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록 - 임진왜란에 관한 뼈아픈 반성의 기록 클래식 아고라 1
류성룡 지음, 장준호 옮김 / arte(아르테)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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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룡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 군관인 이순신을 천거하여 선조로 하여금 전라좌수사로 임명하도록 했고, 이순신으로 하여금 임진왜란 당시 열세였던 조선의 전세를 역전시키는데 공을 세운 인물이다. 임진왜란에 4도 도제찰사, 영의정으로 어려운 조선 조정을 총지휘했던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많은 공을 세웠지만 정인홍, 이이첨 등 북인의 상소로 인해 노량해전이 벌어진 날 영의정에서 삭탈관직을 당한다. 선조는 다시 그를 불렀지만, 관직에서 마음을 접은 유성룡은 올라가지 않고 안동에 남아 우리가 임진왜란 때 격은 후회와 교훈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책을 쓴다.

그 책이 『징비록』이다.

유성룡의 『징비록』이 가치가 있는 것은 전쟁에서 이긴 영웅담이 아닌 우리가 임진왜란 때 어떻게 당했는지? 왜 그렇게 당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긴 전투에선 어떻게 이길 수 있었는지?에 대한 내용도 기록되어 있다.

임진왜란 하면 나는 광화문 광장 앞에 서 있는 이순신을 가장 먼저 떠오른다. 세계 4대 해전에 꼽히는 전투를 지휘한 장군이면서 일본과의 전투에서 한 번도 진 적이 없는 모든 해전을 승리로 이끈 장군이기에 기억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그런 이순신의 능력을 알아보고 전투를 치를 수 있도록 도운 데는 유성룡의 역할이 컸다는 사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일본군은 이곳을 우리 군사가 지키고 있을까 염려하여 사람을 시켜 두세 번 살펴본 후에 지키는 군사가 없다는 것을 알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지나갔다고 한다. 그 뒤에 명나라 장수 제독 이여송이 일본군을 추격하여 조령을 지날 때 "이와 같이 험한 요새지가 있는데도 지키지 못했으니 신 총병은 계책이 없는 사람이구나"라고 탄식하며 말했다.

신립은 비록 날쌔어서 이름을 얻었지만 전략을 세우는 것은 그의 장점이 아니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장수가 군사를 쓸 줄 모르면 그 나라를 적에게 주게 되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지금 후회한다고 하더라도 소용은 없으나 뒷날의 경계가 되는 것이므로 자세히 적어 두는 것이다.

p.48

책에는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우리가 왜 이렇게 무력하게 당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뼈아픈 반성의 글이 있다.

이때 세 순찰사는 모두 문인이어서 병무에 익숙하지 못했으며, 비록 군사의 수효는 많았으나 명령 계통이 통일되지 않았다. 또한 험준한 곳을 차지해 방어물을 설치하지 않았으니 "군사 행동을 봄놀이하듯 하면 어찌 패전하지 않겠는가"라고 했던 옛사람의 말과 같았다.

그 다음날 일본군은 우리 군사들이 속으로 겁내는 것을 알고는 몇 사람이 칼을 휘두르고 용맹을 뽐내면서 달려왔다. 세 도의 군사들이 이 모습을 보고 크게 무너지는데, 산이 무너지는 것과 같았다.

p 57

만반의 준비를 하고 쳐들어온 일본에 비해 우리는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책을 읽는 내내 가슴을 답답하게 한다.

하지만 모든 내용이 그렇지는 않다. 『징비록』에는 일본군이 이긴 전투와 조선군이 이긴 전투가 모두 수록되어 있다.

물론 임진왜란 시기 유성룡이 경험하고 견문했던 것을 바탕으로 쓰인 글이라 100% 객관적인 자료라고 볼 수 없다는 게 좀 아쉽지만 충분히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1604년 유성룡이 『징비록』을 저술할 무렵 그는 일본과의 화친을 주장했고, 그로 인해 나라를 그르친 간사한 인간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래서 책이 간행되었을 당시 서인들은 '자신의 공로만을 드러낸 책'이라고 책의 의미를 평가절하했다. 하지만 지금은 유성룡을 인간 영역을 넘어 세상에 둘도 없는 최고의 재상이라고 평가한다.

arte 출판사에서 나온 『징비록』을 번역하고 해설한 장준호는 독자들이 유성룡을 '불편부당한', '하늘이 내린' 등의 수식어를 붙인 채 박제된 위인으로서 이해하기보다는 '유성룡은 어떤 사람일까'라는 질문을 갖고 탐구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술했다고 한다.

