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한나 아렌트를 읽는가
리처드 J. 번스타인 지음, 김선욱 옮김 / 한길사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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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의 사상을 읽을 때면 항상 강남순 교수님이 떠오른다. 강남순 교수님은 나에게 급진적 물음의 의미와 그 중요성을 일깨워주신 분이다. 급진적인 물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에 따르면, 이는 뿌리까지 파고드는 근원적인 질문을 가리킨다. 식물의 모습과 같이 인간 세상에서 겉으로 드러난 부분은 제한적이다. 더욱이 겉으로 드러난 부분이 그렇지 않은 부분보다 더욱 방대하기도 하다. 하지만 많은 인간들은 겉으로 드러난 부분에 취해 그 아래에 펼쳐진 것들을 보지 못한다. 급진적인 질문을 통해 인간은 행위, 말과 같은 표지를 넘어서 이것들의 발원을 살필 수 있다. 뿌리 물음은 오만한 정복자의 마음을 버리게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모든 것을 이해했다. 알고 있다,’ 등의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로서 이러한 급진적인 물음에 불편함을 느낀다. 인간은 낯선 환경도 편안하게 느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이에 반해 급진적인 물음은 이러한 적응의 과정을 거부하며 대상에 대한 거리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도록 도와준다. 나는 뿌리 물음을 알게 된 후, ‘익숙한 것이 항상 옳은 것이 아닐 수 있다’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오랫동안 나는 많은 생각, 행위, 언어를 자연스럽게 생각했다. 익숙한 것과 자연스러운 것, 옳은 것은 같은 의미였다. 그렇기 때문에 익숙한 것에 대해 의문을 던질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익숙한 것들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기보단, 나를 그 틀에 맞추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인간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당연하다고 믿어지는 것들은 ‘누군가에 의해 어떠한 이유’로 ‘당연화’된 것이다. 당연하지 않은 것들이 당연화될 때, 우리의 사고는 멈춘다. “왜”와 더 나아가 생각할 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연하다고 믿어지는 것들에 “왜?”라는 질문을 던지면 “당연하니까.”라는 대답만 무한 반복된다. 하지만 당연하다는 믿음이 깨지면, “왜?”라는 질문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 된다. 어딘가에 이유가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은 인간이 적극적으로 사고할 수 있도록 한다.

‘우리는 왜 한나 아렌트를 읽는가?’에 대한 번스타인의 답 역시 ‘뿌리 물음’의 중요성과 상통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적극적 사고와 반성적 성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전체주의의 기원, 인간의 조건 등이 이 책의 재료로써 적극 활용된다. 현재 우리 앞에 나타난 문제들은 아렌트의 문제의식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번스타인은 아렌트의 사상을 틀로 삼아 우리가 마주한 문제들을 분석하고 있는 것이다. 전체주의 문제와 나치의 잔혹성을 고발한 아렌트의 수십 년 전의 경고 메시지가 여전히 유효한 것이 안타깝기도 하다.

이 책을 읽으니 아렌트의 주요 저작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번스타인이 아렌트의 저작들에서 뽑아낸 개념어들이 나의 사고를 확장시켜주는 기분이었다. 또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혼자 읽었을 때보다 훨씬 다면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내용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취하기 힘들었는데, 이 책은 아렌트가 비판받는 부분을 다룸으로써 아렌트를 넘어 생각할 수 있게끔 도와줬다. 아렌트 역시 인식의 사각지대를 지닌 유한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됐다.

아렌트는 복수성과 탄생성을 강조한 정치 철학자다. 탄생성은 인간이 새로운 것을 시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이러한 능력을 통해 인간은 타인과 함께 행위하고, 숙고하며, 공동행위를 할 수 있는 공적 공간을 창출할 수 있다. 복수성은 공동체에 속한 수많은 개인의 독특성을 의미한다. 사회 안에 어떠한 개인도 같을 수 없으며 고유하고 독특한 관점을 갖는다.

아렌트는 인간의 독특성을 들며 ‘인간이 본래 평등하게 태어났다.’라는 생각을 거부한다. 인간은 서로 다른 능력과 재능을 갖고 태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평등은 법과 같은 인위적인 제도를 통해 보장돼야 하지 인간 본연의 것이 아니다. 즉 출생을 통해서가 아니라 제도권 아래에서만 인간은 평등한 것이다. 그는 정치의 본질로서 고대 그리스의 이소노미아로 대변되는 정치적 평등을 강조한다. 이소노미아는 인간 본연의 속성이 아니며 폴리스의 제도적 속성을 가리킨다. 정치적 평등은 정치를 전통적 ‘통치’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한다. 아렌트는 이를 적극 활용해 정치를 무지배의 형식으로 생각한 것이다.

인간은 서로 차별화된 관점을 가지며 타인과 소통을 한다. 이러한 소통과 공동의 행위 과정에서 인간은 자신의 독특성을 표현하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말과 행위는 이의 표지로써 활용된다. 아렌트는 이러한 관점에서 ‘공적 공간’을 중요시한다. 공적 공간에서 인간은 서로 토론하고 행위 하며 의견을 검증한다. 이는 인간이 인위적으로 창조한 공간으로서 행위자의 행위가 타인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마치 공연예술가가 자신의 작품을 위해 공적으로 조직된 공간이 필요하듯이, 행위의 수행 그 자체가 타인에게 의존하는 것이다.

이 책에선 난민 문제가 중요하게 다뤄진다. 우리는 인권이 인간이라면 당연히 갖고 있는 누구도 침범할 수 있는 권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인권이 그렇게 여겨지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난민 문제를 살펴보면, 인권은 국가를 가진 인간들에게만 허용된 권리라 할 수 있다. 난민들은 잉여 인간으로 취급되며 삶의 보금자리가 허락되지 않는다. 그들이 인간으로서 삶의 공간을 획득하기 위해선 국민 국가가 결정한다. 그들이 설정한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면 그들은 난민 캠프에서 인간다운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 채 살아갈 뿐이다.

