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책을 읽는가 - 세상에서 가장 이기적인 독서를 위하여
샤를 단치 지음, 임명주 옮김 / 이루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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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작에 읽었어야 할, 지적 스노브들을 위한 팩폭도서. 책을 산 게 2월 20일이었으니까 그로부터 11일만에 읽은 셈이다. 이게 진짜 대단한 건데, 나는 보통 책을 사고 읽지 않는 편이기 때문. 그나마 알라딘에서 주문한 두 권(개소리에 대하여, 왜 책을 읽는가)은 완독을 했으니 시작이 참 좋다. 그런데 매우 느린 독해 속도를 자랑하는 내 특성상 이 책에 쏟은 순수 시간은 자그마치 24시간 남짓 될 터다. (아날로그 텍스트에 친숙해지는 길이 이렇게나 어렵다.) 독서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긴 하지만, 교양도서이면서 교양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 책을 찾는 건 꽤나 힘든 일이다. (보통은 온갖 치장으로 가득 차 있고, 속은 텅 빈 경우가 허다하지 않은가) 하지만 이번에는 제대로 만난 거 같다. (역시 충동구매가 짱) 우선 번역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문장들이 평이하지 않다. 흡사 고전을 읽는 듯한 뉘앙스를 주는데, 읽었던 기표들을 다시금 곱씹게 하는 매력이 있다. 내가 철학서적을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것 때문인데, 내 비교적 느린 독서 속도에 맞추어 문장들을 하나하나 '곱씹을 수' 있기 때문. (easy come, easy go. 대류, 정독이 최고다.) 특히 불문학에 대한 지식이 좀 더 수반되면 정말로 작가와 대담하는 기분이었을 것 같다. 그래서 이 책은 다른 누구보다도 '독서광'들을 위한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앞서 말했듯 불문학에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 필요하면 좋은데, 그게 뒤따르지 않으면 저자의 견해를 잠정적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기 때문. 그래서 프루스트와 스탕달, 플로베르와 뒤라스를 읽고 다시 작가와 대담해보고 싶은 것이다. "어이, 당신은 틀렸어요."라는 식으로. 그때가 되면 더 폭넓은 이해로 다가오겠지.



 다만 각주를 논외로 하고, '문학'과 '독서'라는 부분만 조명하고 본다고 해도(그게 가능할 지는 싶지만) 참 괜찮은 책이다. 이 책이 만약 국내 자기계발서였다면 페이지가 닳도록 독서의 장점에 관해 열거했을 것이다. (여담으로 저자 샤를 단치는 프랑스인인데, 다른 국적 내지 다른 문화권의 작가들이 논하는 '독서론'도 보고 싶었달까.) 그러나 저자는 '독서는 어느 것에도 봉사하지 않는다. 그래서 위대하다.'라고 일축한다. 독서가 미덕이 아니고, 독서를 한다고 교양인이 되지는 않는다고도 얘기한다. 심지어 책을 많이 읽어도 책 읽는 '기술'은 습득할 수 없다고까지... 하여튼 책에서 여하한 실용성을 갈구하는 작태들을 저자는 진심으로 혐오하고 있다. 이렇듯 입 발린 소리 따위는 개나 줘 버린 모습에서 '열정이 가장 뛰어난 이성'이라는 저자의 면모가 느껴진다. (열정적으로 까고 있거든.) 확실히 '실용성'이 '다수'가 되어버린 세상이다. 인본주의자를 자처하는 나로서는 이런 작가의 견해들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기도 하고. 같은 맥락에서 마지막에 민주주의의 맹점을 찌르는 부분이 참 일품이었다. 브렉시트와 트럼프의 등장을 예고하기라도 한 듯 중우정치를 신랄하게 조소하는 모습, 현대의 지적 엘리트다웠다. 21세기의 사조는 상대주의가 저물고 절대론이 대두하고 있다고 들었다. 무덤 속에서 잠 자고 있던 플라톤이 재림할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런 한 편으로 알랭 바디우를 읽어 보고 싶다는 욕구가 차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저자의 독서가 문학에 치우친 경향이 있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다. 그도 그럴 것이 흔히 '책벌레'라고 하면 문학소년, 소녀들을 상상하기 쉽기 때문. 문학, 즉 문예는 (작가가 언급했듯) 예술이면서 죽음을 향한 투쟁이다. 계속 지지만, 어쨌든 싸우고 있으니까. 작품은 유구한 시간에 걸쳐 읽히니까. (이렇게 보면 정말 '문학전선'이라는 표현이 맞다.) 그런데 철학 역시 죽음을 인식하며 행해지는 끝없는 물음이라는 점에서 같은 정서를 공유하고 있지 않나. 차이가 있다면, (본문에도 나와 있듯) 철학이 분석과 지성이라면 문학은 유추와 감성의 영역이라는 거. 어쩌면 책이라는 매체는 철학보다 문학에 특화된 것인지도 모른다. 유추와 감성이라는 영역. 뭐 내 쪽은 비문학 독서를 더 선호하긴 하지만, 이 부분은 독서량을 더 늘리는 것으로 내 견해를 더 강화할 수 있겠다. 



