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습니다
홍승은 지음 / 동녘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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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린 시절을 돌이켜 보면 나는 평범한 남자아이들과 달랐다. 운동은 나의 관심사가 전혀 아니었다. 운동 경기에서 이겨야 하는 부담감과 땀을 흘리며 힘들게 몸을 쓰는 것이 싫었다. 더욱이 아이들이 즐겨 하는 총 쏘는 게임, 전략 게임, 격투 게임, 축구 게임 등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노래를 따라 부르거나 춤을 추는 걸 좋아했다. 가만히 앉아서 친구들과 한번 수다를 떨면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그냥 그땐 그런 것이 재미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의 특이점들은 아이들에게 이상하게 여겨졌다. 그리고 이것은 일종의 놀림거리로 작동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 나이대의 남자들은 무리에서 의리를 중시해서 차이를 별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러한 이유로 그들로부터 여자 같다는 말을 정말 많이 들었다. 이 말이 정말 싫었고 고통스러웠다. 왜 아이들이 나를 이렇게 부르는지 아니깐. 그리고 남중에 진학하면서, 친구들과의 차이는 점점 크게 다가왔다. 게임에도 크게 관심이 없고 운동도 못했기 때문에 점점 소외됐던 것 같다. 친구들과 겉으론 웃으면서 잘 지냈지만 다른 아이들과 다른 내가 너무나도 싫었다. 다른 아이들이 즐기는 것에 관심이 없는 내가 비정상이라고 생각했다.

“왜 나는 다른 아이들처럼 게임과 운동에 흥미가 없지?”라는 생각을 항상 했다. 이러한 비정상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내 자신을 정말 많이 탓했다. 평범한 아이들이 즐기는 것을 똑같이 즐기고 그들과 관심사를 공유하는 것을 항상 바랬다. 이와 같은 이유로 매 학기 방학 목표는 이것들에 대한 취미 붙이기였다. 결과적으로 성공은 못 했지만, 친구들과의 접점이 별로 없다는 사실은 마음속에 응어리로 여전히 남아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러한 것들이 대화 소재로 나오거나 하게 될 일이 있을 때 나 스스로 웅크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비정상이 아니란 걸 알며 나 역시 이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지려고 노력하고 있다. 애초에 인간은 다른데 이를 의리라는 이름에 한 무리에 집어넣으려는 행위가 비정상 아닌가? 내가 잘못된 사람이 아니라, 차이를 매개로 배제하고 소외하려는 사람들이 문제 그 자체다.

다행히 고등학교때부터 이러한 소외감을 덜 느낄 수 있었다. 남자들로만 가득했던 중학교에서 벗어나 여자들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학교에 진학했기 때문이다. 남자 아이들이 소수였기 때문에 그들과 나의 관심사가 같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내가 체육을 못하고 게임을 하지 않아도 친구를 사귀는 데에 별 문제가 없었다. 더욱이 내가 비정상이라고 여겼던 나의 특징과 관심사는 이 집단에선 긍정적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중학교 3년을 남자 중학교에서 보낸 나와 여학생들과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몰랐기 때문에 갈등이 엄청 심했던 적도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를 대하는 방식을 조금씩 알아갔던 것 같다.

고등학교 이후로 지금까지 나는 여초 집단에서 생활하고 있다. 남성들이 주를 이룬 환경은 중학교와 군대 훈련소가 전부다. 나는 여초 집단에서 있으면서 자연스레 여성들의 고충을 알게 됐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성차별 및 불평등에 대해 다른 사람들보다 민감해질 수 있었다. 내 주변엔 정말 능력이 좋은 여성들이 많이 있다. 능력과 더불어 성실하기까지 하다. 그런데 사회에 나가면 수 많은 여성들이 자취를 감춘다고 한다. 대부분의 고위직 및 존경받는 자리는 남성들의 몫이다. 아이러니이다. 내 나이대에만 잘난 여성들이 있었던 걸까? 아니. 그들을 ‘성’을 매개로 차별과 배제를 당했던 것이다.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일상생활을 경험을 통해 성차별이 나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나 역시도 일상에 만연한 차별과 혐오 표현을 무시했던 적이 정말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 나아가 많은 사람들을 혐오하며 폭력을 행사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여자가 조신해야지. 현모양처가 좋은 거 아니야? 왜 남성 혐오와 여성 혐오가 다르죠?’ 등 무지에서 나온 발언도 했다. 또 서슴없이 ‘입에 걸레 물었냐.’ 등의 여성을 성적 대상화한 욕도 서슴없이 사용했다. 지금은 문제라는 걸 알지만, 그 당시엔 어떠한 문제의식도 없었다. 아마 지금도 내가 일상에서 혐오가 만연한 생각, 행동, 말 등을 하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습니다.’는 작가의 불편한 경험과 생각에 대한 수필집이다. 같은 세상에 살지만, 남성과 여성이 겪는 세상의 모습은 정말 다르다. 그냥 다른 것을 넘어 질적으로 차이 난다. 남성이라면 겪지 않을 것들은 여성들은 일상에서 흔히 겪는다. 상상할 수 없는 영역까지 이러한 차이는 만연해 있다. 이러한 차이는 차별과 배제를 내포한다. 누가 인간들이 동등한 가치를 지닌 존재라 하는가? 학교에서 우린 이를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라 배우지만 실상은 결코 그렇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비정상성에 대해 익숙해 있어, 이것이 지닌 문제를 쉽게 지나친다.

불편함은 문제를 알아가는 첫걸음이라고 생각한다.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그 문제로부터 이익을 취하거나 문제에 식민화된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요즘엔 ‘불편함’도 혐오 대상이 되고 있다. 사실 이는 오래전부터 부정적으로 여겨졌다. 어렸을 때부터 불편함을 토로할 때면 ‘저런 거에도 불편을 느끼나? 괜히 트집이야. 너무 예민한 거 아니야?’ 등의 반응을 했던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이러한 반응은 내가 불편함을 느끼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게 했다. 남성인 나도 이러한 폭력적인 반응에 무기력해지는데, 배제와 차별이 일상화된 여성의 삶은 얼마나 더 무기력할지.

