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열대 한길그레이트북스 31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지음, 박옥줄 옮김 / 한길사 / 199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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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교수님의 페이스북을 통해 클로 레비-스트로스와 슬픈 연대를 알게 됐다. ‘다름/차이’에 대해 고민하던 시기라 교수님께서 페이스북에서 언급한 문장이 마음에 꽂혔었다. “나는 표면적인 대조나 외면상의 특이성을 경계한다. 그런 것은 단시간 동안 밖에 효력이 없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과 자신을 구별할 때 인간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을 적극 활용한다. 겉으로 드러난 것이 전부가 아니란 것을 알지만, 외관이 눈에 가장 잘 띄기에 이러한 사실을 망각해버린다. 이는 인간으로 하여금 외관에 집착하게 하고, 차이를 인정하기보단 동화를 이끌어낸다. 하지만. 레비스트로스가 말한 것처럼 실제로 외관의 독특성/ 대조는 단기간밖에 효력이 없다. 우리가 외관에 이끌려 타인과 인간관계를 맺을 수 없지만, 내면의 결이 맞지 않으면 이 인간관계는 유지되기 어렵다.

외면의 동화 현상은 우리나라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이 사실은 독일에서 만난 4명의 미국 친구를 통해 깨달았다. 그 친구들의 옷, 머리 스타일은 모두 가지각색이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란 그들은 서로 비슷할 법도 한데,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각자 다른 일을 하는 모습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 남자들은 대부분 투블록 머리 스타일을 하고 있었다. 또한 나의 경험에 비춰봤을 때,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함께 하는 것’은 똑같이 무언가 하는 걸 의미한다. 예컨대 여행에 함께 간다면, 여행지를 반드시 함께 가야 하고, 같은 식당에서 밥을 먹어야 한다. 즉 같은 시간을 같은 일로 채워나가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러한 외적인 것에 개의치 않았다. 이는 한국인의 동질성 문화를 깨달을 수 있는 좋은 경험이었다.

교수님께선 ’슬픈 열대‘를 마치 긴 영행을 하는 느낌의 책이라고 소개해 주셨다. 책이 두꺼워서 무게가 있지만 쉽고 재미있게 읽힐 것이라 말씀하셨다. 교수님 덕분에 레비스트로스를 처음 알았기에 서점에서 한번 검색을 해봤다. 라캉, 푸코 등 이름만 들어도 묵직한 학자들이 함께 언급되고 있었다. 푸코의 책을 한 권 읽었을 때, 나의 학문적 역량의 부족함을 절실히 깨달았기에 레비스트로스의 책을 읽기가 겁이 났다. 또한 그가 이뤄낸 학문적 성과는 나에게 너무 높아만 보였다. 그래도 교수님께서 나라면 읽을 수 있을 것이란 말에 한번 도전해봤다. 이와 함께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 강의‘와 첫 단추 시리지 ’문화 인류학‘을 병행 독서를 했다.

한 달간 틈틈이 슬픈 열대를 읽었다. 짧은 시간 내에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었다. 이 책엔 레비스트로스의 경험과 생각이 농도 짙게 담겨있다. 사실 한 달도 부족한 시간이었다. 레비스트로스가 원주민들의 삶, 문화, 생활 방식 등을 묘사한 부분을 머리로 그리며 충분한 시간을 갖고 독서를 했으면 좋았을 것이라 생각이 든다. 무언가를 상세히 묘사한 책을 접한 경험이 없어, 머릿속에서 그 모습이 그려지지 않았다. 레비스트로스가 만난 원주민들의 삶을 담은 영상 자료가 있는지도 살펴봤지만, 아쉽게도 찾을 수 없었다. 구체적인 부분 역시 소화하면 좋았겠지만, 이번엔 레비스트로스의 생각 위주로 독서를 했다.

슬픈 열대는 레비스트로스가 원주민과의 삶을 샅샅이 기록한 후의 해석을 담은 여행기다. 나에게 마치 현대 미술 감상문과 같았다. 현대 미술은 작가의 의도만큼이나 감상자의 해석이 중요하다. 작가의 곁을 떠난 작품은 감상자의 해석을 통해 새롭게 탄생한다. 감상자마다 작품을 다르게 받아들이고, 자신들의 관점에 따라 이를 해석한다. 그래서 나는 현대 미술을 좋아한다. 다른 예술 작품을 보면 감상자인 내가 끼어들을 틈이 없는데, 현대 미술은 나에게 참여 공간을 마련해 준다. 레비스트로스가 마주한 원주민들의 삶, 문화, 생활 방식의 의도가 그의 해석과 다를 수 있다. 책의 한 부분에서 언급된 것처럼 레비스트로스의 해석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레비스트로스의 해석은 원주민들의 삶을 다른 차원으로 이끌어낸다. 이것이 이 책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이 책을 독서하면서, 원주민들의 삶보다 그의 생각과 해석에 주목한 이유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슬픈 열대를 읽으면서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On Liberty)’과 타라 웨스트오버의 ‘배움의 발견(Educated)’이 떠올랐다. 밀은 자유론에서 개인은 타인의 자유를 침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들을 해치는 자유는 진정한 의미의 자유가 아니다. 다른 사람이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 우리는 우리의 뜻대로 그들을 억압할 수 없다. 아무리 그의 행동 사고방식이 자신의 관점에서 비정상적으로 보이더라도, 이를 용인해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우리의 자유 역시 누군가에 의해 빼앗길 수 있다. ‘자유론’과 ‘배움의 발견’에서 모르몬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많은 사람들이 이 종교를 사이비, 이단이라고 칭하며 비정상적인 집단이라고 비판을 한다. 그들의 생활 방식을 이해하지 않으며, 그 종교를 존중하지 않는다.

