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문학동네 시인선 145
이병률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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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을 다닌 학교 도서관에서 난 시가 어느 코너에 꽂혀있는지 몰랐다. 요새야 듀이십진법 상 800은 문학 섹션, 그리고 시는 811 이란 걸 알게되었다. 813 (에세이) 와 823 (소설) 앞에 언제나 휙 지나치던 그곳.
올해 100권 챌린지를 하면서 시와 소설과 친해지자고 한 뒤 생긴 많은 변화중에 하나는 도서관이나 책방에 가서 시 섹션에 서서 찬찬히 시집의 제목을 훑게 된 것이다. 노오란 이 시집은 얼핏 사랑시만 가득할까봐 기피하다가 어느날 한 장 넘겨보고 단순 연인간의 이별얘기만이 아니겠다 싶어 빌려왔다.

시인은 자신의 일상 속 풍경을 매우 자세히, 아주 오래 들여다본다. 그리고 그 풍경을 일상속 우리가 바라보지 않을 단어와 연관짓거나, 전혀 접점이 없어보였던 다른 나라의 어떤 일과 연결고리를 찾는다.

🔖 많은 청귤을 자르다가
손가락을 크게 베고 몇 바늘을 꿰맸다
나는 평생 살을 꿰멜 일 따위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극단적으로 금이 갔다

[사람의 금] 중 (46쪽)

손가락을 베어 몸에 금이 가자, 자신의 생각에도 금이 갔다 는 연상. 이러한 시인들의 관찰과 연상이 시집을 읽을때 시의 ‘맛‘ 으로 내게 다가오는 것 같다.

많은 시들이 일상 속 슬픈순간, 아찔한 순간, 이별의 순간 등에 대한 것이었다. 밝고 신나진 않지만 차분히 다른 각도로 슬픔을, 상실에 대한 애도를, 생과의 이별을 보게하는 구절이 많았다.

🔖그리고 그들을 제외한 누군가는
눈물을 흘리면서 심장에 쌓인 눈을 녹이고

누군가는 눈물을 흘리면서
가슴에 등불을 켠다

[눈물이 온다 중] (13쪽)

🔖우리는 어찌어찌 무엇이라도 하겠다고 태어난 게 아니라
좋아하는 자리를 골라 그 자리에 잠시 다녀가는 것

그러니 그 자리에 좋은 사람 데려가기를
이번 생에서는 그리 애쓰지 말기를

[여행] 중 (86쪽)

<아침의 피아노> 서평에서 쓴 것 처럼 여백이 더 많은 나의 말로 채워지는 책도 있다. 시는 시어로 다 말하지 않은 것을 나의 해석, 나의 경험, 나의 그 순간의 감정으로 함께 채워갈 수 있는 장르는 아닌가 요즘 왕왕 생각한다.

아직도 시집의 3/4는 낮설고, 때로는 기괴하거나 무서워도 내가 꾸준히 시집을 사고 빌리고 펼칠 이유는 그 여백 때문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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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보다 2021
강보원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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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만한 한국문학책 꾸준히 읽는 사람들이라면 알 문학과 지성사의 ‘소설보다 (계절이름)‘ 시리즈. 매 계절마다 단편소설 3편씩이 계절감있는 표지에 묶여 매우 착한가격 (3500원!) 에 나오는 시리즈이다. 그 시리즈가 드디어 시집도 나왔다. 2021년 1년동안 나온 시 중, 등단 10년 이하의 시인들이 쓴 시들을 보고 9인을 선정, 추가 시와 산문한편을 부탁해 모은 <시 보다 2021>.

이 시집은 음....쉽진않다. 시를 올해 꽤 다양하고 많이 읽었다 생각했지만 아직 한참 먼 듯하다. 여전히 의식의 흐름같고 뭔가 일상논리가 아닌 리듬으로 써진 글은 소화하고 느끼는 감각이 많이 발달되지 않아서인지 생소하고 어렵다. 산문시도 여전히 어렵고, 가끔은 단어반복이나 주문(?) 처럼 줄줄나오면 좀 무섭기도 하다. 하지만 이곳에 실린 시들을 이해할 실마리를 맨 마지막 페이지에 실린 ˝기획의 말˝ 에서 얻을 수 있었는데, 그건 시를 선정할때 우선순위가 ˝시 언어의 운동에너지˝ 였다는 것이다. 아하! 확실히 내 이해의 범주안에 있건 그렇지 않건, 각 시인의 시는 운동력이 충만했다. 때로는 좀 무서울정도로 운동력이 요동치기도 하고, 때로는 조금은 직관적으로 이해가능하게 역동적이었다. 어쨌든 시어들과 시의 움직임은 매우 다이나믹 했다.

올해의 가장 다이나믹한 젊은 시인들의 시들을 한자리에서 만나고 싶다면 지체없이 꼭 읽어볼 것. 시집으로는 거의 <반지의제왕> 급 두께인 250쪽이 넘는 이 시집의 가격은 7000원. 올해의 가장 에너제틱한 시의 언어를 맛보기엔 매우 착한 가격이다.

