알 수 없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이 책 <독서>를 통해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도스토예프스키 <지하 생활자의 수기>, 체호프 <내기>, 토마스 만 <토니오 크뢰거>, 소포클래스 <오이디푸스 왕>, 릴케 <말테의 수기>, 슈테판 츠바이크 <에라스무스 전기>. 온전히 그의 것이 되어버린 책들이다. 온전히 그의 것이 되었다는 말은 곧 그의 삶이 되었다는 말과도 같다. 저 책들 중 하나라도 읽어본 사람은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고 또한 어떻게 살아갈지를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그가 어떤 사람인지도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책을 읽어왔을까. 내 기억 속의 최초의 책 읽기는 초등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시절엔 공동 책장을 만드는 것이 학교의 방침이어서 집에 있던 책 중 몇 권을 교실 뒤에 마련해 둔 책꽂이(책장이라고 하기엔 볼품없는)에 꽂아뒀다. 책을 가져올 수 없는 일부 아이들을 제외한 모든 친구들의 책을 모아두니 하나의 조그만 책방이 만들어졌다. 보고 싶었지만 보지 못했던 책도 많았다. 빌려가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지만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에 읽을 수 있는 것만 해도 충분히 만족했다. 그렇게 나는 구전동화와 안데르센 동화의 세계에 입문하게 되었다.
  자식은 부모를 닮고 따라간다는 것은 불변의 법칙인 것 같다. 중학시절 아버지께선 대본소에서 무협지와 만화책을 잔뜩 빌려오셔서 쌓아두고 읽으셨다. 남들처럼 퇴근하면 모여서 대포 한 잔을 걸치지 않고 일찍 집에 들어와 책을 읽으니 오히려 낫지 않을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더 나은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문제는 나도 거기에 심취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문제가 된 것은 당시 무협지와 만화책은 중독성이 강해 한 번 손에 들면 자의로 놓기가 무척 힘들었다는 것이다. 밤을 꼬박 지새우는 날이 많아졌고 그런 날은 학업에 열중할 수가 없었다. 이래선 안 된다고 하면서도 마치 마약과 같은 거부할 수 없는 유혹에 놓기가 몹시 힘들었다. 만화의 경우는 학교로 가져가서 수업을 듣는 중 교과서 안에 감춰두고 읽기도 하는 등(들키면 압수와 함께 벌이 내려짐) 심취했다.
  책을 읽는 속도는 점점 빨라졌고 그렇게 다독을 하던 중 장르도 다양해졌다. 순수문학(한국문학전집), 역사(조선왕조500년), 과학(스페이스 오디세이를 비롯한 소설과 순수과학서적 등), 추리(팬더 추리문학시리즈 50권) 등 범위를 점점 넓혀갔다.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그렇게 읽은 책이 수백 권이요 투자한 돈이 수백만 원이 넘는다. 거의 모든 용돈을 책에만 다 썼었다. 그 중 백미는 역시 추리문학이다. 당시 우리 집안에 추리문학에 빠진 사람이 세 명이 있었으니 막내 고모와 나, 그리고 형이다. 내 기억으로는 해문출판사에서 팬더 추리걸작 시리즈라는 이름으로 50권을 3년에 걸쳐 출간했었는데 그 전권을 대구에 살던 막내 고모가 소유하고 있었다. 책을 읽기 위해서는 당연히 대구로(내 고향은 포항이다.) 원정을 갈 수 밖에 없었고 여름방학이면 짧으면 1주일에서 길면 2주일 동안 우리 셋은 추리소설에 빠져서 헤어날 줄 몰랐다. 그렇게 뤼팽과 홈즈, 포와로는 나와 함께 ‘한여름 밤의 꿈’을 연출했다.

  그렇게 책에 빠져 살던 학창시절 나의 꿈은 당연하게도 문학가였다. 상상력은 점점 커져만 갔고 수많은 인물이 그곳에서 살며 다양한 사건을 일으키고 해결하곤 했다. 그동안 독서를 통해 쌓인 내공이 발현되었는지 나는 국어에 특기를 발휘했다. 다른 어떤 과목보다 국어가 좋았고 그만큼 성적도 잘 나왔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문학도를 꿈꾸던 소년은 지금 온데간데없고 전혀 다른 인물이 지금 여기 존재한다.
  지금 여기 있는 존재에게 물어본다. 지금까지 너에게 책은 어떤 의미였고 독서를 통해 무엇을 추구했는지, 무엇을 얻었는지, 심지어는 많은 책을 읽었다지만 편식한 것은 아닌지. 왜냐하면 지금 당당히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책이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김열규의 <독서>는 나로 하여금 그런 질문을 던지게 만들었다.
  온라인서점 예스24를 통해 연재되었던 칼럼 <침대와 책>에서 정혜윤은 다양한 상황의 사람들에게 그에 걸맞은 책을 이야기했다. 독자들의 뜨거운 반응에 칼럼은 책으로 세상에 나왔다. 독서기를 그런 정도로 적용하려면 얼마나 책을 탐독해야 할까. 나에게 <침대와 책>을 쓰라고 하면 과연 쓸 수 있을까. 아니, 내 자식들을 위한 동화책을 만들라하면 만들 수 있을까.
  김열규 교수는 <독서>를 통해 이런 나에게 한줄기 빛을 비추어 주었다.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지, 또 어떻게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지를 강습했다. 새로운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 그동안 읽은 것을 새롭게 재구성만 해도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김열규 교수는 그 점을 특히 강조했다.