무엇보다도 인권이 ‘양도 불가능한, 것으로 정의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모든 정부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가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만의 정부를 지니지 못하거나 또는 최소한의 권리만을 갖는 상태로 추락하자마자, 어떠한 권위도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남겨져 있지 않고, 또 어떠한 제도도 인권 보장을 바라 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법적 권리와 시민적 권리의 상실로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의 처지에서는 이런 권리의 상실은 양도 불가능한 권리의 실질적 상실을 의미했다. 보편적이고 양도 불가능하다고 생각된 인권은 그 인권에 기초한 헌법을 갖춘 국가들에서조차 강제적으로 요구될 수 없음이 입증되었고 또 앞으로도 계속 입증될 것이다.

언론에서 난민에 대해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면 사람들이 난민의 인권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난민의 인권은 그들에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난민은 국민 국가에 속한 인간들에게 관심 밖의 존재에 불과하다. 현대 사회에서 자신의 국가가 없다는 것은 사회적 조직 전체를 상실을 의미한다. 그들은 누구도 원치 않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된다. 그저 표류하는 인간으로서 누군가 그들을 허락할 때만을 기다리는 것이다. 번스타인은 인간들이 난민을 태하는 태도가 전체주의적 사고방식과 다른 점이 없다고 말한다. 그는 인간들은 어떠한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은 채, 난민들이 인간 답지 못한 삶을 사는 것을 방치해두고 있다고 본다. 인간의 권리와 생명을 언제든 파괴할 수 있다는 전체주의의 잔재가 아닐까.

아렌트 역시 인식의 사각지대를 지닌 유한한 인간이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그가 유대인 위원회를 언급할 때, 우리나라의 친일파와 같은 모습이라서 당황했다. 공동체를 파괴하기 위해 내부의 균열을 적극 활용하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친일파가 행한 범죄를 알기에, 그 묘사에서 나도 함께 분노했다. 하지만 번스타인의 설명에 따르면, 이 부분이 제한된 서술이라고 한다. 모든 유대인 위원회가 아렌트가 말한 것처럼 유대인 학살에 동참하지 않은 것이다. 역으로 나치에 적극적으로 대항한 유대인 지도자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와 더불어 한나 아렌트가 흑인에 대한 미국의 분리교육을 제재에 대해 소극적인 입장을 취한 것은 이번에 새로 알게 된 사실이다. 그는 분리교육과 같은 차별에 대해선 반대하지만, 이러한 차별에 국가가 제재를 가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한다. 국가는 사회의 편견과 차별적 관행에 개입할 권리가 없다고 한나 아렌트는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그가 현실의 복잡성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고 자신의 기준을 세계에 강요해 벌어진 결과다. 국가의 역할이 편견과 차별적 관행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 아닌가? 그들이 이러한 잘못된 관습에 의해 고통을 받고 있어도, 국가는 개인의 자유와 평등의 이름으로 이를 방치해도 되는 걸까. 개인의 행위가 타인의 행위를 억압하거나 그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때에만 그 정당성이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 무자비하게 타인의 권리를 해치면, 공권력은 마땅히 발휘돼야 한다.

오늘날 우리가 아렌트를 읽어야 하는 이유는, 아렌트가 우리 앞에 아직도 버티고 서 있는 위험들을 예민하게 잘 이해하면서 동시에 우리가 무관심하거나 냉소적이 되지 않도록 경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우리의 정치적 운명을 책임지라고 촉구한다. 아렌트는 우리가 공동으로 행위 할 능력이 있고, 새로운 것을 시작할 능력이 있으며, 자유를 지상의 현실로 만들기 위해 분투할 능력이 있다고 가르쳐주었다. "새로운 시작은 그것이 역사적 사건이 되기 이전에 이미 인간이 갖춘 최상의 능력이다. 정치적으로 그것은 인간의 자유와 동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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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 정보사회와 인간의 조건 한길사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5
아담 샤프 지음, 구승회 옮김 / 한길사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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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서점을 구경하면서 1989년에 발간된 오래된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출간된 시기에 비해 책의 제목이 현대적이라서 눈에 띄었다. 표지에 적힌 '정보사회'는 지극히 현대적인 용어다. 그 당시에 정보화 사회를 논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에게 이 책이 매력적이었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에 아담 샤프라는 폴란드의 마르크스주의 학자는 정보화 사회에 대해 어떠한 이야기를 펼쳤을까 궁금했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아담 샤프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출판사가 한길사라서 의심의 여지없이 이 책을 구매했다. 한길사라면 읽을 가치가 있는 외국의 서적만 번역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또한 학술명저번역총서의 일환으로 번역된 책이기에 어떻게든 도움이 될 책이라고 생각했다.

이 책은 쉽게 읽히지 않았다. 가독성이 너무 좋지 않았다. 가장 먼저 번역의 질을 의심했다. 번역가를 검색해 보니 내가 최근에 포기한 책의 번역가였다. 그 책의 제목은 '이데올로기'다. 내가 이데올로기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이 상투적으로 이 용어를 난발하는 것 같아 더욱 적확한 이해를 위해 구매했었다. 적은 분량의 책이었는데, 진도를 쉽게 나갈 수 없었다. 읽어도 무슨 말인지 이해 못 하는 문장이 대부분이었다. 이렇게 읽다간 시간을 낭비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포기했는데, 똑같은 번역가를 이렇게 빠른 시일 내에 만났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과연 그분은 이러한 번역을 하고 떳떳할지 궁금하다. 분명히 주변에 그와 함께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많을 텐데, 어째서 이렇게 번역을 했을까.

독서의 어려움을 오로지 번역가의 탓으로만 돌릴 수도 없다. 구승회 번역가는 평생을 학문을 업으로 한 사람이다. 그는 독일에서 철학을 공부한 후 한국의 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그와 나의 학문적 역량 차이는 엄청날 것이다. 이 책에서 사용하는 용어들은 학자로서 그의 정신적 자본일 수 있다. 즉 그와 같이 오랫동안 학문과 씨름을 한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개념들이 이 책에 채워졌을 가능성이 높다. 학자들만 공유하고 있는 전문 용어를 일반인이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들과 같이 학문에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지 않고 그들이 공유하고 있는 정신적 자본을 탐하는 것은 오만하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이 책에서 주로 활용되는 마르크스주의의 용어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아니, 전무하다. 작가가 적극 활용하는 개념틀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과한 욕심일 수 있다.

