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 우리 시에 비친 현대 철학의 풍경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긴 호흡으로 한 권의 책을 읽어나가는 것을 좋아한다. 이 호흡은 책을 읽자마자 생기지 않고 글을 읽어나가면서 천천히 쌓인다. 한 권의 책에서 작가가 보여 주는 일관된 세계는 내가 그의 글에 더욱 집중하고 깊이 빠지게 한다. 이것이 내가 긴 호흡의 책을 좋아하는 이유다. 긴 호흡의 글들은 함축적으로 한 번에 생각을 뱉어내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풀어낸다고 해야 할까? 이러한 글들의 문장들은 결코 따로 놀지 않고 서로 연결돼 더욱 구체적으로 작가의 생각을 그려낸다. 이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들을 서로 보강해 독자가 원활하게 읽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하지만 한 권의 책에 여러 생각이 나 주제가 담겨 있으면 이 호흡을 유지하기 쉽지 않다. 또 작품 하나하나가 끝날 때마다 새로운 호흡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단편 소설, 시 등을 선호하지 않는다. 하나의 작품에 들어가야 할 힘이 같다고 가정하면, 짧은 글들은 이 힘을 단기간에 내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글이 시작될 때 이 호흡을 끊고 새로운 호흡을 시작해야 한다. 이러한 독서는 피로도가 만만치 않다. 그래서 이러한 작품집을 읽을 때 집중력을 종종 잃는다. 이때 이를 보강해 줄 장치가 있으면 좋겠지만, 다른 글들은 그것만의 세상을 풀어내기에도 바쁘다. 이러한 독서는 힘은 힘대로 쓰지만, 그만큼 무언가를 얻어내지 못하는 찝찝함을 안겨준다.

그중 단연코 시집이 각 지면마다 가장 많은 힘을 필요로 하는 것 같다. 대부분의 시는 겉보기엔 짧은 글로 이뤄져 있어 쉽게 읽힐 거란 생각을 할 수 있다. 나 역시 어렸을 땐 이러한 생각을 많이 했다. 하지만 이 짧은 시의 언어는 시인의 생각을 농축한 산물이다. 모든 문학 작품이 그렇겠지만, 특히 시의 언어는 드러나 있는 것보다 더욱 많은 것을 내포한다고 생각한다. 이를 깨닫기 전엔 시를 다른 글을 대하듯이 있는 그대로 대하려 했다. 시를 감상하기보단 짧은 글을 쓰윽 읽어나가는 것이 내가 시를 읽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 독해는 나에게 어떠한 것도 남기지 않았다. 그저 짧은 한 편의 글을 읽었다는 인상만 남을 뿐이었다. 시인이 말하려는 생각을 이해하지도 못했고, 그가 보이는 시의 세계는 무미건조했다. 하지만 수능을 공부하면서 많은 시를 접하고 읽어나가면서 시를 읽는 방법에 대해 익힐 수 있었다. 옛날엔 가볍게 넘겼던 작가의 언어에 집중하며 느끼고, 작가의 생각에 나의 생각을 덧붙이려고 노력했다. 이 과정을 통해 시의 세계가 겉보기와 달리 복잡하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이 복잡한 세상을 들어가기 위해선 독자의 다양하고 깊은 생각이 필수적이다. 이것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시는 그저 짧은 글에 불과할 것이다.