  독서(讀書)란 무엇인가? 책 읽기다. 그렇다면 책은 무엇인가? ‘책(冊)은 일정한 목적으로 쓴 글 및 참고 자료 등을 덧붙여 묶은 것이다. 서사(書史), 서질, 서적(書籍), 서전(書典), 서책(書冊), 책자(冊子), 문적(文籍), 전적(典籍), 편적(篇籍) 혹은 도서(圖書)로도 불린다.’ 백과사전적 정의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실은 것이 바로 책이다.
  책에는 지은이의 지식, 사고, 사상, 지혜, 경험 등이 녹아들어가 있고 독자는 책 읽기를 통해 그것을 들여다보고 배울 수 있다. 간접체험이라는 과정을 통해 많은 것을 얻기도 하고 때론 지은이의 말과 삶에서 위안을 얻어 마음이 평온해지기도 한다. 인생이란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바람직한지, 내가 추구하고자하는 목표가 무엇인지, 책 읽기를 통해서 알아가고 배운다. 삶이 힘들고 지칠 때 책은 따스한 손길을 건네기도 하며 진리탐구의 갈증을 해소해 주기도 한다. 어두운 숲속을 밝혀주는 촛불과 같다. 그 불빛에 의지해서 사람은 진리를 찾아 떠나는 게 아닐까. 그런 이유로 우리는 책을 읽는 것이 아닐까.
  책을 만든 사람은 거기에 마음을 담아 세상에 내 보낸다. 품을 떠난 책은 더 이상 만든 사람의 것이 아니다. 새로운 둥지를 찾아 떠난 책은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리며 많은 것을 담고 또 보금자리를 찾아 떠난다. 세월의 흐름과 함께 책도 사람도 그렇게 성장한다. 르누아르가 마고가 책을 읽는 마음을 화폭에 담아 세상 사람들에게 감동을 전했듯이 나도 마음을 담은 책 읽기를 통해 얻은 감동을 전할 수만 있다면 삶은 보다 풍요로워질 것이다. 그리고 그런 내 마음이 담긴 책은 세월과 함께 사람들과 영원히 함께 할 것이다. ‘너희가 진리를 알게 되리라.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요한복음의 구절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한 권의 책은 진리를 담아 그렇게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될 것이다. 김열규의 <독서>도 이제 이 여행의 첫걸음을 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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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더미의 유산 - 한국전쟁에서 이라크전쟁까지 세계 역사를 조종한 CIA의 모든 것
팀 와이너 지음, 이경식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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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톰 클랜시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패트리어트 게임>에서 정보부 잭 라이언-해리슨 포드 분-의 뛰어난 활약상을 본 나는 감탄했다. 역시 미국이란 나라는 대단한 구석이 많구나. 우리는 언제 저런 정보부와 요원을 기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품으며 미국에 대한 부러움을 느꼈다. CIA 요원이 되어 세계를 누비는 꿈을 그려보기도 했다. 그 감정은 후속작인 <긴급명령>에서 더 선명한 형상을 나타냈다.

  어느 날 미국의 CBS 전파를 타고 한 드라마가 방송이 되었다. 그 주인공은 바로 <CSI 과학수사대>로 화려한 도구와 과학적 기법, 그리고 체계적인 방법으로 수사를 진행하여 각종 범죄를 해결하는 활약상은 시청자들의 눈을 사로잡아 큰 인기를 끌었다. 또한 국내 방영 후 시청자들로부터 CSI에 들어가 일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문의가 폭증했다고 한다. 드라마에서 보여준 모든 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감안해도 미국이란 나라에 다시 한 번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저 정도쯤 되니까 세계경찰국가를 자처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
구분 정보기관
설립연도 1947년
소재지 미국 버지니아주 랭글리
설립목적 국가적 비밀첩보 활동
주요활동 정책제공, 정보수집, 특수공작
94년 책정 예산 30억 달러, 직원 수 약 1만5천 명 (추정)