무슨 오기인지 이 책을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넘기더라도 이 책을 다 끝냈다는 쾌감을 느끼고 싶었다. 모든 것을 소화하겠다는 마음은 진작에 버렸다. 그저 읽다가 나에게 사고의 초대장을 던지는 구절들만을 포착하려고 애썼다. 불확실한 이해 속에 모인 구절들은 다양한 생각거리를 던져줬다. 이는 나에게 현대 사회의 변화와 그 안에서 인간의 역할 및 모습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기회였다. 작가가 이를 의도했는지는 모른다. 또한 그가 책에서 서술한 것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나의 생각이 흐를 수도 있다. 하지만 나의 흩날려 있던 생각들을 정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책의 제목에 나타난 길은 무엇을 나타낼까? 현대 인류는 어떠한 길 위에 있을까? 독자마다 이 책에서 뽑아낸 길의 모습은 다를 것이다. 내가 생각한 길은 정보화, 자동화로 대변되는 진보의 길이다. 현 인류는 정보화와 자동화로 인해 수많은 이점을 누리고 있다. 과거에 상상할 수 없었던 일들이 기술의 발달로 가능해졌다. 하지만 이 길은 그 자체로 어떠한 가치를 내포하지 않는다. 인간이 이 길을 어떻게 활용하냐에 따라 그 가치가 결정된다. 좋아 보이는 길이 인간의 잘못된 활용으로 사회에 큰 피해를 입힐 수 있다는 사실을 역사적으로 많은 사건들이 보여줬다. 즉 이 길이 이어지는 곳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선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을 자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존재다. 이 활용이 항상 인간에게 선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엄청난 피해를 입힐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이유로 인간의 자율성을 해치는 것에 대해 아담 샤프는 부정적 입장을 취한다. 인간의 자율성은 존중받아 마땅하며, 부작용으로 인해 자율성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선한 결과를 이끌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똑같은 발견을 갖고 새로운 낙원으로 가는 길을 여는 데 사용할 수도 있고,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무엇보다도 처참한 새로운 지옥 문을 여는 데 사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겨웅에도 인간의 지식과 지성의 오용 위험을 빌미로 활용 금지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

이 책은 30년이 넘은 책이지만 현재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을 구체적으로 다룬다. 정보화가 이뤄지면서 인간들에게 많은 지식과 정보의 접근성이 용이해졌다. 과거엔 이러한 것들이 전문가라는 소수의 집단에만 허용된 것들이다. 그 당시엔 지식 그 자체가 권력이었으며 전문가들을 자신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 지식에 대한 접근을 제한했다. 하지만 지금은 전문가만이 갖고 있는 지식의 범주가 줄어들고 있다. 둘 사이의 장벽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기술의 발달로 이 장벽의 높이와 두께가 완화되고 있다.

최근에 어느 한 지인과 대중 지식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는 전문가와 일반 대중이 구분돼야 하기 때문에 대중 지식인의 역할에 대해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대중 지식인은 일반 대중의 오해를 불러일으키거나, 학문의 발달을 저해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둘 사이의 장벽이 사라지는 것이 학문의 진보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대중의 오해를 불러일으키거나 학문의 발달을 저해할 수 있다는 건 오로지 전문가 집단의 입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걱정하는 것이 대중의 오해라면, 그전까지 대중은 지식이 없던 채로 전문가 집단에게 의존했거나 기만 당하기 일쑤였다. 또한 수많은 사람들이 학문의 장에 들어오면, 지식 생태계를 교란할 수 있다고 말한다. 지식 생태계 교란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교란의 기준은 누가 설정하는 것인가. 현재는 지식 생태계가 어떠한 문제 없이 잘 이뤄지고 있는가.

지식의 장에 많은 사람들이 들어오면, 손해를 보는 것은 이곳에 속한 소수의 학자 집단이다. 이들이 그들이 지금껏 누리던 것을 포기하는 것을 반가워할 리가 없다. 하지만 확실한 건 기술의 발달로 지식 생태계 변동이 지속적으로 일어나 중심화 과정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엔 중심화를 통한 효율성이 높이 평가됐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은 중심에 벗어난 존재들과의 차별을 부추기며, 중심부에 있는 사람들만이 역사의 주인공으로 인식됐다. 하지만 탈 중심화는 지금껏 삐뚤어졌던 힘의 균형을 제자리로 돌리는 데 기여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회의 구성원들 좀 더 수평적인 입장에서 협력과 소통을 할 수 있게 된다.

그가 지역주의/애국심의 확장 개념으로서 세계주의를 소개한 부분은 인상적이었다. 현재 우리가 지닌 문제점이 가장 두드러진 부분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외적 조건은 현재 세계화의 과정에 있다. 하지만 우리의 사고방식은 여전히 민족주의/ 국가주의에 머물러 있다. 현대 인류는 세계화로 인해 막대한 이점을 누렸다. 세계화로 인해 많은 발전을 이룩했고, 다양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 국가와 국민에게 다른 집단은 그들과 동등한 가치로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에게 외부 집단은 수단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 사회에선 자기 집단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둬 정책을 운용하는 것이 일상이다. 요즘 대두되고 있는 난민 문제 역시 오로지 민족과 국가 중심으로 수많은 국가와 민족들이 난민을 바라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세계주의는 개인을 하나의 국가에 속한 국민이 아니라 세계 시민으로서 인식하는 사조다. 이렇게 되면 개인은 자신이 속한 좁은 집단의 이익 추구를 넘어 전 지구적 보편적 가치 추구에 힘쓸 수 있다. 이것은 기존의 민족주의와 반대되는 개념이 결코 아니다. 세계 시민으로서 추구하는 보편적 가치는 자신이 속한 조그만 집단에게도 이점을 주기 때문이다. 또한 폭넓은 문화를 접하고, 많은 나라와 그 나라의 언어와 도덕에 대한 지식을 가진 세계 시민은 각 문화가 지닌 독특성에 대해 인정하게 된다. 이는 자연히 자신의 문화나 국가가 지닌 독특성을 인정하며, 또 다른 의미의 애국심을 키운다.

