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책 한 권 외워봤니?
김민식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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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페북에서 문유석 판사의 추천평을 보고 읽게 됐다. 그는 '아니야, 우리가 미안하다'를 쓴 천종호 판사과 더불어 내가 존경하는 국내의 법조인이다. 원래는 한참 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이런 자기계발서 부류의 책은 내 돈 주고 사기 아까워서 틈틈히 도서관 대출을 노리던 중이었다. 그런데 이 책이 인기가 상당히 많던 탓인지, 요 몇 달 간 좀처럼 대출을 받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그저께, 드디어 기회를 잡았다. 그렇게 뒤도 안 돌아보고 대출하고 나서 바로 읽어내렸다.


우리 세대는 자기계발담론에 대한 대대적인 환멸에 빠져 있다.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미래가 보이지 않는 건 내가 노력을 게을리해서가 아니라 세상이 부조리로 가득차서인데, 언론, 매체에서는 허구헌 날 '개인이 바뀌어야 한다'는 식으로 닦달을 해대니, 신물이 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건 널리 알려진 개소리고, 천 번을 흔들리면 어른이 되는 게 아니라 스트레스에 시달려 죽는다. 하지만 살아 남기는 해야 하지 않는가. 더구나 이 세상이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이 되길 바라는 '어른'이 추천해준 책이니, 속는 셈 쳤다.


꽤나 좋은 책이다. 영어공부 꿀팁 뿐만이 아니라 삶에 대한 기술(art), 저자의 긍정적인 면모들을 얻어가는 데도 도움이 된다. 저자 김민석PD는 어렸을 때부터 다독가였다는데, 울산에서 방위(지금의 사회복무요원)로 근무할 때는 지역 도서관에서 1년에 200권에 육박하는 책을 읽었다고 한다. 올해로 이제 딱 40권 읽어낸 나로서는 낯뜨거워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성공한 사람들은 뭔가 다르구나... 싶어도 이제 그런 빈곤 코스프레는 집어 던지기로 했다. 내가 잘해내면 그만이다.


또한 이 책이 여느 자기계발서와 다르게 읽히는 이유는 첫째, 자신의 재능을 공공에 기여한다는 저자의 진심을 읽을 수가 있어서겠고, 둘째, 내가 그 진심을 읽을 만큼 여유가 생겼다는 탓이겠다. 그러니까 이런 부류의 텍스트는 텍스트 자체보다는 컨텍스트가 중요하다.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버텨라', '즐거운 꿈을 가져라', '긍정적인 동기부여를 하라'같은 말은, 누가 하느냐에 따라서 자칫 본래의 의미가 결여되고 그 가치가 소진될 수도 있는 말이다. 다시 말해, 노력이 중요하다는 걸 아는 사람만이 노력이 중요하다는 말을 귀담아 들을 수 있다. 나로서는 텍스트 이상의 컨텍스트를 가꾸는 일을 해야겠다는 책임감을 갖고 있는데, 이것은 두고볼 일이다.


언젠가 영어를 잘하고 싶다고 마음을 먹고 있던 건 만년째인데, 무척 좋은 동기부여를 얻은 것 같다. 역시 공부에 왕도는 없다. 끈기가 있을 뿐. (그리고 나도 책에 나오는 문구를 하나 외운 것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의 '몰입' 개념은 이 책에서도 어김없이 인용된다. 대체 안 인용되는 데가 어디일까 이 양반은... (그렇게 또 하나의 책을 알라딘 장바구니에 주워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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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로 바바리맨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63
유영민 지음 / 자음과모음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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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이스북 '망했어요' 페이지에서 책의 목차만 캡쳐해서 대차게 까는 걸 보고 읽게 된 소설이다. 페미니즘과 정치적 올바름에 익숙한 오늘날의 인터넷 젊은이들에게 바바리맨이란, 지극히 '빻은' 소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문학이 세계와 삶에 대한 이해를 확장시켜 준다고 믿고 있는 사람이라, 어떤 작품이 구태여 소재만을 두고 까일 필요까지는 없다고 봤다. 더군다나 이 책은 청소년 성장소설이다. 소재와는 별개로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봤고, 그래서 일단 읽게 됐다. (성장소설이라는 장르를 좋아하는 건 덤이다)


