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가미래교육전략
KAIST 문술미래전략대학원 미래전략연구센터 지음 / 김영사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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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은 실천의 개념이기에 시대에 따라 다양한 변화를 겪는다. 과거, 현재, 미래의 교육은 모두 다를 것이다. 어떤 것이 미래 교육이다. 어떤 것이 과거 교육이다 말할 수 없지만 무엇이 됐든, 학습자가 성장하고 배울 수 있는 교육은 최고의 교육일 것이다. 현재의 교육을 보기 위해선 우리의 교육뿐 아니라, 외국의 교육을 살펴보는 방법이 있다. 외국에 어떤 교육이 있는지 보고, 우리의 교육과 비교하며 우리 교육의 현주소를 알 수 있다. 이를 토대로 우리는 우리 교육과 미래의 교육을 고민할 수 있다. 미래 교육은 현재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를 토대로 수립될 것이다. 교육이 사회를 바꾸는 시발점이 될 수 있지만, 사회의 영향을 받아 교육이 바뀌는 경우도 자주 일어난다. 교육과 사회가 서로 영향을 미치는 관계인 것은 자명하다.
 
이 책은 사회의 문제를 토대로 우리의 미래교육이 어떤 생각을 갖고 어떻게 이뤄져야 하는지에 대한 서술한 책이다. 교육학도로서 우리가 미래에 행할 교육에 대해 알아보고 싶어 책을 택하게 됐다. 처음 시작은 현대 사회가 겪고 있는 사회, 환경, 정치, 경제, 인구, 자원, 기술 문제를 시작으로 미래교육 전략의 수립을 강조했다.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들의 심각성에 공감됐고 이를 우리 교육자들이 교육을 통해 해결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했다.

교육이 대처해야 할 우리 사회의 문제

한국은 급격한 고령화와 인구 감소라는 두 가지 문제를 복합적으로 갖고 있다. 학교의 감소, 노동 인력 구조의 변화, 노동생산성의 저하 등에 대처해야 한다.

현대는 뉴노멀이라고 불리는 저성장이 세계경제의 정상상태가 된다는 주장이 현실이 된다.

한국의 미래에도 긍정적 요소가 많다. 우리나라는 역동성이 강하면, 안되면 방법을 바꾸는 것에 주저함이 없다.

기술 분야를 살펴보면 메타 기술, 개방혁신, 개방 플랫폼의 등장을 통한 경제 패러다임의 변화에 따라, 창조성 중심의 경제를 이뤄가야만 한다.

인류는 기후변화, 에너지 문제, 식량 문제, 질병, 물 부족의 현안을 해결하고 지속적인 삶을 유지해야 한다.

저자들은 아들러의 삶의 틀 3가지와 비슷하게 미래 학습자, 아이들이 갖춰야 할 역량을 5가지 틀로 제시했다.

<3가지 틀>
자기개념: 내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지 의미 부여
세계상: 세상이 나에게 어떤 곳인지 의미 부여
자기 이상: 내가 마땅히 그래야 하는 어떤 모습