유성룡이 이 책을 통해 후세에게 주고자 한 메시지를 읽어내고, 역사를 배운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해설을 했다는 장준호의 말처럼 '과연 유성룡은 어떤 사람일까?', '유성룡이 우리에게 남기고자 했던 메시지는 과연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읽으면 훨씬 더 몰입할 수 있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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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역 소크라테스의 말 - 스스로에게 질문하여 깨닫는 지혜의 방법
이채윤 엮음 / 읽고싶은책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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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5세기에 철학자로 활동했던 소크라테스는 예수, 석가모니, 공자와 더불어 세계 4대 성인으로 알려져 있다.

소크라테스는 민주주의의 발상지인 그리스에서 민주주의를 반대하다 죽임을 당한다. 그 당시 아테네는 직접민주제를 실시하고 있었는데 그는 직접민주제가 타락하면 중우정치가 될 수 있다며 부정적 입장을 보였다. 서양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는 아테네가 믿는 신을 우습게 보고, 새로운 우상을 섬기면서 무신론자, 청년들을 타락시킨 자로 고발되어 재판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소크라테스는 평생 단 한 권의 책도 쓰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과 많은 말들이 지금까지 전해져오고 있는 건 훌륭한 제자들 덕분이다. 그중 플라톤은 수많은 책을 쓰며 스승 소크라테스에게서 배운 것을 풀어놓았다.

『소크라테스의 변명』 같은 책에서 나오는 소크라테스의 말은 진짜 소크라테스의 말이겠으나, 어떤 책에서 나오는 그의 말은 플라톤의 말인지 소크라테스의 말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울 때가 많다. 『초역 소크라테스의 말』을 엮은 이채윤은 그 점에 유의해서 소크라테스가 했을 법한 진짜 그의 말을 고르고 골라 책을 엮었다고 한다.

책은 12개의 챕터로 소크라테스의 말을 정리해 두었다.

우리 둘 중 어느 누구도

글쎄, 우리 둘 중 어느 누구도 정말 아름답고 좋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나는 그보다 더 잘 살고 있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그는 아무것도 모르면서도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내가 안다고 생각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chapter1. 지혜란 무엇인가, p.33

나는 세계의 시민

나는 아테네인이나 그리스인이 아니라 세계의 시민이다. chapter7. 시민의 권리, 자유와 의무에 대하여, p.214

겉사람과 속사람이 하나가 되게

내면의 영혼에 아름다움을 주소서. 겉사람과 속사람이 하나가 되게 하소서. chapter11. 죽음과 영혼, 그리고 신에 대하여, p.323

행복의 비결은

행복의 비결은 더 많은 것을 추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덜 즐길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데 있다. chapter12. 무엇이 가치 있고 행복한 삶인가?, p.372

지혜와 통찰력을 얻으려면

숨 쉬고 싶은 만큼 지혜와 통찰력을 원할 때 비로소 그것을 얻게 된다. chapter12. 무엇이 가치 있고 행복한 삶인가?, p.397

소크라테스의 말 중 지금까지도 가장 널리 알려지고 화자되고 있는 건 지혜에 관한 말이 아닐까 한다.

"똑똑한 사람은 모든 사물과 모든 사람들로부터 배우고, 평범한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에서 배우고,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미 모든 답을 가지고 있다."라는 이 말을 나는 가장 좋아한다.

한 일을 20년 넘게 하다 보니 마치 그 분야에서는 내가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런 순간이 가장 위험한 순간이다. 그럴 때 나를 들여다보기 위해 철학 책을 읽는다. 하지만, 어렵게 쓰인 책은 펼쳐보기가 쉽지 않다. 그런 책은 책장에 꽂혀있는 것으로 책의 역할을 다하는 경우가 많다.