기술의 발달은 산업의 자동화를 가능케 한다. 수많은 기계들이 인간의 일을 대체하고 있다. 이로 인해 대량 실업이 나타는 것은 피할 수 없다. 인간의 노동력 투입 없이도 사회에서 요구하는 양의 생산물을 얻을 수 있는 여건이 되고 있다. 더 나아가 사회의 요구보다 많은 초과 생산물을 얻을 수 있다. 인간이 노동을 하지 않아도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기본 조건이 충족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인간은 단순노동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가는 인간이 노동 없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도록 요구받는다. 이에 대한 방법으로써 유발 하라리가 말한 것처럼 기본 소득이나 무상 사회 복지 서비스가 활용될 수 있다.

아담 샤프는 제도적 측면보다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자동화로 대체될 노동은 단순노동이다. 창조적인 노동은 절대 기계에 의해 대체되지 않을 것이고, 이와 관련된 직업은 더욱 많아질 것이다. 기계와 인간의 관계는 이분법적으로만 바라봐선 안 된다. 이 둘은 상보적 관계로서 협력을 통해 더욱 좋은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다. 이를 위해선 창조적인 인간을 육성하기 위한 교육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인간은 기계의 진보 여하에 자신의 운명을 내맡기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제한된 조건에서도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는 자율적이고 창조적인 존재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미래는 기술 발달에 의해 결정되는 운명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에 의해 창조되는 것으로서 우리에게 열려 있다. 무대 위에서는 전체 역사의 발전 과정 동안 현존하는 자기 창조적 인간, 즉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창조해내는 인간이 행동한다. 그가 이 운명에 자의적으로 형태를 부여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일정한 조건 아래 그리고 이와 부합하는 가운데 그는 자신에게 제공되는 대안들의 틀 속에서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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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치의 상상력 - 질병과 장애, 그 경계를 살아가는 청년의 한국 사회 관찰기
안희제 지음 / 동녘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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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자신의 질병과 통증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릴 목적으로 ‘난치의 상상력’을 썼다. 하지만 이 책은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글이 아니다. 독자들이 질병과 통증에 대해 이해하는 것을 넘어, 이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존중하는 마음을 갖도록 바라는 마음을 담은 글이다. 그가 이 목적을 ‘정치적 이유’라고 부르는 것처럼, 그는 이 책을 통해 독자의 생각과 행동에 변화를 주고 싶었을 거라 생각한다. 적어도 한 명의 독자에 있어서 이 목적을 달성한 것 같다. 이 책을 통해 나는 일상에 만연한 장애, 병, 장애인 등에 대한 불편한 시선에 대해 성찰할 수 있었다.

작가 안희제는 크론병을 앓고 있다. 크론병은 나에게 익숙하다. 고등학교 때 가장 친한 친구가 크론병으로 힘들어했기 때문에 이 병이 얼마나 심각한지 곁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그 친구가 묘사하길 고통이 심할 땐, 배가 찢어질 정도로 아프다고 한다. 이 고통은 일반적인 복통과 비교할 수 없다고 한다. 그는 면역 반응을 조절하기 위해 엄청나게 많은 양의 약을 먹었다. 약의 반응을 외관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성분을 포함한 듯 보였다.

난치의 상상력을 읽어나가면서, 내 주변의 장애인들에 대해 상상할 수 있었다. 부모님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사실 우리 엄마, 아빠도 장애인이다. 그들은 휠체어나 인공 내우와 같은 가시적인 장치를 사용하지 않아 장애인이라고 생각하기 힘들다. 엄마는 고된 노동으로 목, 허리, 무릎, 발목 등 수술을 5번 정도를 한 지체장애인이다. 아빠는 군대에서 지뢰 폭발 사고로 인해 한쪽 눈이 불편하다. 나는 부모님의 신체능력이 일반적인 사람들과 다르다는 걸 실감한지 오래되지 않았다. 장애에도 불구하고, 나의 부모님은 가정에 충실하며 어떠한 나약함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마와 함께 걸을 때, 엄마의 걸음걸이가 불편하다는 걸 발견하곤 한다. 양쪽 다리의 길이가 달라 다리를 절며 걷고, 계단을 오르내릴 땐 한쪽 무릎을 구부리지 못한다. 내가 쉽게 내딛는 한 발자국도 엄마에겐 편하지 않다. 하지만 나처럼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엄마가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기 쉽지 않다. 가시적이지 않은 질병은 그 고통과 증상이 경시되기 쉽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환자성, 장애인성이 있는 듯하다. 그들이 머릿속에 임의로 그린 장애인과 환자의 모습에 타인을 대입시켜, 그들의 고통을 지레짐작한다. 크론병 역시 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 병이고 증상이 일관되지 않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설정한 기준으로 이 병을 평가하며, 차가운 시선을 보낸다.

작가 안희제가 세상에 내는 목소리는 강력하다. 이는 정상성 또는 일상성이라는 이름하에 가볍게 여겼던 삶의 방식을 직시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특히 장애 체험에 대한 그의 생각은 장애에 대한 나의 태도에 대해 되돌아볼 수 있었다. 나는 그들을 같은 인간으로서 동등하게 생각하나? 그는 장애인 체험이 장애인에 대한 단순히 연민, 동정의 시선으로만 이해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존중과 이해는 엄연히 다르다. 존중은 상대의 존재 가치를 그대로 인정한다. 이는 타인을 주체로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이해의 경우, 대상의 가치는 이해를 통해 결정된다. 대상이 가치를 갖기 위해선 상대의 이해를 필요로 한다. 이는 주체를 대상화할 위험이 있다.