‘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습니다.’에서 말하는 ‘당신’은 여성과 남성 모두라고 생각한다. 불편을 느끼는 것에 결코 죄책감을 느끼지 말아야 한다. 문제가 있을 때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데 누가 이 감정을 억제하려는가. 다른 사람의 감정을 통제할 권리는 어느 누구에게도 없다. 하지만 실상은 불편함을 토로하는 목소리를 억제하려 한다. 이는 그 사람의 언어와 생각을 빼앗는 행위라고도 생각한다. 불편함은 변화를 부른다. 이는 불편함의 종말을 의미하기도 한다. 자신들의 문제점에 불편함을 느끼고 이것에 대해 세상에 외칠 때 이러한 불편함은 사라지지 않을까. 또한 남성은 여성들이 느끼는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주로 남성들에 의해 만들어지며 남성들에겐 어떠한 피해도 주지 않기 때문이다. 남성들은 의도적으로 문제를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문제를 문제로 보지 못할 땐, 불편함을 느낄 수 없다. 불편함을 느기 위해선 문제가 문제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제목은 불편한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인식하라는 말을 전하고 있을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페미니즘에 대한 책을 읽으면 내가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들이 내가 모르는 사이에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이것이 계속 공부해야 하는 이유겠지. 공부하지 않으면 문제를 방치하고 더 심화할 테니까. 이런 걸 보면 공부의 목적은 과거의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함인 것 같다. 공부하자! 그리고 나로 인해 상처받는 사람이 없도록 노력하자.

질문이 부족한 사회는 아니지만 질문하는 사람은 한정적이다. 가난한 남성이 가난한 여성을 폭행하거나 성을 구매하는 시인 김수영 식의 서사처럼, 남성과 여성 •성소수자가 겪는 빈곤의 경험은 각각 다르다. 다 른 사회적 차별과 폭력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남성이 아 닌그외 존재가 직접 자신의 목소리를 내거나 ‘다른' 질문을 던지는 책은 찾기 어렵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존재는 불편함을 주지 않는다. 우리가 무언가에 불편할 수 있는 건, 어떤 존재가 눈에 걸리적거릴 때이다.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의 몸에서 일어 나는 일은 침묵됨으로써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존재가 스스로 목소리를 낼 때, 세상은 딸국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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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아파도 아프다고 말할 수 있는 세상 - 공감하고 위로해주는 공동체, 2021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
안병은 지음 / 한길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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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이 되기 전 나에게 병이란 육체적 질병을 의미했다. 정신 건강의 중요성은 전혀 실감하지 못했다. 하지만 성인이 돼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세상을 살아가면서 병이 육체에만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않은 사람들을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옛날엔 몸의 건강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들이 정신적 건강 문제로 인해 고통을 받는 모습을 보면서 정신 건강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내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은 정신적 문제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정신적 질병을 지닌 사람들의 특징은 이 모습을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떠한 질병들이 환영받겠냐만 정신적 질병들은 특히 외부로 드러내는 것에조차 많은 우려를 표하고 있었다. 흔히 정신병이라 불리는 이러한 질병은 사람들의 시선이 좋지 않다. 우리가 질병에 대해 연민이나 동정의 시선으로 보는 것에 비해 이러한 질병은 반감을 더욱 많이 사는 것 같다. 육체의 질병을 앓고 있는 환자에 대해선 연민의 시선이 기본값이다. 하지만 정신병 환자는 질병과 환자를 분리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질병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이 환자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정신병의 문제를 환자에게 돌리다 보니, 환자들은 이 질병은 더욱더 감추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이러한 것은 문제의 방치와 심화로 이어진다. 특히 정신적 질병을 앓고 있는 나의 친구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 대학 학생 커뮤니티에서 종종 올라오는 고민 글만 봐도 이를 절실히 느낄 수 있다. 교사가 되는 데 있어서, 직업을 구하는 데 있어서 정신병 진료 기록이 해가 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이러한 고민의 기저엔 정신병을 앓고 있는 자신을 세상이 안 좋은 시선으로 바라볼 것이라는 걱정이 있을 것이다. 게다가 병의 진단은 자신이 실제로 이 정신병을 갖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니 말이다. 정신병 증상을 보일 때와 의사가 진단을 내리는 것은 확연한 차이가 있다.



옛날엔 정신병을 귀신에 들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현재 역시 정신병 치료를 위해 무당을 찾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병을 앓고 있는 사람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은 당연했다. 하지만 현대의 과학은 정신병 역시 인간의 신체적 조건으로 인해 생긴 질병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인간이 사고하고 무언가를 느끼는 것이 심장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던 과거와 달리 모든 것을 뇌가 관장하고 있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뇌의 다양한 신경 세포의 상호작용으로 인해 인간은 느끼고 생각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신병은 뇌의 기능에 이상이 생길 때 발병한다. 현재는 모든 정신병의 원인을 구체적으로 밝히진 못했지만, 정신병이 다른 신체적 질병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병과 환자를 구분하는 것이 중요한데 정신병은 오래전부터 미지의 영역이었기 때문에 이것이 어려운 것 같다. 인간의 존재를 넘어서는 초월자들이 관여한다는 점은 인간들이 이 병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과학적 연구 결과와 함께 이러한 두려움은 점점 깨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미 고착된 생각을 한 번에 바꾸기란 힘들겠지만 점점 이 질병에 대한 시선의 변할 것이다. 내가 정신병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꾼 것처럼! 우리가 몸이 아프면 병원을 가는 것이 자연스럽듯이 정신병을 앓고 있으면 정신병원을 가는 것이 자연스러워야 한다. 증상이 심하지 않는데 과잉 진료를 받으란 소리가 아니다. 누구도 정신 병원에 가는 것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정신병과 환자를 분리할 수 있는 상태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정신병이 치료될 수 있고, 그것이 신체적인 이유로부터 발병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고 깨닫는다면, 환자들 역시 질병을 숨기고 방치하지 않을 것이다. 질병에 대한 사회의 시선이 두려워 그들은 이 질병이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고통받고 있다. 또한 그러한 질병과 환자를 악으로 치부하며 분노를 표출한다. 이는 혐오와 배제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나의 친구들이 정신병 기록이 취업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두려움을 갖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러한 인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겠지.

