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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아파도 아프다고 말할 수 있는 세상 - 공감하고 위로해주는 공동체, 2021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
안병은 지음 / 한길사 / 2020년 11월
평점 :
대학생이 되기 전 나에게 병이란 육체적 질병을 의미했다. 정신 건강의 중요성은 전혀 실감하지 못했다. 하지만 성인이 돼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세상을 살아가면서 병이 육체에만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않은 사람들을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옛날엔 몸의 건강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들이 정신적 건강 문제로 인해 고통을 받는 모습을 보면서 정신 건강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내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은 정신적 문제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정신적 질병을 지닌 사람들의 특징은 이 모습을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떠한 질병들이 환영받겠냐만 정신적 질병들은 특히 외부로 드러내는 것에조차 많은 우려를 표하고 있었다. 흔히 정신병이라 불리는 이러한 질병은 사람들의 시선이 좋지 않다. 우리가 질병에 대해 연민이나 동정의 시선으로 보는 것에 비해 이러한 질병은 반감을 더욱 많이 사는 것 같다. 육체의 질병을 앓고 있는 환자에 대해선 연민의 시선이 기본값이다. 하지만 정신병 환자는 질병과 환자를 분리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질병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이 환자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정신병의 문제를 환자에게 돌리다 보니, 환자들은 이 질병은 더욱더 감추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이러한 것은 문제의 방치와 심화로 이어진다. 특히 정신적 질병을 앓고 있는 나의 친구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 대학 학생 커뮤니티에서 종종 올라오는 고민 글만 봐도 이를 절실히 느낄 수 있다. 교사가 되는 데 있어서, 직업을 구하는 데 있어서 정신병 진료 기록이 해가 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이러한 고민의 기저엔 정신병을 앓고 있는 자신을 세상이 안 좋은 시선으로 바라볼 것이라는 걱정이 있을 것이다. 게다가 병의 진단은 자신이 실제로 이 정신병을 갖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니 말이다. 정신병 증상을 보일 때와 의사가 진단을 내리는 것은 확연한 차이가 있다.
옛날엔 정신병을 귀신에 들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현재 역시 정신병 치료를 위해 무당을 찾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병을 앓고 있는 사람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은 당연했다. 하지만 현대의 과학은 정신병 역시 인간의 신체적 조건으로 인해 생긴 질병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인간이 사고하고 무언가를 느끼는 것이 심장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던 과거와 달리 모든 것을 뇌가 관장하고 있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뇌의 다양한 신경 세포의 상호작용으로 인해 인간은 느끼고 생각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신병은 뇌의 기능에 이상이 생길 때 발병한다. 현재는 모든 정신병의 원인을 구체적으로 밝히진 못했지만, 정신병이 다른 신체적 질병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병과 환자를 구분하는 것이 중요한데 정신병은 오래전부터 미지의 영역이었기 때문에 이것이 어려운 것 같다. 인간의 존재를 넘어서는 초월자들이 관여한다는 점은 인간들이 이 병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과학적 연구 결과와 함께 이러한 두려움은 점점 깨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미 고착된 생각을 한 번에 바꾸기란 힘들겠지만 점점 이 질병에 대한 시선의 변할 것이다. 내가 정신병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꾼 것처럼! 우리가 몸이 아프면 병원을 가는 것이 자연스럽듯이 정신병을 앓고 있으면 정신병원을 가는 것이 자연스러워야 한다. 증상이 심하지 않는데 과잉 진료를 받으란 소리가 아니다. 누구도 정신 병원에 가는 것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정신병과 환자를 분리할 수 있는 상태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정신병이 치료될 수 있고, 그것이 신체적인 이유로부터 발병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고 깨닫는다면, 환자들 역시 질병을 숨기고 방치하지 않을 것이다. 질병에 대한 사회의 시선이 두려워 그들은 이 질병이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고통받고 있다. 또한 그러한 질병과 환자를 악으로 치부하며 분노를 표출한다. 이는 혐오와 배제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나의 친구들이 정신병 기록이 취업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두려움을 갖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러한 인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겠지.
조현병에 대한 합리적인 생각 없이 그들을 혐오하고 분노해 자리를 빼앗고 사회에서 축출하려 한 것은 바로 우리다. 이는 비단 정신질환자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다 장애인, 외국인, 동성애자 등 우리 사회는 특정 대상에 대한 혐오와 분노를 쉽게 드러내고 배제하고 분리하기 위해 애쓴다. 우리 곁에 그들이 머물 틈을 내주지 않기 위해 그들을 혐오히는 것이다.
’마음이 아파도 아프다고 말할 수 있는 세상‘은 정신병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 시각과 정신의학과의 실태를 고발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정신병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한다. 더 나아가 피하고 싶은 두려운 대상이기도 하다. 정신병 환자들이 범죄를 저질렀을 때 뉴스에선 그들의 질병과 연결해 범죄의 심각성을 강조한다. 사람들은 이러한 정보 전달로 인해 정신병 환자들이 범죄를 만연하게 저지른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이는 정신병뿐 아니라 정신병 환자에게까지 두려움, 공포, 반감 등 부정적인 감정의 전이를 일으킨다. 하지만 이 책에서 나와 있듯이 정신병 환자의 범죄율이 비질환자의 1/10도 되지 않는다. 정신병 환자와 범죄자를 자동적으로 연결하는 것이 과연 맞는 걸까.