이 주제에 대해 동기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작가의 말이 공감이 됐는데, 한 동기는 ‘불쌍하게 바라보는 것’을 무조건적으로 나쁘게 볼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장애인 역시 다양한데, 작가의 생각이 모든 장애인의 생각을 대변할 수 없다는 것이 요지였다. 이분법적으로 ‘불쌍하게 바라보는 것은 나쁘다’라고 단언하면 감정싸움만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자신이 아는 장애인은 다른 사람들이 불쌍하게 바라보며 도움을 주는 것을 원한다고 한다. 또한 불쌍하다는 감정이 장애인을 위한 제도 개선에 어떻게든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이야기를 듣자마자 신기하단 생각이 들었다. 나는 불쌍하다는 감정과 제도 개선이 반드시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권 신장을 예로 들면 쉽다. 우리가 여성의 인권을 높이려는 이유는 여성이 불쌍해서가 아니다. 그들이 그저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것들을 누리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그들을 누리지 못했고 이를 바로잡는 것이 여권 신장 운동이라고 생각한다. 장애인 역시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지닌 존재다. 하지만 장애라는 삶의 조건은 그들이 인간으로서 권리를 누릴 수 없는 무기력한 존재처럼 여겨지도록 한다. 즉 장애인들은 마땅히 누려야 할 것들을 삶의 조건 때문에 누리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장애인 인식 및 제도 개선은 그들이 불쌍해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원래 그래야 하는 위치를 되찾아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엔 장애와 병에 대한 작가의 솔직한 생각이 가득 담겨있다. 내가 평소에 생각해보지 못했던 부분들이라, 작가로부터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하지만 납득이 되지 않은 생각 역시 마주할 수 있었다. 내가 그처럼 장애를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니고 이에 대해 충분히 고민하지 않아 서툰 문제 제기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책 한편에 적어둔 나의 생각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면 좋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우선 그가 병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는지 헷갈린다. 이 책은 병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낸다. 하지만 그가 경험을 통해 드러내는 생각은 종종 이와 어긋난다. 그 역시 ‘병이 없던 정상’적인 과거의 삶을 그리워한다. 이러한 시선 역시 병에 대한 부정을 전제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병이 없던 과거를 그리워하는 그의 태도를 비판하고 싶지 않다. 다만, 그의 비판의 초점을 달리하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든다. 병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회가 아니라 병을 가진 사람들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회를 비판해야 한다. 삶의 조건인 병과 환자를 분리하지 않는 사회가 문제적 사회 아닐까?

작가는 세월호 사건과 코로나 바이러스를 다루는 미디어의 행태를 비판한다. 그는 이 두 사건 이후 달리 전개된 재난 영화 상영에 의문을 던진다. 그는 세월호에 대해 사람들이 애도를 하기 때문에 재난 영화를 상영하지 못했다고 해석한다. 이에 반해 코로나 바이러스 같은 경우, 대부분 사망자가 기저 질환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의 해석에 따르면, 이들에 대한 애도가 없기 때문에 미디어에서 재난 영화 상영을 활발히 한다는 것이다. 나는 재난 영화 상영에 대해 다른 이유를 찾고 싶다.

세월호 사건과 코로나 바이러스 창궐의 책임소재가 다르다. 세월호 사건은 인재, 코로나 창궐은 자연재해가 중심돼 일어났다고 생각한다. 전자의 사건을 바라볼 땐, 애도의 감정을 넘어 죄책감이 주를 이룬다. 무책임한 행위에 대한 죄책감으로 재난 영화 상영을 쉽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후자는 책임의 소재를 자연에서 찾음으로써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창궐의 경우, 자연재해에 대한 경각심이 부각된다. 인간은 이 재해의 원인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롭기 때문에 활발한 영화 상영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코로나 바이러스 창궐을 인재로 바라봐도, 중국에서 시작한 전염병이기 때문에 우리나라 미디어는 책임을 덜 수 있다.

마지막으로 긴급 상황에 이뤄지는 AED 사용 및 심폐소생술에 대한 작가의 의견에 공감할 수 없었다. 긴급 상황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생과 사를 오고 가는 상황을 가리킨다. 긴급 환자에 대한 응급지원이 신속히 이뤄지지 않으면 환자들을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다. 응급 처치 교육을 받을 때 환자의 갈비뼈가 부서지는 것이나 자신의 잘못으로 죽을 수 있다는 걱정을 하지 말고 신속하게 환자를 도울 것을 요구한다. 상황에 구애받지 않고 환자가 죽지 않도록 신속하게 응급처치를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작가는 환자가 어떤 질병을 가졌는지, 어떤 장비를 장착했는지를 살펴 적절한 대응을 할 것을 원하는 것 같아 보인다. 응급 처치가 어느 상황에서 이뤄지는지 맥락을 살핀다면, 이러한 주장은 안 하지 않았을까?

또한 민방위 훈련에서 비장애인 건장한 남성이 응급 처치하는 사례만 보여주고, 이를 보고 배우는 것 역시 건장한 남성이라는 점에 비판을 가한다. 이는 우리나라에 대한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비판이라 생각한다. 이 영상은 군대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상영되다. 민방위 훈련은 전시를 대비해 이뤄지는 것이다. 모든 것이 전시 상황 대비에 맞춰져 있다. 우리나라에서 국방의 의무를 다해야 하는 존재는 누구인가? 성인 남성이다. 그들이 이걸 보는 이유는 국방의 의무 중 하나기 때문이다. 그는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 공간에서 비장애인 건장한 남성이 응급처치하는 영상을 보는 것을 문제 삼을 것이 아니라,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면 이뤄지지 않을 응급 처치 교육에 대해 비판해야 한다. 이러한 교육이 일상화되면, 이 교육이 이뤄지는 장소와 맥락에 맞게 사례 역시 다양해질 것이라 생각한다.

오랜만에 만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게 도와준 에세이였다. 지금껏 읽은 에세이들은 대부분 작가가 자신의 세계에 취해, 공감되지 않은 이야기를 펼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또한 뻔한 말들로 지면을 가득 채워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정성이 담기지 않은 글들이 아니었나 싶다. 하지만 이 책은 쉽게 쓴 것이 아니란 걸 느낄 수 있었다. 다른 독자에게도 작가의 마음이 잘 전달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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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04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장애가 고려되지 않은 응급지원이 장애인을 죽일 수도 있다는 내용인 듯한데.. 배우는 사람만 비장애인남성이라고 한 게 아니고 받는 대상이 핵심이던데요?
 
아리랑 - 조선인 혁명가 김산의 불꽃 같은 삶
박건웅 지음, 님 웨일즈 외 원작 / 동녘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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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은 이 나라의 비극의 상징이 되었어요. 이 노래는 죽음의 노래이지, 삶의 노래가 아니다.

