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한나 아렌트를 읽는가
리처드 J. 번스타인 지음, 김선욱 옮김 / 한길사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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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의 사상을 읽을 때면 항상 강남순 교수님이 떠오른다. 강남순 교수님은 나에게 급진적 물음의 의미와 그 중요성을 일깨워주신 분이다. 급진적인 물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에 따르면, 이는 뿌리까지 파고드는 근원적인 질문을 가리킨다. 식물의 모습과 같이 인간 세상에서 겉으로 드러난 부분은 제한적이다. 더욱이 겉으로 드러난 부분이 그렇지 않은 부분보다 더욱 방대하기도 하다. 하지만 많은 인간들은 겉으로 드러난 부분에 취해 그 아래에 펼쳐진 것들을 보지 못한다. 급진적인 질문을 통해 인간은 행위, 말과 같은 표지를 넘어서 이것들의 발원을 살필 수 있다. 뿌리 물음은 오만한 정복자의 마음을 버리게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모든 것을 이해했다. 알고 있다,’ 등의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로서 이러한 급진적인 물음에 불편함을 느낀다. 인간은 낯선 환경도 편안하게 느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이에 반해 급진적인 물음은 이러한 적응의 과정을 거부하며 대상에 대한 거리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도록 도와준다. 나는 뿌리 물음을 알게 된 후, ‘익숙한 것이 항상 옳은 것이 아닐 수 있다’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오랫동안 나는 많은 생각, 행위, 언어를 자연스럽게 생각했다. 익숙한 것과 자연스러운 것, 옳은 것은 같은 의미였다. 그렇기 때문에 익숙한 것에 대해 의문을 던질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익숙한 것들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기보단, 나를 그 틀에 맞추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인간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당연하다고 믿어지는 것들은 ‘누군가에 의해 어떠한 이유’로 ‘당연화’된 것이다. 당연하지 않은 것들이 당연화될 때, 우리의 사고는 멈춘다. “왜”와 더 나아가 생각할 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연하다고 믿어지는 것들에 “왜?”라는 질문을 던지면 “당연하니까.”라는 대답만 무한 반복된다. 하지만 당연하다는 믿음이 깨지면, “왜?”라는 질문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 된다. 어딘가에 이유가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은 인간이 적극적으로 사고할 수 있도록 한다.

‘우리는 왜 한나 아렌트를 읽는가?’에 대한 번스타인의 답 역시 ‘뿌리 물음’의 중요성과 상통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적극적 사고와 반성적 성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전체주의의 기원, 인간의 조건 등이 이 책의 재료로써 적극 활용된다. 현재 우리 앞에 나타난 문제들은 아렌트의 문제의식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번스타인은 아렌트의 사상을 틀로 삼아 우리가 마주한 문제들을 분석하고 있는 것이다. 전체주의 문제와 나치의 잔혹성을 고발한 아렌트의 수십 년 전의 경고 메시지가 여전히 유효한 것이 안타깝기도 하다.

이 책을 읽으니 아렌트의 주요 저작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번스타인이 아렌트의 저작들에서 뽑아낸 개념어들이 나의 사고를 확장시켜주는 기분이었다. 또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혼자 읽었을 때보다 훨씬 다면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내용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취하기 힘들었는데, 이 책은 아렌트가 비판받는 부분을 다룸으로써 아렌트를 넘어 생각할 수 있게끔 도와줬다. 아렌트 역시 인식의 사각지대를 지닌 유한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됐다.

아렌트는 복수성과 탄생성을 강조한 정치 철학자다. 탄생성은 인간이 새로운 것을 시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이러한 능력을 통해 인간은 타인과 함께 행위하고, 숙고하며, 공동행위를 할 수 있는 공적 공간을 창출할 수 있다. 복수성은 공동체에 속한 수많은 개인의 독특성을 의미한다. 사회 안에 어떠한 개인도 같을 수 없으며 고유하고 독특한 관점을 갖는다.

아렌트는 인간의 독특성을 들며 ‘인간이 본래 평등하게 태어났다.’라는 생각을 거부한다. 인간은 서로 다른 능력과 재능을 갖고 태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평등은 법과 같은 인위적인 제도를 통해 보장돼야 하지 인간 본연의 것이 아니다. 즉 출생을 통해서가 아니라 제도권 아래에서만 인간은 평등한 것이다. 그는 정치의 본질로서 고대 그리스의 이소노미아로 대변되는 정치적 평등을 강조한다. 이소노미아는 인간 본연의 속성이 아니며 폴리스의 제도적 속성을 가리킨다. 정치적 평등은 정치를 전통적 ‘통치’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한다. 아렌트는 이를 적극 활용해 정치를 무지배의 형식으로 생각한 것이다.