 그리고 이 책은 '정치적으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바바리맨이라는 소재를 비교적 성실하게, 나름대로 적절한 조망을 가지고 활용하고 있었다. 책 자체도 그렇게 가볍게만은 볼 수 없는 주제의식을 담고 있었다. '헬로 바바리맨'의 배경은 서울시 동대문구 용두동 뚝방촌 언덕이다. 언덕 위쪽에는 철거 위기에 놓인 주거지구에 사는 사람들이, 아래 쪽에는 아직 직접적으로 철거 위기에 놓여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고만고만한 살림살이를 가진 사람들이 산다. 아랫 동네 구멍가게에 사는 주인공 동현은 이른 나이에 현실의 논리를 학습한, 다소 조숙하면서도 시니컬한 13살 소년이다. 아버지는 두부공장 일을 하다가 사업을 말아먹고, 하루종일 방 안에 틀어박혀 무협지를 읽는 데만 빠져 있으며, 어머니는 동네에서 알아주는 일수쟁이다. 얹혀 살고 있는 삼촌은 경찰 공무원이 되겠다고 몇 년 째 허송하고 있는 만년 공시생이다. 이런 무료한 일상이 깨어지는 계기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부부싸움 이후다.


 가구 구성원으로서의 무능함과 권태에 찌들어있던 아버지는 부부싸움을 한 그날부터 바바리 코트를 입고,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쓰고, 바바리맨으로서 '제 2의 인생'을 시작한다. 바깥에만 나갔다 들어오면 생기(라 쓰고 '변태 에너지'라 읽는다)를 얻는 아버지(그렇다고 완전 노출하지는 않고 언더웨어까지는 입는다.), 동현은 그런 아버지가 몹시 '쪽팔렸기' 때문에 그를 미행하게 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공연음란과 일탈행위의 상징 '바바리맨'은 언제부터인가 '동네의 영웅'으로 통하기 시작한다. 알고 보니 바바리맨은 여고생을 불량배들로부터 구해주고, 발을 다쳐 거동이 어려운 학생들의 등교를 도와주고, 윗 동네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몰래 쌀을 가져다 주는 등 선행을 일삼았던 것이다. 급기야는 동네에서 바바리맨의 팬클럽이 만들어지기까지 이르고, 한편으로 이를 심상치 않게 본 파출소 측에서는 바바리맨을 체포하기 위한 노력들을 기울인다.



 사실 나는 이 책을 읽고 과연 '어떻게 '물의를 일으키지 않고' 이 작품의 문제의식을 전달할 수 있을까'하는 고민에 빠졌다. 문학의 기능이라는 '다양한 삶의 조망' 이라는 게 과연 가능하기는 할까 하는 회의를 거듭하는 가운데, 그래도 부족하지만 어떻게든 글로 남겨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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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는 '가짜'와 '진짜' 간 구분의 '무용성'이다. 프롤로그에서 동현의 학교 담임선생님은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영웅은 누구냐고 묻는다. 배트맨, 슈퍼맨, 아이언맨 등의 평범한 대답들이 오가는 가운데 동현은 가장 '이상적인' 영웅으로 '우리 동네 바바리맨'을 언급한다. 그리고 바바리맨에 대한 일화와 그의 영웅적 면모, 그가 영웅으로서 갖는 위치성에 대한 논의가 사실상 이후의 줄거리다.


