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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 1 - 한국 대표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정끝별 해설, 권신아 그림 / 민음사 / 2008년 6월
평점 :
책을 집어들자마자 목차를 확인하고 150페이지를 펼쳤다.
그곳엔 내가 학창시절 꿈꿨던 유토피아, 아라비아 사막이 펼쳐져 있었다.
오직 알라의 신만이 머무는 열사(熱沙).
그곳에 선 사람에게 허락된 것은 ’나’란 존재와의 대면 뿐.
그리고 이루지 못하면 회한 없이 백골로 뒹굴 각오.
시인 유치환은 삶의 애증을 다 짐 지지 못하여 생명이 부대낄 때 병든 몸을 이끌고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가자고 했다. 하지만 나는 학업과 진학에 대한 주위의 기대어린 시선,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갈증에 못 이겨 그곳으로 떠나고 싶었다.
시인처럼 구하던 진리를 찾아 고독에 몸부림치며 헤매다보면 어느 이름없는 모래언덕에 서서 옷자락을 나부끼고 홀로 서 있을 그런 순간이 찾아오겠지. 그리고 나는 필연적으로 무언가와 대면하게 될 테지. 그런 꿈을 꾸게 한 시가 바로 유치환의 <생명의 서(書)>이다.
해설가 정끝별 교수는 유치환 시인은 편지의 고수이고 사랑의 시인이지만 ’의지의 시인’, ’허무의 시인’의 면모가 더 진면목에 가깝다고 한다. 이 <생명의 서>가 바로 그 정신의 정수를 보여 준다고 한다. 비록 다른 사람들에게 그는 사랑의 시인일지 모르지만 나에게 그는 ’탐구의 시인’, ’의지의 시인’이었다. 나에게 유치환은 <생명의 서>가 전부였고 그것은 나의 지향점이 되었다. 그 시절 나를 지탱하게 해 준 버팀목 중 하나인 그가 담겨 있었기에 나는 이 시집을 펼쳐 들었다.
하루에 한두편 씩 순서에 상관없이 읽고 싶은 시를 찾아서 읽는다.
어제는 천상병 시인의 <귀천>과 정지용 시인의 <향수>를
오늘은 기형도 시인의 <빈집>과 오규원 시인의 <한 잎의 여자>를
내일은 박노해 시인의 <노동의 새벽>과 .................
글피는 ....................
이 시집은 한 명의 작가가 쓴 일련의 흐름을 가진 시집이 아닌 50명에 달하는 시인의 대표작이 실린 작품이다. 그러니 읽고 싶은 데로 읽으면 된다. 읽기 싫은 부분은 건너뛰어도 괜찮다. 읽으며 생각하고 읽은 후 이미지를 떠 올리며 시인의 시선과 나의 시선을 맞춰본다.
그는 무엇을 보았을까?
나에게 보이는 것은 무엇인가?
시인과 내가 같은 물상을 보고 있더라도 받아들여지는 의미는 다를 것이다. 심지어 어제의 느낌과 오늘의 느낌조차도 다를 수 있다. 여기서는 꼭 이런 것을 봐야한다는 둥 그런 고정관념이 있다면 모두 집어 던져버려라. 10명의 사람이 있으면 10가지 생각이 있을 수 있다는 논리는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이 시집이 장점은 정끝별 교수의 친절한 해설에 있다. 178P 이하석 시인의 <투명한 속>에 대한 해설 중 이런 대목이 있다.
"1970년대 후반 그가 살던 대구 주변에 널린 산업 쓰레기 현장을 흑백사진으로 찍어 그 사진을 바탕으로 시 작업을 했다고 한다."
이하석 시인이 ’극사실주의’로 평가받는 시를 쓰게 된 배경인 셈이다. 그는 저런 환경속에 있었기에 그런 시상을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일테다. 그외 해설가의 평론가적인 시각으로 바라본 시에 대한 감상이 담겨있는 것이 읽는 즐거움을 배가시켰다. 또한 일러스터 권신아의 그림은 시의 핵심 이미지를 담아내어 시를 그림보듯 감상하는 재미를 주었다. 하지만 어떨 땐 나만의 이미지 떠올림을 하는데 그것이 방해가 되기도 했다. 아쉬웠다.
시는 꽃과 같고 계절과 같고 여자와도 같다. 김춘수 시인은 <꽃>에서 존재의 의미와 관계 맺기를 노래했고 정호승 시인은 <별들은 따뜻하다>에서 가난과 거짓속에서도 따뜻함을 희망했고오세영 시인은 <그릇 1>에서 날카로움 속에서 혼의 성숙을 노래했다.
심지어 같은 시대에 태어난 시일지라도 담은 의미는 다르다. 이상화 시인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는 광복에 대한 희망이 담겼고 김소월 시인의 <진달래꽃>에는 별리의 슬픔조차 사랑으로 승화시켰다. 물론 님이 지칭하는 의미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겠다.
이념의 시대인 1980년대 등장한 시는 또 어떤가. 마종기 시인의 <바람의 말>, 과재구 시인의 <사평역에서>, 최승호 시인의 <대설주의보>. 모두 생긴 것이 제각각이다.
백석 시인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이란 시는 이게 시인가, 수필인가하며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산문시다.
젊은 김경주 시인부터 이미 작고한 시인들에 이르기까지 이 시집은 가히 시의 백화점이라 할만하다.
혹자는 이럴지도 모르겠다. 일제시대나 이념의 시대에 탄생한 시가 왜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지 않았느냐고. 시는 이래야한다고 정의하지 말자. 누군가가 당신은 그래야한다고 정의한다면 그게 온전히 당신이 될 수 있을까. 시에는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학창시절에는 정답이 존재했다. 아니 모든 시에는 정답이 있었다. 중요한 어구, 행간에는 밑줄을 치고 그 의미를 받아 적으라했다. 그리고 우습게도 그렇게 시험이 출제되었고 그것이 정답으로 처리되었다. 이의는 받지 않았고 있을 수도 없었다. ’왜?’라는 근원적인 물음을 차단했던 시절의 일이다. 오래되지도 않았다. 20년 전 일이다. 한국의 교육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에서 정끝별 교수의 해설이 정답은 아닐 것이다. 받은 느낌이 다른데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 시를 읽는 순간 그 시의 주인은 이미 나 자신이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 나만의 의미를 가져도 잘못된 것은 아닐 것이다.
시시지락(詩詩之樂)이라고 했다. 시 속에서 즐거움을 찾고 그 자체로 즐기면 그만인 셈이다. 거기다 마음의 양식으로 삼을 수 있으면 더 무엇을 바랄 것인가. 시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여 고정시켜버린다면 그것은 더이상 시가 아닌 다른 무엇일 것이다. 살아있지 못한 시는 더이상 시가 아닌 것이다
2권에는 또 어떤 시의 세계가 펼쳐져있을지 생각하면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시시지락(詩詩之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