조현병에 대한 합리적인 생각 없이 그들을 혐오하고 분노해 자리를 빼앗고 사회에서 축출하려 한 것은 바로 우리다. 이는 비단 정신질환자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다 장애인, 외국인, 동성애자 등 우리 사회는 특정 대상에 대한 혐오와 분노를 쉽게 드러내고 배제하고 분리하기 위해 애쓴다. 우리 곁에 그들이 머물 틈을 내주지 않기 위해 그들을 혐오히는 것이다.

’마음이 아파도 아프다고 말할 수 있는 세상‘은 정신병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 시각과 정신의학과의 실태를 고발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정신병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한다. 더 나아가 피하고 싶은 두려운 대상이기도 하다. 정신병 환자들이 범죄를 저질렀을 때 뉴스에선 그들의 질병과 연결해 범죄의 심각성을 강조한다. 사람들은 이러한 정보 전달로 인해 정신병 환자들이 범죄를 만연하게 저지른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이는 정신병뿐 아니라 정신병 환자에게까지 두려움, 공포, 반감 등 부정적인 감정의 전이를 일으킨다. 하지만 이 책에서 나와 있듯이 정신병 환자의 범죄율이 비질환자의 1/10도 되지 않는다. 정신병 환자와 범죄자를 자동적으로 연결하는 것이 과연 맞는 걸까.

사람들은 미지의 질병에 대해 더욱 많은 두려움을 느낀다. 정신병 역시 이와 같은 이유로 귀신과 같은 초자연적인 대상으로부터 원인을 찾으려고 했다. 이는 질병과 결부된 존재와 이를 앓고 있는 환자에게까지 두려움이 이어졌을 것이다. ’귀신 들린 사람. 불결한 사람‘ 등 정신병자는 사회에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는 존재라고 여겨졌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질병을 없애는 것과 더불어 사회에서 그들을 떼어놓는 것이 중요했다. 19세기와 20세기에 행해진 정신병 환자들에 대한 반인권적인 의료 행위는 이러한 생각을 절실히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미지의 질병을 어떻게든 정복하기만 하면 됐다.

20세기 정신의학은 안전이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어째서 이처럼 무모한 치료법을 경쟁적으로 시도했을까. 그들이 지니고 있던 마음은 정신의학계에 이름을 남기겠다는 공명심이었을까. 남들보다 먼저 성공하려는 조바심 때문에 ‘작은 문제’는 덮어두어도 되었을까. 아니면 정말로 정신질환으로 고통받는 환자를 돕고자 하는 선한 의도였을까. 무엇을 얻고자 했는지는 알 수 없어도 가능성이 있다는 가설만으로 부작용을 숨기고 실험 결과를 조작하면서까지 환자를 대상으로 위험한 시도를 했다는 사실 자체는 용서받을 수 없다.

이러한 생각은 찰스 힐이 말했던 것처럼 쓰레기 더미와 같은 의료 행위를 촉진시켰다. 노벨 의학상까지 받은 권위적인 의학자들 역시 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열 치료, 극소 감염 원인 제거, 전두엽 절제술 등 비이성적이고 잔인한 행위들이 의료 행위란 명목으로 행해지고 있었다. 또 그들은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가 허락되지 않았다. 그들은 자유롭게 밖을 돌아다닐 수 없었고 타인에 의해 쇠사슬에 묶이고, 조그만 방에 갇혀 통제받아야만 했다. 비질 환자들에게 정신병은 사회악이기 때문에 이러한 극악무도한 행위를 했어도 어떠한 죄책감도 느끼지 않을 것 가라 생각한다.

인간이 잘 알려지지 않은 대상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자신의 건강이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질병에 대해선 특히 더 그렇다. 하지만 정신병은 더 이상 미지의 영역이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정신병에 대한 편견은 끊이지 않고 있다. ‘앨런 프란시스’의 비정상과 정상 구분이 이러한 인식을 가장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정신병을 지닌 사람을 비정상이라고 규정한 후에 비질 환자들은 자연스레 정상이 된다. 이 둘은 각각 실체가 없고 구분할 수 있는 기준도 없으며 단지 반대되는 개념으로서만 존재한다. 정상이 아닌 건 비정상이고, 비정상이 아닌 건 정상이라는 말이다. 정신병을 지닌 환자들은 이러한 비정상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차별과 배제를 받고 있는 것이다.

‘마음이 아파도 아프다고 말할 수 있는 세상’을 통해 정신병에 대해 사회의 시선이 날카롭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이러한 부정적인 시선은 정신병 질환 치료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들을 사회에서 더욱 밀어내며 문제를 더 크게 만들 수도 있다. 더욱 지속적인 의료적 지원이 시급하다. 그들을 사회에서 매장하거나 숨기는 임시방편의 수단이 아니라 그들이 비질환자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이 필요하다. 작가가 말하는 것처럼 ‘탈 수용화’와 ‘지역 사회 중심의 치료’의 취지에 깊이 공감을 했다.

입원이 정신병원의 이익과 결부돼 있다는 사실 역시 이번에 처음 알게 됐다. 그들은 환자를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서 바라본다. 자신들의 돈벌이를 위한 수단! 환자에게 가장 도움이 될만한 수단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에 가장 부합되는 치료를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나 역시 정신병 환자의 범죄 뉴스를 보면서 정신병 환자들에 대한 ‘수용 치료’가 주를 이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러한 생각에 대해 반성을 하게 됐다.