아직 시의 눈이 다 뜨이진 않았지만 오로지 내 느낌과 마음으로 좋았던 구절들 모음

🔖(41쪽)
겨울은 멀고,
사랑은 이르다.
겨울이 겨울다울 수 있는 건
함께 있지 않아서야

<눈사람을 보면 이상해> -강혜빈

🔖(51쪽)
혼자서 빗속을 걷는다
비와 함께 걷는다

이 비를 기다렸다

<이 비>- 강혜빈

🔖(143쪽)
우리는 모두 늪에
빠지지 않기 위한 걸음걸이를 가졌지
얼마나 각자가 위태로운지

<현실의 앞뒤> -박세미

🔖(182쪽)
책 속에서 출렁이는 물을 만났어 몰캉몰캉한 젤리들이눈 속으로 가득 쏟아졌어 이렇게 고요한 밤에 어떻게 나는 숨을 쉬고 말을 할 수 있을까 불 속에서 녹아내리는 몸줄곧 가지고 다닌 비밀과 질문 정말이라면 그것이 정말이라면 물은 까맣고 까만 것은 무한하기에……
<비밀과,질문, 비밀과 질문>- 백은선

🔖(253쪽)
어느 여름 오후

선생님이 사과 한 알을 교탁에 올려놓고
그것에 대해 쓰라고 하셨을 때

소녀들은 죽음과 눈물과 폭력과 섹스와 오물과 고통을생각하는
완벽한 방법을 알아낸다.

음악이 시작된다.
<헤테로포니> -임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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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팅 클럽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32
강영숙 지음 / 민음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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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독일기_2021 #책105번
105. 라이팅클럽 (강영숙, 2010)

이 책에 대한 내 첫인상은 뭐야 이 산만한 소설은? 이었다.

중2 병 같은 작가병에 걸린것처럼 행동하지만 실상은 습작만 평생쓰는 모녀 영인과 김작가 (주인공이 엄마를 엄마라고 부르는 장면은 딱 한번인가 나온다). 제목이 라이팅 클럽이라서 그 클럽이 김작가가 영인이 10대때부터하던 계동의 글짓기 교실인가 했는데 잉? 영인이 미국에 이민갔네? 세탁소집 남자랑 결혼하다 일찍 헤어지고 뉴저지 네일샵서 일하다가 돈키호테를 읽고 감명받다가 급 한인들과 라이팅 클럽을 만드네? 오오 이제 본론 시작인가? (300쪽중 200쪽이상 진행됨) 뭐? 라이팅 클럽 발대식 밖에 안했는데 김작가가 죽을병? 영인 한국오네?
뭔가 제목은 라이팅 클럽인데 클럽 속 회원이나 그 안의 인간군상의 케미가 주인공이 아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 이야기 속 주인공인 이 모녀는 그닥 호감이 아니었다. 줄곧 내게. 김작가는 철없고 영인은 현실적인 척하지만 역시 철없다. 그들의 연애, 인간관계, 커리어 는 서툴고 실패투성이다.

하지만 외모도 말투도 삶의행보도 호감의 범주에 전혀 안드는 이 모녀가 이상하게도 중력처럼 끌려오는 글쓰고 싶다는 열망. 작가가 친절하게 그 열망의 출처를 설명해 주지 않으니 내가 그 행간 속에서 영인의 마음, 김작가의 마음을 헤아리며 이 산만한 이야기는 내게 스며들었다. 영인이 계동 아주머니들의 글을 ˝레시피나 가득한 쓰레기˝ 라 해왔지만 미국서 고된 노동을 하며 살다 그 모임을 생각하며 위로를 받는다는 아이러니가 이해됐다. 그녀가 미국서 라이팅 클럽을 만들고 어느방식으로든 미국 메인스트림에서 소외되어 글쓰고싶어 견디지 못하는 그들과 한을푸는 장면은 남얘기같지 않았다. 결국 끝까지 영인이 어떤 글을 써내진 않지만 뜻밖에 김작가가 등단하게 되는 반전(?) 이 오게되자 이미 ˝그래 어디로든 튀어보렴 다 받아들이라˝ 마인드가 된 나는 함께 미소지었다.

작가가 빼곡히 설명해주지 않으니 내가 더 열심히 생각하며 그들과 함께 ˝왜 그들은, 우리는 자신만의 글을 써야 하는가˝ 에 대한 질문의 답을 찾아가게되는 소설. 그리고 전형적인 모녀상이 아니라서 김작가가 영인에게 미국이민시 건넨 편지의 내용은 이 책 속 최고의 문구인듯. (궁금하시면 책에서 확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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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고 첨이고 덤입니다 문학동네 시인선 123
정끝별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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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 혹해 계절을 노래한 시가 많으려나 하고 샀지만 그렇진 않다. 시가 어렵고 나와 다른세계를 말하는것 같이 느끼게 하는 시집들이 문학동네 시인선에 많은데 그 중 하나.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처음 읽었을때 딱 와닿는 시의 소재나 주제가 생각 안날때 많이 그런 것 같다. 같은 이유로, 이 시집에서 좋아한 시들은 연애의 이별, 엄마와 딸의 나이듦과 함께 찾아온 관계의 재정립, 젠더 문제에 대한 시인의 생각 등, 시를 읽으며 바로 파악가능한 소재가 있을때였다.

