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이란 무엇인가 - 자유롭고 평등한 사귐의 길을 찾아서
박홍규 지음 / 들녘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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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우정이란 무엇인가?


지은이 박홍규 선생은 이 책을 “사상사”라고 말한다. 그는 “우정”(사전적 의미는 친구의 정)을 “자유롭고 평등한 사귐”이라 정의한다. 그는 “나에게 친구란 단순히 친한 사이가 아니라, 자유롭고 평등한 관계로 맺어진 공동의 상대입니다.”라고 했다. 서로를 지배하거나 명령하거나 구속하거나 억압하지 않고, 서로를 더 높거나 낮음도 없이 함께 생각하고 이야기하고 일하는 같은 자격의 상대인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친구란 하나도 없는 게 당연하다. 진정 그러한 것인가, 우정의 사상사를 따라가면서 “우정”을 톺아본다. 지금도 “우정”이란 스펙트럼이 아주 넓은 개념을, “우정”이란 무엇인가 따져보자.


우정 혹은 우애와 관련된 질서, “붕우유신(朋友有信)” 즉, 오륜(五倫)의 하나. 벗과 벗 사이의 도리(道理)는 믿음에 있음을 이른다고, 여기서 나오는 도리란, 사람이 어떤 처지에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바른길을 가리킨다. 

“우정론”에 관해서 역사상 가장 빨랐다고 알려진 아리스토텔레스는 죽어가면서 말하기, “오, 나의 친구여, 친구는 없다네”라고, 지은이는 책을 뒤져봐도 이런 말을 아리스토텔레스가 했다는 걸 찾을 수가 없다고, 이 말은 조선의 연암 박지원이 그의 절친 홍대용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 “소위 친구란 한 사람도 없습니다”라고, 


그래서 “우정”은 지은이의 지적 욕구를 자극한 주제가 됐던 모양이다. 이 책은 우정에 관하여 근대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살펴본다. 통상 우리가 사용하는 근대(近代), 중세와 현재 사이의 시대다.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1876년의 개항 이후부터 1919년 3.1운동까지의 시기를 말하기도, 이때, 대한제국이라는 왕정에서 공화제로 바뀌었다. 즉 국민국가 시대이면 신분 자체가 없는 평등사회가 됐다는 의미로 새겨도 될 듯하다.


책 구성은 2부 15개의 우정론을 다룬다. 근대 이전의 우정론은 고대 동양의 그것을 비롯하여 고대 그리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에피쿠로스, 스토아학파와 키케로, 기독교 등의 우정론 그리고 근대 이전 동아시아의 우정론까지, 근대 이후는 몽테뉴, 계몽주의와 루소, 레싱과 칸트, 조선 후기, 담사동, 현대의 우정론까지 그리고 이의 요약과 전망을 담았다. 


고대 동서양의 우정론 – 공적 관계, 여론 형성의 목적으로 토론에 참여하는 의욕이 “우정”


고대 동서양은 신분 계급사회였고, 친구란 같은 계급 내에서 형성된 교류 관계다. 이상적인 대인관계가 성립되는 공간은 다양한데, 공공의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공적 관계나 정치적인 관계다. 여기서 친구란 정치문제, 즉 사회의 모든 구성원과 관련된 공공적 문제에 관한 합의를 형성하기 위한 합리적인 의사 교환의 상대다. 이런 사상의 흐름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키케로, 18세가 영국 철학자 샤프츠베리에 이른다. 이들은 말하는 “우정”은 여론 형성을 목적으로 하는 토론에 참여하는 의욕을 의미했다. 의욕 자체가 우정인 셈이다. 의견이나 이해관계의 일치, 친밀함은 우정의 전제가 아니다. 이렇게 보면 사상사의 우정과 일상의 우정이 다름을... 


근대 이후의 우정론 


몽테뉴는 이상적인 대인관계가 사적 생활의 내부에서만 가능하다고 봤다. 친구는 분신, 나를 비추는 거울과 같은 존재로, 친구와 사귐에 가치가 있다면 그 가치는 친구의 사귐에 의해 내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시쳇말로 어떤 사람을 평할 때, 그의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과도 같은 맥락이다. 사상사 안에는 우정 무용론과 우정 유해론도... 우정을 하나의 거래로 보는 윤리학자도 있으니, 그만큼 친구와 우정은 찾기 어렵다는 역설적 표현이기도 하다. 


오성과 한음을 관포지교에 비유하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우정”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지 실제는 아니다. 두 사람은 과거장에서 만났고, 이후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정치적 입장은 달랐다는 점, 그렇다 하더라도 사적 우정과 공적 처지를 구별할 줄 알았다는 이성적 태도가 중요한 것이다. 


새로운 우정 공동체


지은이가 말하려는 핵심은 “우정 공동체”다. 인종과 국가, 성별 등 그 밖의 모든 국경을 넘어 친구를 만드는 것이다. 우정이나 친족 관계를 통해 우리는 잠재적으로 급진적이고 위험한 방식으로 자신을 무너뜨리고 새로워질 수 있다. 우정은 이런 의미에서 자유의 뿌리가 될 수 있다. 우정은 새로운 정치가 탄생하는 토양이 될 수 있다. 신자유주의 아래에서 우리는 함께 어울리고, 취미를 공유하고, 잡담을 나눈다. 서로를 편안하게 유지한다. 페이스북 등 소셜네트워크의 알고리즘은 프로필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어 우정을 버튼 한 번 클릭하는 차원으로 축소한다. “그냥 친구야”라는 말은 하찮은 유대 관계를 말한다. 


가족의 비핵화, 우리는 사람들이 한 쌍의 부부가 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그 가족 구조 안에서 모든 필요를 충족시킬 것으로 기대하는 이성애 규범적인 가족 구조에 저항하는 데 관심이 있는 퀴어 커뮤니티, 성 소수자의 문제 제기라기보다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기술로 가족 구조의 변화가 필요했고, 여러 세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보다는 핵가족화가 건강에 더 해롭다는 점을 지적한다. 흑인 사회의 비공식적 입양으로 아이들을 돌보는 방식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초개인화, 1인 가구 등 극한까지 거의 임계치에 이르는 공동체는 아이에서 노인에 이르는 돌봄이 단지 법적인 가족만이 책임지는 구조로, 지은이는 사회적 돌봄, 아이 하나를 키우기 위해 온 마을이 함께 나서야 한다는 말이, 원시적이고 미개한 것처럼 보이지만, 인간의 본성에 맞는 태도였음을. 돌이켜 보면 알 수 있듯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통적인 가족 관계는 남녀와 부자의 불평등을 당연하게 여겼다. 근대에 와서 결혼은 자유롭고 평등한 계약 관계가 됐지만, 실질적으로는 반드시 자유롭고 평등하지는 않다. 남성이 여성을 지배해왔다. 일부일처제라고 하더라도 이것이 반드시 남녀평등이 아니었듯이, 이렇게 보자면 모두가 가족이다. 가정이라는 울타리 밖에 있는 사람이 남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 책은 우리에게 “우정”이란 무엇인가를 묻는다. 그리고 우정 공동체가 지금 필요함을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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