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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이프 오브 워터
기예르모 델 토로.대니얼 크라우스 지음, 김문주 옮김 / 온다 / 2018년 3월
평점 :
서울대학교 대나무숲에 이 책에 대한 글이 실렸었다. 미녀와 야수와 같이 고전적인 설정이 아니라 과연 엘라이자가 흉측한 모습을 한 어인이었다면, 이 책이 지금과 같은 찬사를 받을 수 있었을까? 여성은 아름다워야 하며 남성은 미적 기준보단 능력이 우선시되기 때문에 여자가 아름답지 않으면 주인공이 되기 힘들고 대중 역시 불편해한다는 것이 그 글의 요지 같아 보였다. 사실 그 글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접한 많은 작품들이 그랬던 것 같다.
비판적 사유 없이 관습을 따르는 행위에 대해 어떤 자세를 취하면 좋을지 요즘 고민이 많다. 우리가 평범한 관습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악습인 경우가 많다. 분명히 지금 나 역시 악습을 따르며 그게 악습인지도 모른 채 떳떳하게 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끔 관습이 비판적으로 보일 때가 있다. 다른 사람들은 지극히 평범하고 관용적으로 생각하는 것들인데, 나에겐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들이 종종 나타난다. 최근에 그런 일이 또 있었다. “원칙으론 잘못된 게 맞지. 그런데 도의적으로 이해해줄 수 있잖아? 우리가 이해해줄 수 있는 부분 아니야? 그 사람들이 얼마나 우리를 위해 열심히 했는데. 그 사람들처럼 고생한 사람들 없을걸?” 그렇다. 그 사람들은 우리를 위해 힘썼고 노력했다. 그런데 그것이 그들의 모든 행위를 보장해주는 것도 아니다. 나는 그들의 성취, 노력을 비난, 경시하는 게 아니다. 내 기준으로 봤을 때, 원칙에 비춰 봤을 때 잘못된 부분을 비판하는 것이다. 불완전한 건 인간을 인간이게끔 하는 성질이다. 어느 인간이든 불완전성을 지닌다. 그렇기에 오류를 범하는 것은 당연하다. 나 역시 완벽한 사람이 아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성인들 역시 불완전이 범인에 비해 덜 한 것이지, 아예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비판적으로 보지 못 한 부분을 어떤 사람은 비판적으로 볼 수 있다. 내가 옳다고 여기는 것이 다름이 아니라 틀림일 수 있다. 잘못됐다고, 틀렸다고 이것이 내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가? 아니다. 그것도 내가 품어야 할 나됨이다. 그런데 우리는 비판에 너무 인색하다. 비판하는 것도, 비판받는 것도. 나 역시도 그렇다. 비판받으면 괜히 ‘나를 싫어하나?’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비판의 부분은 온전한 내가 아닌데, 나는 비판받았다고 내 존재가 비판받는 것과 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다. 그런데 이 감정은 보편적인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실수를 하고 있고 최근에 우리 학교에서 이런 장면은 목격하니 참 심란했다.
미투 운동을 통해 우리가 존경하던 정치인, 좋아하던 연예인들의 잘못된 만행이 폭로되고 있다. 다음 대선에서 유력했던 정치인과 많은 팬들이 응원했던 연기자가 성추행으로 그들의 직업 인생을 끝내게 됐다. “잘못된 건 줄 몰랐다. 사랑인 줄 알았다.” 그들의 말이다. “어떻게 진짜 저렇게 뻔뻔하지?” 반응이 대다수다. 그런데 진짜 몰랐을 수도 있다. 자기들이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걸 몰랐을 수 있다. 일상에서 습관화된 행위를 계속하다 보니 판단을 할 능력이 떨어진 걸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에 대해 비판을 멈춰야 하는가? 아니다. 비판을 계속해야 한다. 모두 이 부분은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막상 우리는 이런 것에 대해 비판받을 준비는 참 안 돼 있는 것 같다.
Think with myself, Think against myself
책을 받은 순간 표지에 매료됐다. 물속에서 둘은 사랑을 하고 있다. 서로의 모든 것을 포용하며 하나가 돼 가는 모습이다. 제목인 물의 모양이 말하려는 바가 무엇일지 궁금증을 가지며 책을 읽어나갔다. 말을 할 수 없는 장애를 가진 엘라이자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의 주변인은 그를 사랑한다. 흑인 젤다, 동성애자 자일스, 흉악한 스트릭랜드, 데우스 브랑퀴아 역시. 그들은 모두 불완전한 존재이다. 각자의 상처를 지니고 있다. 젤다, 자일스, 스트릭랜드, 데우스 브랑퀴아 모두. 젤다는 흑인으로서 많은 차별을. 자일스는 동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비난을. 스트릭랜드는 전쟁 후의 후유증. 데우스 브랑퀴아 삶의 터전을 잃고 인간 세상에선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 그런데 이 불완전성은 세상 살아가는 데에 전혀 문제가 없다. 모든 사람이 불완전하고, 사회 자체가 불완전하니깐. 그들이 할 수 있는 영역에서, 자신을 잘 뽐낼 수 있는 영역에서 그들의 존재 가치를 알고 실천하면 되는 것이다.
자일스와 괴생명체는 서로 크게 다르지 않은 존재였다. 자일스 역시 그에게 어울리는 빛 아래에서, 그에게 맞는 물에 잠길 수 있다면 아름다울 것이다.
엘라이자와 데우스 브랑퀴아는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다. 서로가 어떤 문제가 있든지 간에. 서로의 겉모습, 장애는 그들의 사랑엔 아무런 장해 요소가 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서로를 볼 뿐이다. 그들은 진심으로 교감하고 서로에 대해 나눈다. 아마 사랑이란 이런 모습을 할 것이다. 어떤 외향적인 조건보단 서로의 내면을 볼 수 있는 사이다. 다양한 표지의 나를 하나의 표지로 평가하는 게 아니라, 그 표지의 집합체인 나 존재 자체를 사랑해줄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나 역시 그런 사랑을 줄 수 있을까?
물의 모양. 물은 모양이 없다. 없다기보단 어디에 담느냐에 따라 모양을 달리한다. 사랑도 그렇다. 인간도 그렇고 우리가 느끼는 감정도 그렇다. 모양이 있다고 딱 말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사랑이란 사랑의 주체에 따라 모습을 달리한다. 그 모습은 그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이 있다. 각자의 아름다움. 누구의 사랑이든 간에. 그 사랑이 진실된다면 아름다운 것이다.
이 세상에서 절대로 안전할 수 없는 이 아름답고 슬픈 괴생명체를 그저 단 몇 초라도 더 안아줄 것이다.
그녀는 오늘만큼은 가난하지 않았다. 오늘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여성이었고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가졌다. 그녀는 사랑하고 사랑받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랑은 괴생명체만큼이나 영원했다. 사랑은 인간도 동물도 아닌 느낌이다. 지금껏 좋았고 앞으로도 좋을, 모든 것들 사이에 공유되는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