하지만 그게 명확치 않더라도 이 시집에선 소리가 비슷한 단어들의 전략적 배치를 통해 라임이 마치 쇼미더 머니처럼 맞는 부분들이 많았다 (시집 제목 ‘봄이고 첨이고 덤입니다‘ 처럼). 그래서 시를 소리내어 읽을때 느껴지는 리듬감과 신박함이 청각적 즐거움을 주기도 했다.

시는 여전히 난해하지만, 난해해도 함께 두고 더 알고싶은 친구가 되어간다. 그렇게 있다보면 한두편쯤은 너무 내게 좋은, 필사하고 싶어지는 문장과, 혹은 시 전체와 만나게 되니까.

좋은 만남이었다. 이번에도
@salon_book 에서 만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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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자에게
김금희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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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주에 들린 @check2dang 에서 문자가 왔다. 12월에 북토크가 있다고. 북토크 이름은 굿바이 편독 (굿독). 평소에 읽는책만 읽지않고 다양히 읽는 모임인듯. 12월의 책이 복자에게 였고, 때마침 강의를 마치고 수의학 도서관에서 책을 구경하러 온 내 눈엔 신착도서인 복자에게 가 보여 홀린듯이 북토크 신청을 하고 책을 빌렸다.

복자에게 는 내가 굿독 같은 프로그램이 아니면 선뜻 먼저 찾아빌릴 책은 아니다. 일단 소설이고 (난 아직도 문학이 어렵다) 여성의 고단한 삶과 직업속 이야기란 소개사가 현재 내가 별로 읽고 생각하고 싶은 책은 아니라 생각했다. (몇년전에 82년생 김지영과 며느라기 덕에 한번 과몰입과 앓이가 심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참 읽기 잘했다.
난 일단 이 책이 담은 내용에 비해 얇다는것에 놀랬고 (어릴때 친구였던 두 여자가 판사와 산업재해 피해자로 만나 연대하는 이야기라면 최소 3,400쪽은 될줄알았다) 그리고 그들의 우정 이야기가 담백하고 생각보다 분량이 적은것에 놀랬다.

제목은 복자에게 인데
주인공인 이영초롱과 고모와의 관계, 고모와 그의 친구와의 관계, 영초롱과 동네친구 고오세와의 썸, 복자의 해녀 할머니가 복자, 영초롱, 영초롱 고모에게 준 영감, 그리고 영초롱과 양선배간의 관계가 더 분량상으로 많이나온다.
그들은 구질하지 않다. 특히 복자는 판사인 영초롱에게 절대로 자신을 봐달라 매달리지 않는다. 심지어 둘 사이 대화도 미니멀하다. 그래서인가 복자와 영초롱의 어린시절, 재회후 대화와 만남의 짧은 순간들을 정말 유심히 보게되었다. 단어 하나, 작은 감정의 진폭 하나하나에 눈을 맞추고 집중하며 이들을 따라가게 했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빨리보려고 마음만 먹으면 후루룩 읽고 승소 혹은 패소 이런게 중요한 책이 아니었다. 그래서 사실 내가 한국소설은 다소 무기력하고 밍숭맹숭하다 느껴왔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중요한건 사건의 진행과 결과가 아닌, 제주도라는 배경 속 생명력 넘치는 사람들과 그들이 서로를 아끼고 걱정할때 내는 빛 자체였던 것 같다. 그래서 법정소설인데 그 흔한 법정공방 신도 없고, 곁다리같다 첨에느낀 고모이야기나 고오세의 어린시절 고백불발 이 더 많이나온것같다.

관전포인트가 다르니 여운이 길다.
그리고 한가지 더 인상적이었던건 인물들의 불행과 비극 위에서 그들을 감싸는 제주도라는 배경 그 자체였다. 내가 언제 이렇게 소설 배경이 제 3의 주인공같이 여겨지는 책을 보았던가 싶을정도로 인물들이 밥을먹고, 차를마시고, 울고웃는 그 모든 곳에서 제주도의 자연은, 그리고 로컬 사람들의 정은, 그들의 사투리는 빛났다.

내 굿바이 편독의 시작은 나와 정반대 독서취향을 가진 패이커를 따라하며 시작되었지만, 이제는 궂이 페이커가 읽지 않았더라도 (또 계속 안읽을거라 해도) 내가 넘고싶은 허들들이 많아졌다.

요새야 비로소 그 상투적인 말이 내 인생서 진심으로 빛난다.
책은 삶을 바꾸는 힘이 있다.
진짜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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