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수용소에서 (양장) - 빅터 프랭클의
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 청아출판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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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저 그 자체.


 언젠가 한 번 페북의 L은 자기랑 가장 잘 맞는 학자가 '리처드 로티'라고 말 한 적이 있었다. 그의 책을 처음 읽어 보지만, 그의 이론은 결코 처음 듣는 얘기 같지가 않았다는 포스팅과 함께...... 그리고 이제는 나 역시 이와 비슷한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경우는 '빅토르 프랑클'이 '인생 학자'라고. 인간이 가진 잠재력, 의미를 추구하려는 본원적 욕구, 책임감의 중요성, 실존주의가 주장하는 니힐리즘에 대한 배격, 무한한 인간에의 믿음 등... 이제 겨우 그의 저서를 한 권 읽었을 뿐이지만 나는 그 한 권으로 페북 쿨병환자들로부터 매 순간 위협받던 소신을 지킬 수 있는 무척이나 훌륭한 '빽'을 얻게 됐다. 그 모든 안 좋은 여건 속에서도 자신의 신념과 낙관을 설파한 빅토르 프랑클 선생에게 다시 한 번 경의를 표한다.


 이 책은 총 세 부분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수용소에서의 고난과 역경을 담은 1부, 로고테라피에 대한 개괄적인 요약이 들어 간 2부, 그리고 1983년 6월, 서독 레젠스부르크 대학의 막시멈 오디토리엄에서 열렸던 제3차 로고테라피 세계대회에서 프랑클이 했던 연설을 요약한 3부가 그것이다.


 1부에서는 희망이라고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참담한 증언들이 이어진다. 수용소에서 얼마나 인간이 황폐화될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그의 기록을 따라가다 보면 그 누구라도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 없을 것이다. 그러한 서술 일변도가 이어지는 가운데, 나는 몇몇 페북 엘리트주의자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종종 자신과 견해를 달리하는 소위 '멍청이'들을 굴라그로 보내자고들 하는데, 그들은 수용소 생활의 잔인성을 모르거나, 알고 싶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그걸 알고 나면 절대 함부로 굴라그 운운할 수 없을 테니.


 저자 빅토르 프랑클이 사태에 대한 객관성을 유지하고 자신이 '인간'임을 잃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모습은 대단하다 못해 안쓰럽기까지 하다. 그 역시도 정서적으로 매말라지고, 원초적 욕구 외에는 생각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등의 시련을 피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가 정신과 의사가 아니었다면, 최소한 어떤 '신념'을 가진 인간이 아니었다면 이 책은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안 좋은 기억' 정도로 억압되거나, 미화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프랑클은 이러한 태도를 경계하며, 인간은 시련을 통해 더 성숙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과거에 그랬던 것'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존재방식이며, 인간은 과거에 행해졌던 '경험'과 현재를 그려 나갈 수 있는 잠재적인 '가능성'을 통해 비로소 존엄할 수 있다.


 빅토르 프랑클은 수용소 수감자들을 위한 정신적 테라피로 '희망'을 설파한다. 우리에게는 꿈꿀 수 있는 미래가 있고, 우리의 존재 양태는 과거의 고통과 훌륭했던 생각들의 총체이며, 무궁무진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작은 위로로 시작해 미래를 얘기하고, 고통과 시련, 그리고 희생의 가치를 얘기하는 그에게서 부랑아들을 구원하러 온 예수의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면 과장일까. 하지만 당장 그 어떤 미래도 볼 수 없는 수용소 안에서 누구나 쉽게 그런 행동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정말 그 누구도.