정신병원은 ‘치료'가 아닌 ‘감금'이 목적인 것처럼 운영된다. 따라서 과연 이 중에서 치료다운 치료를 제공하는 정신병원은 얼마나 될 것이며, 정말 치료를 위해 병원에 입원해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되겠는가.

여전히 치료는 입원 중심이고, 정신질환자를 사회에서 격리해야 사회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다는 사회 방위적인 시각이 남아 있다. 사실상 국가가 가장 적은 돈으로 최소 한의 질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이 바로 정신병원이다 국가 권력이 정신병원에 바라는 것은 치료가 아닌 불편한 존재 둘을 국가권력 대신 수용해 주는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자신이 살아가던 공간에서 자리를 빼앗기고 배제되는 수용에 대한 두려움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환자를 넘어 인간이다. 그들은 사회에서 여타의 인간들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서 질병의 유무와 상관없이 잘 살아가는 것이 기본 전제가 돼야 한다. 그들을 사회에서 내몰고 숨기는 것으론 ‘함께 잘 사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 이를 위해선 병원과 함께 다양한 지역 사회의 구성원들이 힘써야 한다. 질병은 지우개로 쉽게 지울 수 있는 오점과 같지 않다. 오랜 시간의 관심과 처방을 통해 점점 희미해지지만, 언제든지 다시 생길 수 있는 선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어느 정도가 이 사회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정상인가? 어느 정도 이 선이 희미해져야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가? 그러한 기준은 없다. 이 선이 희미하든 희미하지 않든 다 같이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을 고민하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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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 우리 시에 비친 현대 철학의 풍경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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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긴 호흡으로 한 권의 책을 읽어나가는 것을 좋아한다. 이 호흡은 책을 읽자마자 생기지 않고 글을 읽어나가면서 천천히 쌓인다. 한 권의 책에서 작가가 보여 주는 일관된 세계는 내가 그의 글에 더욱 집중하고 깊이 빠지게 한다. 이것이 내가 긴 호흡의 책을 좋아하는 이유다. 긴 호흡의 글들은 함축적으로 한 번에 생각을 뱉어내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풀어낸다고 해야 할까? 이러한 글들의 문장들은 결코 따로 놀지 않고 서로 연결돼 더욱 구체적으로 작가의 생각을 그려낸다. 이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들을 서로 보강해 독자가 원활하게 읽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하지만 한 권의 책에 여러 생각이 나 주제가 담겨 있으면 이 호흡을 유지하기 쉽지 않다. 또 작품 하나하나가 끝날 때마다 새로운 호흡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단편 소설, 시 등을 선호하지 않는다. 하나의 작품에 들어가야 할 힘이 같다고 가정하면, 짧은 글들은 이 힘을 단기간에 내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글이 시작될 때 이 호흡을 끊고 새로운 호흡을 시작해야 한다. 이러한 독서는 피로도가 만만치 않다. 그래서 이러한 작품집을 읽을 때 집중력을 종종 잃는다. 이때 이를 보강해 줄 장치가 있으면 좋겠지만, 다른 글들은 그것만의 세상을 풀어내기에도 바쁘다. 이러한 독서는 힘은 힘대로 쓰지만, 그만큼 무언가를 얻어내지 못하는 찝찝함을 안겨준다.

그중 단연코 시집이 각 지면마다 가장 많은 힘을 필요로 하는 것 같다. 대부분의 시는 겉보기엔 짧은 글로 이뤄져 있어 쉽게 읽힐 거란 생각을 할 수 있다. 나 역시 어렸을 땐 이러한 생각을 많이 했다. 하지만 이 짧은 시의 언어는 시인의 생각을 농축한 산물이다. 모든 문학 작품이 그렇겠지만, 특히 시의 언어는 드러나 있는 것보다 더욱 많은 것을 내포한다고 생각한다. 이를 깨닫기 전엔 시를 다른 글을 대하듯이 있는 그대로 대하려 했다. 시를 감상하기보단 짧은 글을 쓰윽 읽어나가는 것이 내가 시를 읽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 독해는 나에게 어떠한 것도 남기지 않았다. 그저 짧은 한 편의 글을 읽었다는 인상만 남을 뿐이었다. 시인이 말하려는 생각을 이해하지도 못했고, 그가 보이는 시의 세계는 무미건조했다. 하지만 수능을 공부하면서 많은 시를 접하고 읽어나가면서 시를 읽는 방법에 대해 익힐 수 있었다. 옛날엔 가볍게 넘겼던 작가의 언어에 집중하며 느끼고, 작가의 생각에 나의 생각을 덧붙이려고 노력했다. 이 과정을 통해 시의 세계가 겉보기와 달리 복잡하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이 복잡한 세상을 들어가기 위해선 독자의 다양하고 깊은 생각이 필수적이다. 이것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시는 그저 짧은 글에 불과할 것이다.

시가 농도 짙은 언어의 산물이고 독자의 많은 생각을 요구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시집을 읽는다는 것은 나에게 부담스러운 일이다. 집중력을 발휘해 작품 하나하나에 정성을 쏟는 것이 나에겐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책장엔 몇 권의 시집이 꽂혀 있지만 꺼내어 읽는 것이 용기 나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하나의 작품에 집중하지 않고, 시집이라는 단행본을 읽는다는 것에 집착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이러한 시 읽기는 나에게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데도 말이다. 내가 어떻게 작품을 읽어나갈지 알기에 시집을 꺼내지 않는 것도 좋은 것 같다. 그저 일상에서 가끔 찾아오는 시를 내가 읽어낼 여유와 힘이 있을 때 천천히 읽는 것으로 만족하련다.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은 교과서에서 볼법한 묵직한 시인들의 21편의 시와 철학자 ‘강신주’가 철학으로 풀어낸 해설을 담고 있다. 혼자 읽기에 부담스러운 시를 철학자와 함께 읽는 기분이다. 이 덕분에 내가 혼자 읽었다면 읽어내지 못했을 생각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강신주는 쉬운 언어로 어려운 철학자들의 생각을 시와 곁들여 소개하고 있었다. 특히 이들 중 대부분이 내가 평소에 읽고 싶었던 철학자들이어서 많이 반가웠다. 나의 부족한 사고력과 독해력으로 그들의 작품을 아직 읽어 보진 못했지만, 이렇게 만날 때마다 그들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철학자 강신주가 시인과 철학자의 역할에 대해 묘사한 부분에 많은 공감을 했다. 시인과 철학자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이면을 보려는 존재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둘의 역할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나 역시 이 둘의 공통점을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각자의 방식대로 세상을 바라보고 이에 대한 해석을 언어로 표현하는 사람이 시인과 철학자다. 또 그들은 이를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을 낯설게 보도록 도와준다. 자신이 속한 세상을 낯설게 보기라. 세상에 온전히 빠져 있으면서 세상과 거리를 두는 두 존재들. 왜 지금까지 이 둘의 공통점을 생각해보지 못했을까?