같은 내용이라도 편집을 어떻게 했느냐, 번역을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 느낌이 많이 달라진다.

12개의 챕터 제목대로 소크라테스가 했을 법한 말을 엮어 둔 『초역 소크라테스의 말』을 읽으면, 역자가 굉장히 쉽게 풀어쓰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철학 책은 어렵다는 선입견을 가진 사람도 부담 없이 볼 수 있는 문체와 편집 방식이 눈에 띄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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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향해 걷는 열 걸음 - 단 하나의 나로 살게 하는 인생의 문장들
최진석 지음 / 열림원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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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최진석은 1959년 전남 신안의 하의도에서 태어났다. 서강대학교 철학과에서 학부와 석사 과정을 마친 그는 중국 헤이룽장대학교를 거쳐 베이징대학교에서 「성현영의 '장자소'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를 퇴임한 그는 현재 사단법인 새말새몸짓 이사장으로 있다.

인간은 머무르지 않고 변화하는 존재이기에 멈추면 부패하지만 건너가면 생동합니다. 건너가기를 멈추면 양심도 딱딱하게 권력화됩니다. 건너가기를 멈추고 자기 확신에 빠진 양심은 양심이 아니라 폭력입니다. 도덕도 마찬가지입니다. 건너가기의 힘은 책 읽기로 가장 잘 길러집니다. 우리 함께 책을 읽고 건너갑시다.

최진석, 『나를 향해 걷는 열 걸음』, 서문

읽고 건너갈 징검다리로 작가 최진석은 『돈키호테, 어린 왕자, 페스트, 데미안, 노인과 바다, 동물농장, 걸리버 여행기, 이솝우화, 아Q정전, 징비록』 총 열권의 책을 골랐다. 각기 다른 작가가 쓴 작품이지만 책을 읽다 보면 열권의 책을 왜 이렇게 배열했는지 중간중간 자신의 의도를 이야기한다.

한 걸음마다 교수 최진석은 책을 어떻게 봤는지? 작가들이 살았던 시대적 배경과 작가의 삶을 이야기하며 자신의 의견을 곁들인다. 글의 마지막은 독후감으로 마무리된다. 초등학교 이후로 독후감을 써 본 적 없는 독자로써 '철학과 교수는 독후감을 어떻게 쓸까?' 이 부분이 가장 궁금했다.

파멸할 수는 있어도 패배하지는 않는다.

p.148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부분 독후감의 제목이다. 제목만 봐도 이 책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을 정도다.

84일 동안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노인이지만 조건과 환경, 자신도 탓하지 않는다. 85일째가 되던 날 바다로 나가면서 "85는 행운의 숫자이지."라고 말하는 노인의 낙관적인 내공은 독자를 부끄럽게 한다. 이런 낙관적인 자세는 자신을 믿는 자만이 가질 수 있다면서, 85일 만에 잡은 청새치는 그런 할아버지의 신뢰의 결과인 것이라 이야기한다.

스스로에게 당당한 자! 이보다 더 높은 사람이 또 있을까? 노인은 자기가 어부로서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소유의 길이 아니라 존재의 길을 가는 자들은 언제나 자기에게 당당하다. 이는 작은 이익들에 휘둘리는 삶이 아니라 자부심과 존엄을 지키는 삶을 살겠다는 인간 선언이다.

세 장 정도 되는 독후감을 읽으며 강연을 듣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책은 한 번만 읽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내용, 줄거리만 봐오던 내게 도서관에서 독서 수업은 책을 제대로 보는 방법을 알려줬고, 코로나19로 인해 독서 수업을 듣지 못하던 내게 『나를 향해 걷는 열 걸음』이란 책은 갈증을 풀어줬다.

너무 오래전에 읽어 기억에 없던 책과 아직 읽어보지 못한 책을 읽으며 한 걸음 한 걸음 '다음'을 향해 나아가야겠다.