  정보수집분석·첩보활동·특수공작의 대명사 미국 중앙정보국(CIA). 능력·자금·조직 면에서 세계 최대의 정보기관. 한때 개인적인 통화내역까지 낱낱이 감청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가질 정도로 그들은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해방 전후 한국의 역사-이승만 정권 수립, 한국전쟁, 박정희 전 대통령 암살, 민주화 운동 등-와 긴밀한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측되는 미국이 자랑하는 이 최고의 정보기관이 사실 거짓과 실패로 점철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과연 믿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요원들은 형편없고 탄생 후 60년이 흐르는 동안 왜곡된 정보에 의한 판단 착오로 한국, 중국 및 기타 많은 나라의 뜻있는 국민들이 실험실의 쥐처럼 덧없이 희생되었다면 과연 믿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정보를 잘못 분석하여 한국전쟁에서 하마터면 패전할 뻔했고 대통령의 입맛에 맞는 정보를 제공하여 사실상 이라크전쟁을 초래했다면 과연 믿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여기 한 권의 책으로 말미암아 CIA에 대해 그동안 품어 왔던 모든 생각-추측-이 모래성처럼 힘없이 무너져버렸고 그동안 얼마나 무지했던가를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1988년 미 국방부 비자금 탐사보도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뉴욕타임즈 기자 팀 와이너의 생생한 현장취재로 탄생한 <잿더미의 유산-한국전쟁에서 이라크전쟁까지 세계 역사를 조종한 CIA의 모든 것>은 그런 나의 무지를 산산이 부숴버렸다. 심지어 CIA에 대한 불신을 넘어 미국이 과연 세계경찰국가로써의 자질이 있는지에 대한 의심까지 하게 되었다.

  독재정권을 지원하여 그들이 전 세계 수백만 명을 학살하는데 일조했고 국익을 위해 비밀공작으로 이슬람 근본주의 단체에 무기를 제공하였지만 결국 그 총구를 미국으로 향하게 만들었으며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입맛에 맞는 보고서를 만들기 위해 거짓 정보를 생산하여 이라크전쟁을 일으키게 하는 등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중요한 현대사를 모두 부정하게 하는 충격적인 내용을 이 책은 담고 있다.

  현 세계의 유일한 초강대국인 미국의 현 위치를 만드는 데 CIA는 분명 일정부분 기여를 했다고 알고 있었다. 비록 그것이 오해와 무지로 인해 만들어진 허울 좋은 포장에 힘입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런 CIA가 한국전쟁·베트남전쟁·아프가니스탄전쟁·이라크전쟁에서 전쟁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정보를 제대로 수집하지 못했고 잘못 분석하는 실수까지 저질러 미국의 대의명분을 잃게 하고 이미지를 실추시켰다. 뿐만 아니라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하면 반대진영일지라도 무기를 제공하는 사상적으로 용납하기 어려운 작전을 수행하기도 했다. 냉전시대 베트남 공산당의 인도차이나 반도 통일을 견제하기 위해 다른 공산진영인 캄보디아에 각종 원조를 한 사례도 있다. 

  남의 나라가 죽을 쑤든 콩을 태우든 우리만 잘 하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할 사람이 혹시 있을지도 모르겠다. 왜 이런 사실이 문제가 되고 중요하냐면 바로 한국이 대북 정책을 수행하는 데 있어 거의 모든 정보를 이런 미국-CIA-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제공하는 정보를 바탕으로 그동안 대북정책이 진행되어 왔고 때론 수정되기도 했다. 정보의 주제공처인 CIA의 대북 전문요원 중 북한에 가 본 경험이 있는 자가 거의 없다는 사실도 모른 채 말이다. 그들은 냉전시대 소련에 대한 정보수집에 수백 억 달러를 쏟아 부었지만 손에 쥔 정보는 역공작과 거짓으로 가득 찬 휴지조각뿐이었다. 소련의 붕괴를 예측하지도 못했으며 덕분에 백악관이 크렘린에 대해 늘 두려움에 떨게끔 만들었다. 정작 크렘린에서는 미국과 세계를 두고 전쟁을 할 생각과 능력이 없다는 사실도 모른 채 말이다. 북한에 대한 정보도 마찬가지였다. 요원을 북한에 침투시키는 데 실패한 CIA는 김일성이 죽을 것이라고는 예상도 못했으며 그의 사후 북한정권이 곧 붕괴될 것이라는 주장을 계속 하고 있지만 김정일 정권은 붕괴될 기미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이에 대해 팀 와이너는 도널드 그레그-전 CIA 서울지부장·주한 미 대사-의 말을 빌려 "미국 첩보 역사에서 북한은 가장 오래 지속되는 실패 사례"라고 명시했다. 

  프랭크 와이즈너와 같은 공상주의자가 정책조정실 책임자로 오랫동안 기용되는 곳, 처벌해야할 전범이었던 기시 노부스케와 손을 잡고 자민당을 창당하는 등 밀월관계를 주도한 앨런 W. 덜레스를 국장에 임명되는 곳, 그런 곳이 바로 CIA다. 자금을 제외한 정보 작전의 모든 면에서 한 수 위였던 소비에트가 스스로 붕괴되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까? 보다 큰 역량을 가지고도 정작 사용하는 방법이나 제대로 투사하는 방법은 모르는, 즉 어린아이 손에 광선검을 쥐어준 예가 미국이 아닐까. 지금의 위치에 오른 것이 순전히 행운의 여신이 손을 들어줬기 때문은 아닐까. 북한에 직접 가보지도 않고서 CIA 북한보고서-Kim Il-song's North Korea-와 같은 자료를 만들고 이를 비밀문서로 분류했다고 하니 무지한 것인지 무식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이런 보고서를 지금까지 발간되었던 어떠한 북한 관련 서적보다도 광범위하고 자세하다는 평가를 내린 우리나라에 대해서는 무어라 말을 해야 할까. 그리고 미국인들은 이런 CIA의 실체를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혹시 영화에서 보여지는 CIA의 모습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닐까?