5가지 틀은 지성, 마음, , 자기관리 능력, 인간관계의 틀을 포함하며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전인적 인간을 목적으로 한다.
이 틀이 완성된 교육이야말로 수용성 교육, 즉 학생이 받아들이고자 하는 마음이 들게 만들어놓고 지식을 가르치는 교육이 되는 것이다. 저자들은 아이들의 이 다섯 가지 역량 중에 부족한 역량에 대한 교육과정을 운영함으로써, 아이들의 부족한 역량을 채워나가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읽은 후 내용에 대해 생각해봤다. 우선 가장 먼저 말하고 싶은 것은 정말 이게 미래교육일까? 미래교육 전략일까라는 의구심이다. 통일교육, 미래교육, 인성교육,  가정교육 등 우리가 앞으로 계속 신경 써야 할 교육을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언급에 끝나고 있다. 이 교육에 대한 개괄적인 소개일 뿐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없었다. 단지 소개에 그치지는, 인터넷에서 찾으면 다 볼 수 있는 그저 그런 내용을 서술하고 있다. 
저자들이 제시하는 5가지 틀이 과연 인간이 필요한 틀의 전부일까? 아니다. 인간은 무수히 복잡한 존재이기에 틀로 분석하지 못하는 부분이 분명 있다. 게다가 어떤 틀이 다른 틀에 비해 발달이 됐더라도, 그 틀 안의 부분 부분들은 또 다를 수 있다. 검사를 통해 그 부분들을 교육으로 수정하는 과정이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할 것이란 생각을 했다. 저 부분들은 유기체적으로 다 연결된 틀일 것인데, 부족한 부분에 맞게 처방된 교육법이 과연 전인교육에 도움이 될지도 궁금하다.  이 책에서 제시하는 교육의 방법들, 교육 커리큘럼들이 과연 학습자 중심의 것인지, 진정으로 수용성 교육이 추구하는 교육의 방법인지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우리가 전통적으로 따르던 교사 중심의 수업이 대부분이란 생각을 했다. 이것이 왜 미래교육 전략인지에 대한 언급 없이.
다양한 미래 교육은 소개해주고, 구체적인 커리큘럼 소개를 해준다는 것을 기대했던 것과 달리 매우 불만족스럽다. 커리큘럼도 단순 표로만 제시할 뿐, 구체적인 경험, 방법, 이유, 효과 등에 대한 서술 없이 좋은 것은 좋은 것이라고 주장만 하고 있다. 과연 내가 만날 현장의 아이들이 이 교육 방법을 좋아할지. 게다가 이 저자들이 실험한 것과 같이 유의미한 결과가 나올지. 나왔더라도 과연 이 교육법 때문인지. 왠지 모르게 의심이 든다. 현장에 대한 얘기가 너무 부족해서 그런가. 현장과 교육법에 대한 서술을 구체적으로 한다면 더욱 좋을 것 같다. 단순히 교육을 소개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참 아쉬움이 남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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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 & 이이 : 조선의 정신을 세우다 지식인마을 38
조남호 지음 / 김영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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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 도덕 교육론 박형빈 교수님 수업을 듣고, 바로 책을 읽었다. 대학에 와서 거의 처음 접한 동양 철학이다. 언젠가 배웠겠지만 분명한 건 서양철학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수업을 들으면서 동양철학이 매력적이라고 느꼈다. 이와 기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현상을 해석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 선천적인 것인지, 경험에 의해 터득된 것인지 등 당연하다고 여기지는 것들을 당연시 여기지 않는 태도를 느낄 수 있었다. 철학이란 생각하는 학문을 의미하며 무언가를 당연시 여기는 태도는 생각을 동반하지 않는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게 보는 것이 철학의 시작이 아닐까 생각한다.

