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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수용소에서 (양장) - 빅터 프랭클의
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 청아출판사 / 2005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명저 그 자체.
언젠가 한 번 페북의 L은 자기랑 가장 잘 맞는 학자가 '리처드 로티'라고 말 한 적이 있었다. 그의 책을 처음 읽어 보지만, 그의 이론은 결코 처음 듣는 얘기 같지가 않았다는 포스팅과 함께...... 그리고 이제는 나 역시 이와 비슷한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경우는 '빅토르 프랑클'이 '인생 학자'라고. 인간이 가진 잠재력, 의미를 추구하려는 본원적 욕구, 책임감의 중요성, 실존주의가 주장하는 니힐리즘에 대한 배격, 무한한 인간에의 믿음 등... 이제 겨우 그의 저서를 한 권 읽었을 뿐이지만 나는 그 한 권으로 페북 쿨병환자들로부터 매 순간 위협받던 소신을 지킬 수 있는 무척이나 훌륭한 '빽'을 얻게 됐다. 그 모든 안 좋은 여건 속에서도 자신의 신념과 낙관을 설파한 빅토르 프랑클 선생에게 다시 한 번 경의를 표한다.
이 책은 총 세 부분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수용소에서의 고난과 역경을 담은 1부, 로고테라피에 대한 개괄적인 요약이 들어 간 2부, 그리고 1983년 6월, 서독 레젠스부르크 대학의 막시멈 오디토리엄에서 열렸던 제3차 로고테라피 세계대회에서 프랑클이 했던 연설을 요약한 3부가 그것이다.
1부에서는 희망이라고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참담한 증언들이 이어진다. 수용소에서 얼마나 인간이 황폐화될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그의 기록을 따라가다 보면 그 누구라도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 없을 것이다. 그러한 서술 일변도가 이어지는 가운데, 나는 몇몇 페북 엘리트주의자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종종 자신과 견해를 달리하는 소위 '멍청이'들을 굴라그로 보내자고들 하는데, 그들은 수용소 생활의 잔인성을 모르거나, 알고 싶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그걸 알고 나면 절대 함부로 굴라그 운운할 수 없을 테니.
저자 빅토르 프랑클이 사태에 대한 객관성을 유지하고 자신이 '인간'임을 잃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모습은 대단하다 못해 안쓰럽기까지 하다. 그 역시도 정서적으로 매말라지고, 원초적 욕구 외에는 생각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등의 시련을 피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가 정신과 의사가 아니었다면, 최소한 어떤 '신념'을 가진 인간이 아니었다면 이 책은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안 좋은 기억' 정도로 억압되거나, 미화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프랑클은 이러한 태도를 경계하며, 인간은 시련을 통해 더 성숙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과거에 그랬던 것'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존재방식이며, 인간은 과거에 행해졌던 '경험'과 현재를 그려 나갈 수 있는 잠재적인 '가능성'을 통해 비로소 존엄할 수 있다.
빅토르 프랑클은 수용소 수감자들을 위한 정신적 테라피로 '희망'을 설파한다. 우리에게는 꿈꿀 수 있는 미래가 있고, 우리의 존재 양태는 과거의 고통과 훌륭했던 생각들의 총체이며, 무궁무진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작은 위로로 시작해 미래를 얘기하고, 고통과 시련, 그리고 희생의 가치를 얘기하는 그에게서 부랑아들을 구원하러 온 예수의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면 과장일까. 하지만 당장 그 어떤 미래도 볼 수 없는 수용소 안에서 누구나 쉽게 그런 행동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정말 그 누구도.
이를 몇 달 전에 읽었던 커트 보니것의 '제5도살장'과 비교하는 것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둘 다 2차세계대전이라는 동시기의 기록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사태에 대해 상이한 문체로 접근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니것이 특유의 시니컬한 문체로 전쟁의 참상을 묘사하는 데 주력했다면, 빅토르 프랑클은 마지막까지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이라는 가치를 끝내 지키고자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어느 쪽이 사람들에게 더 감명 깊을지는 모르겠다. 문학과 철학(엄밀히 말하면 프랑클은 실존치료법, 정신의학이지만)의 고유한 역할이라는 게 있는 거니까. 하지만 혹자는 철학의 그 '고집'에 대한 반감을 가지곤 한다. '다 아는 걸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그런데 물론 '문학은 진리를 말해놓고 그걸 텍스트에 가둔다'는 견해도 있다. 일찍이 플라톤은 '시인들이란, 술에 취한 상태에서 세상의 진리를 이야기한다'고 말했다. 희망이라는 덕목의 가치를 믿는 한, 언제까지고 술에 취해 자조해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판고자 한다. 상담.
2부는 1962년에 처음 수록된 '로고테라피 이론'에 대한 개괄인데, 당시 많은 젊은이들이 '실존적 공허' 상태에 빠져 있다는 설명이 이어진다.