 이를 몇 달 전에 읽었던 커트 보니것의 '제5도살장'과 비교하는 것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둘 다 2차세계대전이라는 동시기의 기록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사태에 대해 상이한 문체로 접근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니것이 특유의 시니컬한 문체로 전쟁의 참상을 묘사하는 데 주력했다면, 빅토르 프랑클은 마지막까지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이라는 가치를 끝내 지키고자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어느 쪽이 사람들에게 더 감명 깊을지는 모르겠다. 문학과 철학(엄밀히 말하면 프랑클은 실존치료법, 정신의학이지만)의 고유한 역할이라는 게 있는 거니까. 하지만 혹자는 철학의 그 '고집'에 대한 반감을 가지곤 한다. '다 아는 걸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그런데 물론 '문학은 진리를 말해놓고 그걸 텍스트에 가둔다'는 견해도 있다. 일찍이 플라톤은 '시인들이란, 술에 취한 상태에서 세상의 진리를 이야기한다'고 말했다. 희망이라는 덕목의 가치를 믿는 한, 언제까지고 술에 취해 자조해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판고자 한다. 상담.




 2부는 1962년에 처음 수록된 '로고테라피 이론'에 대한 개괄인데, 당시 많은 젊은이들이 '실존적 공허' 상태에 빠져 있다는 설명이 이어진다.


"한편 존스홉킨스 대학교에서는 사회과학자들이 48개 대학 7,948명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통계조사를 실시한 적이 있다. 이 예비 보고서는 국립정신건강연구소의 지원을 받아 2년 동안 진행된 연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작선된 것이다. 설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16퍼센트의 학생들이 '돈을 많이 버는 것'이라고 대답한 반면 78퍼센트의 학생들은 첫번째 목표가 '자기 삶의 목표와 의미를 찾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p.169)


 2012년 작금의 청년세대를 '표백 세대'라고 진단한 장강명에 따르면, 이 사회는 체제에 순응하는 것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는 '무의미의 현발' 그 자체다. 신자유주의 체제의 가속화 속에서 제반 인본적 가치들이 침잠해 들어 가고, 국가 사회, 그리고 구성원들이 몰인간화되어가고 있는 가운데 장강명은 '왜 자살하지 않는가'를 묻는다. 그리고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저술가이자 정신과 의사인 프랭클 박사는 크고 작은 고통으로 고생하고 있는 환자들에게 가끔 이렇게 묻는다.

 "그런데 왜 자살하지 않습니까?"(p.15)


 장강명은 사람들이 총체적 무의미, 몰가치에 빠진 세상을 돌아보기 위해서는 상처, 즉 의식의 반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당신들도 나처럼 상처받길 바라요.'(표백.2012.한겨레출판사). 로고테라피 역시 삶의 '의미'의 중요성을 말하면서 동시에 '시련'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인간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은 긴장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가치 있는 목표, 자유의지로 선택한 그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투쟁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긴장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자신이 성취해야 할 삶의 잠재적인 의미를 밖으로 불러내는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항상성이 안라 정신적인 역동성이다. 말하자면 한 쪽 극에는 실현되어야 할 의미가, 그리고 다른 극에는 그 의미를 실현시켜야 할 인간이 있는 자기장 안의 실존적 역동성이다." (p.176)


 물론 의미를 찾는 데 시련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불안한, 그러나 그 불안과 함께 더욱 잘 사는' 강인한 인간상이 이상적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철학상담치료의 주요 골자다.



 우리나라에서 빅토르 프랑클의 로고테라피는 인문학 보다는 주로 자기계발 진영에서 인용되고 있다. 그가 살아남기 위해 했던 처절한 노력들을, 단지 노오력 하면 안되는 게 없다며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덮어놓으려는 식으로 말하는 태도들이 몹시 안타깝다. 나는 자기자신을 구원하면서도 세상에 대한 개혁의지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아우슈비츠의 잔인한 역사를 다시 반복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의 한 구절을 좀 빌리자면, 작금의 우리 사회가 직시해야 할 목소리는 다음과 같다.