수업은 사단칠정에 대한 이이와 이황의 논쟁을 다뤘다. 책 역시 이와 기, 사단과 칠정을 주로 다룬다. 고등학교 때부터 들었던 것들이라 많이 낯설진 않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는 낯설고, 어려웠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그들의 주장에 대해 수월히 이해할 수 있었고 그걸 바탕으로 나만의 생각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책을 통해 이황과 이이의 학파를 주기론, 주리론을 나누는 것이 식민사관의 일부인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식민 시대의 유명한 일본 학자 다카하시 교수가 조선의 유학을 정리하고, 이를 일본의 사상을 전파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려 했다는 것이다. 분명 학파의 다양한 인물들이 모두 같은 주장을 할 수 없다. 그들이 같은 학파라고 같은 생각만을 고수한다면 학문의 발전은 없을뿐더러, 자신들의 생각만을 고집하는 최악의 상태가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게 아닌 걸 알면서 그들은 주리론, 주기론 학파로 이해하고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많은 우리나라의 학자들 역시 아직도 그렇게 그들을 바라본다고 한다. 왜 그런 걸까? 생각해봤다. 우선 우리나라 교육에서 이상하게 서양의 철학을 동양철학보다 많이 그리고 중요하게 다룬다. 학교뿐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서도 서양 철학자는 쉽게 접하는데 동양 철학자는 쉽게 접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들의 사상 역시 더 어렵고 낯선 영역으로 여겨진다. 세계화로 인해 서양 문화, 사상들이 유입돼 현대 문화를 형성하기 때문에 그런 것일 것이지만 우리 고유의 문화, 사상들에 대해선 경시한다는 생각이 든다. 나 역시도 동양 철학은 어렵고, 딱딱하고 낯설기 때문에 막상 도전하기가 힘들다. 책도 찾기 힘들다. 우리의 고유의 것을 바탕으로 외부의 것을 받아들여야 할 텐데, 나는 지금 그러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박형빈 교수님의 강의가 재밌고 이해하기 쉬워서 이 책도 쉽게 읽을 수 있을지 알았다. 하지만 절반은 이해했나 싶을 정도로 어려웠다. 이황, 이이의 학파에 누가 있고 어떤 주장을 하는지에 대한 배경 지식 없이 오로지 강의 내용만을 토대로 읽어서 불완전한 독서를 한 것 같다. 그렇지만, 동양 철학이 서양 철학 못지않게(더 일 수 있다) 깊은 사유를 담고 있고 내가 더 고찰해야 할 대상이란 걸 깨달았다. 내 독서 목록 중 대부분이 서양 철학자, 사상가라는 점을 반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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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이프 오브 워터
기예르모 델 토로.대니얼 크라우스 지음, 김문주 옮김 / 온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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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대나무숲에 이 책에 대한 글이 실렸었다. 미녀와 야수와 같이 고전적인 설정이 아니라 과연 엘라이자가 흉측한 모습을 한 어인이었다면, 이 책이 지금과 같은 찬사를 받을 수 있었을까? 여성은 아름다워야 하며 남성은 미적 기준보단 능력이 우선시되기 때문에 여자가 아름답지 않으면 주인공이 되기 힘들고 대중 역시 불편해한다는 것이 그 글의 요지 같아 보였다. 사실 그 글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접한 많은 작품들이 그랬던 것 같다.
비판적 사유 없이 관습을 따르는 행위에 대해 어떤 자세를 취하면 좋을지 요즘 고민이 많다. 우리가 평범한 관습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악습인 경우가 많다. 분명히 지금 나 역시 악습을 따르며 그게 악습인지도 모른 채 떳떳하게 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끔 관습이 비판적으로 보일 때가 있다. 다른 사람들은 지극히 평범하고 관용적으로 생각하는 것들인데, 나에겐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들이 종종 나타난다. 최근에 그런 일이 또 있었다. “원칙으론 잘못된 게 맞지. 그런데 도의적으로 이해해줄 수 있잖아? 우리가 이해해줄 수 있는 부분 아니야? 그 사람들이 얼마나 우리를 위해 열심히 했는데. 그 사람들처럼 고생한 사람들 없을걸?” 그렇다. 그 사람들은 우리를 위해 힘썼고 노력했다. 그런데 그것이 그들의 모든 행위를 보장해주는 것도 아니다. 나는 그들의 성취, 노력을 비난, 경시하는 게 아니다. 내 기준으로 봤을 때, 원칙에 비춰 봤을 때 잘못된 부분을 비판하는 것이다. 불완전한 건 인간을 인간이게끔 하는 성질이다. 어느 인간이든 불완전성을 지닌다. 그렇기에 오류를 범하는 것은 당연하다. 나 역시 완벽한 사람이 아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성인들 역시 불완전이 범인에 비해 덜 한 것이지, 아예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비판적으로 보지 못 한 부분을 어떤 사람은 비판적으로 볼 수 있다. 내가 옳다고 여기는 것이 다름이 아니라 틀림일 수 있다. 잘못됐다고, 틀렸다고 이것이 내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가? 아니다. 그것도 내가 품어야 할 나됨이다. 그런데 우리는 비판에 너무 인색하다. 비판하는 것도, 비판받는 것도. 나 역시도 그렇다. 비판받으면 괜히 나를 싫어하나?’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비판의 부분은 온전한 내가 아닌데, 나는 비판받았다고 내 존재가 비판받는 것과 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다. 그런데 이 감정은 보편적인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실수를 하고 있고 최근에 우리 학교에서 이런 장면은 목격하니 참 심란했다.
미투 운동을 통해 우리가 존경하던 정치인, 좋아하던 연예인들의 잘못된 만행이 폭로되고 있다. 다음 대선에서 유력했던 정치인과 많은 팬들이 응원했던 연기자가 성추행으로 그들의 직업 인생을 끝내게 됐다. “잘못된 건 줄 몰랐다. 사랑인 줄 알았다.” 그들의 말이다. “어떻게 진짜 저렇게 뻔뻔하지?” 반응이 대다수다. 그런데 진짜 몰랐을 수도 있다. 자기들이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걸 몰랐을 수 있다. 일상에서 습관화된 행위를 계속하다 보니 판단을 할 능력이 떨어진 걸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에 대해 비판을 멈춰야 하는가? 아니다. 비판을 계속해야 한다. 모두 이 부분은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막상 우리는 이런 것에 대해 비판받을 준비는 참 안 돼 있는 것 같다.