  수많은 침투 시도를 했지만 성공을 하지 못해서 포기한 것일까. CIA는 현장의 중요성을 망각하고 그저 책상 앞에 앉아서 세계를 들여다보고 조정하려는 시도를 그동안 계속 해 왔다. 이는 정보기관이라면 절대 지양해야할 점이고 그것을 무시했던 그들은 실패의 역사를 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숫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반성할 줄 몰랐고 그것은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역사가 주는 교훈을 깨닫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강대국의 오만일까.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다만 거짓을 사실로 만들고 실패를 포장하여 성공으로 둔갑시키고 최고 지휘자의 입맛에 맞는 정보만 보고하여 그를 기쁘게 한다는 CIA의 이상한 전통은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해서도 안 되며 절대 배워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 ‘실패한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장차 CIA와 같은 신세가 될 지도 모른다.’라는 교훈도 얻게 되었다. 결국 CIA는 현재 다수의 권한을 빼앗기고 국방부 하부조직으로 전락하여 2류 정보기관으로 존속하고 있는 처지로 전락했다. 화무십일홍이라는데 그들은 60년이나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고도 나라를 오히려 더 강하게 만들었으니 조선시대 장동김씨의 60년 세도가 나라를 망친 것에 비교하면 참으로 씁쓸한 생각이 든다. 

  다시는 진주만 공습과 같은 악몽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트루먼 전 대통령에 의해 만들어진 최고의 정보기관으로 포장되었던 CIA는 9.11 테러 등을 예측하지 못하여 진주만 공습보다 더한 악몽을 자국민에게 선물했다. 트루먼 전 대통령처럼 후회하지 않으려면 우리도 제대로 정보기관을 운영해야 할 것이다. 손에 든 칼이 일으키는 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그저 들리는 대로만 믿는다면 그 칼은 결국 주인의 피를 보게 할 것이다. 손자의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는 명언을 미국의 정보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여 대북 정책을 수행하는 정부는 똑똑히 새겨야 할 것이다.


  현재의 미국발 금융위기는 전 세계를 휘청거리게 만들고 있고 그것은 미국에 대한 인식을 새삼 바꾸어놓고 있다.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를 외치며 각국을 동조시켰던 미국, 그들의 경제가 흔들리며 나타나는 연쇄반응이 앞으로 세계정세에 어떤 변화를 불러올지 자못 기대가 된다. 

  팀 와이너는 "미국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지지 못한다면 강대국 지위에서 언젠가는 밀려날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것은 비단 미국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나아가 국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만 있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잿더미의 유산>이 가지는 가장 큰 의미가 바로 거기에 있다고 생각된다. 우리 정부도 책상에 앉아 누군가 제공하는 통계치만 들고 현재 위기는 생각보다 심각하지 않고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만 하지 말고 국민들이 느끼는 불안이 어느 정도인지, 기업이 얼마나 많이 힘들어 하고 있는지를 현장에서 직접 본 후 판단하여 올바른 정책을 세워 주기를 바란다. 그래서 현재의 위기를 슬기롭게 헤쳐 나가기를 바란다.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 대사는 "적에 대한 무지의 공백을 편견으로 채우는 위험한 의식이 미국에는 분명히 존재한다"고 경고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지 않고 편견으로 채워 안다고 착각할 경우 어떤 결과가 발생하는지 우리는 CIA의 역사를 통해 분명히 알게 되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지만 편견을 진리로 착각할 경우 자유는 머나먼 안드로메다에 존재하는 신기루가 될 것이다. 위기에 처한 CIA. 그들이 새롭게 태어나려면 그들이 직접 본부 로비에 새긴 요한복음의 구절을 명심해야할 것이다. "너희가 진리를 알게 되리라.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그리고 앞으로 인터넷에서 떠돌아다니는 CIA에 대한 환상과 잘못된 정보, 그리고 인식이 상당부분 바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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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즈 강남대로점에 약속 시간보다 다소 늦게 도착했다. 입장하니 김탁환 작가는 강연을 막 진행하고 있던 중이었다. 내용을 들어보니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은 듯했고 그래서 중요한 내용을 놓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의 이전 소설도 역사물 흔히 팩션이라고 불리는 장르였다. 이번 <혜초> 역시 왕오천축국전을 바탕으로 극적인 드라마로 쓴 책이다. 하지만 그는 여느 때와는 달리 쓰기가 무척 힘들었다고 한다. 워낙 오래 전 인물이라서 그런 것인가? 하고 생각했지만 그건 소설을 쓰는 데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했다. 바로 왕오천축국전이 여행기였고 너무 방대한 지역을 아우르고 있었기에 더 힘들었다는 것이다. 불교를 숭상하는 국가뿐 아니라 이슬람권역까지 혜초스님은 들어갔고 그 당시 그와 같은 행동은 매우 위험했다. 목숨을 걸어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 그의 발자취를 뒤따르자니 아주 죽을 맛이었을 게다.