그러나 죽음은 패배가 아니다. 수많은 죽음 가운데서 승리가 태어날 수도 있다.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사는 소설보다 더 소설 같다. 현재의 편안한 삶에선 절대 상상할 수 없는 일이 그 당시엔 일상이었다. 근대사를 공부할 때마다 독립운동가들의 치열한 삶으로부터 큰 자극을 받는다.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현재 우리가 지금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겐 환경을 탓하는 일은 시간 낭비다. 환경이 열악하다면, 인간은 그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인간은 환경이 조건화한 대로만 사고하고 행동하는 존재가 아니다. 환경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순 없지만, 환경 역시 인간의 영향력 안에 있다.

독립운동가들은 주체적 인간으로서 제국주의에 대항한 사람들이다. 대항의 과정에서 그들은 많은 것을 잃었다. 하지만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주권을 지키기 위해 이러한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들 중 독립운동만 없었다면, 편한 삶을 살았을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들은 굳이 고생하지 않고, 우리나라가 일본에 흡수되는 걸 그저 지켜보기만 해도 됐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그들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치열하게 저항했다.

내가 고민하는 것들은 대부분 세속적인 이유에서 시작한다. 원대한 이상 없이 오로지 나만의 이익을 위해 삶을 살아간다. 내가 공부하는 이유 역시 나의 개인적 즐거움 때문이다. 아리랑에서 그려진 독립운동가들의 삶은 이러한 나를 반성하게 한다. 나는 나약하게 환경 탓을 자주 한다. 후회 없는 삶을 살겠다고 항상 마음속으로 되뇌지만 나약함과 게으름이 종종 이러한 생각을 저지한다. 이것들의 달콤한 유혹을 견디지 못해 내가 하려던 것들을 하지 않거나 달성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문제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으려 한다. 즉, 잘못을 외부 탓으로 돌림으로써 나의 책임감과 부담감을 더는 비겁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

닐 웨일즈, 김산의 아리랑은 독립운동가 한 명의 일대기를 통해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역사를 살필 수 있는 정말 좋은 책이다. 또한 원작을 만화로 각색해 복잡한 독립운동사를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고 있다. 이 책의 재료는 단순히 역사적 지식이 아니다. 지식의 관점에서 이 책을 바라봐선 안 된다. 이 책은 독립운동의 살아있는 증언이라 할 수 있다. 어떠한 감정보다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감사함을 가장 크게 느낀다. 시험을 위해 역사를 배울 땐 그들의 희생이 피부로 와닿지 않았다. 희생자의 수, 독립자금 등은 차가운 숫자로 가려져 그 심각성이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아리랑이 그려낸 그 당시의 모습은 내가 결코 가볍게 여기고 잊어선 안 될 것들이었다.

일제 강점의 힘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들이 추구하는 바를 향해 나아갈 수 있었을까. 과연 나는 그러한 길을 걸을 수 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나는 큰 목적을 위해 수많은 유혹들을 물리칠 수 있을까. 요즘 나에 대한 회의를 느끼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내가 스스로 나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는 징조다. 다른 사람에게 떳떳한 것이 아니라, 나에게 먼저 떳떳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이를 위해서 내가 무얼 해야 할지 잘 알고 있다. 알고 느끼는 것을 넘어 치열하게 실천할 수 있는 내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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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열대 한길그레이트북스 31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지음, 박옥줄 옮김 / 한길사 / 199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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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교수님의 페이스북을 통해 클로 레비-스트로스와 슬픈 연대를 알게 됐다. ‘다름/차이’에 대해 고민하던 시기라 교수님께서 페이스북에서 언급한 문장이 마음에 꽂혔었다. “나는 표면적인 대조나 외면상의 특이성을 경계한다. 그런 것은 단시간 동안 밖에 효력이 없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과 자신을 구별할 때 인간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을 적극 활용한다. 겉으로 드러난 것이 전부가 아니란 것을 알지만, 외관이 눈에 가장 잘 띄기에 이러한 사실을 망각해버린다. 이는 인간으로 하여금 외관에 집착하게 하고, 차이를 인정하기보단 동화를 이끌어낸다. 하지만. 레비스트로스가 말한 것처럼 실제로 외관의 독특성/ 대조는 단기간밖에 효력이 없다. 우리가 외관에 이끌려 타인과 인간관계를 맺을 수 없지만, 내면의 결이 맞지 않으면 이 인간관계는 유지되기 어렵다.

외면의 동화 현상은 우리나라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이 사실은 독일에서 만난 4명의 미국 친구를 통해 깨달았다. 그 친구들의 옷, 머리 스타일은 모두 가지각색이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란 그들은 서로 비슷할 법도 한데,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각자 다른 일을 하는 모습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 남자들은 대부분 투블록 머리 스타일을 하고 있었다. 또한 나의 경험에 비춰봤을 때,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함께 하는 것’은 똑같이 무언가 하는 걸 의미한다. 예컨대 여행에 함께 간다면, 여행지를 반드시 함께 가야 하고, 같은 식당에서 밥을 먹어야 한다. 즉 같은 시간을 같은 일로 채워나가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러한 외적인 것에 개의치 않았다. 이는 한국인의 동질성 문화를 깨달을 수 있는 좋은 경험이었다.

교수님께선 ’슬픈 열대‘를 마치 긴 영행을 하는 느낌의 책이라고 소개해 주셨다. 책이 두꺼워서 무게가 있지만 쉽고 재미있게 읽힐 것이라 말씀하셨다. 교수님 덕분에 레비스트로스를 처음 알았기에 서점에서 한번 검색을 해봤다. 라캉, 푸코 등 이름만 들어도 묵직한 학자들이 함께 언급되고 있었다. 푸코의 책을 한 권 읽었을 때, 나의 학문적 역량의 부족함을 절실히 깨달았기에 레비스트로스의 책을 읽기가 겁이 났다. 또한 그가 이뤄낸 학문적 성과는 나에게 너무 높아만 보였다. 그래도 교수님께서 나라면 읽을 수 있을 것이란 말에 한번 도전해봤다. 이와 함께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 강의‘와 첫 단추 시리지 ’문화 인류학‘을 병행 독서를 했다.