독서 모임에서 모르몬교 구성원에 대한 다른 집단의 간섭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우리와 살아가는 방식 및 생각의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그들은 비정적으로 보인다. 우리가 다름을 인정한다고 하지만 우리의 눈에 종종 이 집단의 행위는 틀린 것으로 비치기도 한다. 어떤 친구는 이 의견을 고수하며, 그들의 잘못된 행위를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이 의견에 무척이나 조심스럽다. 나의 사고와 행위가 비정상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도 언젠가 누군가에 의해 그들의 입장에서 옳지 못하기 때문에 교정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밀은 당사자게 더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거나 더 행복하게 만든다고, 또는 다른 사람이 볼 때 그렇게 하는 것이 현명하거나 옳은 일이라는 이유에서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무슨 일을 시키거나 금지시켜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나는 이 말이 슬픈 열대에서 레비스트로스가 말하려는 것과 일맥상통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진보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본다. 진보적이지 않은 것들은 진보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며 현재 상태의 가치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문명화된 사회와 원주민들의 사회를 바라보면 쉽다. 또는 우리가 가치를 높이 두는 삶과 그렇지 않은 삶에 대한 시선의 차이를 보면 이를 극명히 느낄 수 있다. TV에서 원주민이나 아프리카인들을 다룰 때, 항상 그들은 불쌍하게 다뤄졌다. 그들이 꾸려나가는 삶에 주목하지 않고, 오로지 미개한 사회라는 틀에서 그들을 바라봤다. 그들은 우리와 같은 현대 문명의 특권을 누리지 못하기에 행복하지 않고 그들에게 우리가 쌓아온 문명의 혜택을 나눠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과연 그들이 불행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그들의 삶에 간섭해 변화를 꾀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슬픈 열대는 이러한 생각이 잘못됐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원주민들은 그들 나름의 삶, 문화를 지니고 있다. 이는 우리와 다른 삶의 방식으로 우리의 관점에서만 그들을 바라봐선 안 된다. 진보의 관점에서 그들은 많이 부족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관점에선 우리의 삶이 부족해 보일 수 있다. 우리가 만성적으로 느끼는 사회 문제들을 그들은 어떻게 바라볼까? 과연 우리는 진보의 이름으로 생겨난 이러한 문제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우리는 다름을 인정한다고 하지만, 종종 다름은 급을 나누는 기준으로 작동된다. 우리는 원주민들의 다름을 그대로 인정하고 있는가 아니면 열등한 존재로서 가치 평가를 하고 있는가.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는 진보의 관점에서 그들의 삶에 간섭하고, 그들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기보다 개선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오만한 행태를 비판한다. 그들의 삶은 진보적 관점에 취한 사람들에 의해 파괴되고 있다. 그러나 원주민들 역시 그들의 삶을 꾸려나갈 수 있는 주체로 그들의 자유를 누구도 해칠 수 없다.

슬픈 열대는 원주민에 대한 레비 스트로의 해석을 담지만, 이 해석은 원주민의 그의 틀에 가두지 않는다. 해석이 원주민에게 향하는 것이 아니라, 진보적 관점을 취하는 사회에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이 원주민에게 향했다면, 레비스트로스는 자신이 지금껏 은연중에 획득한 사고방식을 원주민들에게 주입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레비스트로스는 경험과 해석을 통해 자신의 삶 및 사고방식의 절대성에 의문을 던진다. 이 의문은 현대 문명에 대한 원숙한 통찰과도 같다. 그는 원주민의 사회에서 현대 문명이 당연하고 절대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에 반하는 사례를 발견한다. 이는 우리가 절대적이라고 믿는 대상에 대해 의문을 던질 여지를 마련해 준다. 인간은 절대성의 이름으로 자신을 가둘 필요가 없으며, 끊임없이 이를 의심하고 성찰해나가야 한다.