그래서 김탁환 작가는 혜초의 삶을 시간의 축이 아니라 공간의 축을 따르는 방식을 취했다고 한다. 이것은 왕오천축국전이 여행기였기에 가능한 방식이었을 것이다. 또한 데칼코마니 기법을 어느정도 반영하였는데 과거와 미래라는 양 날개가 현재라는 몸뚱이를 하늘로 끌어올려 날게 하는 역할을 하는 상상을 했다고 한다. 우연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필연의 이어짐으로 이야기를 써나간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돌아오지만 않는다면 여행은 멋진 것이다.'는 괴테의 말을 인용하며 혜초 스님이나 자신이나 성공적인 여행을 하지 못했음을 강조했다. 이번 소설을 쓰면서 마지막 여행이자 글쓰기이기를 바라며 <혜초>가 최고의 작품이 되기를 꿈꿨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다음 작품을 구상하는 것이다. 그것을 볼 때 쳇바퀴 도는 듯한 인생은 스스로 끝을 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 아닐까.

여행과 글쓰기 그리고 인생. 다른 단어이지만 서로 닮아 있는 말들. 김탁환 작가는 혜초 스님이 되어 여행을 해가며 이 세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독자들과 나누고자 <혜초>를 쓰지는 않았을까. 젊은 소설 <혜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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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발전을 요구한다 - 장하준의 경제 정책 매뉴얼
장하준.아일린 그레이블 지음, 이종태.황해선 옮김 / 부키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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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프랑스
19세기 영국
20세기 미국

위는 각 세기를 대표하여 세계를 경제로 주름잡은 대표국가를 표시한 것이다. 다른 말로 패권국가들이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돈 잘 버는-’잘 사는’이 아님-국가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는 나라들이기도 하다. 

영국은 산업화에 가장 먼저 성공을 거둔 후 좁은 시장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적극적인 해외팽창 정책을 펼쳤다. 자국의 산업이 만들어 낸 물건을 내다팔기 위해 아프리카, 중동, 아시아로 손길을 뻗쳐 문호를 개방하라고 요구했다. 명목은 ’자유무역’ 이다. 상대가 듣지 않으면 강력한 함대와 군대를 이용하여 강제로 개방했다. 이른바 식민지 경영의 시작이다.

신세계를 찾아 떠난 유럽인들이 세운 미국은 영국의 심한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쟁을 불사했고 결국 독립을 쟁취했다. 그 직후 문호를 닫아 걸고 강력한 산업 정책을 펼쳐나갔다. 그리고 그들도 다른 열강보다 다소 늦은 19세기 말엽부터 대외 팽창으로 방향을 수정해나갔다. 하지만 그들은 현재 세계를 경영하고 있는 유일한 패권국가가 되었다.

위에서 예로 든 국가들의 공통점은 개도국의 상태일 때 중앙정부 주도하에 ’보호주의’ 정책을 펼쳤다는 것이다. 그러나 산업화에 성공한 이후 ’자유무역주의’과 ’자유방임주의’ 그리고 ’자유금융주의’로 선회하여 세계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독일과 일본은 미국의 유치 산업 보호 정책을 성공적으로 활용하였고 그 중 일본은 미국의 기술 이전을 바탕으로 세운 소니와 도요타로 세계를 주름잡았고 미국조차 넘어섰다.

한국은 어떤가. 살기 위해 그리고 최빈국이라는 딱지를 떼어내기 위해 국가 주도 하에 각종 기간 산업을 유치했고 그렇게 유치한 산업은 여러 정책의 보호 아래 착실하게 성장했다. 그 결과 삼성전자, LG전자, 현대기아자동차, 포스코, 현대중공업, 대우조선해양 등 세계를 호령하는 글로벌 기업들이 탄생했다. 여기에 대해서는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이제 세계는 자유화 시대다. 신자유주의를 실시하자는데 문제가 될 것이 무에 있는가. 그 자체로는 문제될 것이 없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신자유주의 개혁을 요구하는 진영의 ’이중성’에 있다.