"미래를 돌아보지 못하고 희망의 추구를 배재하는 사회는 모두 인간 본성의 기본적 필연성과 모순을 일으켜 결국 멸망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은 번역이 특히 매끄러운데, 역자인 이시형 박사는 우리나라 격동기의 산 증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자기계발' 내지 '힐링'이라는 개념 조차 희박한 시기에 성과주의 사회를 열렬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정신적 테라피를 시도했다. 그가 전공했다는 사회정신과학의 모토를 따라. 그가 그런 행동을 하게 된 계기는, 잘못된 생활습관으로 이른 나이에 건강을 잃어서인데 이렇게 보면 그 역시 의식의 반전을 겪고 유익한 일을 하려고 마음먹은 인간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자기계발론에 대한 대대적인 환멸'에 빠져 있는 청년들이 보기에는 그의 '유익한 일' 역시 구시대의 유물에 지나지 않는 듯 보인다. 그는 '의사'라는, 한국 사회의 지적 권위자로서 자신의 소명을 다했지만, 그래도 격동하는 시대적 갭은 참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그가 활동할 당시에는 지금의 웰빙이나 힐링 같은, 성과주체 구성원을 달랠만한 완충재가 거의 전무했을 테고, 따라서 개인보다는 집단으로, 더 많은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것저것 닥치는대로 고군분투 했을 것이다. 이제는 충분히 개인을 구원하는 데 열중될 수 있는 담론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고, 그 정점에 인문학이 있음은 자명하다. 헬조선 담론이 부상하며 삶과 세계에 대한 제반 '의미'들이 상실되고 있는 지금, 나는 정신적으로 방황하고 몰의미에 빠져있는 개인을 구원해야 한다는 시대적 소명을 느낀다. 점점 희박해져 가는 인도주의와 이타성의 기치 아래, 트렌디한 상담, 테라피를 공부한다. 비록 이시형 박사의 방식은 구시대적일 지라도 그의 정신적 태도는 오늘날까지 유효한 부분이다. 다만, 구별되어야 할 것은 개인에 대한 구원과 사회를 향한 개혁의지이다. 개인을 구원하면서 동시에 더 좋은 세상을 꿈꾸지 않으면 안된다. 대저 이러한 이원론적 진리관이 나를 지탱하는 뿌리가 되기를.



 "Sed omnia praeclara tam difficilia quam rara sunt (그러나 모든 위대한 것은 그것을 발견하는 것만큼이나 실현시키는 것도 힘들다)" 스피노자 <에티카>의 마지막 문장이다.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성자'들은 언제나 소수일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나는 소수의 반열에 합류하려는 도전의지를 본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지금 아주 좋지 않은 상태에 있고, 우리 각자가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더욱 더 나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제 경계심을 갖자. 두 가지 측면에서의 경계심을.

아우슈비츠 이후로 우리는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히로시마 이후로 우리는 무엇이 위험한지를 알게 되었다.


(p.24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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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야, 우리가 미안하다 - 따뜻한 신념으로 일군 작은 기적, 천종호 판사의 소년재판 이야기
천종호 지음 / 우리학교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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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후감을 쓰고 있는 지금은 조금 잠잠해졌지만 근 2주 전까지만 해도 부산 여중생 폭행사건을 기점으로 강릉, 아산 등지에서의 학교폭력 사건이 연일 보도되고 있었다. 또한 얼마 전에도 천안에서 중학생들이 같은 학급 학생을 무자비하게 폭행하는 사건이 있었다. 보수언론에서는 '학생들이' 했다고는 볼 수 없을 만큼 그 폭력의 정도가 잔학하다는 데 포커스를 뒀으며, 이에 많은 이들이 경악하고 분노했다. 학교폭력에 대한 문제의식이 불거지고 있는 와중에 급기야는 소년법 폐지 청원까지 이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어른들 못지 않게 잔인무도한 범죄를 저지르는 청소년들을 굳이 보호해 줄 필요가 없다'는 이유인데, 과연 그 말마따나 소년법을 폐지하면 학교폭력이라는 문제는 해결될 수 있는 것일까. 미성년자들을 보호해야 할 법적, 인도적인 이유는 정말 없는 걸까.

  페이스북을 끊은 지 이제 일주일 정도가 되었지만 월 초에 타임라인에서 부산 kbs라디오 제연화 기자가 쓴 글을 하나 본 적이 있다. 부산가정법원 부장판사로 재직하고 있는 천종호 판사님을 취재했던 일화를 바탕으로 작금의 학교폭력 의제에 대한 자신의 소회를 쓴 글이었다. 그녀는 소년법 폐지를 외치는 이들에게 소년법의 필요성과 청소년에 대한 인도주의를 온몸으로 주장하고 있었는데, 떠들썩한 시국 때문에 대중들에게 자칫 가해자를 두둔하냐는 식으로 오도될 가능성이 있는 데도 불구하고 의연하게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게 참 멋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면서 그가 권했던 책이 바로 천종호 판사의 '아니야, 우리가 미안하다'이다.