한 달간 틈틈이 슬픈 열대를 읽었다. 짧은 시간 내에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었다. 이 책엔 레비스트로스의 경험과 생각이 농도 짙게 담겨있다. 사실 한 달도 부족한 시간이었다. 레비스트로스가 원주민들의 삶, 문화, 생활 방식 등을 묘사한 부분을 머리로 그리며 충분한 시간을 갖고 독서를 했으면 좋았을 것이라 생각이 든다. 무언가를 상세히 묘사한 책을 접한 경험이 없어, 머릿속에서 그 모습이 그려지지 않았다. 레비스트로스가 만난 원주민들의 삶을 담은 영상 자료가 있는지도 살펴봤지만, 아쉽게도 찾을 수 없었다. 구체적인 부분 역시 소화하면 좋았겠지만, 이번엔 레비스트로스의 생각 위주로 독서를 했다.

슬픈 열대는 레비스트로스가 원주민과의 삶을 샅샅이 기록한 후의 해석을 담은 여행기다. 나에게 마치 현대 미술 감상문과 같았다. 현대 미술은 작가의 의도만큼이나 감상자의 해석이 중요하다. 작가의 곁을 떠난 작품은 감상자의 해석을 통해 새롭게 탄생한다. 감상자마다 작품을 다르게 받아들이고, 자신들의 관점에 따라 이를 해석한다. 그래서 나는 현대 미술을 좋아한다. 다른 예술 작품을 보면 감상자인 내가 끼어들을 틈이 없는데, 현대 미술은 나에게 참여 공간을 마련해 준다. 레비스트로스가 마주한 원주민들의 삶, 문화, 생활 방식의 의도가 그의 해석과 다를 수 있다. 책의 한 부분에서 언급된 것처럼 레비스트로스의 해석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레비스트로스의 해석은 원주민들의 삶을 다른 차원으로 이끌어낸다. 이것이 이 책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이 책을 독서하면서, 원주민들의 삶보다 그의 생각과 해석에 주목한 이유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슬픈 열대를 읽으면서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On Liberty)’과 타라 웨스트오버의 ‘배움의 발견(Educated)’이 떠올랐다. 밀은 자유론에서 개인은 타인의 자유를 침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들을 해치는 자유는 진정한 의미의 자유가 아니다. 다른 사람이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 우리는 우리의 뜻대로 그들을 억압할 수 없다. 아무리 그의 행동 사고방식이 자신의 관점에서 비정상적으로 보이더라도, 이를 용인해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우리의 자유 역시 누군가에 의해 빼앗길 수 있다. ‘자유론’과 ‘배움의 발견’에서 모르몬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많은 사람들이 이 종교를 사이비, 이단이라고 칭하며 비정상적인 집단이라고 비판을 한다. 그들의 생활 방식을 이해하지 않으며, 그 종교를 존중하지 않는다.

독서 모임에서 모르몬교 구성원에 대한 다른 집단의 간섭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우리와 살아가는 방식 및 생각의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그들은 비정적으로 보인다. 우리가 다름을 인정한다고 하지만 우리의 눈에 종종 이 집단의 행위는 틀린 것으로 비치기도 한다. 어떤 친구는 이 의견을 고수하며, 그들의 잘못된 행위를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이 의견에 무척이나 조심스럽다. 나의 사고와 행위가 비정상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도 언젠가 누군가에 의해 그들의 입장에서 옳지 못하기 때문에 교정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밀은 당사자게 더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거나 더 행복하게 만든다고, 또는 다른 사람이 볼 때 그렇게 하는 것이 현명하거나 옳은 일이라는 이유에서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무슨 일을 시키거나 금지시켜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나는 이 말이 슬픈 열대에서 레비스트로스가 말하려는 것과 일맥상통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진보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본다. 진보적이지 않은 것들은 진보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며 현재 상태의 가치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문명화된 사회와 원주민들의 사회를 바라보면 쉽다. 또는 우리가 가치를 높이 두는 삶과 그렇지 않은 삶에 대한 시선의 차이를 보면 이를 극명히 느낄 수 있다. TV에서 원주민이나 아프리카인들을 다룰 때, 항상 그들은 불쌍하게 다뤄졌다. 그들이 꾸려나가는 삶에 주목하지 않고, 오로지 미개한 사회라는 틀에서 그들을 바라봤다. 그들은 우리와 같은 현대 문명의 특권을 누리지 못하기에 행복하지 않고 그들에게 우리가 쌓아온 문명의 혜택을 나눠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과연 그들이 불행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그들의 삶에 간섭해 변화를 꾀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슬픈 열대는 이러한 생각이 잘못됐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원주민들은 그들 나름의 삶, 문화를 지니고 있다. 이는 우리와 다른 삶의 방식으로 우리의 관점에서만 그들을 바라봐선 안 된다. 진보의 관점에서 그들은 많이 부족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관점에선 우리의 삶이 부족해 보일 수 있다. 우리가 만성적으로 느끼는 사회 문제들을 그들은 어떻게 바라볼까? 과연 우리는 진보의 이름으로 생겨난 이러한 문제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우리는 다름을 인정한다고 하지만, 종종 다름은 급을 나누는 기준으로 작동된다. 우리는 원주민들의 다름을 그대로 인정하고 있는가 아니면 열등한 존재로서 가치 평가를 하고 있는가.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는 진보의 관점에서 그들의 삶에 간섭하고, 그들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기보다 개선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오만한 행태를 비판한다. 그들의 삶은 진보적 관점에 취한 사람들에 의해 파괴되고 있다. 그러나 원주민들 역시 그들의 삶을 꾸려나갈 수 있는 주체로 그들의 자유를 누구도 해칠 수 없다.

슬픈 열대는 원주민에 대한 레비 스트로의 해석을 담지만, 이 해석은 원주민의 그의 틀에 가두지 않는다. 해석이 원주민에게 향하는 것이 아니라, 진보적 관점을 취하는 사회에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이 원주민에게 향했다면, 레비스트로스는 자신이 지금껏 은연중에 획득한 사고방식을 원주민들에게 주입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레비스트로스는 경험과 해석을 통해 자신의 삶 및 사고방식의 절대성에 의문을 던진다. 이 의문은 현대 문명에 대한 원숙한 통찰과도 같다. 그는 원주민의 사회에서 현대 문명이 당연하고 절대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에 반하는 사례를 발견한다. 이는 우리가 절대적이라고 믿는 대상에 대해 의문을 던질 여지를 마련해 준다. 인간은 절대성의 이름으로 자신을 가둘 필요가 없으며, 끊임없이 이를 의심하고 성찰해나가야 한다.

