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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의 글쓰기 철학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지음, 오광일 옮김 / 유아이북스 / 2025년 3월
평점 :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마음을 움직이는 글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쇼펜하우어의 글쓰기에 관한 생각을 전하는 이 책<쇼펜하우어의 글쓰기 철학>, 그는 “자신의 시대를 초월하는 글을 써라.”라고 했다. 시간을 뛰어넘는 사유의 힘은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옮긴이 오광일은 쇼펜하우어의 <소품과 부록> 안에 담긴 내용을 빌려와 이 책을 구성했는데,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진정한 글쓰기의 가치를 알고 싶다면 꼭 고전 작품을 읽어야 한다”라고 왜 그럴까, 좋은 글은 일시적 유행이나 기교가 아닌 위대한 작가들의 최고작을 완성하는 방식을 연구하는 것이다. 옮긴이의 분명한 생각에 공감한다. 아마도 팔레스타인 출신의 미국 연구자 에드워드 사이드의<오리엔탈리즘> 을 우리말로 옮겼던 박홍규 선생의 생각과 같은 맥락일 듯싶다.
이 책은 쇼펜하우어의 글쓰기에 관한 생각을 8장으로 나눠서 싣고 있다. 1장 ‘작가의 자격’에서 글쓰기는 2개 유형(생각 표현형과 생계형), 세 부류의 작가가 있다. 첫째는 생각 없이 글 쓰는 사람, 둘째는 글을 쓰기 전까지 생각하는 사람, 셋째는 글을 쓰기 전에 깊이 생각하는 사람, 글은 지은이 자신의 관찰에 터 잡지 않으면 읽을 가치가 없다고 시원스레 말한다.
2장 ‘문체’에서는 문체가 글쓴이의 마음 생김새와 같으며 얼굴만큼 성격이 드러나는 확실한 지표라고 했다. 불필요하게 중복되는 표현, 의미 없는 내용, 읽을 가치가 없는 것들은 모두 피하라. 중언부언하게 되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종잡을 수 없다. 글쓰기에 진심이 아닌 다른 목적(돈벌이 수단 등)들이 종종 화려하게 미사여구를 늘어놓는 것도 이런 연유 때문이다. 좋은 글은 작가가 말하는 내용 자체가 느껴진다는 것이다. 간결함은 단지 단어 수 줄이기가 아니라 내용의 명확성과 전달력을 유지하면서도 불필요한 요소를 없애는 것이다. 간결 명확한 글을 선호하는 듯 보인다.
3장 ‘라틴어 공부’에서는 이미 통용되지 않는 라틴어를 배워서 뭐하게라는 질문에 관한 답일 듯하다. 지방분권주의가 유럽 내의 언어소통은 물론 지식전파의 걸림돌이 됐다는 견해다. 과거에는 공용어인 라틴어를 통해 전체 유럽 지식인들에게 즉각적인 영향을 주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우물 안의 개구리에서 벗어나자고 그러기 위해서는 라틴어를 공부해야 한다고, 옛 현인들의 교훈을 받아들이는 것이기도 하지만, 모국어를 더 정확하게 쓸 수 있게 됨은 물론, 자신만의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어가는 것처럼 새로운 세계관 또한 열리기에 그렇다. 이 대목은 마치 한학을 공부해야 할 이유처럼 들린다.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귀중한 경구이지 않을까 싶다.
4장 ‘지식인들’에 관하여, 학생이나 학자의 대부분은 통찰력보다는 단순히 정보를 습득하는 데 목표를 둔다고 일침을 준다. 철학자가 될 수 있는 것은 단순히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사유의 방식 때문이라고, 쇼펜하우어는 자신에게 묻는다. “이렇게 많이 읽었는데, 이토록 사유하지 않을 수 있는가? 라고, 스스로 생각이 얼마나 부족했으면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이렇게까지 끊임없이 주입해야 했을까? 라고, 한 주제를 주의 깊게 생각하고 더 생각하면서 도저히 주체할 수 없을 때, 넘쳐나는 생각을 글로 옮기는 것이 글쓰기의 정석이자 정초다. 이런 맥락에서 5장 ‘사고의 독립성’과도 연결되는데,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스스로 생각할 수 있을 때만 그 지식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대목(87쪽), 결국 독서로 얻은 지식은 깊은 사유와 내재화를 통해서만 진정한 가치로 전환될 수 있다고 쇼펜하우어는 힘주어 말한다. 한편으로 독서의 부작용과 폐해도 잊지 않고 지적하는데, 책을 읽는 습관은 자기 자신의 생각을 없애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스스로 생각을 잃고 다른 사람의 생각만으로 가득 찬 사람이 되는 것이다. 즉 과도한 독서는 마음의 탄력성을 잃게 한다고,
6장 ‘비평’에서는 자신만의 책임 있는 판단을 내리기보다는 권위에 기대는 현실을 다행으로 여길 수 있다고, 모든 사람이 플라톤, 칸트, 호머, 셰익스피어, 괴테 같은 위대한 작가들의 작품을 읽고 즐기면 자신의 의견을 형성하려 했다면 그들의 작품에 대한 비평은 매우 혼란했을 것이다. 실제 많은 사람이 이들 작가를 평가할 능력이 없기에 권위에 기대는 자신의 의견을 말한다. 이때 문학지는 터무니없는 글과 쓸모없는 책의 범람을 막을 방파제 역할을 해야 한다고,
7장 ‘작가의 명성’에서는 동시대 사람들의 의견과 반응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야말로 시대를 초월하는 위대한 작품을 만드는데 필수적인 조건이다. 작가의 명성은 당대의 유행에 휘둘리지 않고, 시대정신을 반영한 보편적인 정서에 터 잡은 것이 중요한데, 당대의 의견과 반영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덫에 걸려버리게 된다. 작가로서 이런 유혹을 이기는 것 또한 사유의 힘이 있어야 가능하다. 8장 ‘천재성’에서도 역시 초월이다. 천재와 평범한 사람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천재는 두 가지의 형태의 지능이 있다. 하나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의지를 위해 작동하는 지능이고, 또 하나는 순수하게 객관적인 태도로 세상을 거울처럼 비추는 지능이다. 천재가 창조하는 미술 작품, 시, 철학 등은 두 번째 지능 작동으로 생겨난 결과물이며 전문적인 기술로 구체화한 것이다.
우리는 날마다 글을 쓴다. 일기를 쓰거나, 일과 관련된 보고서를 만들거나, SNS로 누구와 정보를 주고받거나, 하다못해 잡담하면서 뒷담화를 하더라도, ”쓰기“와 ”읽기”라는 행위를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든 반복한다. 그런데, 이런 활동을 목적 있는 글쓰기로 바꿔보면 어떨까 싶다. 어떤 주제에 관해 깊이 생각해보기, 걸리는 시간은 중요하지 않을 듯하다. 번뜩이는 지혜는 모두 순식간에 일어나기에, 문체도, 한자나 외국어 공부도 마찬가지로 조금씩 해보는 습관을, 쇼펜하우어의 말 중에 핵심이라고 생각되는 게 ”이렇게 많이 읽었는데 이토록 사유하지 않을 수 있을까?”라는 대목이다. 제아무리 많이 읽어도 사유의 힘이 약하면 남의 권위를 빌어 자신의 의견인양하는 건 내가 아닌 남의 일이라는 점만이라도 기억했으면 한다.