 작중에서는 철거민과 용역업체 간의 갈등이 계속해서 언급된다. 원주민의 주거권을 빼앗고 무책임하게 일관하는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비판이다. 이런 성장중심주의의 폐해는 현실의, 그리고 현재진행형의 아젠다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부분은 거의 '보도되지 않는다.' 이런 문제를 돌아 보지 않으면 내일 당장 '살 곳'을 잃는 쪽은 우리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헬로 바바리맨'의 용두동 철거민들은 불의한 시장권력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기껏해야 조금이나마 더 연명하는 처지에 불과한 입장인 것이다. 영웅의 필요성이 대두되는 시점은 바로 여기서부터다.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쓰고 선행을 일삼는 '바바리맨'은 민중의 영웅으로 급부상하지만, 그가 현실의 모든 사태를 끝장낼 수 있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기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는 몇 차례에 걸쳐 용역업체로부터 철거민들의 주거권을 지키는 데 성공한다. 여기서 우선 주목할 점은 바바리맨의 '기호'와 '상징'이다.


 '우리 동네 바바리맨'을 상징하는 것은 '가이 포크스 가면'과 '바바리 코트' 크게 두 가지다. 가이 포크스는 17세기 초 제임스 1세를 암살하려다 사전에 발각되어 처형된 인물로, 후일 그의 얼굴을 따서 만들어진 가면은 자유와 혁명을 상징하게 되었다. 바바리 코트는 공연음란과 변태성에 대한 기호로 잘 알려져 있다. 정부 기득권이 보기에 양자는 불의함, 일탈성을 공유하는 것으로, 가히 '치워져야 마땅하다.' 그리고 바로 이 '일탈'에의 상징이 바바리맨이 영웅으로 부상하게 되는 지점이다. 다시 말해 오늘날은 그토록 위험하기 짝이없는 '바바리맨'이 가히 영웅으로 호명하기에 이른, 지극히 '위험한 사회'라는 역설이다. 그가 현 시점에서 이미 영웅이라는 것은 그의 '정치적 위험성'과 그 어떤 영웅으로서의 '진위'를 논하는 것이 무용하다는 귀결을 제공한다.

 

 소설의 막바지에서는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쓴 '개인들'이 나타나 용역업체를 저지하기에 이른다. 바바리맨의 활약상이 한 네티즌에 의해 알려져 철거민들을 위한 '연대'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의 영웅이 구태여 '총대를 매는 개인'의 형태를 취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을 의미한다. 촛불혁명을 통해 광장에서 전제군주를 끌어내린 시민들처럼 우리는 충분히 불의한 권력에 맞서 연대할 수 있다. 그러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의 용기 있는 '시도'이다.



 우리는 저항의 수단을 논의함에 있어서 그 수단의 '합법성'을 말하는 것이 너무 지나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2013년 말, 철도 민영화 시위 노동자 파업 이후의 하 수상한 시국을 비판하며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 열풍이 붙었었다. 혹자는 대학 측의 허가를 받지 않은 '불법 판촉물' 운운하기 급했지만, 세월호가 가라앉고, 시민이 물대포를 맞아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그러한 논리가 지극히 기득권 영합적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가만히 있으면 죽는다'는 것을 뼈아프게 체득한 시민들에게 있어 표준, 준법, 평범을 의미하는 '진짜'의 개념은 지극히 사회에서 규정된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불의에 눈 감는 온건한' 시민들을 양산하기 위한. 일례로 매스미디어는 '중산층'의 '평범'한 삶을 보여주며 개인에게 '삶'의 표준을 제시하는 데 급하지만 현실은 그러한 표준을 따를 만큼 녹록지 않고, 그렇게 따라서도 안된다. 동현의 이웃들, '백부'라고 불리는 철물점 주인, 머리가 벗겨지고 배가 나온 만년 파출소장, 나훈아 '모창가수' 나후나, 옥탑방에 사는 시인 아줌마 등 현실은 '진짜'를 따르지 않는 '가짜'들이 더 많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진짜'의 개념은 결코 본질적이지 않고, 오히려 사회구조적이라는 것이다. 대신 비(非)진짜가 인간에게 더 유익하게 기능하고 있다면, 그것을 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가이 포크스의 반정부적 사상은 당시 도덕적으로 아주 위험했고, 바바리맨은 오늘날 탈선자의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악역을 자처한' 다크나이트처럼, 바바리맨은 철거촌을 지켜냈고, 시민의 연대를 만들었다. 