사람들은 보통 여행을 공간의 이동이라는 면에서 생각한다. 그러나 장기 간의 여행은 공간뿐만 아니라 시간, 사회적 서열에서의 변화도 수반한다. 우리가 받은 인상들을 적절히 정의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각각의 세 가지 요소를 서로 관련시켜야만 한다. 공간 하나만 하더라도 세 개의 국면을 지 니고 있으므로, 여행에 대한 적절한 개념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다섯 가지의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 나는 브라질의 해변을 거닐자마자 이 같 은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대서양과 적도를 건너서 열대 부근에 왔다는 사 실을 이 몇몇 확실한 징표로써 알 수 있었다. 이 징표 가운데서 후럽지근 한 열기는 내가 보통 때 입고 있던 모직물의 옷을 벗게 하였고, ‘집 안과 ‘집 바깥,이라는 구별(우리들 문명의 징표 가운데 하나라고 인식할 수 있다)을 없애버렸다. 반면에 완전히 인간화해버린 우리네 풍경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인간과 미개척 자연과의 대립이 이곳에는 있음을 나는 곧 알 수 있었다. 이곳에는 도처에 종려나무나 낯선 꽃들이 있으며, 또한 꼭지를 떼어내면 술 냄새가 물씬 나는 달콤하고 시원한 즙을 마실 수 있는 푸른 야 잣나무 열매가 살롱 앞마다 수북이 쌓여 있다.

자신의 생각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하기란 쉽지 않다. 문명화되지 않은 사회에서 어떤 문화와 삶을 이끌어나가는지 매번 인류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살필 수도 없다. 어떻게 사고의 사각지대를 극복할 수 있을까? 레비스트로스의 생각을 빌려 공시적이고 통시적인 시각을 의식적으로 견지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나의 관점을 전부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시작으로 해석하는 자세다.’ 나를 시작으로 관점을 주변 세계로 넓히는 것이다. 내가 속한 공간의 과거와 내가 속한 시간의 다른 공간들이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는지 끊임없이 살피는 것이다. 그들은 왜 나와 다른 생각과 삶의 방식을 갖는 걸까?

아빠와 교육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이러한 시각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아빠는 학교 교육의 절대성을 신봉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학교 교육과 다른 나라의 학교 교육이 다른 이유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또한 과거와 우리나라의 교육이 달라진 것 역시 염두에 두지 않고 있었다. 학교교육이 절대적이라면, 과거나 지금이나 같은 내용과 방식으로 이뤄지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문화마다 학교교육이 다를 필요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우리 아빠처럼 학교 교육을 절대적이라고 믿는 사람이 정말 많다고 생각한다. 이는 우리가 절대성이라는 이름하에 타협하지 않으려는 자세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많은 사람들이 레비스트로스의 학문을 문화적 상대주의라며 비판한다고 한다. “너의 문화도 맞고 나의 문화도 맞아.” 이러한 생각은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원주민 문화에 대한 존중이 이러한 가벼운 결론을 도출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선, 레비스트로스의 생각은 우리가 절대적이라고 믿는 것에 균열을 일으킬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해 준다. 이는 나와 다른 것들을 틀린 것이라 규정하는 것을 막고,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문제들을 해결해 준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는 너도 맞고 나도 맞는다는 결론을 결코 도출하지 않는다. 그가 인류학을 대하는 자세를 보면, 그가 연구와 학문에 얼마나 진심을 다하는지 알 수 있다. 그는 끊임없이 관찰하고 기록한다. 이 과정은 “좋은 것은 좋은 거다.”라는 식으로 결론을 도출하지 않는다. 자신의 문화와 타문화를 비교하고, 그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차이의 뿌리를 끝까지 찾아내려는 과정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후에 연구자들이 내는 결론은 문화 상대주의로만 설명될 수 없다.

레비스트로스는 내 공부 인생에 끊임없이 등장할 것 같다. 특히 독일에서 공부할 예정인 나에게 그의 학문적 태도는 반드시 익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외국의 교육을 배우는 이유는 이를 절대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절대화와 정반대의 과정을 거치기 위해 외국 교육을 공부한다. 대상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할 때, 그 대상을 절대화하고 신성시하기 쉽다. 하지만 그 대상을 공부할수록, 그가 가진 특징을 객관적으로 분석할 눈을 갖게 된다. 더욱이 내가 기존에 겪은 경험과 비교함으로써 이 특징을 명확히 볼 수 있다. 요즘 독일 교육을 신성시하며, 우리나라 교육을 반교육이라 비판하는 학자가 눈에 띈다. 나의 1차적 독일에서의 유학 목표는 이러한 이상화 과정에 반론을 제기하는 것이다.

한 종족이 지닌 관습들의 전체적 집결에는 언제나 어떤 특정한 양식이 존재한다. 관습들이 체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체계들이 수적으로 제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며, 또 개별적인 인간존재들과 마찬가지로 인간 사회도 一그들의 놀이와 꿈 또는 정신착란의 상태에서——결코 절대적인 방식을 창조해내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인간 사회란 재구성이 가능한 관념의 저장고로부터 어떤 결합들을 선택해낸다. 신화, 어린이와 어른들의 놀이, 건강한 사람이나 병든 사람의 꿈, 또는 심리학적 • 병리학적 행위 가운데 표 현되어 있는 것과 같은 모든 관찰된 관습들의 목록을 작성하기 위해 서는 우리들은 화학원소의 주기표와 유사한 일종의 주기표를 만들어 낼 수 있게 될 것이다. 현실적인 것이든 또는 단지 가능할 뿐이든 모 든 관습들이 이 주기표 내에서 가족으로서 집단을 이루게 되고, 우리 들은 사회가 실제로 어떤 것을 채택하느냐를 단지 식별하기만 하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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