시가 농도 짙은 언어의 산물이고 독자의 많은 생각을 요구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시집을 읽는다는 것은 나에게 부담스러운 일이다. 집중력을 발휘해 작품 하나하나에 정성을 쏟는 것이 나에겐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책장엔 몇 권의 시집이 꽂혀 있지만 꺼내어 읽는 것이 용기 나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하나의 작품에 집중하지 않고, 시집이라는 단행본을 읽는다는 것에 집착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이러한 시 읽기는 나에게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데도 말이다. 내가 어떻게 작품을 읽어나갈지 알기에 시집을 꺼내지 않는 것도 좋은 것 같다. 그저 일상에서 가끔 찾아오는 시를 내가 읽어낼 여유와 힘이 있을 때 천천히 읽는 것으로 만족하련다.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은 교과서에서 볼법한 묵직한 시인들의 21편의 시와 철학자 ‘강신주’가 철학으로 풀어낸 해설을 담고 있다. 혼자 읽기에 부담스러운 시를 철학자와 함께 읽는 기분이다. 이 덕분에 내가 혼자 읽었다면 읽어내지 못했을 생각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강신주는 쉬운 언어로 어려운 철학자들의 생각을 시와 곁들여 소개하고 있었다. 특히 이들 중 대부분이 내가 평소에 읽고 싶었던 철학자들이어서 많이 반가웠다. 나의 부족한 사고력과 독해력으로 그들의 작품을 아직 읽어 보진 못했지만, 이렇게 만날 때마다 그들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철학자 강신주가 시인과 철학자의 역할에 대해 묘사한 부분에 많은 공감을 했다. 시인과 철학자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이면을 보려는 존재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둘의 역할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나 역시 이 둘의 공통점을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각자의 방식대로 세상을 바라보고 이에 대한 해석을 언어로 표현하는 사람이 시인과 철학자다. 또 그들은 이를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을 낯설게 보도록 도와준다. 자신이 속한 세상을 낯설게 보기라. 세상에 온전히 빠져 있으면서 세상과 거리를 두는 두 존재들. 왜 지금까지 이 둘의 공통점을 생각해보지 못했을까?

시인이 물속으로 직접 들어가 온갖 물고기를 온몸으로 느끼고 표현하는 존재라면, 철학자는 그물로 끌어올린 물고기를 다시 확인하고 만져 보는 사람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시는 주관적인 것이고, 철학은 객관적 혹은 보편적인 것이라는 인상이 생겨났는지도 모릅니다. 온몸으로 물고기를 경험했던 사람이 자신의 낯선 경험을 육지 사람들에게 들려주려 할 때, 그의 낯선 경험에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반면 새로운 그물을 엮어 낯선 물고기를 뭍으로 끌어올려 보여 준다면 사람들은 이전보다는 좀 더 쉽게 그 낯섦을 경험할 수 있을 겁니다.

이 책은 어울릴 거라 생각하기 힘든 철학자와 시인을 잘 버무린 책이었다. 하지만 철학자들과 그들의 생각에 대한 서술이 빈약하지 않았나 싶다. 읽으면서 쉽게 책장을 넘길 수 있었지만, 독서의 무게감은 아쉬웠다. 400쪽 분량의 책에 21편의 시와 21명의 철학자를 다루는 것은 무리가 아니었나 싶다. 철학자답게 철학자들의 사유 세계를 더욱 자세히 다뤘다면 많은 생각들이 남지 않았을까. 분명히 책을 읽을 땐 공감 가는 구절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는데, 결국에 남은 것은 강신주 작가의 시인과 철학자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철학자들은 세상을 낯설게 보는 존재인데, 이 책에서 서술되는 철학자들의 생각은 왜 낯설게 여겨지지 않는 걸까?

헤겔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한 주인과 그의 노예가 있습니다. 물론 주인은 노예에게 주인으로 인정을 받고 있지요. 노예는 주인을 보면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그가 내리는 명령을 한 치의 착오도 없이 수행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문제는 노예의 인정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다시 말해 노예는 주인의 압도적인 힘이 무서워서 거짓된 인정과 존경을 주인에게 표시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바로 여기서 주인의 고독과 고뇌가 시작됩니다. 그는 노예에게 진정한 인정과 존경을 받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인은 노예에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실 그 일은 먼저 주인이 노예를 자신과 마찬가지의 자유로운 인격으로 해방시켜야만 가능해질 겁니다. 노예가 자유를 얻어 주인과 마찬가지로 자유인이 되었을 때 비로소 그의 인정과 존경은 진정한 자발적 행위가 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여기서 일종의 아이러니가 발생합니다. 만약 자유로워진 노예가 이전의 주인을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고, 심지어 그가 주인을 외면하거나 아니면 아예 주인에게서 멀리 도망가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지만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주인은 노예에게 자유를 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직 그럴 때에만 주인이 노예에게 진실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릴 것이기 때문이지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