  '아니야, 우리가 미안하다'는 창원가정지법에서 비행을 저질러 재판을 받거나, 부산 경남 등지의 위탁가정에서 지내는 청소년들의 일화를 다룬 사례집이다. 저자 천종호 판사는 비행청소년들에게 10호 처분(2년 간 소년원 송치. 소년법에서 가장 처벌수위가 높음)을 많이 내린다는 이유로, 냉정하고 엄격한 판사로 잘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사실 그는 굉장히 인도주의적인 가치관을 가졌으며, 청소년들의 재사회화와 전인적인 재활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힘을 쓰고 있는 사람이다.

  우리나라는 오래 전부터 소년들을 사회화하는 데 있어 가족, 가정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왔고, 관련 법과 제도에서도 가족주의적인 가치관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는 대대적인 '가정의 해체'를 겪고 있고, 이에 비행에 빠지는 청소년들 역시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가정불화, 생활고 등의 이유로 학업을 중도에 포기한 청소년들은 2013년 기준으로 약 6만 여명에 이르지만, 그렇게 코너에 내몰린 이들의 사회적인 완충재는 사실상 없다. 책에 나온 내용을 조금 인용하자면 좋은 사회의 척도는 그 사회의 가장 낮은 사람이 어떤 대우를 받는지에 따라 달려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암울한 유년을 보내고 있는 소년들의 아픔은 좀처럼 조명되지 못하고, 우리는 애써 그들을 보려고 하지도 않는다. 청소년들이 '인정'이나 '인도주의'에 대해 희박한 개념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사회가, 그 사회의 어른들이 약육강식과 각자도생의 논리로 겉잡을 수 없이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학교폭력 문제를 말하려면 청소년 문제를 얘기해야 하고, 청소년 문제는 곧 사회 전반의 거시적인 해결과제로 논의되어야 하는데, 작금의 여론은 그러한 논의는 덮어놓고 애들을 처벌하기만 하자는 꼴이다. 또한 대중들이 주장하는 '엄벌'의 실효성도 논란의 소지가 많다. 실제로 소년원에 입소했던 청소년들의 재범률은 무려 60%에 가깝다.
 

  청소년들을 돌보는 것은 좌우의 문제도 아니고, 지성과 반지성의 대립도 될 수 없다. 예전보다 상황은 점점 더 안 좋아지고 있지만, 누군가는 미래를, 희망을 보아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양심이라는 게, 애정과 사랑이라는 게 있다는 걸 몸소 증명해야 한다. 그리고 천종호 판사가 바로 그런 일을 하고 있다. 그는 국내 최초로 사법형그룹홈(대안가정)을 도입하고 소년들의 재활을 도우며, 그들이 좌절 대신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한다. 그의 노력 때문인지 대안가정에 입소한 소년들의 재범률은 소년들의 그것에 비해 현저히 낮다. 그들이 생의 희망을 보고 건실한 사회인으로 자라는 것은 덤이다. 그는 현직 판사이지만 청소년들로부터 '판사 같지 않고 다정하다'는 말을 자주 듣는데, 우리 사회에서 판사에 대한 이미지가 소통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을 시사하는 데서 '판사 같지 않다'는 말에 담긴 함의는 막중하게 느껴진다.

  나는 고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청소년지도사를 지망했었고, 지금도 여건이 된다면 관련 자격증을 취득하려는 사람이다. 교육은 백년대계고, 청소년들은 나라의 기둥이라는 나의 신념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이 막막하다는 핑계로 미래를 바라보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그 현실이야말로 바로 수 년 뒤 미래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안 돼, 안 바꿔 줘, 바꿔 줄 생각 없어, 돌아 가.'로 유명한 타칭 '무자비한 판관' 천종호 판사가 대단히 소신있는 법조인이자 책임있는 어른이라는 게 무척 감사하다. 누군가 조국의 미래를 비관하거든, 고개를 들어 천종호 판사를 보게 할 수 있다는 것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어 크나 큰 영광이 아닐 수 없다. 