사람들은 미지의 질병에 대해 더욱 많은 두려움을 느낀다. 정신병 역시 이와 같은 이유로 귀신과 같은 초자연적인 대상으로부터 원인을 찾으려고 했다. 이는 질병과 결부된 존재와 이를 앓고 있는 환자에게까지 두려움이 이어졌을 것이다. ’귀신 들린 사람. 불결한 사람‘ 등 정신병자는 사회에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는 존재라고 여겨졌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질병을 없애는 것과 더불어 사회에서 그들을 떼어놓는 것이 중요했다. 19세기와 20세기에 행해진 정신병 환자들에 대한 반인권적인 의료 행위는 이러한 생각을 절실히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미지의 질병을 어떻게든 정복하기만 하면 됐다.
20세기 정신의학은 안전이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어째서 이처럼 무모한 치료법을 경쟁적으로 시도했을까. 그들이 지니고 있던 마음은 정신의학계에 이름을 남기겠다는 공명심이었을까. 남들보다 먼저 성공하려는 조바심 때문에 ‘작은 문제’는 덮어두어도 되었을까. 아니면 정말로 정신질환으로 고통받는 환자를 돕고자 하는 선한 의도였을까. 무엇을 얻고자 했는지는 알 수 없어도 가능성이 있다는 가설만으로 부작용을 숨기고 실험 결과를 조작하면서까지 환자를 대상으로 위험한 시도를 했다는 사실 자체는 용서받을 수 없다.
이러한 생각은 찰스 힐이 말했던 것처럼 쓰레기 더미와 같은 의료 행위를 촉진시켰다. 노벨 의학상까지 받은 권위적인 의학자들 역시 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열 치료, 극소 감염 원인 제거, 전두엽 절제술 등 비이성적이고 잔인한 행위들이 의료 행위란 명목으로 행해지고 있었다. 또 그들은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가 허락되지 않았다. 그들은 자유롭게 밖을 돌아다닐 수 없었고 타인에 의해 쇠사슬에 묶이고, 조그만 방에 갇혀 통제받아야만 했다. 비질 환자들에게 정신병은 사회악이기 때문에 이러한 극악무도한 행위를 했어도 어떠한 죄책감도 느끼지 않을 것 가라 생각한다.
인간이 잘 알려지지 않은 대상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자신의 건강이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질병에 대해선 특히 더 그렇다. 하지만 정신병은 더 이상 미지의 영역이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정신병에 대한 편견은 끊이지 않고 있다. ‘앨런 프란시스’의 비정상과 정상 구분이 이러한 인식을 가장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정신병을 지닌 사람을 비정상이라고 규정한 후에 비질 환자들은 자연스레 정상이 된다. 이 둘은 각각 실체가 없고 구분할 수 있는 기준도 없으며 단지 반대되는 개념으로서만 존재한다. 정상이 아닌 건 비정상이고, 비정상이 아닌 건 정상이라는 말이다. 정신병을 지닌 환자들은 이러한 비정상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차별과 배제를 받고 있는 것이다.
‘마음이 아파도 아프다고 말할 수 있는 세상’을 통해 정신병에 대해 사회의 시선이 날카롭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이러한 부정적인 시선은 정신병 질환 치료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들을 사회에서 더욱 밀어내며 문제를 더 크게 만들 수도 있다. 더욱 지속적인 의료적 지원이 시급하다. 그들을 사회에서 매장하거나 숨기는 임시방편의 수단이 아니라 그들이 비질환자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이 필요하다. 작가가 말하는 것처럼 ‘탈 수용화’와 ‘지역 사회 중심의 치료’의 취지에 깊이 공감을 했다.
입원이 정신병원의 이익과 결부돼 있다는 사실 역시 이번에 처음 알게 됐다. 그들은 환자를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서 바라본다. 자신들의 돈벌이를 위한 수단! 환자에게 가장 도움이 될만한 수단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에 가장 부합되는 치료를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나 역시 정신병 환자의 범죄 뉴스를 보면서 정신병 환자들에 대한 ‘수용 치료’가 주를 이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러한 생각에 대해 반성을 하게 됐다.
정신병원은 ‘치료'가 아닌 ‘감금'이 목적인 것처럼 운영된다. 따라서 과연 이 중에서 치료다운 치료를 제공하는 정신병원은 얼마나 될 것이며, 정말 치료를 위해 병원에 입원해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되겠는가.
여전히 치료는 입원 중심이고, 정신질환자를 사회에서 격리해야 사회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다는 사회 방위적인 시각이 남아 있다. 사실상 국가가 가장 적은 돈으로 최소 한의 질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이 바로 정신병원이다 국가 권력이 정신병원에 바라는 것은 치료가 아닌 불편한 존재 둘을 국가권력 대신 수용해 주는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자신이 살아가던 공간에서 자리를 빼앗기고 배제되는 수용에 대한 두려움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환자를 넘어 인간이다. 그들은 사회에서 여타의 인간들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서 질병의 유무와 상관없이 잘 살아가는 것이 기본 전제가 돼야 한다. 그들을 사회에서 내몰고 숨기는 것으론 ‘함께 잘 사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 이를 위해선 병원과 함께 다양한 지역 사회의 구성원들이 힘써야 한다. 질병은 지우개로 쉽게 지울 수 있는 오점과 같지 않다. 오랜 시간의 관심과 처방을 통해 점점 희미해지지만, 언제든지 다시 생길 수 있는 선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어느 정도가 이 사회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정상인가? 어느 정도 이 선이 희미해져야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가? 그러한 기준은 없다. 이 선이 희미하든 희미하지 않든 다 같이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을 고민하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