 아버지는 바바리맨이라는 일탈자의 운명을 선택했고, 이를 통해 애벌레가 고치에서 빠져나오듯 '변태'했다. 코너에 내몰린 사업 실패자라는 하나의 '알'을 깨고, '우리동네의 영웅'이라는 신에게로 날아갔다. 안타깝게도 현행법 상 바바리맨은 경범죄에 해당하기 때문에 소설에서는 바바리맨의 최후가 다음과 같이 서술된다.



지난 일들을 생각하는 걸까. 아빠는 아득한 눈빛으로 구덩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큰숨을 내쉬고서 구덩이를 메우기 시작했다. 그런 아빠를 보며 나는 며칠 전 그가 바바리맨 팬카페에 올린 글을 떠올렸다.


안녕하세요. 바바리맨입니다.

처음으로 인사를 드리네요. 한낱 치한에 지나지 않는 저를 위해 팬카페를 만들고, 게다가 경찰서에서 풀려나는데 도움까지 주시니, 정말이지 어떻게 고마운 마음을 전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오늘 이렇게 글을 쓰게 된 건 사과를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이런저런 일들을 통해 여러분이 저를 히어로라고 불러주지만, 분명 제 바바리맨 행각으로 인해 큰 고통을 받은 학생들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미 많이 늦었지만, 그 학생들에게 고개 숙여 사과를 드립니다. 그동안의 제 행동에 대해 깊이 뉘우치고 반성합니다. 여러분들이 제게 보내준 따뜻한 관심과 응원은 평생 간직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아무쪼록 여러분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길 빕니다.


(p.254)



 아버지는 바바리맨에서 다시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왔다. 동현은 너무나 일찍이 세상의 혹독한 논리를 학습한 시니컬한 소년이지만, 끝내는 '우리동네 바바리맨'을 영웅으로 인정했다. 불의한 일을 겪고 의식의 반전을 겪은 다른 많은 시민들처럼 동현 역시도 세상을 보는 또다른 관점을 얻게 되었을 것이라 기대한다.


 그렇게 '변태'하고 더 성장할 모두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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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나는 문화인류학
한국문화인류학회 엮음 / 일조각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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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독성이 엄청나게 좋다. (진짜 열심히 뜯어고쳤겠지 싶었다...) 또한 이 책 자체를 문화인류학적으로 조망할 수 있다. 가령 1장에서는 최근(2003년) 김치가 pc한 음식으로 진보진영에서 각광받고 있다는 얘기가 나오는데, 이거 오늘날에는 상상할 수 없는 부분이지 않나. 대대적인 개정판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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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수용소에서 (양장) - 빅터 프랭클의
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 청아출판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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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저 그 자체.


 언젠가 한 번 페북의 L은 자기랑 가장 잘 맞는 학자가 '리처드 로티'라고 말 한 적이 있었다. 그의 책을 처음 읽어 보지만, 그의 이론은 결코 처음 듣는 얘기 같지가 않았다는 포스팅과 함께...... 그리고 이제는 나 역시 이와 비슷한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경우는 '빅토르 프랑클'이 '인생 학자'라고. 인간이 가진 잠재력, 의미를 추구하려는 본원적 욕구, 책임감의 중요성, 실존주의가 주장하는 니힐리즘에 대한 배격, 무한한 인간에의 믿음 등... 이제 겨우 그의 저서를 한 권 읽었을 뿐이지만 나는 그 한 권으로 페북 쿨병환자들로부터 매 순간 위협받던 소신을 지킬 수 있는 무척이나 훌륭한 '빽'을 얻게 됐다. 그 모든 안 좋은 여건 속에서도 자신의 신념과 낙관을 설파한 빅토르 프랑클 선생에게 다시 한 번 경의를 표한다.