"한편 존스홉킨스 대학교에서는 사회과학자들이 48개 대학 7,948명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통계조사를 실시한 적이 있다. 이 예비 보고서는 국립정신건강연구소의 지원을 받아 2년 동안 진행된 연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작선된 것이다. 설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16퍼센트의 학생들이 '돈을 많이 버는 것'이라고 대답한 반면 78퍼센트의 학생들은 첫번째 목표가 '자기 삶의 목표와 의미를 찾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p.169)
2012년 작금의 청년세대를 '표백 세대'라고 진단한 장강명에 따르면, 이 사회는 체제에 순응하는 것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는 '무의미의 현발' 그 자체다. 신자유주의 체제의 가속화 속에서 제반 인본적 가치들이 침잠해 들어 가고, 국가 사회, 그리고 구성원들이 몰인간화되어가고 있는 가운데 장강명은 '왜 자살하지 않는가'를 묻는다. 그리고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저술가이자 정신과 의사인 프랭클 박사는 크고 작은 고통으로 고생하고 있는 환자들에게 가끔 이렇게 묻는다.
"그런데 왜 자살하지 않습니까?"(p.15)
장강명은 사람들이 총체적 무의미, 몰가치에 빠진 세상을 돌아보기 위해서는 상처, 즉 의식의 반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당신들도 나처럼 상처받길 바라요.'(표백.2012.한겨레출판사). 로고테라피 역시 삶의 '의미'의 중요성을 말하면서 동시에 '시련'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인간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은 긴장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가치 있는 목표, 자유의지로 선택한 그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투쟁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긴장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자신이 성취해야 할 삶의 잠재적인 의미를 밖으로 불러내는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항상성이 안라 정신적인 역동성이다. 말하자면 한 쪽 극에는 실현되어야 할 의미가, 그리고 다른 극에는 그 의미를 실현시켜야 할 인간이 있는 자기장 안의 실존적 역동성이다." (p.176)
물론 의미를 찾는 데 시련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불안한, 그러나 그 불안과 함께 더욱 잘 사는' 강인한 인간상이 이상적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철학상담치료의 주요 골자다.
우리나라에서 빅토르 프랑클의 로고테라피는 인문학 보다는 주로 자기계발 진영에서 인용되고 있다. 그가 살아남기 위해 했던 처절한 노력들을, 단지 노오력 하면 안되는 게 없다며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덮어놓으려는 식으로 말하는 태도들이 몹시 안타깝다. 나는 자기자신을 구원하면서도 세상에 대한 개혁의지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아우슈비츠의 잔인한 역사를 다시 반복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의 한 구절을 좀 빌리자면, 작금의 우리 사회가 직시해야 할 목소리는 다음과 같다.
"미래를 돌아보지 못하고 희망의 추구를 배재하는 사회는 모두 인간 본성의 기본적 필연성과 모순을 일으켜 결국 멸망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은 번역이 특히 매끄러운데, 역자인 이시형 박사는 우리나라 격동기의 산 증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자기계발' 내지 '힐링'이라는 개념 조차 희박한 시기에 성과주의 사회를 열렬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정신적 테라피를 시도했다. 그가 전공했다는 사회정신과학의 모토를 따라. 그가 그런 행동을 하게 된 계기는, 잘못된 생활습관으로 이른 나이에 건강을 잃어서인데 이렇게 보면 그 역시 의식의 반전을 겪고 유익한 일을 하려고 마음먹은 인간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자기계발론에 대한 대대적인 환멸'에 빠져 있는 청년들이 보기에는 그의 '유익한 일' 역시 구시대의 유물에 지나지 않는 듯 보인다. 그는 '의사'라는, 한국 사회의 지적 권위자로서 자신의 소명을 다했지만, 그래도 격동하는 시대적 갭은 참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그가 활동할 당시에는 지금의 웰빙이나 힐링 같은, 성과주체 구성원을 달랠만한 완충재가 거의 전무했을 테고, 따라서 개인보다는 집단으로, 더 많은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것저것 닥치는대로 고군분투 했을 것이다. 이제는 충분히 개인을 구원하는 데 열중될 수 있는 담론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고, 그 정점에 인문학이 있음은 자명하다. 헬조선 담론이 부상하며 삶과 세계에 대한 제반 '의미'들이 상실되고 있는 지금, 나는 정신적으로 방황하고 몰의미에 빠져있는 개인을 구원해야 한다는 시대적 소명을 느낀다. 점점 희박해져 가는 인도주의와 이타성의 기치 아래, 트렌디한 상담, 테라피를 공부한다. 비록 이시형 박사의 방식은 구시대적일 지라도 그의 정신적 태도는 오늘날까지 유효한 부분이다. 다만, 구별되어야 할 것은 개인에 대한 구원과 사회를 향한 개혁의지이다. 개인을 구원하면서 동시에 더 좋은 세상을 꿈꾸지 않으면 안된다. 대저 이러한 이원론적 진리관이 나를 지탱하는 뿌리가 되기를.
"Sed omnia praeclara tam difficilia quam rara sunt (그러나 모든 위대한 것은 그것을 발견하는 것만큼이나 실현시키는 것도 힘들다)" 스피노자 <에티카>의 마지막 문장이다.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성자'들은 언제나 소수일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나는 소수의 반열에 합류하려는 도전의지를 본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지금 아주 좋지 않은 상태에 있고, 우리 각자가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더욱 더 나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제 경계심을 갖자. 두 가지 측면에서의 경계심을.
아우슈비츠 이후로 우리는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히로시마 이후로 우리는 무엇이 위험한지를 알게 되었다.
(p.242-2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