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더미의 유산 - 한국전쟁에서 이라크전쟁까지 세계 역사를 조종한 CIA의 모든 것
팀 와이너 지음, 이경식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9월
평점 :
절판


  톰 클랜시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패트리어트 게임>에서 정보부 잭 라이언-해리슨 포드 분-의 뛰어난 활약상을 본 나는 감탄했다. 역시 미국이란 나라는 대단한 구석이 많구나. 우리는 언제 저런 정보부와 요원을 기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품으며 미국에 대한 부러움을 느꼈다. CIA 요원이 되어 세계를 누비는 꿈을 그려보기도 했다. 그 감정은 후속작인 <긴급명령>에서 더 선명한 형상을 나타냈다.

  어느 날 미국의 CBS 전파를 타고 한 드라마가 방송이 되었다. 그 주인공은 바로 <CSI 과학수사대>로 화려한 도구와 과학적 기법, 그리고 체계적인 방법으로 수사를 진행하여 각종 범죄를 해결하는 활약상은 시청자들의 눈을 사로잡아 큰 인기를 끌었다. 또한 국내 방영 후 시청자들로부터 CSI에 들어가 일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문의가 폭증했다고 한다. 드라마에서 보여준 모든 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감안해도 미국이란 나라에 다시 한 번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저 정도쯤 되니까 세계경찰국가를 자처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
구분 정보기관
설립연도 1947년
소재지 미국 버지니아주 랭글리
설립목적 국가적 비밀첩보 활동
주요활동 정책제공, 정보수집, 특수공작
94년 책정 예산 30억 달러, 직원 수 약 1만5천 명 (추정)

  정보수집분석·첩보활동·특수공작의 대명사 미국 중앙정보국(CIA). 능력·자금·조직 면에서 세계 최대의 정보기관. 한때 개인적인 통화내역까지 낱낱이 감청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가질 정도로 그들은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해방 전후 한국의 역사-이승만 정권 수립, 한국전쟁, 박정희 전 대통령 암살, 민주화 운동 등-와 긴밀한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측되는 미국이 자랑하는 이 최고의 정보기관이 사실 거짓과 실패로 점철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과연 믿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요원들은 형편없고 탄생 후 60년이 흐르는 동안 왜곡된 정보에 의한 판단 착오로 한국, 중국 및 기타 많은 나라의 뜻있는 국민들이 실험실의 쥐처럼 덧없이 희생되었다면 과연 믿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정보를 잘못 분석하여 한국전쟁에서 하마터면 패전할 뻔했고 대통령의 입맛에 맞는 정보를 제공하여 사실상 이라크전쟁을 초래했다면 과연 믿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여기 한 권의 책으로 말미암아 CIA에 대해 그동안 품어 왔던 모든 생각-추측-이 모래성처럼 힘없이 무너져버렸고 그동안 얼마나 무지했던가를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1988년 미 국방부 비자금 탐사보도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뉴욕타임즈 기자 팀 와이너의 생생한 현장취재로 탄생한 <잿더미의 유산-한국전쟁에서 이라크전쟁까지 세계 역사를 조종한 CIA의 모든 것>은 그런 나의 무지를 산산이 부숴버렸다. 심지어 CIA에 대한 불신을 넘어 미국이 과연 세계경찰국가로써의 자질이 있는지에 대한 의심까지 하게 되었다.

  독재정권을 지원하여 그들이 전 세계 수백만 명을 학살하는데 일조했고 국익을 위해 비밀공작으로 이슬람 근본주의 단체에 무기를 제공하였지만 결국 그 총구를 미국으로 향하게 만들었으며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입맛에 맞는 보고서를 만들기 위해 거짓 정보를 생산하여 이라크전쟁을 일으키게 하는 등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중요한 현대사를 모두 부정하게 하는 충격적인 내용을 이 책은 담고 있다.

  현 세계의 유일한 초강대국인 미국의 현 위치를 만드는 데 CIA는 분명 일정부분 기여를 했다고 알고 있었다. 비록 그것이 오해와 무지로 인해 만들어진 허울 좋은 포장에 힘입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런 CIA가 한국전쟁·베트남전쟁·아프가니스탄전쟁·이라크전쟁에서 전쟁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정보를 제대로 수집하지 못했고 잘못 분석하는 실수까지 저질러 미국의 대의명분을 잃게 하고 이미지를 실추시켰다. 뿐만 아니라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하면 반대진영일지라도 무기를 제공하는 사상적으로 용납하기 어려운 작전을 수행하기도 했다. 냉전시대 베트남 공산당의 인도차이나 반도 통일을 견제하기 위해 다른 공산진영인 캄보디아에 각종 원조를 한 사례도 있다. 

  남의 나라가 죽을 쑤든 콩을 태우든 우리만 잘 하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할 사람이 혹시 있을지도 모르겠다. 왜 이런 사실이 문제가 되고 중요하냐면 바로 한국이 대북 정책을 수행하는 데 있어 거의 모든 정보를 이런 미국-CIA-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제공하는 정보를 바탕으로 그동안 대북정책이 진행되어 왔고 때론 수정되기도 했다. 정보의 주제공처인 CIA의 대북 전문요원 중 북한에 가 본 경험이 있는 자가 거의 없다는 사실도 모른 채 말이다. 그들은 냉전시대 소련에 대한 정보수집에 수백 억 달러를 쏟아 부었지만 손에 쥔 정보는 역공작과 거짓으로 가득 찬 휴지조각뿐이었다. 소련의 붕괴를 예측하지도 못했으며 덕분에 백악관이 크렘린에 대해 늘 두려움에 떨게끔 만들었다. 정작 크렘린에서는 미국과 세계를 두고 전쟁을 할 생각과 능력이 없다는 사실도 모른 채 말이다. 북한에 대한 정보도 마찬가지였다. 요원을 북한에 침투시키는 데 실패한 CIA는 김일성이 죽을 것이라고는 예상도 못했으며 그의 사후 북한정권이 곧 붕괴될 것이라는 주장을 계속 하고 있지만 김정일 정권은 붕괴될 기미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이에 대해 팀 와이너는 도널드 그레그-전 CIA 서울지부장·주한 미 대사-의 말을 빌려 "미국 첩보 역사에서 북한은 가장 오래 지속되는 실패 사례"라고 명시했다. 