고전 강의를 듣고 싶은 사람이라면 한 번 읽어봄직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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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드라미의 빨강 버드나무의 초록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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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도쿄에서 태어난 에쿠니 가오리는 청아한 문체와 세련된 감성 화법으로 일본 문학 최고의 감성 작가로 불리며 <냉정과 열정 사이 Rosso>, <도쿄 타워>, <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진다 해도>, <우는 어른>, <울지 않는 아이> 등 수많은 작품으로 한국의 많은 독자를 사로잡고 있다.

『맨드라미의 빨강 버드나무의 초록』은 대부분 그녀가 이십 대 초반에 쓴 단편을 모은 책이다.

책에는 <러브 미 텐더>, <선잠>, <포물선>, <재난의 전말>, <녹신녹신>, <밤과 아내의 세제>, <시미즈 부부>, <맨드라미의 빨강 버드나무의 초록>, <기묘한 장소> 이렇게 총 아홉 편이 실려있다.

그녀는 이중 세 편을 마음에 들어 한다고 소개했다.

『맨드라미의 빨강 버드나무의 초록』은 그녀의 작품 중 『반짝반짝 빛나는』이라는 소설의 뒷이야기이다. 그녀는 자신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그 후에도 어딘가에서 잘 지내고 있다'라고 생각하는 걸 좋아하기에 마음에 들어 했고, 『포물선』은 처음으로 문예지에 소개되어 기쁨을 주었던 작품, 『선잠』은 그림이 많이 실린 문예 무크지라는 것을 처음 보았기에 흥미진진했던 기억이 나 마음에 들어 했다.

『맨드라미의 빨강 버드나무의 초록』은 총 4개의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녀의 다른 작품 <냉정과 열정 사이>처럼 작가가 첫 번째와 세 번째 부분은 여주인공 '치나미' 입장에서 서술했고, 두 번째와 네 번째 부분은 남주인공 '로' 입장에서 서술했다. 재미있는 구성이다.

작가와 달리 나는 <러브 미 텐더>, 와 <밤과 아내의 세제> 이 두 작품이 마음에 들었다.

밤과 아내의 세제는 마지막 문장이 압권이다.

"당신이란 사람은 정말이지 남의 이야기를 듣질 않아. 다이어트 콜라는 있다고 내가 말했지? 우유도. 쓰레기봉투도."

그리고 문득, 웃음을 터뜨린다.

"당신, 도대체 왜 그래? 사람 말할 땐 안 듣고."

손에 리무버를 들고 있다.

나의 승리다.

p.213

며칠 전 본 드라마의 대시가 떠오른다. 남자 주인공이 좋아하는 여자의 환심을 사고 싶어 주변 친구들에게 조언을 구하는 자리였는데, 괜찮다고 가보라고 해서 왔다는 말에 친구들이 입을 모아 이야기한다.

"여자가 괜찮다는 건 괜찮은 게 아니라고…. 지금이라도 다시 돌아가라고…."

이런 미묘한 감정을 참 잘 살린 글이다.

러브 미 텐더는 치매에 걸린 부인을 위해 묵묵히 곁을 지키며 최선을 다하는 남편 이야기다. 소설 마지막 부분에서 딸이 본 아버지의 모습은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다.

두 소설 다 이제 그만 헤어져라는 어투로 시작하지만, 진심으로 사랑이 느껴지는 작품이라 마음에 들었나 보다.

에쿠니 가오리의 글은 메마른 감성을 촉촉이 적시고 싶을 때 읽기 좋은 소설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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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일간의 세계일주 쥘 베른 베스트 컬렉션
쥘 베른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림원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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쥘 베른(1828~1905)은 19세기 프랑스 작가다. 그는 과학자도 기술자도 아니었지만 20세기 과학발전에 영감을 준 작가로 손색이 없다. 불가능해 보일 수 있는 일에 기존의 지식과 추론을 적용해 독자로 하여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할 수 있지?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공감을 이끌어내는 솜씨가 뛰어난 사람이다.