’워싱턴 컨센서스’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 진영에서는 미국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모델이야말로 모든 개발도상국이 모방해야 할 이상적인 형태라고 주장한다. 신자유주의 정책을 채택한 개발도상국들은 경제적 번영을 누려 왔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심지어 정치인과 공무원은 신뢰할 수 없으니 국제기구-IMF, 세계은행, WTO 등-과 정치적으로 독립적인 국내 전문 기관에게 정책을 맡기는 것이 옳은 방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서 동아시아 모델은 그 지역의 독특한 역사적, 정치적, 문화적 조건 덕분에 성공한 시스템이니 타지역에서는 사용할 수 없다고 못을 박으며 영미형 모델이야말로 보편적 시스템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들이 이렇게까지 주장하는 신자유주의적 모델이란 무엇인가. 바로 모든 경제활동을 시장의 자율에 맡기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는 국가의 개입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것을 잘 따르면 산업화에 성공하여 선진공업국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다는 논리다. 이들은 자신들이 그랬으며 또한 이를 따르는 개발도상국도 성공했다고 주장한다. 최근 25년 간 이루어놓은 각종 수치-높은 성장률, 낮아진 빈곤층 비율 등-을 예로 들고 있다.

저자들은 여기에 일침을 놓는다. 반대되는 진영의 대표로서 이 허황된 논리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고 나섰다. 그들은 초기 영국과 미국이 국가적 차원에서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수입을 금지시키고 수출을 장려하는 등 이른바 보호주의 정책을 펼쳤으며 경제대국이 된 연후에야 자유주의를 받아들였다고 반론한다. 그러한 과거를 가진 국가들이 선진국이 되었다고 태도가 돌변해 신자유주의를 주창하고 더 나아가 강요하는 것을 비판한다. 또한 지난 25년 간 국가별 빈부의 격차는 더 심화되었고 심지어 국가 내부에서조차 빈부의 격차가 크게 벌어졌다며 수치의 허상에 사로잡히지 말라고 주장한다. 지난 세월 세계에서 가장 빈곤층이 많은 국가는 중국과 인도였다. 세계 인구의 1/3 이상을 보유한 두 국가는 개혁 개방에 박차를 가했고 빈곤층은 줄어들었다. 중국과 인도는 그렇게 세계적인 빈곤 통계에 큰 기여를 했다. 하지만 이 두 나라를 통계에서 제외시키면 결과가 어떻게 나올까. 미루어 짐작이 가능할 것이다. 저자들은 이렇게 수치의 허상에 사로잡히지 말라며 신자유주의의 논리를 반박하고 있다.

심지어 장하준 교수는 <사다리 걷어차기>에서 19세기 독일 경제학자인 프리드리히 리스트의 주장을 근거로 신자유주의 진영을 통렬히 비판했다. 리스트는 영국이 주창한 자유무역주의라는 것은 사다리를 타고 정상에 오른 사람이 뒤따르는 사람이 정상에 오를 수 없도록 사다리를 걷어차버리는 것과 똑같다고 말했다. 그는 이것을 ’사다리 걷어차기’라고 표현하며 영국을 비판했다. 리스트의 주장에 따르면 신자유주의를 따르는 개발도상국들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정상에 오를 수 없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미국은 그 정도가 더 심하다고 장하준 교수는 지적한다. 이것이 바로 현 신자유주의를 주창하는 강대국의 실체이며 이중적인 면모이다. 장하준 교수는 신자유주의의 정확한 실체를 모르고 받아들이는 것을 경계하라고 주문한다. 그 점을 독자들에게 주지시키고 싶은 것일 게다.

<나쁜 사마리아인들>에서 장하준 교수는 이미 신자유주의 이론의 맹점을 통렬히 비판했다고 한다. 조목조목 이유를 들어 잘못된 점을 지적한 그는 무언가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덴버 대학교의 아일린 그레이블 교수와 함께 <다시 발전을 요구한다>라는 이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여기서는 <나쁜 사마리아인들>에서 부족한 점을 보완했다. 바로 ’대안’을 제시한 것이다. 그것도 무역, 산업, 민영화, 지재권, 국제 민간 자본 흐름, 금융 규제 등 거의 모든 경제 분야를 망라한 정책 대안들이다. 나는 이 대안들을 보면서 현재 세계 경제와 한국 경제 상황을 비교해가며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었다. 신자유주의 진영에서는 국영기업의 부실은 민영화말고는 대안이 없는 것처럼 주장하는데 과연 그럴까? 민간에는 부실기업이 없다는 말인가? 규제를 철폐하고 장벽을 철거하기만 하면 기업은 성장하고 글로벌 자본의 적극적인 투자로 연결되는 것일까? 물가를 잡기위해 중앙은행이 단행한 금리인상이 과연 옳은 선택일까? 등 많은 경제 현안에 대해 대안을 쏟아내고 있다. 특히 현 정부의 주요 현안인 민영화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환율과 통화 정책에서는 뭔가 알 수 없는 통쾌함마저 느꼈다.

물론 장하준 교수와 아일린 교수의 대안과 주장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서문에서 이들은 다원주의와 겸허한 정신을 특별히 강조했다. ’내 이론만이 유일하게 옳다.’는 신자유주의자들의 오만을 거부하고 겸허한 자세로 신자유주의의 대안을 찾는 이들에게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라고 했다. 이보다 더 나은 대안이 나올 수 있음이기때문이다.

