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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피난처에 잘 있습니다
이천우 지음 / 북다 / 2024년 1월
평점 :
이천우 작가는 한양대 연극 영화학과를 졸업하고 극영화 · 다큐멘터리 · 연극 ·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했다. 그런 이력 덕분이었을까? 삼 남매의 타임루프 탈출기 『우리는 피난처에 잘 있습니다』를 읽는 내내 머릿속에 영화 장면이 떠오르는 몰입도가 높은 소설이었다.
문제는 지금이 8월 5일이라는 거야. 어제는 8월 22일이었고!
[서평] 『우리는 피난처에 잘 있습니다』 - 이천우, 삼 남매의 타임루프 탈출기
진태, 진수, 해민은 사는 게 버거워 서로 연락을 잘하지 않고 지내는 삼 남매다.
큰형 진태는 결혼 생활에 문제를 느끼고, 이혼을 생각하는 시점에 회사에서는 명예퇴직을 권고받는다.
둘째 진수는 같이 대회를 준비해오던 파트너가 다른 남자를 택하는 바람에 한강에 몸을 던진다.
자신의 인생에서 그런 수치는 처음이었다고, 죽지 않고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투신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제보자의 신고로 구조된다. 구조를 한 대원은 큰형 진태에게 전화를 하고, 진태는 진수를 집으로 데려간다.
집에는 막내 해민이 기다리고 있다.
해민도 고민을 가지고 있다. 오빠 둘이 집으로 들어선 순간 해민은 자신의 정체성을 알려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오빠들 나 있잖아. 알고 보니 레즈비언이었어!"
해민은 자신이 레즈비언이라고 중대 발표를 하지만, 삼 남매는 각자의 인생에서 큰일을 겪고 있었기에 해민의 상태에 마음을 써줄 여력이 없다.
오랜만에 모인 삼 남매지만, 안부를 묻거나 서로에게 신경을 써 줄 여유 따위는 없는 그런 만남이었다.
그런데 다음 날 병원으로부터 아버지의 임종이 임박했다는 연락을 받고, 삼 남매는 다시 모인다.
언제든 닥쳐올 죽음이었음에도 삼 남매는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모두 자기 고민에만 빠져 있었다. "내가 상조에 가입 안 해놨으면 어쩔 뻔했어?"
- 중략 -
"어차피 태울 거니까, 그치?" 수의와 관과 유골함은 가급적 최고 저렴한 것으로 골랐고, 심지어 입관할 때 관을 들어 옮기던 형제는 쿵, 하고 관을 떨어뜨리기까지 했다. p.31
[서평] 『우리는 피난처에 잘 있습니다』 - 이천우, 삼 남매의 타임루프 탈출기
어설픈 장례를 치르고 남매는 아버지 유품을 정리하기 위해 집에 모인다.
의욕 없이 모인 삼 남매는 일단 아버지의 짐을 마루로 끌어냈다. 그러던 중 진태가 고급 양주를 발견한다.
삼 남매는 양주를 마시며, 유품을 정리하다 40년은 묵은 것 같은 턴테이블을 발견한다. 턴테이블에 판을 올려놓고 양주를 홀짝이며 삼 남매는 추억에 젖는다.
그러다 판이 튀며 세상이 캄캄해졌다.
뭐지?
아침에 눈을 뜬 진태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구속에서 풀려난 듯도 하고 괜히 시원한 듯도 하고, 좋은 술은 역시 뒤끝도 깔끔한 건가?
근데 여기가 어디지? 아, 집이군. p.39
[서평] 『우리는 피난처에 잘 있습니다』 - 이천우, 삼 남매의 타임루프 탈출기
진태는 어떻게 자기 집 안방에 누워있는지 모르겠지만, 안방 침대에서 잠이 깼다.
그 시각 진수와 해민도 이상함을 느낀다.
아버지의 장례가 끝나고 오늘은 8월 23일이어야 하는데, 세상은 18일 전인 8월 5일로 되돌아와 있었다. 삼 남매는 진태의 회사 건물 앞에 모여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대화를 나누지만, 결론에 도달할 수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버지 병원을 찾은 삼 남매는 어제 장례를 치른 아버지가 죽기 전과 같은 모습으로 814호 창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타임 루프의 시작이다.
삼 남매는 '타임 루프'를 인정하고, 다시 삶을 살아간다.
힘겨운 삶 속에 또다시 아버지의 임종을 맞고, 장례를 치른다.
아버지의 장례식이 끝나고, 집에 모여 고급 양주를 마시며 유품을 정리한 다음 날 눈을 뜨면 또다시 8월 5일.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던 해민은 아버지의 일기장을 발견하고, 삼 남매와 함께 읽기 시작한다.
타인의 일기장을 훔쳐본다는 느낌 때문일까? 아버지의 일기장이 등장하는 순간 몰입도가 확 높아졌다.
삼 남매는 아버지의 일기장을 읽고, 타임 루프를 거듭하며 '아버지'라는 타이틀을 가진 '아버지로서의 인생'이 아닌 철저히 개인적인 '아버지의 삶' 자체를 이해하게 된다.
왠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자신이 이루지 못했던 꿈, 남기지 못했던 무엇, 그리웠던 무엇일지 모른다고. 그렇게 사람은 가족을 이루고 사회를 이루고 살지만, 죽음 앞에선 철저히 개인일지 모른다고. p.214
[서평] 『우리는 피난처에 잘 있습니다』 - 이천우, 삼 남매의 타임루프 탈출기
『우리는 피난처에 잘 있습니다』의 작가 이천우는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6개월 넘게 병실에서 먹고 자며 아버지의 곁을 지키는 어머니의 모습이 의아했다고 한다. 원래 두 분 사이엔 애틋함이 별로 없다고 느꼈는데, 어머니가 왜 저렇게까지 하는지에 대해 답답한 마음까지 들었다고 한다.
본가를 찾은 어느 날 집 정리를 하려고 안방을 뒤적거리다가 책장 맨 아래 서랍 속에서 아버지의 일기장을 발견한 이천우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어떻게 만났는지, 함께 겪은 희로애락의 감정들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한다. 밤새 그 일기장을 읽고 난 후로는 아버지 곁을 지키는 어머니의 모습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다고….
이 작품은 진실에 허구를 더하고 거기에 웃음을 더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책을 읽으며 부모님의 삶을 생각해 보게 됐다. 나이가 어릴 땐 엄마, 아빠가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그게 부모가 할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내가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그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었구나!라는 걸 알게 됐고, 부모님의 희생에 대한 고마움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느끼게 되었다.
우리 엄마, 아빤 어떤 꿈이 있었을까?
『아버지의 해방일지』의 작가와 『우리는 피난처에 잘 있습니다』의 작가의 책을 통해 우리네 아버지의 삶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이런 책이 나온다는 건 그동안 희생하면서도 외면당했던 아버지들의 삶을 위로하기 위함일까?
이천우 작가는 무거울 수 있는 이야기를 '타임 루프'라는 장치를 통해 재밌고, 흥미진진하게 끌어나갔다.
이 책은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끝까지 읽을 수밖에 없는 재미있는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