시인이 물속으로 직접 들어가 온갖 물고기를 온몸으로 느끼고 표현하는 존재라면, 철학자는 그물로 끌어올린 물고기를 다시 확인하고 만져 보는 사람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시는 주관적인 것이고, 철학은 객관적 혹은 보편적인 것이라는 인상이 생겨났는지도 모릅니다. 온몸으로 물고기를 경험했던 사람이 자신의 낯선 경험을 육지 사람들에게 들려주려 할 때, 그의 낯선 경험에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반면 새로운 그물을 엮어 낯선 물고기를 뭍으로 끌어올려 보여 준다면 사람들은 이전보다는 좀 더 쉽게 그 낯섦을 경험할 수 있을 겁니다.

이 책은 어울릴 거라 생각하기 힘든 철학자와 시인을 잘 버무린 책이었다. 하지만 철학자들과 그들의 생각에 대한 서술이 빈약하지 않았나 싶다. 읽으면서 쉽게 책장을 넘길 수 있었지만, 독서의 무게감은 아쉬웠다. 400쪽 분량의 책에 21편의 시와 21명의 철학자를 다루는 것은 무리가 아니었나 싶다. 철학자답게 철학자들의 사유 세계를 더욱 자세히 다뤘다면 많은 생각들이 남지 않았을까. 분명히 책을 읽을 땐 공감 가는 구절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는데, 결국에 남은 것은 강신주 작가의 시인과 철학자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철학자들은 세상을 낯설게 보는 존재인데, 이 책에서 서술되는 철학자들의 생각은 왜 낯설게 여겨지지 않는 걸까?

헤겔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한 주인과 그의 노예가 있습니다. 물론 주인은 노예에게 주인으로 인정을 받고 있지요. 노예는 주인을 보면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그가 내리는 명령을 한 치의 착오도 없이 수행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문제는 노예의 인정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다시 말해 노예는 주인의 압도적인 힘이 무서워서 거짓된 인정과 존경을 주인에게 표시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바로 여기서 주인의 고독과 고뇌가 시작됩니다. 그는 노예에게 진정한 인정과 존경을 받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인은 노예에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실 그 일은 먼저 주인이 노예를 자신과 마찬가지의 자유로운 인격으로 해방시켜야만 가능해질 겁니다. 노예가 자유를 얻어 주인과 마찬가지로 자유인이 되었을 때 비로소 그의 인정과 존경은 진정한 자발적 행위가 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여기서 일종의 아이러니가 발생합니다. 만약 자유로워진 노예가 이전의 주인을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고, 심지어 그가 주인을 외면하거나 아니면 아예 주인에게서 멀리 도망가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지만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주인은 노예에게 자유를 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직 그럴 때에만 주인이 노예에게 진실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릴 것이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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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거닝 - 채식에 기웃거리는 당신에게
이라영 외 지음 / 동녘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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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 1년 동안 있으면서 육식을 하지 않는 친구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그전까진 채식주의는 나와 먼 이야기였다. 해외여행 중 만난 몇몇 친구들이 채식을 지향한다는 이야기는 들어봤지만 내 일상에 채식주의가 개입된 적은 없었다. 가장 친한 친구들 중 몇몇이 육식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스레 채식주의에 대해 관심이 생겼다. 우선 채식주의자 친구와 함께 밥을 먹을 땐, 고기를 완전히 배제한 요리를 했어야 했다. 처음엔 고기 없이 채소만으로 음식을 한다는 것이 어색했다. 고기 없는 식단이 낯설고 뭔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점점 적응이 되면서 야채만으로 만들 수 있는 다양한 요리를 고민했다. 또한 개인의 취향에 따라 재료를 자유롭게 넣고 뺄 수 있는 식단을 활용했다. 케밥, 김밥, 타코 등은 재료에 따라 육식이 될 수 있고 채식이 될 수 있다.

나의 주변에 채식주의자 친구가 생기니 식사 초대를 할 때에도 이것에 대해 유의하기 시작했다. 내 친구들이 모두 육식주의라고 생각했을 땐, 그들의 취향을 묻기보다 내가 그들에게 대접하고 싶은 것만 준비했다. 내가 다 잘 먹으니, 모두가 잘 먹을 것이라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채식주의자들을 만나면서 사람들이 못 먹는 것이나 안 먹는 것이 있다는 걸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식사 초대를 할 때, 그들에게 못 먹는 것이나 안 먹는 것이 있는지 꼭 물어보게 됐다. 상대방인 채식주의자인지 모른 채 육식 위주의 식사를 준비하면, 모두가 난감한 상황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식사를 위해선 사전에 다른 사람의 식습관을 알아야만 한다.