최근 나라를 지키기에 바쁜 국방부에서 읽기에 좋은 도서를 몇 권 선정했다고 한다.  국방부가 추천한 도서 23選에는 이대로 잊혀지면 안 될 그런 책들도 많았다. <나쁜 사마리아인들>도 거기에 포함되었다. 이에 국방부에 감사의 말을 전한다. 그리고 그 리스트에 오른 저자와 출판사에서 공동성명으로 항의표시를 하며 선정을 철회하라고 요구했다고 하는데 내 생각에는 뭔가 잘못된 것 같다. 되려 감사를 해야하는 것이 아닐까. 국방부 추천도서 23選에 대한 기사가 나간 후 대중의 관심이 증폭되어 판매부수가 오히려 증가되었으니 이는 반길 일이 아닌가. 항의를 해야할 곳은 리스트에 오를만한 책을 출간하지 못한 다른 모든 출판사와 저자들이 해야하지 않을까. 특정 출판물만 그렇게 홍보를 대신 해 주어 그들의 책이 덜 팔리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나라를 지키는 데도 모자라 이렇게 도서까지 추천하는 국방부는 아마 국가기관 중 가장 바쁜 곳이 아닐까 생각한다. 군인들이야 그렇게 단속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국민들이야 어디 그럴 수 있을까. 이제 국민들을 ’13579’로 보지 말아달라는 주문을 하고 싶다. 우리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시대는 21세기 첨단시대에 접어들었다. 화성에도 물이 있다는 증거를 발견해 낸 우주 개척의 시대다. 하지만 아직 우리는 냉전 종식 후 사라졌다고 믿은 이데올로기의 시대를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신자유주의 진영에서 우리만이 옳다며 주장하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미소 양 진영으로 나뉘어 서로의 이념을 강요한 그 시대와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다. 이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여러 국제 기구를 내세워 끊임없이 개발도상국을 압박하고 있다. 여기서 자유로울 수 있는 나라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저자들이 제시한 대안 중 급변하는 세계 경제에 적용하기 힘든 부분도 있을 것이고 각종 국제 협약과 기구들 그리고 선진국 정부들이 가하는 압박에 어쩔 수 없이 따르는 나라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 저자들은 이렇게 조언한다.  "우리는 개발도상국이 이런 세력들의 힘과 영향력이 절대적이고 변하지 않을 것처럼 여기며 행동하는 것은 자국의 운명에 치명적인 동시에 정확한 판단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런 식으로 판단하고 행동한다면 현재의 개발도상국에는 희망이 없다."

세계에는 수많은 나라가 있다. 그리고 처한 환경과 상황은 모두 다르다. 산업화를 이룬 나라들 역시 모두 저마다의 환경에서 성공했다. 그 때의 상황에 적합한 정책을 스스로 만들어 가며 이룬 성과인 것이다. 이러할진데 보편적인 법칙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동전은 한 면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세상도 그렇다. 모든 현상에는 동전처럼 앞과 뒤, 양면을 가지고 있다. 보다 생각의 폭을 넓히고 싶은 사람에게 감히 일독을 권장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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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 1 - 한국 대표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정끝별 해설, 권신아 그림 / 민음사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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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집어들자마자 목차를 확인하고 150페이지를 펼쳤다.
그곳엔 내가 학창시절 꿈꿨던 유토피아, 아라비아 사막이 펼쳐져 있었다.
오직 알라의 신만이 머무는 열사(熱沙).
그곳에 선 사람에게 허락된 것은 ’나’란 존재와의 대면 뿐.
그리고 이루지 못하면 회한 없이 백골로 뒹굴 각오.

시인 유치환은 삶의 애증을 다 짐 지지 못하여 생명이 부대낄 때 병든 몸을 이끌고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가자고 했다. 하지만 나는 학업과 진학에 대한 주위의 기대어린 시선,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갈증에 못 이겨 그곳으로 떠나고 싶었다.

시인처럼 구하던 진리를 찾아 고독에 몸부림치며 헤매다보면 어느 이름없는 모래언덕에 서서 옷자락을 나부끼고 홀로 서 있을 그런 순간이 찾아오겠지. 그리고 나는 필연적으로 무언가와 대면하게 될 테지. 그런 꿈을 꾸게 한 시가 바로 유치환의 <생명의 서(書)>이다.

해설가 정끝별 교수는 유치환 시인은 편지의 고수이고 사랑의 시인이지만 ’의지의 시인’, ’허무의 시인’의 면모가 더 진면목에 가깝다고 한다. 이 <생명의 서>가 바로 그 정신의 정수를 보여 준다고 한다. 비록 다른 사람들에게 그는 사랑의 시인일지 모르지만 나에게 그는 ’탐구의 시인’, ’의지의 시인’이었다. 나에게 유치환은 <생명의 서>가 전부였고 그것은 나의 지향점이 되었다. 그 시절 나를 지탱하게 해 준 버팀목 중 하나인 그가 담겨 있었기에 나는 이 시집을 펼쳐 들었다.