 이 책은 총 세 부분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수용소에서의 고난과 역경을 담은 1부, 로고테라피에 대한 개괄적인 요약이 들어 간 2부, 그리고 1983년 6월, 서독 레젠스부르크 대학의 막시멈 오디토리엄에서 열렸던 제3차 로고테라피 세계대회에서 프랑클이 했던 연설을 요약한 3부가 그것이다.


 1부에서는 희망이라고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참담한 증언들이 이어진다. 수용소에서 얼마나 인간이 황폐화될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그의 기록을 따라가다 보면 그 누구라도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 없을 것이다. 그러한 서술 일변도가 이어지는 가운데, 나는 몇몇 페북 엘리트주의자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종종 자신과 견해를 달리하는 소위 '멍청이'들을 굴라그로 보내자고들 하는데, 그들은 수용소 생활의 잔인성을 모르거나, 알고 싶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그걸 알고 나면 절대 함부로 굴라그 운운할 수 없을 테니.


 저자 빅토르 프랑클이 사태에 대한 객관성을 유지하고 자신이 '인간'임을 잃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모습은 대단하다 못해 안쓰럽기까지 하다. 그 역시도 정서적으로 매말라지고, 원초적 욕구 외에는 생각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등의 시련을 피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가 정신과 의사가 아니었다면, 최소한 어떤 '신념'을 가진 인간이 아니었다면 이 책은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안 좋은 기억' 정도로 억압되거나, 미화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프랑클은 이러한 태도를 경계하며, 인간은 시련을 통해 더 성숙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과거에 그랬던 것'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존재방식이며, 인간은 과거에 행해졌던 '경험'과 현재를 그려 나갈 수 있는 잠재적인 '가능성'을 통해 비로소 존엄할 수 있다.


 빅토르 프랑클은 수용소 수감자들을 위한 정신적 테라피로 '희망'을 설파한다. 우리에게는 꿈꿀 수 있는 미래가 있고, 우리의 존재 양태는 과거의 고통과 훌륭했던 생각들의 총체이며, 무궁무진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작은 위로로 시작해 미래를 얘기하고, 고통과 시련, 그리고 희생의 가치를 얘기하는 그에게서 부랑아들을 구원하러 온 예수의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면 과장일까. 하지만 당장 그 어떤 미래도 볼 수 없는 수용소 안에서 누구나 쉽게 그런 행동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정말 그 누구도.


 이를 몇 달 전에 읽었던 커트 보니것의 '제5도살장'과 비교하는 것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둘 다 2차세계대전이라는 동시기의 기록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사태에 대해 상이한 문체로 접근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니것이 특유의 시니컬한 문체로 전쟁의 참상을 묘사하는 데 주력했다면, 빅토르 프랑클은 마지막까지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이라는 가치를 끝내 지키고자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어느 쪽이 사람들에게 더 감명 깊을지는 모르겠다. 문학과 철학(엄밀히 말하면 프랑클은 실존치료법, 정신의학이지만)의 고유한 역할이라는 게 있는 거니까. 하지만 혹자는 철학의 그 '고집'에 대한 반감을 가지곤 한다. '다 아는 걸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그런데 물론 '문학은 진리를 말해놓고 그걸 텍스트에 가둔다'는 견해도 있다. 일찍이 플라톤은 '시인들이란, 술에 취한 상태에서 세상의 진리를 이야기한다'고 말했다. 희망이라는 덕목의 가치를 믿는 한, 언제까지고 술에 취해 자조해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판고자 한다. 상담.




 2부는 1962년에 처음 수록된 '로고테라피 이론'에 대한 개괄인데, 당시 많은 젊은이들이 '실존적 공허' 상태에 빠져 있다는 설명이 이어진다.