친구들과 가까워지면서 채식에 대한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비거닝에서 작가들이 자신과 채식의 이야기를 채워나가는 것처럼 나의 친구들도 채식에 관한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었다. 친구들은 저마다 채식을 시작한 이유가 다양했다.  나의 가장 친한 친구 엠프레스는 태어날 때부터 채식만을 했다고 한다. 부모님이 채식주의자여서 그에겐 채식은 자연스러운 식단이다. 육식에 익숙한 사람들이 채식을 이해할 수없이 쳐다본다면, 그에겐 육식이 그러지 않을까? 그래서 그는 육식에 대해 어떠한 관심도 없다고 한다. 또 어떤 친구는 친구들 때문에 채식주의자가 됐다고 한다. 채식에 대한 어떠한 사전 지식 없이 시작했는데 자신과 채식이 잘 맞는 것 같아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 이외에도 환경 오염, 동물권 등에 대한 생각으로 인해 육식을 포기한 친구들도 있다.

채식을 시작한 이유도 다르지만, 이들은 채식을 지향하는 방식에서도 차이가 있다. 채식주의자가 다 같은 채식주의가 아니란 것이다. 페스토, 비건 등 채식을 지향하는 다양한 방식이 있다. 빨간 고기만 안 먹는 사람,  유제품도 안 먹는 사람, 채소를 제외한 모든 육식을 하지 않는 사람 등 스펙트럼으로 퍼져 있다. 책의 제목이 비건, 채식주의자가 아니라 비거닝이라 한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채식은 고정된 점이 아니라, 육식에서 완전 채식으로 나아가는 선 위에 있는 식단이라 할 수 있다. 비거닝의 작가들이 서로 다른 채식 식단을 하지만, '비거닝'이라는 큰 지붕 아래서 글을 쓸 수 있는 이유다. 그런데 이러한 채식의 구분에 의문이 들기도 한다. 내가 육식을 하지만, 채식을 더욱 선호한다면? 나는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 나의 식단을 육식의 프렘이 아니라, 채식 프레임으로 바라보면 나는 채식주의라고도 불릴 수 있는 것 아닐까?

이 책에도 나왔듯이 외국은 채식이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은 것 같다. 특히 유럽은 나의 경험 채식주의자가 살기 편한 곳이다. 마트나 식당을 가도 채식을 쉽게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식당엔 채식주의자를 위한 메뉴가 있어서 따로 특별 메뉴를 부탁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한국은 이러한 문화가 아직 낯선 것 같다. 대부분의 음식에 고기가 들어가니 말이다. 비거닝에선 우리나라가 전통적으로 채식 식단이 발달됐다고 하는데, 이는 과거에 우리나라가 궁핍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과거의 사람들도 고기를 원했겠지. 하지만 그들에게 고기가 너무 비싸 음식 재료로 사용할 수 없거나, 아주 조금만 넣는 것이 식문화로 자리 잡은 것 아닐까? 즉 환경과 상황에 맞춰 식문화가 형성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나라의 전통적 식문화를 외치는 것은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는 것이라 생각한다. 과거에 비해 경제는 발전했고, 사람들은 고기를 자유롭게 먹을 수 있는 역량이 생겼다. 그러니 자연스레 고기가 곁들여진 식문화가 발전하는 것이다. 나는 이 두 식문화 모두 존중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거가 좋다고 과거로 모두 돌아가자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자율에 따라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채식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환경의 이유를 가장 많이 든다. 책에서 나오듯 축산업이 전 세계 탄소의 14.5%를 배출한다고 한다. 이는 전 세계 자동차, 기차, 항공 산업의 배출량을 다 합친 것보다 많다. 또한 가축들은 전 세계의 77% 작물을 소비하고, 인간은 가축을 통해 오로지 18% 칼로리를 소비한다. 이에 따라 그들은 육식이 에너지 효율도 좋지 않고 자연을 파괴하니 채식을 지향하자고 한다.  나는 이것만이 채식 지향의 원인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자연에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을 지향한다면, 지금의 발전이 이룩한 수많은 것들을 인간은 포기해야 한다. 우린 이러한 발전이 자연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면서도 행하고 있다. 하지만 이를 포기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주는 편리성이 너무나도 달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의 선택에 따라 이 편리성을 포기하고, 자연에게 주는 피해를 최소화하려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순전히 개인의 선택이다. 누구도 이를 강요할 수 없다.

채식 역시 선택의 문제다. 또한 이것이 취향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다양한 음식 중에 내가 먹고 싶은 것, 먹기 싫은 것을 고를 수 있는 자유! 가축이 태어나면서 고통을 받지 않은 적이 없기 때문에, 공리주의 관점에서도 채식이 옳다고 주장한다. 그들로부터 고통을 제거하는 것이니까. 하지만 나는 이러한 동물권 주장이 오만한 생각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지극히 인간 중심적이라고 해야 할까? 그들을 고문하며 고통스럽게 죽이는 것에 대해서 반대한다. 하지만 생태계를 보면 누구는 누군가에게 먹히고, 또 그것은 다른 누군가를 먹는다. 이것이 자연이 작동하는 원리다. 인간은 이 안에 속한 조그만 존재에 불과하다. 이 자연의 섭리를 거스를 수 없다. 그런데 왜 인간은 다른 생물을 먹으면 안 되는 것인가? 자연의 흐름 속에서 다른 생물을 먹을 걸 금지하는 것은 누가 지닌 권리인가?

채식에 대해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책이었다. 지금까지 산재해 있던 생각들을 작가들의 이야기를 통해 하지만 책의 문체가 약간 부담스럽다. 이라영 작가의 정치인의 식탁에서 느꼈던 불편함이 나에게 온다. 불편함보다 불쾌감이라고 할까? 채식주의자는 깨어있고, 우월하다는 인식이 글에서 느껴질 때가 있었다. 뭐. 채식에 기웃거리는 당신에게 보내는 책이니, 그러한 독자들에겐 큰 공감을 불러일으킬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언젠가 육식을 포기하는 날이 올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고기가 좋아서 그런지 강요 당하고 있는 느낌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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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령사 오백나한의 미소 앞에서 - 김치호 한국미술 에세이
김치호 지음 / 한길아트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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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에 재능이 없는 나는 항상 예술을 짝사랑하기만 한다. 한 발짝 물러나 예술을 지켜볼 뿐이다. 예술가들이 예술을 통해 자신들을 표현하고 세상에 목소리를 내는 모습은 나를 열광시킨다. 나 역시 언어가 아닌 다른 수단으로써 나를 표현하고 싶은 열망을 항상 갖고 있다. 예술은 언어가 보여주지 못하는 세상을 열어준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내가 바라보는 세상은 나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자신에 대해 표현하기 위해선 자신을 알아야 한다. 예술은 개인이 자신을 알아가는 여정을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는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모두를 다채롭게 할 것이다.