하루에 한두편 씩 순서에 상관없이 읽고 싶은 시를 찾아서 읽는다.
어제는 천상병 시인의 <귀천>과 정지용 시인의 <향수>를
오늘은 기형도 시인의 <빈집>과 오규원 시인의 <한 잎의 여자>를
내일은 박노해 시인의 <노동의 새벽>과 .................
글피는 ....................
 
이 시집은 한 명의 작가가 쓴 일련의 흐름을 가진 시집이 아닌 50명에 달하는 시인의 대표작이 실린 작품이다. 그러니 읽고 싶은 데로 읽으면 된다. 읽기 싫은 부분은 건너뛰어도 괜찮다. 읽으며 생각하고 읽은 후 이미지를 떠 올리며 시인의 시선과 나의 시선을 맞춰본다.
그는 무엇을 보았을까?
나에게 보이는 것은 무엇인가?
시인과 내가 같은 물상을 보고 있더라도 받아들여지는 의미는 다를 것이다. 심지어 어제의 느낌과 오늘의 느낌조차도 다를 수 있다. 여기서는 꼭 이런 것을 봐야한다는 둥 그런 고정관념이 있다면 모두 집어 던져버려라. 10명의 사람이 있으면 10가지 생각이 있을 수 있다는 논리는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이 시집이 장점은 정끝별 교수의 친절한 해설에 있다. 178P 이하석 시인의 <투명한 속>에 대한 해설 중 이런 대목이 있다. 
"1970년대 후반 그가 살던 대구 주변에 널린 산업 쓰레기 현장을 흑백사진으로 찍어 그 사진을 바탕으로 시 작업을 했다고 한다."
이하석 시인이 ’극사실주의’로 평가받는 시를 쓰게 된 배경인 셈이다. 그는 저런 환경속에 있었기에 그런 시상을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일테다. 그외 해설가의 평론가적인 시각으로 바라본 시에 대한 감상이 담겨있는 것이 읽는 즐거움을 배가시켰다. 또한 일러스터 권신아의 그림은 시의 핵심 이미지를 담아내어 시를 그림보듯 감상하는 재미를 주었다. 하지만 어떨 땐 나만의 이미지 떠올림을 하는데 그것이 방해가 되기도 했다. 아쉬웠다.

시는 꽃과 같고 계절과 같고 여자와도 같다. 김춘수 시인은 <꽃>에서 존재의 의미와 관계 맺기를 노래했고 정호승 시인은 <별들은 따뜻하다>에서 가난과 거짓속에서도 따뜻함을 희망했고오세영 시인은 <그릇 1>에서 날카로움 속에서 혼의 성숙을 노래했다.

심지어 같은 시대에 태어난 시일지라도 담은 의미는 다르다. 이상화 시인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는 광복에 대한 희망이 담겼고 김소월 시인의 <진달래꽃>에는 별리의 슬픔조차 사랑으로 승화시켰다.  물론 님이 지칭하는 의미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겠다.

이념의 시대인 1980년대 등장한 시는 또 어떤가. 마종기 시인의 <바람의 말>, 과재구 시인의 <사평역에서>, 최승호 시인의 <대설주의보>. 모두 생긴 것이 제각각이다.

백석 시인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이란 시는 이게 시인가, 수필인가하며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산문시다.

젊은 김경주 시인부터 이미 작고한 시인들에 이르기까지 이 시집은 가히 시의 백화점이라 할만하다.

혹자는 이럴지도 모르겠다. 일제시대나 이념의 시대에 탄생한 시가 왜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지 않았느냐고. 시는 이래야한다고 정의하지 말자. 누군가가 당신은 그래야한다고 정의한다면 그게 온전히 당신이 될 수 있을까. 시에는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학창시절에는 정답이 존재했다. 아니 모든 시에는 정답이 있었다. 중요한 어구, 행간에는 밑줄을 치고 그 의미를 받아 적으라했다. 그리고 우습게도 그렇게 시험이 출제되었고 그것이 정답으로 처리되었다. 이의는 받지 않았고 있을 수도 없었다. ’왜?’라는 근원적인 물음을 차단했던 시절의 일이다. 오래되지도 않았다. 20년 전 일이다. 한국의 교육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에서 정끝별 교수의 해설이 정답은 아닐 것이다. 받은 느낌이 다른데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 시를 읽는 순간 그 시의 주인은 이미 나 자신이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 나만의 의미를 가져도 잘못된 것은 아닐 것이다.

시시지락(詩詩之樂)이라고 했다. 시 속에서 즐거움을 찾고 그 자체로 즐기면 그만인 셈이다. 거기다 마음의 양식으로 삼을 수 있으면 더 무엇을 바랄 것인가. 시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여 고정시켜버린다면 그것은 더이상 시가 아닌 다른 무엇일 것이다. 살아있지 못한 시는 더이상 시가 아닌 것이다

2권에는 또 어떤 시의 세계가 펼쳐져있을지 생각하면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시시지락(詩詩之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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