 저자와 비슷한 맥락에서 이응준은 책 한 권으로 사람이 바뀌었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고 했지만, 이번 독서년을 성실히 임하면 뭔가 바뀌는 게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많이 든다. 책을 한 권 읽을 때는 이치에 통달한 느낌이지만, 두 권 읽을 때는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되고, 세 권 째에는 내가 정말 모르는 것이 많았구나... 고 반성하게 된다는 말이 있다.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건 변하지 않으므로, 이해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게 될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는 투쟁을 멈추어서는 안된다... 이게 작가가 말하는 주제의식이 아닐까 한다. 그 무엇을 위한 것도 아닌 독서, 그 하등 실용적이지 않은 투쟁. 저자는 결국 독서와 애서가를 예찬하며 대단원을 마무리 짓는다. 나는 이 결론부에서 독서광 인생을 외곬으로 달려온 작가자신의 프라이드와 권위의식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권위의식은 추종자를 거느리고 싶은 욕구로도 읽을 수 있지..)



 그리고 또 하나 더 깨달은 거. 페북은 확실히 허영심 많은 자아들이 자리 잡은 플랫폼이다. 나 역시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들의 견해를 잠정적으로 수용하고만 있었다. 내가 직접 공부하고 소화해내면 될 것을. 그 성격 안 좋은 사람들 '개소리' 듣느라 참 고생 많았다. 이젠 아픈 것도 좀 괜찮아지고 있으니까.



 또 한 가지 더, 좋은 문장이 나오면 기록해두자. 적어도 그런 습관 정도는 괜찮잖아..??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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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03-05 10: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참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일랑일랑 님이 쓰신 리뷰도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

일랑일랑 2017-03-05 11:58   좋아요 0 | URL
ㅎㅎ감사합니다. 잠자냥님이 쓰신 리뷰도 잘 읽었어요
풋풋했던 그 시절이 떠오르는~

cyrus 2017-03-07 15: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북플도 허영심 많은 자아들이 놀기 편한 곳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도 페북과 비교하면, 허영심을 드러내는 정도가 비교적 덜한 편입니다.

일랑일랑 2017-03-07 15:22   좋아요 1 | URL
북플 같은 경우는 독후감 올리고, 다른 좋은 책들 추천받는 느낌으로 이용하려고 합니다ㅎㅎ 아직 이용한 지는 얼마 안돼서 실상은 전자에 경도될 거 같지만ㅜ
 
개소리에 대하여
해리 G. 프랭크퍼트 지음, 이윤 옮김 / 필로소픽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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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자가 언급한 대로 영미철학 특유의 분석기법이 돋보인다. 단어의 개념을 규명해내고, 분석하고, 어떤 보편 원리로 적용하는 문제는 철학의 주요 골자 중 하나다. 개념과 보편, 이 책에서 그 소재가 되는 건 '개소리(Bullshit)'다. 그런데 읽다 보면 이 책은 논문보다는 잘 꾸며진 꽁트같다는 생각도 든다. 혹자가 말하길, '술자리에서나 할 법한 농담은 clever joke에 그치지만 그걸 각잡고 논문으로 발표하면 통찰(insight)이 된다'고 하는데, 이 책이 아마 그 적절한 예시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세상에, '개소리'를 다룬다니! 철학은 그만큼 방대한 개념을 다루는 학문이면서 동시에 인간세상에 이토록 이로운 학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확실히 진리를 잃어버린 세대다. 팩트(fact)라는 말이 특정 정치적 견해를 공고히하는, 타자를 배제하고 동일자의 포섭을 강화하는 아전인수격 개념으로 전락해버린 세상에서 정확성(correctness)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진정성(sincerely)이 주요한 가치로 부각되어버린 시대다. 교수님(김덕천)이 지적하듯 포스트모더니즘은 인간세상에 무의미에의 의지와 회의주의를 양산해냈다. 삶의 목적과 위계를 잃어버리고 부표처럼 살아가는 사람들... 그래서 개소리가 그렇게 만연한 것이겠지. 사랑의 가장 큰 적은 무관심이듯 진리의 가장 큰 적은 '개소리'라는 모토는 이렇듯 많은 것을 시사한다. 그러나 시대에 주어진 철학의 역할이 단순한 지적소비에만 그친다면, 철학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진리를 향한 믿음. 진리를 확보하는 작업은 무용한 것에만 그쳐야 하는가? 저자는 진지하고 세심한 논의를 통해 이와 같은 주장에 반박하고 철학 본유의 역할을 돌아보고 있다. 