예술엔 수많은 분야가 있지만, 나는 그중 특히 미술을 흠모한다. 미술은 어떠한 예술보다 작가 자신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농축된 언어로써 표현된다. 공간의 예술이라고 해야 할까? 미술 작품은 시간이 지나도 그 모습이 같다. 하지만 춤, 노래 등과 같은 시간의 예술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표현되는 방식이나 내용이 달라진다. 공간의 예술인 미술 작품은 예술가가 시간의 흐름을 결정할 수 없다. 주어진 공간에 충실히 자신을 표현하면, 작가의 역할을 끝나게 된다. 그 후 감상 시간을 포함한 모든 것은 감상자가 결정한다.

작가가 작품에 자신을 얼마나 농축했는지에 따라 작품의 질이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대가와 아마추어를 가르는 기준이지 않을까? 우리가 사랑하는 작가들을 떠올리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가 될 것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예술가가 있다. 하지만 자신을 충실히 반영하는 예술가는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들의 작품은 다른 누군가의 작품과 확연한 차이가 있다. 이는 그들만이 갖고 있는 고유성이다. 작품의 색채, 형태, 배치 등만 봐도 떠오르는 작가들이 자신의 고유성을 충실히 반영하는 작가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감상자들은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감상은 예술 작품 너머에 있는 작가의 세상을 알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나는 자신을 충실히 반영하는 예술을 지향한다. 감상자로 수많은 작품을 만나면서, 예술가와의 만남을 이끄는 작품들이 몇몇 있었다. “작가는 왜 이렇게 표현했을까? 이 작품이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 걸까? 작가는 어떠한 사람이었을까?” 등 작품 너머의 것들이 떠오르는 작품 말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마치 나에게 말을 거는 느낌을 준다. 더 나아가 작품 감상이 끝나고도 잔잔한 여운을 준다. <창령사 오백나한의 미쇼 앞에서>는 감상자로서의 경험을 공유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집은 책이다. 내가 지금껏 즐겨 감상한 미술 작품의 종류는 아니지만 작가의 감상 세계가 궁금했다.

<창령사 오백나한의 미쇼 앞에서>를 읽으니, 내가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이 소홀했단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나는 미술관과 박물관을 주로 여행 중에 찾는 비일상적 공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미술관과 박물관을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찾지 않는다. 또한 한국의 문화는 역사 시험을 준비할 때만 잠깐 암기하고 까먹어버리는 대상이었다. 그것들의 우수성, 독창성, 아름다움을 느껴본 경험이 전혀 없다. 하지만 작가는 우리 문화재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그가 수많은 박물관과 미술관을 방문하면서 만난 예술 작품들은 하나같이 아름답게 묘사됐다. 역사 시간에 겉절이로 배웠던 우리나라의 문화사를 진지하게 배우는 느낌이다. 문화사를 주로써 역사를 알아가는 느낌이랄까?


이 책엔 우리 문화재에 대한 묘사와 감상을 넘어 경제학자로서의 시선이 담겨있다. 내가 알지 못했던 미술계의 세상을 알 수 있었다. 문화재의 외국 방출과 환수 문제, 미술품 수집과 감정, 미술품 시장에서의 짝퉁 문제, 경매 시장 상황 등 기존에 잘 알지 못했던 것들을 작가는 이야기를 들려주듯 서술한다. 작가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탓인지 나 역시 그와 이야기를 나누듯 다양한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우선 영화 <테넷>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사토르의 아내 캐서린은 미술품 감정사다. 그는 유명한 작가의 가품을 진품으로 잘못 감정하게 된다. 그로 인해 사토르에게 약점이 잡히고 그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채 가정을 유지하고 있다. 수많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하는 클리셰다. 미술품을 진품이라고 믿고 구매했는데 그것이 가품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진품을 가품으로 대체하는 것은 누군가를 위험에 빠뜨리기 위한 덫으로 자주 사용된다. 이러한 미디어의 영향인지 미술품 거래하면 진위 여부 판단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우리나라에도 미술품 진위 여부 논란이 미디어를 뜨겁게 달군 적이 있다.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는 30년째 위작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1911년에 미인도를 대중에 공개했는데 천경자 화백 본인이 직접 위작 의혹을 제기했다. 미인도는 자신의 작품이 아니란 것이다. 처음엔 ‘작가가 아니라면 아닌 거 아닌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미인도의 경제적 가치를 생각해 봤을 때, 소유자의 경제적 손실이 막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단순히 작가의 말만을 믿고 판단해선 안 될 것이란 생각을 했다. 국내 기관의 감정 결과는 천경자 화백의 그림이 맞는다는 것이다. 감정은 진품인데, 작가는 가품이라고 주장하다니.

감정의 어려움에 대해 조선 후기 서화의 대감식안이었던 추사 김정희 "진정한 감정은 금강역사의 부릅뜬 눈과 혹독한 세무관리의 손으로 한 치 빈틈없이 무섭고 가혹하게 나아가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라고 했다. 온 정신과 오감을 집중하여 눈에는 다이아몬드의 강기를 담아 작가의 손놀림은 물론이고 필획이 일으킨 바람의 흔들림까지 감지하는 섬세함을 갖추어야 하고, 판단의 엄격함은 세무관리의 냉혹한 손을 닮아야 한다는 뜻 일 것이다.