"한편 존스홉킨스 대학교에서는 사회과학자들이 48개 대학 7,948명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통계조사를 실시한 적이 있다. 이 예비 보고서는 국립정신건강연구소의 지원을 받아 2년 동안 진행된 연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작선된 것이다. 설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16퍼센트의 학생들이 '돈을 많이 버는 것'이라고 대답한 반면 78퍼센트의 학생들은 첫번째 목표가 '자기 삶의 목표와 의미를 찾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p.169)


 2012년 작금의 청년세대를 '표백 세대'라고 진단한 장강명에 따르면, 이 사회는 체제에 순응하는 것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는 '무의미의 현발' 그 자체다. 신자유주의 체제의 가속화 속에서 제반 인본적 가치들이 침잠해 들어 가고, 국가 사회, 그리고 구성원들이 몰인간화되어가고 있는 가운데 장강명은 '왜 자살하지 않는가'를 묻는다. 그리고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저술가이자 정신과 의사인 프랭클 박사는 크고 작은 고통으로 고생하고 있는 환자들에게 가끔 이렇게 묻는다.

 "그런데 왜 자살하지 않습니까?"(p.15)


 장강명은 사람들이 총체적 무의미, 몰가치에 빠진 세상을 돌아보기 위해서는 상처, 즉 의식의 반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당신들도 나처럼 상처받길 바라요.'(표백.2012.한겨레출판사). 로고테라피 역시 삶의 '의미'의 중요성을 말하면서 동시에 '시련'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인간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은 긴장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가치 있는 목표, 자유의지로 선택한 그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투쟁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긴장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자신이 성취해야 할 삶의 잠재적인 의미를 밖으로 불러내는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항상성이 안라 정신적인 역동성이다. 말하자면 한 쪽 극에는 실현되어야 할 의미가, 그리고 다른 극에는 그 의미를 실현시켜야 할 인간이 있는 자기장 안의 실존적 역동성이다." (p.176)


 물론 의미를 찾는 데 시련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불안한, 그러나 그 불안과 함께 더욱 잘 사는' 강인한 인간상이 이상적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철학상담치료의 주요 골자다.



 우리나라에서 빅토르 프랑클의 로고테라피는 인문학 보다는 주로 자기계발 진영에서 인용되고 있다. 그가 살아남기 위해 했던 처절한 노력들을, 단지 노오력 하면 안되는 게 없다며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덮어놓으려는 식으로 말하는 태도들이 몹시 안타깝다. 나는 자기자신을 구원하면서도 세상에 대한 개혁의지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아우슈비츠의 잔인한 역사를 다시 반복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의 한 구절을 좀 빌리자면, 작금의 우리 사회가 직시해야 할 목소리는 다음과 같다.

"미래를 돌아보지 못하고 희망의 추구를 배재하는 사회는 모두 인간 본성의 기본적 필연성과 모순을 일으켜 결국 멸망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은 번역이 특히 매끄러운데, 역자인 이시형 박사는 우리나라 격동기의 산 증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자기계발' 내지 '힐링'이라는 개념 조차 희박한 시기에 성과주의 사회를 열렬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정신적 테라피를 시도했다. 그가 전공했다는 사회정신과학의 모토를 따라. 그가 그런 행동을 하게 된 계기는, 잘못된 생활습관으로 이른 나이에 건강을 잃어서인데 이렇게 보면 그 역시 의식의 반전을 겪고 유익한 일을 하려고 마음먹은 인간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자기계발론에 대한 대대적인 환멸'에 빠져 있는 청년들이 보기에는 그의 '유익한 일' 역시 구시대의 유물에 지나지 않는 듯 보인다. 그는 '의사'라는, 한국 사회의 지적 권위자로서 자신의 소명을 다했지만, 그래도 격동하는 시대적 갭은 참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그가 활동할 당시에는 지금의 웰빙이나 힐링 같은, 성과주체 구성원을 달랠만한 완충재가 거의 전무했을 테고, 따라서 개인보다는 집단으로, 더 많은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것저것 닥치는대로 고군분투 했을 것이다. 이제는 충분히 개인을 구원하는 데 열중될 수 있는 담론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고, 그 정점에 인문학이 있음은 자명하다. 헬조선 담론이 부상하며 삶과 세계에 대한 제반 '의미'들이 상실되고 있는 지금, 나는 정신적으로 방황하고 몰의미에 빠져있는 개인을 구원해야 한다는 시대적 소명을 느낀다. 점점 희박해져 가는 인도주의와 이타성의 기치 아래, 트렌디한 상담, 테라피를 공부한다. 비록 이시형 박사의 방식은 구시대적일 지라도 그의 정신적 태도는 오늘날까지 유효한 부분이다. 다만, 구별되어야 할 것은 개인에 대한 구원과 사회를 향한 개혁의지이다. 개인을 구원하면서 동시에 더 좋은 세상을 꿈꾸지 않으면 안된다. 대저 이러한 이원론적 진리관이 나를 지탱하는 뿌리가 되기를.