  책에 수록된 시를 한 편 인용하며, 나 또한 지금도 힘들어하고 있을 소년들에게 말한다. '아니야, 우리가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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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상처로부터 복구되어야 하며
낡은 것으로부터 새로워져야 하고
병으로부터 회복되어야 하고
무지함으로부터 교화되어야 하며
고통으로부터 구원받고 또 구원받아야 한다
결코 누구도 버려서는 안 된다
기억하라
만약, 네가 도움을 주는 손이 필요하다면
너의 팔 끝에 있는 손을 이용하면 된다
네가 더 나이가 들면 손이 두 개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한 손은 너 자신을 돕는 것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이다

<아름다움의 비결> 샘 레븐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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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수수께끼 - 개정판 마빈 해리스 문화인류학 3부작 1
마빈 해리스 지음, 박종렬 옮김 / 한길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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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억울하다... 지난 달에 정독했는데, 바로 개정판이 나와버리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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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아픈데 왜 철학자를 만날까 - 철학은 답을 알고 있다
레베카 라인하르트 지음, 김현정 옮김 / 예문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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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저항지식, 어용지식과 구별되는 실천지식을 제공한다. 철학자의 경구는 아주 제한적으로 인용되고, 서구식 텍스트 특유의 '사례들'의 서술이 이어진다.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세상을 분석하는 데만 힘써왔지만, 중요한 것은 세상을 변혁하는 것이다.' 라는 마르크스의 테제를 다시금 곱씹는다. 하지만 그 실천의 강조로 인해 이 책은 얼핏 '자기계발서'처럼 읽혀지기도 한다. 좋은 말 투성이인데, 좋은 말이 계속되면 잔소리처럼 들릴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좋은 말을 듣고, 그 가치가 소진되지 않도록 행동해야 한다. 이 책은 그러한 노력을 장려하며, 그래도 위기감을 갖지는 말라고 말한다. 그것은 정말 평생에 걸친 연습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런 생각을 했었다. 왜 책읽기나 글쓰기는 내가 억지로 해야만 하는 행동이 되어야 하는가. 이게 아주 몸에 배는 자연스러운 행동이 될 수는 없는가. 그러니까 나는 능수능란하게 공부하는 사람이고 싶어하면서도, 그에 도달하는 과정은 무시하려 했던 거다. 분별력있고 지성을 갖춘 주체가 되는 것은 결코 공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런 게 되고 싶다면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사실 요즘 사람들은 노력에 대한 얘기는 하지 않고 그저 꾸준히 완벽한 모습들만 보여주려 애쓴다. 백조는 우아하기 위해 쉴 새없이 허우적거리고 있지만, 노력을 얘기하기에는 우리가 너무 타락한 시대에 살고 있는 탓이다.