그 의미를 조금 확대하면, 감정은 진위의 차원을 넘어 작품에 생 명의 기운을 불어넣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작품 탄생의 비밀을 밝히고 살아온 이력을 살펴 잃어버린 존재의 가치를 복권하는 한편 위장된 생명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사형선고를 내려야 한다. 미술품의 복권 여부를 결정하는 감정은 마치 원인 모르는 죽음의 진실을 밝히는 부검과 같다.

하지만 감정의 그 엄중한 의미에도 불구하고 사람과 시대에 따라 많은 감정 결과가 가변적이라는 사실이 우리를 적이 당혹스럽 게 한다. 새로운 자료와 감정 기법이 등장하고 인간의 지력이 진보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변덕스러운 인간성 때문인지, 어제의 진품이’ 오늘은 가짜가 되고 어제의 가짜가 오늘은 진품으로 판정되지 표한다. 어쩌면 정답도 없고 오답도 없는 미술품 감정의 그런 무상함이 이 세계의 참모습이자 매력일지도 모른다.

감정에 얽힌 사변적인 이야기와는 달리 감정 결과가 상거래에서 차지하는 역할은 대단히 현실적이고 때로는 치명적이다. 정벌한 감정은 일차적으로 가짜의 범람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한다. 더불어 미술시장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정보의 비대칭성을 완화함으로써 거래 과정에서 발생하는 경제적 비효율과 사회적 비용나 줄인다. 즉 진위에 대한 정보가 시장 참여자들에게 폭넓게 공유될수록 컬렉션이나 투자 목적의 거래에 수반되는 비용과 불확실성 더 최소화되고 나아가시자 구조의 안정화와 거래 규모의 확대는 실현되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정확한 감정과 감정에 대한 신뢰는 시장을 안정시키는 닻이라 할 수 있다.

미술 작품의 감정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경제 상품이기 때문이다. 경제적 가치가 없다면, 진위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예술 작품이 오로지 유희의 대상이면 진위 여부가 무엇인 중요한가? 어찌 됐건 그 작품을 감상하고 즐길 수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미술 작품이 상품이 되면 그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 작품의 가격은 작품의 예술성만으로 평가되지 않는다. 작가가 쌓아온 이력이 가격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즉, 예술 작품을 높은 가격에 사는 것은 그 작가의 이력을 높이 평가한다는 의미다. 가품이 아무리 예술적으로 뛰어나도 그 작가의 이력을 수반하지 않기 때문에 경제적 가치가 떨어지는 건 당연하다.

미디어에서 나오는 것처럼 미술품 시장에 가품이 자주 등장하는 것 같다. 작가가 농담으로 던진 ‘가품의 존재가 감정 수준을 높이고 컬렉터들의 안목을 높이는 순기능을 할 수 있다,’라는 말이 이를 확인해 주는 말로 들렸다. 미술품 시장엔 가품이 존재할 수밖에 없으니, 감정의 수준과 안목을 높이는 것만이 해결책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나는 가품의 순기능을 존중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가품의 존재를 통해 이득을 얻는 것은 가품을 만들어낸 생산자밖에 없다. 도용된 작품의 작가, 컬렉터들을 어떻게든 피해를 보게 돼 있다. 이 피해는 누가 보상할 것인가?

이 책을 통해 컬렉션의 의미를 짚어 볼 수 있었다. 가수 탑이 생각난다. 가수 탑은 수익의 95%를 모두 미술품 구매에 사용한다고 한다. 드라마에서 대기업 총수들이 비자금 수단으로 예술 작품을 활용하는 장면을 익히 봤기 때문에 탑 역시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예술품은 투자재로서 효용 가치가 크지 않은 것 같다. 단순히 경제적 수익으로 컬렉션을 평가해선 안 된다. 그 예술작품이 주는 감성 역시 고려 대상이 돼야 한다. 그가 어떠한 이유로 컬렉션을 진행하는지 자세히 모르겠지만, 오로지 세속적인 이유만으로 이를 바라볼 필요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미술 작품의 가치는 작가만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란 걸 절실히 느꼈다. 감상자들의 높은 평가도 중요하지만 누가 갖고 있는지도 중요한 것 같다. 컬렉터들이 작품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다. 작품을 소유한 사람이 예술에 대단한 안목을 갖고 우수한 작품을 수집해 온 사람이라면, 그것의 가치는 올라간다. 김치호 작가가 말한 것처럼 아름답기 때문에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됐기 때문에 아름다운 작품이 존재한다는 말이 확 와닿는다. 탑이 소더비 경매에서 큐레이팅 한 작품들이 약 190억 원에 거래됐다고 하는데, 그는 높은 안목을 지닌 컬렉터로 평가받겠지?

아름다움으로 가는 여정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또 다른 길이 있다. 남들이 가지 않은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확장하는 것이다. 그것에는 얼마간의 위험도 따르겠으나, 예상치 못한 행운과 보상이 함께한다. 그 여정은 포장되지 않고 안내판도 없는 거친 시골길을 가는 것이어서, 때로는 차가 전복되고 길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그 대신 지금까지 보지 못한 새로운 아름다움이 발견되고 긴장감이 감돈다. 컬렉션을 컬렉션답게 하는 영감이 떠오르고 에너지가 솟 아나는 것이다 남들이 가는 길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기존 관행을 변화시키는 컬렉션, 그것은 바로 ‘창작하는 컬렉션’이다.

창작하는 컬렉션은 작품의 가치를 직관하는 안목에서 시작된다. 안목은 컬렉터를 새로운 관점에서 새로운 아름다움의 세계로 안내하는 무언의 힘이다. 창의적인 관점으로 된 잠재된 아름다움을 찾아 읽는 통찰력이다. 그 세계에서는 아름다운 작품이 존재하기 때문에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되었기 때문에 아름다운 작품이 존재한다. 그리하여 작품을 보는 관점이 열리고 통찰력이 더해지면 컬렉션은 물건의 단순한 집합체에서 유기적인 창작체가 된다. 아름다타 보는 새로운 가치체계가 열리고 묻혀 있던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곳에는 조화와 통일감이 있고, 아름다움을 더 아름답게 하는 질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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