그가 성공을 거둔 것은 아동도서 출판업자와 손잡은 결과였고, 쥘 베른은 아동 시장을 겨냥해 글을 쓰기도 해 아동용 판타지 작가로 알려지기도 했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아동문학가로 여겨지지 않는다. 과학기술 전문 잡지가 그의 작품을 연구 분석하는 일이 점점 늘어나고 있고, 최근 유네스코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쥘 베른은 외국어로 가장 많이 번역된 작가 순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걸로 밝혀졌다.

<지구 속 여행>, <해저 2만리>, <15소년 표류기>, <지구에서 달까지>, <달나라 탐험>, <신비의 섬>, <80일간의 세계일주> 등의 그의 작품은 어린이 문고로도 많이 나와 있다.

『80일간의 세계일주』 책을 받는 순간 400쪽에 가까운 두께를 보고 내가 어릴 때 봤던 그 책이 맞나? 하는 의심이 들었다. 어릴 적 기억으론 영국 신사가 80일 동안 세계 일주를 하겠다는 내기를 했고, 조금 늦게 도착했는데, 알고 보니 하루 일찍 도착했더라는 줄거리였다. 그 당시엔 왜 하루 일찍 도착했을까? 이해하지 못했다.

이십여 년 지나 이 책을 다시 보니 필리어스 포그(주인공) 이외에도 파스파르투(프랑스 하인), 픽스(형사), 아우다 등 여러 인물이 등장하고, 개개인의 특징이 너무 잘 드러나는 작품이란 생각이 든다.

"짐은 필요 없어. 작은 손가방 하나만 있으면 돼. 거기에 셔츠 두 벌과 양말 세 켤레만 넣게. 자네도 마찬가지야. 도중에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그때그때 사면 돼. 내 비옷과 여행용 담요를 가져오게. 구두는 튼튼한 걸로 신도록. 걷는 일은 거의 없겠지만. 자, 어서 서둘러."

p.36

포그는 10분 뒤에 세계여행을 떠날 거라며 파스파르투에게 셔츠 두벌과 양말 세 켤레만 챙기라고 한다. 그리고 전 재산 중 2만 파운드는 내기에 나머지 2만 파운드는 가방에 넣어 출발한다. 대화 단 세 줄로 포그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문장에서 어릴 땐 느끼지 못했던 작가의 대단함이 느껴진다.

그는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원주를 그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이론 역학의 법칙에 따라 지구 주위의 궤도를 돌고 있는 무거운 물체였다.

p.89

여행을 다니는 목적은 새로운 것을 보고 배우고 느끼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던 나는 책장을 넘기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80일 동안 어느 곳에도 머무르지 않고, 기차 타고, 배 타고, 지구 한 바퀴 도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포그는 무엇을 위해 이런 여행을 하겠다고 내기를 했을까? 영국인의 허세일까?

이랬던 나는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런 여행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여행이구나!'라는 생각으로 작가에게 설득당한다.

쥘 베른

돈의 힘으로 구워삶았다.

p.328

포그의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건 돈이 아니라 시간이다. 시간과 사람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한 포그는 아낌없이 플렉스를 외치며 여행한다. 시간과 사람을 돈으로 환산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지만, 돈이 인생에 전부라 생각하지 않는 포그의 삶은 상당히 매력적이다.

그는 이 여행에서 무엇을 가지고 돌아왔는가? 아무것도 없다고 사람들은 말할까? 확실히, 한 아리따운 여성 말고는 아무것도 얻은 게 없었다. 그러나 좀 믿어지지 않는 일이지만, 그 여성은 그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로 만들었다. 사실 우리는 그보다 훨씬 하찮은 것을 위해서라도 세계 일주를 하지 않을까?

p.366

80일간 세계여행을 마치기 위해 무조건 앞으로만 직진했던 포그에게 남은 건 아우다란 여성이다. 이 여성을 구하기 위해 포그와 파스파루트는 목숨을 건 모험을 했고, 시간과 돈을 낭비하기도 했다. 떠나지 않았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었다. 눈에 보이게 남은 건 아우다 뿐이지만, 그가 얻은 건 주변 사람으로부터의 믿음과 자기의 신념이지 않을까?

오랜만에 어릴 적 읽었던 쥘 베른의 소설이 생각나는 사람이라면 다시 한번 읽어봄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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