오늘날 개인을 개발하기 위한 논리는 국가, 제도 단위에서 개인을 착취하는 데 쓰이고 있다. 좋은 사회제도를 구축하는 대신 그 편이 더 싸게 먹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력'이나 '열정', '희망'이 개인에게 꼭 필요한 덕목인데도, 그것은 불신으로 가득찬 언어가 되어버렸다. 참담한 일이다. 그리고 마음수련이나 철학실천은 우리가 어느 정도 먹고 살만해졌을 때 필요해지는 개념이 맞다. 당장 궁핍한, 그리고 갈수록 더 궁핍해지는 현실에서는 노력이니 열정이니 하는 것들이 희박한 관념이라는 소리다. 따라서 개인을 구원하면서 동시에 세상을 변혁할 수 있는, 양자의 딜레마를 극복하는 지식의 역할이 요구된다고 느꼈다. 이른바 자기계발, 노력, 열정, 희망 등의 재의미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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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하지 않는 것도 선택이다....라는 말을 되새긴다. 나는 주체적 인간이 되자면서 너무 많은 선택에 놓여있었다. 이제 나는 선택하지 않는 법에 대해 배울 필요가 있다. 정확히는, 좋은 선택을 하는 법이겠다. 너무 많은 선택을 할 수 있기 때문에 페북이 빈곤한 공간이라고 느끼고 있었는데, 그 생각에 대한 확증을 더해주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 다시금 인정한다. 공부란, 하나의 관점을 갖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무수한 무의미 속에서 더 분명하게 의미들을 분별해낼 수 있다는 점에서 좋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분석과 실천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느껴진다. 새가 죄우의 날개로 나는 것처럼 말이다.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는 칸트의 말마따나 지식은 우선 내 행동에 대한 근거를 마련해주는 쪽으로 개발될 필요가 있겠다. 나는 한꺼번에 다양한 존재가 되고 싶어하는 건전한 인간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전문성을 담지해야 하는 것이다. 얼치기 말고 혼모노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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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309동1201호(김민섭)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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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게 된 건 페친(페북 끊었지만ㅜ) W의 포스팅 때문이다. 그는 '쉬운 글쓰기'를 모토로 강의를 연다는 '모'의 포스팅을 공유하며 글쓰기에 대한 자각도 없는 작자라고 비난했었다. 그에 따르면, 글에는 저자의 치열한 고뇌와 무게감이 담겨 있는 것이고 무턱대고 쉬운 글을 쓴다는 것은 이러한 주체성의 상실을 담보하는 짓거리에 해당한다. 물론 나도 처음에는 모의 강연이 약팔이라고 느껴지긴 했지만, '자신을 버리는' 글쓰기가 중요하다는 점은 동의하고 있었는지라 그냥 모의 유명 에세이를 한 권 읽기로 했다. 최소한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그랬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참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이 책은 한마디로 말하면 진정성(sincerity)의 승리다.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이하 지방시)의 서문에는 본 저서가 암울한 현실을 '기억'하기 위해서 쓰여졌다고 적혀 있다. 물론 과거를 미화하거나 추억하지 않고 온전히 다 기억할 수 있는지의 여부는 차치해야겠지만, 오늘날 대학이 신자유주의 체제에 발빠르게 적응한 비인간적, 몰인간적 기관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학문과 지성의 총체라는 수사는 허울 뿐이고 실상은 그를 구실로 한 착취와 열악한 근무환경이 만연해 있는 것이다.


1부 '대학원생의 시간'은 참 암울하기 그지없는 내용들 투성이지만, 전공을 살리기 위해 대학원 진학을 생각하고 있는 나로서는 어쩌면 책에 나왔던 것보다 훨씬 더 암울한 현실을 마주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나는 문득 영어입시강사 이명학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고삼 3월 무렵에 이명학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모토로 수험생들의 공부를 닥달했는데, 그것은 아무리 힘들고 어렵고 지치는 상황이라도 어떻게든 노오오오오오력을 해서 대학에 가라는 맥락이었다. 대학원생이었던 저자는 막막하고 팍팍한 현실을 살아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기록하며 매순간 거대한 신자유주의 구조라는 괴물을 직시하려 노력한다. 그러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득달같이 노오오오오력을 해서 과업을 달성하는 것보다는 그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자신을 잃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에 더 어울리는 말이라고 느껴진 것이다. 실제로 저자는 대학원 생활 초기에는 부조리에 대한 분노와 울화를 주변 동료나 교수에게 투사했다고 하지만, 지방시를 연재하면서부터는 모두가 구조의 피해자들이고, 그들을 (최소한 마음만이라도) 온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나 역시 사회복무요원 일을 하면서 병역의 의무라는 이름 하에 가해지는 부조리를 명증히 직시하는 대신에 종종 짜증을 내고 같은 직장의 구성원들에게 그 감정을 투사하곤 한다. 하지만 큰 틀에서 그들 역시 구조의 피해자라는 점을 돌아보게 되는 건 항상 짜증을 내고 난 다음의 일이다. 관리국가가 무서운 점은 구성원들을 분열시켜서 자신들에게 대항할 연대를 만들지 못하게 한다는 데 있다. 그래서 우리는 기억해야 하고 기록해야 한다. 팍팍하고 암울한 삶 너머에는 인간을 좀먹고 모두를 불행하게 하는 거대구조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느꼈다.