Think with myself, Think against myself

책을 받은 순간 표지에 매료됐다. 물속에서 둘은 사랑을 하고 있다. 서로의 모든 것을 포용하며 하나가 돼 가는 모습이다. 제목인 물의 모양이 말하려는 바가 무엇일지 궁금증을 가지며 책을 읽어나갔다말을 할 수 없는 장애를 가진 엘라이자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의 주변인은 그를 사랑한다. 흑인 젤다, 동성애자 자일스, 흉악한 스트릭랜드, 데우스 브랑퀴아 역시. 그들은 모두 불완전한 존재이다. 각자의 상처를 지니고 있다. 젤다, 자일스, 스트릭랜드, 데우스 브랑퀴아 모두. 젤다는 흑인으로서 많은 차별을. 자일스는 동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비난을. 스트릭랜드는 전쟁 후의 후유증. 데우스 브랑퀴아 삶의 터전을 잃고 인간 세상에선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 그런데 이 불완전성은 세상 살아가는 데에 전혀 문제가 없다. 모든 사람이 불완전하고, 사회 자체가 불완전하니깐. 그들이 할 수 있는 영역에서, 자신을 잘 뽐낼 수 있는 영역에서 그들의 존재 가치를 알고 실천하면 되는 것이다.

 
자일스와 괴생명체는 서로 크게 다르지 않은 존재였다. 자일스 역시 그에게 어울리는 빛 아래에서, 그에게 맞는 물에 잠길 수 있다면 아름다울 것이다.

 
엘라이자와 데우스 브랑퀴아는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다. 서로가 어떤 문제가 있든지 간에. 서로의 겉모습, 장애는 그들의 사랑엔 아무런 장해 요소가 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서로를 볼 뿐이다. 그들은 진심으로 교감하고 서로에 대해 나눈다. 아마 사랑이란 이런 모습을 할 것이다. 어떤 외향적인 조건보단 서로의 내면을 볼 수 있는 사이다.  다양한 표지의 나를 하나의 표지로 평가하는 게 아니라, 그 표지의 집합체인 나 존재 자체를 사랑해줄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나 역시 그런 사랑을 줄 수 있을까?

물의 모양. 물은 모양이 없다. 없다기보단 어디에 담느냐에 따라 모양을 달리한다. 사랑도 그렇다. 인간도 그렇고 우리가 느끼는 감정도 그렇다. 모양이 있다고 딱 말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사랑이란 사랑의 주체에 따라 모습을 달리한다. 그 모습은 그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이 있다. 각자의 아름다움. 누구의 사랑이든 간에. 그 사랑이 진실된다면 아름다운 것이다.

이 세상에서 절대로 안전할 수 없는 이 아름답고 슬픈 괴생명체를 그저 단 몇 초라도 더 안아줄 것이다.
 
그녀는 오늘만큼은 가난하지 않았다. 오늘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여성이었고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가졌다. 그녀는 사랑하고 사랑받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랑은 괴생명체만큼이나 영원했다. 사랑은 인간도 동물도 아닌 느낌이다. 지금껏 좋았고 앞으로도 좋을, 모든 것들 사이에 공유되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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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희의 밥과 숨
문성희 지음 / 김영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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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한 알의 작은 씨앗에 불과했던 어떤 가능성이 땅에 심어져 흙에 뿌리를 내리고 햇빛과 공기와 비로 키워지는 동안 형체와 성질을 달리하여 산나물이 되고, 콩나물이 되고, 무와 감자가 되고, 쌀이나 과일이 되어서 나를 위한 먹을거리가 된다.
 
 
농부들은 이렇게 무에서 유를 창조해낸다. 농부들의 창조 작업은 자구 상의 모든 것이 협조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음식을 일생에 걸쳐 연구한 음식 전문가다. 노년이 됐을 때 자신의 전문 분야가 있다면 그 사실만으로도 감사할 것 같다. 전문 분야라는 것은 남이 할 수 없음을 나타낸다. 즉 나만의 분야인 것이다. 너도 나도 다 할 수 있는 것을 전문 분야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전문 분야라는 말이 어느 특정 영역에만 붙일 수 있냐? 그것도 아니다. 모든 것에 다 붙을 수 있는 말이지만, 너도 나도 할 수 없는 것을 전문 분야라 부른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전문 분야가 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남을 답습하는 것은 내 것이 아니다. 전문 분야가 될 수 없다. 전문 분야가 되기 위해선 남을 답습하고 연습을 반복해 나만의 색을 입히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문성희 역시 그렇다. 음식은 누구나 한다. 나 역시도 한다. 그런데 그의 음식은 오로지 요리법만을 보고 할 수 있지 않을 것이다. 그가 지금껏 음식을 다뤘던 손이 필요할 것이고 그녀가 음식을 대하는 철학이 필요할 것이다. 그는 요리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남들이 다 할 수 있는 요리를 자신의 색을 입힘으로써 남들이 할 수 없는 그만의 전문 분야를 구축했다. 분명히 이 과정이 쉽지만은 않다. 포기하고 싶은 시련이 반드시 찾아온다. 그 시련을 겪으면 자신의 생각을, 철학을 담아냄으로써 그만의 전문 분야가 생기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을 버텨나갈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순간에 몰입하고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복잡하고 바쁜 시간과 시간의 틈 사이를 비집고 고요히 앉아 숨 고르기에 열중했다.
 