 

 또한 이 책은 페북 스노브들을 까는 글이기도 하다. 2000년대 초반에 나온 글이라는데, 본문의 문제의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아니 더 심화되었다. 일베와 나무위키의 등장으로 너도나도 '좆문가'가 되는 세상이다. 특정 견해에 공통된 의사를 펼치는 커뮤니티를 만들어내고, 성숙한 민주시민을 참칭하며 모든 사안에 오피니언을 피력하는 자들이 차고 넘친다는 말인데, 이 또한 진리의 상실과 관련이 있다. 이것은 허위(falsity)보다는 가짜(phony)에 가까운 개념으로, 정확성의 확보를 상실한 사조는 끽해야 개소리 밖에 될 수 없는 무의미한 논의를 조장할 뿐이다. 한 마디로, 세상에 말들이 너무 많다. 저자는 이 모리배들을 '논문으로 조져버리는' 느낌이다. '말 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해야 한다.'를 넘어서 '정확히 알 수 없는 것은 침묵해야 한다.'는 식으로.


 아는 게 많으면 겸손해지는 법. 아무리 유구한 세월이 흘러도 책을 대체할 수 있는 진리매체가 생겨날 수 없듯 정보의 범람에서 살아남는 것은 결국 '정확성'에의 믿음을 담보하는 사유일 것... 개소리의 철학이 주는 교훈은 대저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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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3-02 20: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르거나 잘못 아는 것을 침묵하기보다는 그걸 스스로 인정하고, 공개하는 자세가 바람직합니다. 그런 자세야말로 겸손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

일랑일랑 2017-03-02 2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맞습니다ㅎ 겸양의 맥락에서는 그렇죠^^
 
변신, 카프카 단편선 세계의 클래식 9
프란츠 카프카 지음, 권세훈 옮김 / 가지않은길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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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프카 - 변신'. 역시 데미안과 마찬가지로 중학교 논술학원 다닐 때 접했던 책이다. 그때는 손도 대지 않았지만, 아마 손 댔더라도 몇 자 읽다가 짜증나서 때려쳤을 게 분명하다. 그만큼 취향을 타는 작가라는 소리인데, 지금도 '카프카'라는 이름이 주는 어두움과 고독감이 참 부담으로 느껴지곤 한다. 그러나 이와는 별개로 그의 작품이 주는 비평적 가치는 흥미를 자극하는 부분이 맞다.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처럼 말이다. (이 책 또한 교수님1께서 추천해주셨는데, 물론 읽어보지 않았다.)


 '변신'은 꾸준히 비극적인 분위기를 견지한다는 점에서 난해하다. (앞서 카프카의 단편 '선고'가 실려있는데, 이 역시 마찬가지다.) 나이브하게 얘기하면 '꿈도 희망도 없다.' 절망, 혼돈 내지 파괴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는 사람들도 있지만, 적어도 그게 나는 아니다. 다만 비평을 통해 자산이 되고, 더 흥미로워지는 작품이기 때문에 '취향'은 아니지만 좋다고 하겠다. (꿈보다 해몽......) 이 소설을 포함한 카프카 문학세계의 전반을 실존주의의 맹아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작품해설은 좀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 카프카를 전공했다는 역자는 '변신'이라는 행위를 '돈 벌어다 주는 기계'로 전락한 주인공의 일탈이자 자본주의, 성과주의 체제의 부조리 폭로라고 설명한다. 인간이면서 인간성이 단절된 주인공이 처한 상황은 '벌레'와 다르지 않다는 것. 그래서 '벌레가 되었다'는 노골적인 설정이 작품을 이루는 골자라는 것이다. 주인공은 가족들을 사랑했다. 그러나 더이상 재화교환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게된(벌레가 된) 주인공은 가족구성원으로부터 배제되고 만다. 이제 '그'는 '그것'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주인공은 체제로부터 해방되었다. 완전히 무력해져 아무도 일을 시키지 않는(이상 - '회한의 장') 상태에 놓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결국 인간을 포기하고 얻어낸 해방으로, 주인공에게 돌아온 것은 구원과 같은 예견된 죽음이며, 가족들은 이에 전혀 개의치 않아 하는 모습을 보인다. 평생을 생업에 종사하며 글을 쓰다가 요절한 카프카의 일생에 대입하면 작품의 주제의식이 명확해지는 게 참 비장하게 느껴진다. 이러니 어찌 탄복하고 경외하지 않을 수 있을까.