 

2부 '시간강사의 시간'은 1부와는 그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1부는 '부조리를 잊지 말아야겠다는 굳은 다짐'이라는 주제였지만, 2부의 그것은 주로 '노동하는 삶에서 찾아나가는 행복'이었다. 학생들과 소통하며 배운 인문학, 좋은 강의자로서의 덕목, 주변의 사회문제로부터 인문학적으로 사유하고 통찰하는 태도의 중요성에 관한 내용들이 주를 이뤘다. 특히 '아메리카노 나오셨습니다'라는 말에 담긴 함의를 분석한 건 무릎을 탁 칠 만큼 기억에 남는데, 신자유주의 체제가 노동자를 외화(外化)하는 한편, "갑≥갑의 소유물>을"이라는 도식을 공고히했다는 근거라는 것이다. 이를 보고 나는 정말이지 페북의 말로만 떠들어대는 딜레땅뜨들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우리가 무식하다고 치부하는 문법과 신조어에는 비난할 수 없는 나름의 사정이 있는 탓이었다. 그래서 책을 보다 보면 그가 왜 '쉬운 글쓰기'를 고집했는지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구조에 맞서는 '저항적 지식'의 담론을 키우려는 데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야말로 세상이 좀 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사람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의 삶의 궤적을 보노라면 그는 오랜 기간 땅 속에서 지내다가 볕을 보게 된 매미처럼 시간제 강사라라는 바운더리 안에서 의미와 행복을 만들어 나가고 있었다. 나는 그러한 '노력'이 그렇게 훈훈할 수가 없었다. 그래, 우리는 결국 의미를 부여하며, 존재하고 살아남기를 바라는 사람이구나...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더 괴롭겠지만 내가 찾아나가는 행복들은 많은 의미들로 다가오겠지...라고 느꼈다.



사실 책을 읽기 전까지는 그냥 어디어디에 연재되는 '지방시'라는 글이 있구나... 정도로만 알고 있었고, 그마저도 그렇게 호의적인 시선이 뒤따르지는 않았던 것 같다. 책 제목이 '어디어디 학교의 강사'가 아닌 것도, 저자가 익명인 것도 사회에 만연한 차별과 위계에 저항하기 위함이라는데, 과연 사람들은 저자의 약력과 지위만 보고 그것을 까내리는 데만 몰두했던 것이다. 그리고 책을 읽고 난 지금은 전부는 아니더라도 저자가 더 친근하게 다가온다. 그에게는 다른 냉소적인 지식인들에게서 보여지지 않는 어떤 '진심'이라는 게 있음이 느껴진다. 지방시는 2년 전에 나온 책이고, 예전보다 상황이 더 안 좋아지긴 했지만 갓 헬조선 담론이 불거지기 시작하던 때 쓰인 글이라 그런지 문제의식은 더욱 명증하다. 에필로그에는 사회학자 오찬호씨의 '진격의 대학교'가 인용되고 있었는데, 더불어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과학 관련 도서는 무서운 속도로 신간이 나오기 때문에 이에 발빠르게 대응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긴 하지만, 아무렴 구조적인 문제의식에 접근하는 건데 상관이 있으려나 싶다.


그러면서도 그의 글을 보면서 한 가지 불안한 것은 있다. 나중에 내가 일정한 사회적 지위를 얻은 사람이 됐을 때, 누가 나에게 어떻게 방황을 멈추게 됐나, 자기만의 바운더리를 어떻게 만들었나 라고 물어보면 나는 대답할 수 있을까...하는 것인데, 나 역시도 나의 방황과 고생을 한낱 젊은 날의 미담 정도로 퉁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겠다고 느꼈다. 고난한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에 더 공부하고 더 치열하게 사유하는 인간이 된다. 어쩌면 축복이라면 축복일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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