사람들은 보통 여행을 공간의 이동이라는 면에서 생각한다. 그러나 장기 간의 여행은 공간뿐만 아니라 시간, 사회적 서열에서의 변화도 수반한다. 우리가 받은 인상들을 적절히 정의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각각의 세 가지 요소를 서로 관련시켜야만 한다. 공간 하나만 하더라도 세 개의 국면을 지 니고 있으므로, 여행에 대한 적절한 개념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다섯 가지의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 나는 브라질의 해변을 거닐자마자 이 같 은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대서양과 적도를 건너서 열대 부근에 왔다는 사 실을 이 몇몇 확실한 징표로써 알 수 있었다. 이 징표 가운데서 후럽지근 한 열기는 내가 보통 때 입고 있던 모직물의 옷을 벗게 하였고, ‘집 안과 ‘집 바깥,이라는 구별(우리들 문명의 징표 가운데 하나라고 인식할 수 있다)을 없애버렸다. 반면에 완전히 인간화해버린 우리네 풍경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인간과 미개척 자연과의 대립이 이곳에는 있음을 나는 곧 알 수 있었다. 이곳에는 도처에 종려나무나 낯선 꽃들이 있으며, 또한 꼭지를 떼어내면 술 냄새가 물씬 나는 달콤하고 시원한 즙을 마실 수 있는 푸른 야 잣나무 열매가 살롱 앞마다 수북이 쌓여 있다.

자신의 생각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하기란 쉽지 않다. 문명화되지 않은 사회에서 어떤 문화와 삶을 이끌어나가는지 매번 인류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살필 수도 없다. 어떻게 사고의 사각지대를 극복할 수 있을까? 레비스트로스의 생각을 빌려 공시적이고 통시적인 시각을 의식적으로 견지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나의 관점을 전부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시작으로 해석하는 자세다.’ 나를 시작으로 관점을 주변 세계로 넓히는 것이다. 내가 속한 공간의 과거와 내가 속한 시간의 다른 공간들이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는지 끊임없이 살피는 것이다. 그들은 왜 나와 다른 생각과 삶의 방식을 갖는 걸까?

아빠와 교육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이러한 시각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아빠는 학교 교육의 절대성을 신봉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학교 교육과 다른 나라의 학교 교육이 다른 이유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또한 과거와 우리나라의 교육이 달라진 것 역시 염두에 두지 않고 있었다. 학교교육이 절대적이라면, 과거나 지금이나 같은 내용과 방식으로 이뤄지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문화마다 학교교육이 다를 필요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우리 아빠처럼 학교 교육을 절대적이라고 믿는 사람이 정말 많다고 생각한다. 이는 우리가 절대성이라는 이름하에 타협하지 않으려는 자세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많은 사람들이 레비스트로스의 학문을 문화적 상대주의라며 비판한다고 한다. “너의 문화도 맞고 나의 문화도 맞아.” 이러한 생각은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원주민 문화에 대한 존중이 이러한 가벼운 결론을 도출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선, 레비스트로스의 생각은 우리가 절대적이라고 믿는 것에 균열을 일으킬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해 준다. 이는 나와 다른 것들을 틀린 것이라 규정하는 것을 막고,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문제들을 해결해 준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는 너도 맞고 나도 맞는다는 결론을 결코 도출하지 않는다. 그가 인류학을 대하는 자세를 보면, 그가 연구와 학문에 얼마나 진심을 다하는지 알 수 있다. 그는 끊임없이 관찰하고 기록한다. 이 과정은 “좋은 것은 좋은 거다.”라는 식으로 결론을 도출하지 않는다. 자신의 문화와 타문화를 비교하고, 그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차이의 뿌리를 끝까지 찾아내려는 과정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후에 연구자들이 내는 결론은 문화 상대주의로만 설명될 수 없다.

레비스트로스는 내 공부 인생에 끊임없이 등장할 것 같다. 특히 독일에서 공부할 예정인 나에게 그의 학문적 태도는 반드시 익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외국의 교육을 배우는 이유는 이를 절대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절대화와 정반대의 과정을 거치기 위해 외국 교육을 공부한다. 대상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할 때, 그 대상을 절대화하고 신성시하기 쉽다. 하지만 그 대상을 공부할수록, 그가 가진 특징을 객관적으로 분석할 눈을 갖게 된다. 더욱이 내가 기존에 겪은 경험과 비교함으로써 이 특징을 명확히 볼 수 있다. 요즘 독일 교육을 신성시하며, 우리나라 교육을 반교육이라 비판하는 학자가 눈에 띈다. 나의 1차적 독일에서의 유학 목표는 이러한 이상화 과정에 반론을 제기하는 것이다.

한 종족이 지닌 관습들의 전체적 집결에는 언제나 어떤 특정한 양식이 존재한다. 관습들이 체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체계들이 수적으로 제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며, 또 개별적인 인간존재들과 마찬가지로 인간 사회도 一그들의 놀이와 꿈 또는 정신착란의 상태에서——결코 절대적인 방식을 창조해내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인간 사회란 재구성이 가능한 관념의 저장고로부터 어떤 결합들을 선택해낸다. 신화, 어린이와 어른들의 놀이, 건강한 사람이나 병든 사람의 꿈, 또는 심리학적 • 병리학적 행위 가운데 표 현되어 있는 것과 같은 모든 관찰된 관습들의 목록을 작성하기 위해 서는 우리들은 화학원소의 주기표와 유사한 일종의 주기표를 만들어 낼 수 있게 될 것이다. 현실적인 것이든 또는 단지 가능할 뿐이든 모 든 관습들이 이 주기표 내에서 가족으로서 집단을 이루게 되고, 우리 들은 사회가 실제로 어떤 것을 채택하느냐를 단지 식별하기만 하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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