인간은 서로 차별화된 관점을 가지며 타인과 소통을 한다. 이러한 소통과 공동의 행위 과정에서 인간은 자신의 독특성을 표현하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말과 행위는 이의 표지로써 활용된다. 아렌트는 이러한 관점에서 ‘공적 공간’을 중요시한다. 공적 공간에서 인간은 서로 토론하고 행위 하며 의견을 검증한다. 이는 인간이 인위적으로 창조한 공간으로서 행위자의 행위가 타인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마치 공연예술가가 자신의 작품을 위해 공적으로 조직된 공간이 필요하듯이, 행위의 수행 그 자체가 타인에게 의존하는 것이다.

이 책에선 난민 문제가 중요하게 다뤄진다. 우리는 인권이 인간이라면 당연히 갖고 있는 누구도 침범할 수 있는 권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인권이 그렇게 여겨지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난민 문제를 살펴보면, 인권은 국가를 가진 인간들에게만 허용된 권리라 할 수 있다. 난민들은 잉여 인간으로 취급되며 삶의 보금자리가 허락되지 않는다. 그들이 인간으로서 삶의 공간을 획득하기 위해선 국민 국가가 결정한다. 그들이 설정한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면 그들은 난민 캠프에서 인간다운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 채 살아갈 뿐이다.

무엇보다도 인권이 ‘양도 불가능한, 것으로 정의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모든 정부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가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만의 정부를 지니지 못하거나 또는 최소한의 권리만을 갖는 상태로 추락하자마자, 어떠한 권위도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남겨져 있지 않고, 또 어떠한 제도도 인권 보장을 바라 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법적 권리와 시민적 권리의 상실로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의 처지에서는 이런 권리의 상실은 양도 불가능한 권리의 실질적 상실을 의미했다. 보편적이고 양도 불가능하다고 생각된 인권은 그 인권에 기초한 헌법을 갖춘 국가들에서조차 강제적으로 요구될 수 없음이 입증되었고 또 앞으로도 계속 입증될 것이다.

언론에서 난민에 대해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면 사람들이 난민의 인권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난민의 인권은 그들에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난민은 국민 국가에 속한 인간들에게 관심 밖의 존재에 불과하다. 현대 사회에서 자신의 국가가 없다는 것은 사회적 조직 전체를 상실을 의미한다. 그들은 누구도 원치 않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된다. 그저 표류하는 인간으로서 누군가 그들을 허락할 때만을 기다리는 것이다. 번스타인은 인간들이 난민을 태하는 태도가 전체주의적 사고방식과 다른 점이 없다고 말한다. 그는 인간들은 어떠한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은 채, 난민들이 인간 답지 못한 삶을 사는 것을 방치해두고 있다고 본다. 인간의 권리와 생명을 언제든 파괴할 수 있다는 전체주의의 잔재가 아닐까.

아렌트 역시 인식의 사각지대를 지닌 유한한 인간이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그가 유대인 위원회를 언급할 때, 우리나라의 친일파와 같은 모습이라서 당황했다. 공동체를 파괴하기 위해 내부의 균열을 적극 활용하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친일파가 행한 범죄를 알기에, 그 묘사에서 나도 함께 분노했다. 하지만 번스타인의 설명에 따르면, 이 부분이 제한된 서술이라고 한다. 모든 유대인 위원회가 아렌트가 말한 것처럼 유대인 학살에 동참하지 않은 것이다. 역으로 나치에 적극적으로 대항한 유대인 지도자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와 더불어 한나 아렌트가 흑인에 대한 미국의 분리교육을 제재에 대해 소극적인 입장을 취한 것은 이번에 새로 알게 된 사실이다. 그는 분리교육과 같은 차별에 대해선 반대하지만, 이러한 차별에 국가가 제재를 가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한다. 국가는 사회의 편견과 차별적 관행에 개입할 권리가 없다고 한나 아렌트는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그가 현실의 복잡성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고 자신의 기준을 세계에 강요해 벌어진 결과다. 국가의 역할이 편견과 차별적 관행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 아닌가? 그들이 이러한 잘못된 관습에 의해 고통을 받고 있어도, 국가는 개인의 자유와 평등의 이름으로 이를 방치해도 되는 걸까. 개인의 행위가 타인의 행위를 억압하거나 그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때에만 그 정당성이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 무자비하게 타인의 권리를 해치면, 공권력은 마땅히 발휘돼야 한다.

오늘날 우리가 아렌트를 읽어야 하는 이유는, 아렌트가 우리 앞에 아직도 버티고 서 있는 위험들을 예민하게 잘 이해하면서 동시에 우리가 무관심하거나 냉소적이 되지 않도록 경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우리의 정치적 운명을 책임지라고 촉구한다. 아렌트는 우리가 공동으로 행위 할 능력이 있고, 새로운 것을 시작할 능력이 있으며, 자유를 지상의 현실로 만들기 위해 분투할 능력이 있다고 가르쳐주었다. "새로운 시작은 그것이 역사적 사건이 되기 이전에 이미 인간이 갖춘 최상의 능력이다. 정치적으로 그것은 인간의 자유와 동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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