  프랭크 와이즈너와 같은 공상주의자가 정책조정실 책임자로 오랫동안 기용되는 곳, 처벌해야할 전범이었던 기시 노부스케와 손을 잡고 자민당을 창당하는 등 밀월관계를 주도한 앨런 W. 덜레스를 국장에 임명되는 곳, 그런 곳이 바로 CIA다. 자금을 제외한 정보 작전의 모든 면에서 한 수 위였던 소비에트가 스스로 붕괴되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까? 보다 큰 역량을 가지고도 정작 사용하는 방법이나 제대로 투사하는 방법은 모르는, 즉 어린아이 손에 광선검을 쥐어준 예가 미국이 아닐까. 지금의 위치에 오른 것이 순전히 행운의 여신이 손을 들어줬기 때문은 아닐까. 북한에 직접 가보지도 않고서 CIA 북한보고서-Kim Il-song's North Korea-와 같은 자료를 만들고 이를 비밀문서로 분류했다고 하니 무지한 것인지 무식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이런 보고서를 지금까지 발간되었던 어떠한 북한 관련 서적보다도 광범위하고 자세하다는 평가를 내린 우리나라에 대해서는 무어라 말을 해야 할까. 그리고 미국인들은 이런 CIA의 실체를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혹시 영화에서 보여지는 CIA의 모습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닐까?

  수많은 침투 시도를 했지만 성공을 하지 못해서 포기한 것일까. CIA는 현장의 중요성을 망각하고 그저 책상 앞에 앉아서 세계를 들여다보고 조정하려는 시도를 그동안 계속 해 왔다. 이는 정보기관이라면 절대 지양해야할 점이고 그것을 무시했던 그들은 실패의 역사를 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숫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반성할 줄 몰랐고 그것은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역사가 주는 교훈을 깨닫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강대국의 오만일까.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다만 거짓을 사실로 만들고 실패를 포장하여 성공으로 둔갑시키고 최고 지휘자의 입맛에 맞는 정보만 보고하여 그를 기쁘게 한다는 CIA의 이상한 전통은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해서도 안 되며 절대 배워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 ‘실패한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장차 CIA와 같은 신세가 될 지도 모른다.’라는 교훈도 얻게 되었다. 결국 CIA는 현재 다수의 권한을 빼앗기고 국방부 하부조직으로 전락하여 2류 정보기관으로 존속하고 있는 처지로 전락했다. 화무십일홍이라는데 그들은 60년이나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고도 나라를 오히려 더 강하게 만들었으니 조선시대 장동김씨의 60년 세도가 나라를 망친 것에 비교하면 참으로 씁쓸한 생각이 든다. 

  다시는 진주만 공습과 같은 악몽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트루먼 전 대통령에 의해 만들어진 최고의 정보기관으로 포장되었던 CIA는 9.11 테러 등을 예측하지 못하여 진주만 공습보다 더한 악몽을 자국민에게 선물했다. 트루먼 전 대통령처럼 후회하지 않으려면 우리도 제대로 정보기관을 운영해야 할 것이다. 손에 든 칼이 일으키는 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그저 들리는 대로만 믿는다면 그 칼은 결국 주인의 피를 보게 할 것이다. 손자의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는 명언을 미국의 정보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여 대북 정책을 수행하는 정부는 똑똑히 새겨야 할 것이다.


  현재의 미국발 금융위기는 전 세계를 휘청거리게 만들고 있고 그것은 미국에 대한 인식을 새삼 바꾸어놓고 있다.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를 외치며 각국을 동조시켰던 미국, 그들의 경제가 흔들리며 나타나는 연쇄반응이 앞으로 세계정세에 어떤 변화를 불러올지 자못 기대가 된다. 

  팀 와이너는 "미국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지지 못한다면 강대국 지위에서 언젠가는 밀려날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것은 비단 미국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나아가 국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만 있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잿더미의 유산>이 가지는 가장 큰 의미가 바로 거기에 있다고 생각된다. 우리 정부도 책상에 앉아 누군가 제공하는 통계치만 들고 현재 위기는 생각보다 심각하지 않고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만 하지 말고 국민들이 느끼는 불안이 어느 정도인지, 기업이 얼마나 많이 힘들어 하고 있는지를 현장에서 직접 본 후 판단하여 올바른 정책을 세워 주기를 바란다. 그래서 현재의 위기를 슬기롭게 헤쳐 나가기를 바란다.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 대사는 "적에 대한 무지의 공백을 편견으로 채우는 위험한 의식이 미국에는 분명히 존재한다"고 경고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지 않고 편견으로 채워 안다고 착각할 경우 어떤 결과가 발생하는지 우리는 CIA의 역사를 통해 분명히 알게 되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지만 편견을 진리로 착각할 경우 자유는 머나먼 안드로메다에 존재하는 신기루가 될 것이다. 위기에 처한 CIA. 그들이 새롭게 태어나려면 그들이 직접 본부 로비에 새긴 요한복음의 구절을 명심해야할 것이다. "너희가 진리를 알게 되리라.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그리고 앞으로 인터넷에서 떠돌아다니는 CIA에 대한 환상과 잘못된 정보, 그리고 인식이 상당부분 바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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