 "Sed omnia praeclara tam difficilia quam rara sunt (그러나 모든 위대한 것은 그것을 발견하는 것만큼이나 실현시키는 것도 힘들다)" 스피노자 <에티카>의 마지막 문장이다.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성자'들은 언제나 소수일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나는 소수의 반열에 합류하려는 도전의지를 본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지금 아주 좋지 않은 상태에 있고, 우리 각자가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더욱 더 나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제 경계심을 갖자. 두 가지 측면에서의 경계심을.

아우슈비츠 이후로 우리는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히로시마 이후로 우리는 무엇이 위험한지를 알게 되었다.


(p.24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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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야, 우리가 미안하다 - 따뜻한 신념으로 일군 작은 기적, 천종호 판사의 소년재판 이야기
천종호 지음 / 우리학교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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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후감을 쓰고 있는 지금은 조금 잠잠해졌지만 근 2주 전까지만 해도 부산 여중생 폭행사건을 기점으로 강릉, 아산 등지에서의 학교폭력 사건이 연일 보도되고 있었다. 또한 얼마 전에도 천안에서 중학생들이 같은 학급 학생을 무자비하게 폭행하는 사건이 있었다. 보수언론에서는 '학생들이' 했다고는 볼 수 없을 만큼 그 폭력의 정도가 잔학하다는 데 포커스를 뒀으며, 이에 많은 이들이 경악하고 분노했다. 학교폭력에 대한 문제의식이 불거지고 있는 와중에 급기야는 소년법 폐지 청원까지 이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어른들 못지 않게 잔인무도한 범죄를 저지르는 청소년들을 굳이 보호해 줄 필요가 없다'는 이유인데, 과연 그 말마따나 소년법을 폐지하면 학교폭력이라는 문제는 해결될 수 있는 것일까. 미성년자들을 보호해야 할 법적, 인도적인 이유는 정말 없는 걸까.

  페이스북을 끊은 지 이제 일주일 정도가 되었지만 월 초에 타임라인에서 부산 kbs라디오 제연화 기자가 쓴 글을 하나 본 적이 있다. 부산가정법원 부장판사로 재직하고 있는 천종호 판사님을 취재했던 일화를 바탕으로 작금의 학교폭력 의제에 대한 자신의 소회를 쓴 글이었다. 그녀는 소년법 폐지를 외치는 이들에게 소년법의 필요성과 청소년에 대한 인도주의를 온몸으로 주장하고 있었는데, 떠들썩한 시국 때문에 대중들에게 자칫 가해자를 두둔하냐는 식으로 오도될 가능성이 있는 데도 불구하고 의연하게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게 참 멋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면서 그가 권했던 책이 바로 천종호 판사의 '아니야, 우리가 미안하다'이다.

  '아니야, 우리가 미안하다'는 창원가정지법에서 비행을 저질러 재판을 받거나, 부산 경남 등지의 위탁가정에서 지내는 청소년들의 일화를 다룬 사례집이다. 저자 천종호 판사는 비행청소년들에게 10호 처분(2년 간 소년원 송치. 소년법에서 가장 처벌수위가 높음)을 많이 내린다는 이유로, 냉정하고 엄격한 판사로 잘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사실 그는 굉장히 인도주의적인 가치관을 가졌으며, 청소년들의 재사회화와 전인적인 재활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힘을 쓰고 있는 사람이다.