나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을 이미 하늘이 준비해두었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 숨을 쉰다는 것 외에 또 다른 존재함이 있기나 한 것일까? 지금 이 순간 그저 숨 쉬고 있다는 것, 그것만이 내가 간절히 원하고 바라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간격은 어느 정도가 적당할까? 일과 나 자신의 간격은 어느 정도가 필요한 것일까? 관계와 일 속에 매몰되어 허우적거리고 있는 동안 삶은 더욱더 엉켰고, 시시로 원치 않는 상황들이 다가와 내 선택의 여지를 좁혀갈수록 나는 허허로웠다. 엄청난 고독을 직면해야만 나의 존재성이 얻어진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오히려 평온해졌다.

이 책을 읽을 당시 학교에서 요리 실습이 있었다. ‘요리는 요리법만 보고 하면 되지라는 생각이 강했는데 절대 그렇지 않았다. 요리법을 보고도 내가 생각한 맛은 나지 않았다. 그리고 요리하는 과정 말고도 준비, 정리 과정은 그 이상으로 힘들었다. 참 쉬운 일은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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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예찬 - 정원으로의 여행 한병철 라이브러리
한병철 지음, 안인희 옮김 / 김영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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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중에 나는 자연을 얼마나 생각할까? 자연은 과연 내 삶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할까?
자연의 색깔에 살던 나의 과거와 달리 현재 나는 잿빛 속에 살고 있다. 잿빛 속에서 자연을 잊고 살아가고 있다.
빠르게, 누구보다 부단히 움직이며 살아가느라 주변을 둘러볼 생각도 못한다.
주변엔 조그만 풀, 꽃, 나무가 있지만 나의 눈엔 그들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아주 가끔씩 이들이 그리울 때가 있다.
햇빛이 나를 비출 때 잠깐 서서 따스함을 느끼며 주변을 둘러보면 그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냥 쉬고 싶다. 이렇게 잠깐 쉬는 것도 좋은데, 이들과 연결된 삶을 사는 건 어떨까?"

한병철은 정원에서 자연과 연결된 삶을 살고 있다.
땅을 잊고 살았던, 땅을 알지 못했던 과거에서 벗어나 그는 자연을 느끼며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에게 식물이란 그가 사유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주체이다.
단순히 도구, 객체가 아닌 그들 나름대로의 삶도 있고 인간보다 어쩌면 더 나은 삶을 살 수도 있다.

우리는 어떤 표상을 볼 때, 그 겉모습만을 보고 지나칠 때가 많은데 이는 진정한 의미의 '봄'이 아니다.
우리가 읽어낼 수 있는 정보인 스투디움은 탐구와 관찰의 대상이지만 이는 외관에 그칠 뿐이다. 이에 반해 풍크툼은 외면의 정보를 주지 않고, '이를 통해' 생기는 관찰자의 마음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즉, 내면의 의미로서 보는 대상을 일컫는다. 우리가 여유 없이, 세상을 급급히 살아가는 이유는 내면의 의미인 풍크툼을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조금만 멈춰 그들 속에 담긴 의미를 음미해보면 그들을 진정을 볼 수 있고, 소통할 수 있을 텐데. 내가 그걸 하지 못했기 때문에 물질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 함몰되는 것 같다.
조금 멈춰, 내 마음이 무엇을 말하는지 들어보고 주변의 세상을 관찰만 하는 것이 아닌 느껴보는 건 어떨까?

정원의 시간은 타자의 시간이다. 정원은 내가 멋대로 할 수 없는 저만의 시간을 갖는다.
모든 식물은 저만의 시간을 갖는다. 정원에서는 수많은 저만의 시간들이 교차한다. 가을 크로커스와 봄 크로커스는 모습은 비슷해도 시간감각이 전혀 다르다. 모든 식물이 매우 뚜렷한 시간의식을 갖는다는 것, 어쩌면 오늘날 어딘지 시간을 잃어버린, 시간이 부족한 인간보다 심지어 더욱 시간의식을 갖는다는 것이 놀랍다 정원은 강렬한 시간체험을 가능케 한다.
정원에서 일하면 정원은 많은 것을 돌려준다. 내게는 존재와 시간을 준다. 불확실한 기다림, 꼭 필요한 참을성, 느린 성장이 특별한 시간감각을 불러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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