 청소년들 읽으라고 추천해주는 20세기 고전들은 대체로 자본주의/성과주의 체제로부터 상실된 인간성의 회복을 주제로 한 작품이 많다. 어쩌면 그 속에는 '어차피 힘든 세상이고, 잔인한 체제니까 문학전선에 뛰어들 생각이면 마음 똑바로 먹어라. 그런데 그때보다 상황은 훨씬 더 열악하다...'라는 무언의 압박이 담겨있지 않았나 싶다. (당시에 유행했던) 자기계발서도 아니고, 문학에서 체제순응적인 논리를 학습하기란 아이러니니까. 따라서 문학은 어딘가 어둡고 고독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세상 너머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사람들. 그들 내면의 깊이 만큼 문학은 구원에 이르는 양분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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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제피네, 여가수 혹은 쥐의 종족'은 카프카의 예술관이 드러난 짧은 꽁트다. '그것은 뻔하지만 세계와 인간을 구원하는 것.' 생전 최후의 작품이라는데 죽음을 앞둔 거인의 초연함이라는 점에서 칸트의 '영원한 평화'와 비견되지 않는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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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 가지 힘 - 욕망 + 모더니즘 + 제국주의 + 몬스터 + 종교 다섯 가지 힘
사이토 다카시 지음, 홍성민 옮김 / 뜨인돌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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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이토 다카시의 '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 가지 힘'. 역시 얇고 넓은 교양서적 답게 논지전개가 일률적이고, 이것을 개별 지식의 나열로 지탱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중  - 고딩 때 읽었을 때는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정도로 넘어갔겠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빈약한 논거나 성급한 주의주장 등(또한 이런 부분들이 대중교양서적의 폐해이기도 하다) 여러 문제점들이 눈에 들어온다. 보다 심층적인 논의로 넘어가기 위한 노력이 재고된다. (그러려고 책 읽는 거니까.) 흥미유도를 위한 서적은 '지대넓얕' 정도로 끝내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물론 읽어보지는 않았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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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달인, 호모 아르텍스 - 구경은 됐다 신나는 나만의 예술하기!, 개정증보판 달인 시리즈 2
채운 지음 / 북드라망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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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론다 번의 시크릿과 이지성의 저서들을 위시한 '인문학적 자기계발서'들의 가장 큰 특징-이자 유해함은 그 좋은 구절들을 '끌어다가' 노력만능주의 자기주문의 논리를 이어간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들은 그런 식으로 돈을 벌어왔다.) 특히 '틀을 깨부순다(구조를 해체한다)'라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조를 그런 식으로 오독하는 걸 보면 부아가 치밀어오를 지경이다. 10여 년 전에 출판된 '호모-' 시리즈 역시 이와 다르지 않은데, 최소한 이런 책들은 한글을 떼고 교양(liberal arts)을 아주 처음(very first time) 접하는 시기의 유아들을 독자로 상정하는 편이 낫다. 또한 그말 그대로 그러한 책들은 '노력하라', '행동하라' 식의 유아적인 주문들을 강조한다. 따라서 인문학적 자기계발서의 주요 독자인 청소년층은 교양의 유아기적 상태에 머무르게 될 뿐이다. 어디 청소년 뿐이겠는가. 갓 인문학에 관심을 갖게 되는 성인들은 어떻고. '깨부서라', '행동하라', '노력하라'. 뭐 그리 많은 주문들로 어디 '계몽'까지야 한다는 말인가. 결론은 항상 일차원적 노력만능주의로 수렴하는데. '계몽'하고자 한다면 그런 식으로 하면 안된다. '우매한 대중'들을 계도하겠다는 의도는 구시대적이며, 필패하기 마련이다. 칸트가 '계몽이란 무엇인가'에서 말했듯, 계몽이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도 자신의 오성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인식의 유아기적 상태를 조장하는 대중마취서적들로 계몽을 한다? 이율배반도 이런 이율배반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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