  우리나라는 오래 전부터 소년들을 사회화하는 데 있어 가족, 가정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왔고, 관련 법과 제도에서도 가족주의적인 가치관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는 대대적인 '가정의 해체'를 겪고 있고, 이에 비행에 빠지는 청소년들 역시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가정불화, 생활고 등의 이유로 학업을 중도에 포기한 청소년들은 2013년 기준으로 약 6만 여명에 이르지만, 그렇게 코너에 내몰린 이들의 사회적인 완충재는 사실상 없다. 책에 나온 내용을 조금 인용하자면 좋은 사회의 척도는 그 사회의 가장 낮은 사람이 어떤 대우를 받는지에 따라 달려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암울한 유년을 보내고 있는 소년들의 아픔은 좀처럼 조명되지 못하고, 우리는 애써 그들을 보려고 하지도 않는다. 청소년들이 '인정'이나 '인도주의'에 대해 희박한 개념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사회가, 그 사회의 어른들이 약육강식과 각자도생의 논리로 겉잡을 수 없이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학교폭력 문제를 말하려면 청소년 문제를 얘기해야 하고, 청소년 문제는 곧 사회 전반의 거시적인 해결과제로 논의되어야 하는데, 작금의 여론은 그러한 논의는 덮어놓고 애들을 처벌하기만 하자는 꼴이다. 또한 대중들이 주장하는 '엄벌'의 실효성도 논란의 소지가 많다. 실제로 소년원에 입소했던 청소년들의 재범률은 무려 60%에 가깝다.
 

  청소년들을 돌보는 것은 좌우의 문제도 아니고, 지성과 반지성의 대립도 될 수 없다. 예전보다 상황은 점점 더 안 좋아지고 있지만, 누군가는 미래를, 희망을 보아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양심이라는 게, 애정과 사랑이라는 게 있다는 걸 몸소 증명해야 한다. 그리고 천종호 판사가 바로 그런 일을 하고 있다. 그는 국내 최초로 사법형그룹홈(대안가정)을 도입하고 소년들의 재활을 도우며, 그들이 좌절 대신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한다. 그의 노력 때문인지 대안가정에 입소한 소년들의 재범률은 소년들의 그것에 비해 현저히 낮다. 그들이 생의 희망을 보고 건실한 사회인으로 자라는 것은 덤이다. 그는 현직 판사이지만 청소년들로부터 '판사 같지 않고 다정하다'는 말을 자주 듣는데, 우리 사회에서 판사에 대한 이미지가 소통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을 시사하는 데서 '판사 같지 않다'는 말에 담긴 함의는 막중하게 느껴진다.

  나는 고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청소년지도사를 지망했었고, 지금도 여건이 된다면 관련 자격증을 취득하려는 사람이다. 교육은 백년대계고, 청소년들은 나라의 기둥이라는 나의 신념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이 막막하다는 핑계로 미래를 바라보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그 현실이야말로 바로 수 년 뒤 미래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안 돼, 안 바꿔 줘, 바꿔 줄 생각 없어, 돌아 가.'로 유명한 타칭 '무자비한 판관' 천종호 판사가 대단히 소신있는 법조인이자 책임있는 어른이라는 게 무척 감사하다. 누군가 조국의 미래를 비관하거든, 고개를 들어 천종호 판사를 보게 할 수 있다는 것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어 크나 큰 영광이 아닐 수 없다. 

  책에 수록된 시를 한 편 인용하며, 나 또한 지금도 힘들어하고 있을 소년들에게 말한다. '아니야, 우리가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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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상처로부터 복구되어야 하며
낡은 것으로부터 새로워져야 하고
병으로부터 회복되어야 하고
무지함으로부터 교화되어야 하며
고통으로부터 구원받고 또 구원받아야 한다
결코 누구도 버려서는 안 된다
기억하라
만약, 네가 도움을 주는 손이 필요하다면
너의 팔 끝에 있는 손을 이용하면 된다
네가 더 나이가 들면 손이 두 개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한 손은 너 자신을 돕는 것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이다

<아름다움의 비결> 샘 레븐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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